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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죽음]Ⅳ-(5)‘타자의사유’ 로서 현대철학

slowdream 2008. 1. 13. 21:0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5)‘타자의사유’ 로서 현대철학


-자유·민족 넘어 ‘타자’ 와의 융합 모색-



20세기 철학은 시대의 급변에 따라 화두를 달리 해왔다. 19세기 후반 이래 동북아 철학은 서구 철학의 성과를 수용해 왔고, 이 시대를 ‘계몽’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 계몽의 시대는 주로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한 시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계몽의 사상들도 두 가지 갈래를 뚜렷이 구분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사상이고, 또 하나는 이 계몽사상의 비판적 성격을 와해시키기 위해 도입한 독일 보수주의 사상들(특히 헤겔) 및 사회진화론(특히 스펜서)이다. 한국은 일제 시대에 본격적으로 현대 철학(주로 서구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쉽게도 전자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오히려 후자로부터 현대적 사유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몽적 흐름에 대해 두 가지 대립적 사상이 출현했다. 그 하나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들이 도래시킨 자본주의적 현실에 맞서 혁명을 추구한 사회주의적 사상들(특히 마르크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일방적인 서구화에 회의를 느끼면서(특히 한국의 경우 식민지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민족주의적 사상이다.


이렇게 한국 현대 철학은 자유, 혁명, 민족을 세 핵심 화두로 삼아 전개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 철학은 다변화되었고, 근대 철학의 몇 가지 갈래에 대한 편협한 연구를 넘어선 서구 철학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근대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론으로서의 비이성주의(실존철학 등), 동북아 고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 그리고 영·미 분석철학의 도입 등 여러 갈래에서의 새로운 경향들이 도래했다.


이와 나란히 정치·철학적으로도 여전히 자유, 혁명, 민족이라는 삼각 구도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를 이끌었던 핵심적인 철학적 동력은 역시 모순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섰던 변증법 철학(특히 헤겔과 마르크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이래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철학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특히 후기 구조주의의 수용). 이 시대의 철학적 화두를 어떻게 잡을지는 아직 그 자체가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철학적 장을 ‘타자의 사유’로 이해하고 있다. 이 ‘타자’를 세 가지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 윤리학적 타자


타자란 권력 안에 들어 있는 동일자(the Same)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래서 타자란 권력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the Others), 바깥의 사람들이다.


이런 ‘타자’ 개념의 규정에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로 ‘규정’을 통해 규정하는 방식이 있다. 동일자란 규정하는 존재이고, 타자란 규정되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규정’이란 가치, 의미, 법규, 규범, 제도 등 여러 가지 맥락을 띨 수 있다. 제도의 예를 든다면 동일자는 제도를 규정하고 타자는 그 규정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타자는 ‘~이 아닌 존재’라는 부정의 방식으로 규정된다. 광인은 ‘~한 존재’가 아니라 정상인‘이 아닌 존재’로 규정된다. 타자란 자신의 규정이 아니라 타자(동일자)의 규정을 통해서 규정되는 존재이다.


세계사는 동일자와 타자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 명제는 87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 이전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세계사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의 역사이다. 그러나 전자의 명제는 후자의 명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를 포괄한다. 그래서 포괄적 명제는 이렇게 된다: 세계사는 동일자와 타자의 투쟁의 역사이며, 근대 이후 그 투쟁의 핵심 항들 중 하나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 87년 이후 ‘구좌파’와 ‘신좌파’의 갈등은 이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의 타자의 사유는 ‘타자’의 얼굴을 프롤레타리아라는 하나의 얼굴에서 민족, 성, 지역, 연령, 신체 등에 관련되는 매우 다양한 여러 얼굴들로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얼굴들을 배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 얼굴들은 대개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배타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또 각 역사적 맥락에서의 우선 순위가 첨예한 문제가 되지만 타자의 문제를 불연속적 병렬의 형태가 아니라 입체적인 얽힘의 형태로 파악해 나가고 실천 역시 입체적으로 얽어 나가는 것이 오늘날 긴요한 문제로 존재한다.


# 인식론적 타자


87년 이래의 한국 사회의 변화는 학문, 이론, 사상, 철학(무엇이라 부르든)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를 담지하는 핵심적인 말은 아마 ‘담론’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용어는 이제 일상어가 되었다.


