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佛像)은 과연 신상(神像)이어야 하는가?
불상(佛像)은 과연 신상(神像)이어야 하는가?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학 교수
몇 년 전에 한국사 강좌를 듣는 학생들을 위해 오슬로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한 영화를 비디오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꼭 그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한국 고대 미술을 소개하는 영어 영화들이 하도 없기에 할 수 없이 도서관에 있는 그 영화를 꺼내게 됐다. 그 영화의 주제는, 유신 정권 말기에 미국의 일곱 개의 주요 도시를 돌았던 <한국 미술 오천년> 전시회이었다.
그 전시회의 영문 목록은 전시회를 홍보하려고 찍은 모양으로, 전시회에서 출품된 256개의 한국 미술, 공예 걸작들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사 전체를 통째로 간추려 감동과 흠모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해준 것이었다. 유신 정권 말기, 민주 투사들이 고문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불구자가 되고, 노동자들이 10만원이 될까 말까 하는 월급으로 겨우 기아를 면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온 나라가 커다란 병영이 된 그 끔찍한 시기에, 국제적인 기피 대상이 된 유신 정권의 실추된 명예를 약간이라도 복원하려고 반가사유상들과 고려 불상들을 "높은 나라"에 보내서 그 유식자들의 환심을 사려 하는 작전인 모양이었다.
반가사유상과 고려 불상들을 배경으로 해서 고문과 살인을 본업으로 하는 정권의 요인들이 급히 꼬셔야 할 미국 측 "보스"들과 악수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한숨이 계속 나왔다. 그 사유상, 불상들을 조성하신, 신앙 바르신 분들이 도대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뭔 악업을 지으셨길래 지극한 신앙심이 담겨져 있는 그 작품들이 잡스러운 소인배들의 이용물이 돼야 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 사유상과 불상들이 무슨 장관 무슨 관장의 아부적인 미소를 보면서 그냥 홀가분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동화를 믿고 싶은 아이의 심리 같기만 하지만, 나는 불상이 사람의 행동을 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을 때가 왠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전시회 유물 소개도 아니고 맨 끝에 나온 석굴암 이야기이었던 것 같다. 동해에서 떠오르고 있는 새벽의 해를 응시하고 있는 영원, 불변, 신성의 석굴암 본존불…. 이 부처님이 종래 학계의 주장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든 아니면 황수영 교수의 새로운 주장대로 사자(死者)들을 서방정토로 보내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발원을 담았던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이든 일개 중생인 나는 그 무한하다 싶은 위엄 앞에서 나의 인생과 나의 잡념들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실감나게 느낄 뿐이다.
종교적 미술의 위력이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추상적인 관념으로만 알아온 "초월"이라는 용어가 살아 있는 현실이 되어서 나 앞에 다가온 듯했다. 최상의 명상이라는 것은 생각을 완전히 비어놓는 것이지만, 그 단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 본존불과 같은 신성한 위엄에 찬 이미지들을 부지런히 염(念)하여 잡념을 근절시키는 마음 속 집중의 시간을 가져야 될 듯하다.
한마디로, 그 영화의 끝 부분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위용(威容) 앞에서는 나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데, 영화 상영이 끝난 다음에 회의의 마군(魔軍)이 나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나를 숙연하게 만든 저 위풍당당의 부처님을 박정희의 하수인들이 이용한 것이 과연 우연뿐이었던가? 잘 알려진 대로 석굴암을 경덕왕 때(재위: 742-765)의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발원하여 하나의 국가적인 불사로서 751-774년간에 만든 것인데, 신라의 역사를 통들어 아마도 가장 많은 불사를 일으킨 임금 중의 한 명인 경덕왕이 과연 무슨 의도로 국가의 재정을 기울이다시피 하면서 불국사, 석굴암과 같은, <화엄경>과 <법화경>의 장엄한 세계를 재현한 대형 사찰을 창건한 것이었을까?
물론 순수한 불심도 없지 않았겠지만, 최근의 고대사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결국 중앙 집권화에 반대했던 귀족들의 반발과 구(舊) 백제 등지의 소외된 주변 지역의 불만 등에 직면한 왕권의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 주된 정치적 목적이라 봐야 할 듯하다. 즉, 나한과 천룡(天龍), 역사(力士), 사천왕 등을 거느리다시피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본존불의 위엄은 부처님의 위용인 동시에 부처님을 