고전적인 학문/이론에서는 ‘명제’를 추구했다. 명제란 무엇보다 진위 판별이 가능한 문장이며, 감정 등 사적인 차원이 제거된 문장이며, 연역적 논리 구조의 고리를 형성하는 문장이다. 이에 비해서 담론은 이 명제 차원으로부터 비언어의 차원 즉 신체의 차원, 사물들의 차원을 향해 하강하고자 한다. 이로써 신체 차원과 명제 차원 사이의 공간이 담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미지, 시뮬라크르, 텍스트를 비롯한 많은 개념이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거나 새롭게 해석되었다.


이런 인식론적 변환을 통해서 학자들, 사상가들의 사유 태도나 글쓰기 양식에서도 큰 변화가 도래했다. 고전적인 방식의 사유나 글쓰기가 변화를 겪게 되고 좀더 생기발랄하고 탈분과적인 방식의 사유/글쓰기가 모색되었다. 지식인들과 사회의 관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왔고, 지식인 개념 자체가 복잡한 분화 과정을 겪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변환의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지적 불성실이 사유의 생기발랄함과 혼동되었고, 학문적인 노동의 결여가 자유분방한 글쓰기와 혼동되었고, 자본주의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정당화가 문화의 새로운 조건들에 대한 연구와 혼동되었고, 그 외에 많은 것들이 혼동되었다.


사상의 내용에서도 많은 혼동이 있었다. 세계의 기표화에 저항해서 실재론적 사유를 펼쳤던 사상가들(예컨대 기표화를 넘어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려 한 라캉, 사회체제의 근저에서 권력의 활동을 읽어내려 한 푸코, 현실성의 운동 밑에서 생명의 운동을 밝히려 한 들뢰즈 등)을 오히려 리얼리티 개념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로 (완벽히 거꾸로) 읽어내려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모든 부작용들을 거둬내고 지난 20년간 우리가 배웠던 새로운 사유를 더욱 성숙한 형태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 전통 학문(유·불·도)과 근대에 들어와 배웠던 학문, 그리고 최근의 학문 사이에 연계성을 수립하는 것,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고유의 학문을 전개하는 것이다.


# 존재론적 타자


철학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문제가 된 타자는 존재론적 타자이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세상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가 바뀌는 것을 지켜봐 왔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만이 변한 것이 아니다. ‘사물’ 자체, ‘존재함’의 의미 자체가 거대한 변혁을 거쳤다.


세계는 하나이지만(물론 계속 변해 가는 하나)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여럿이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바뀌면 이전의 세계는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간에게는 다른 세계가 된다. 지난 반세기(한국의 경우 지난 20년)는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질적인 측면에서 ‘세계’라는 개념이 거대한 변환을 겪은 시대이다.


이론적 맥락에서 현대 철학은 복잡계 이론, 프락탈, 급변론, 분자생물학, 진화론, 면역학, 뇌 과학을 비롯한 매우 다양한 과학적 성과와 맞물려 전개되었다. 이런 지적 모험은 우리를 지난 긴 세월 동안 살아왔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다가온 타자의 얼굴을 한 이 새로운 세계를 철학적으로 소화해내는 일은 현대 존재론 초미의 관심사이다.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또한 사이버 공간의 도래 로봇·사이보그를 비롯한 생체공학의 등장, 의학에서의 다양한 혁신 등을 비롯한 많은 변화가 도래했다. 우리는 신체에 있어서나 감성, 무의식, 욕망, 지각 체계, 상상 등에 있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휴먼’이 어떤 모양새를 해 나갈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존재론적 카오스의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카오스는 또한 새로운 존재론의 모태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대 철학의 앞에는 배제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새로운 윤리의 길을 열어나가는 것, 철학함 자체(사유하기, 철학사 읽기, 글쓰기, 대화하기 등등)의 새로운 형태을 창출해내는 것, 새롭게 도래한 ‘세계’와 맞붙어 존재론적으로 고투하는 것을 비롯해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어떤 문제든 그것은 타자의 문제와 얽혀서 논의되리라 본다.


〈이정우|철학아카데미 대표〉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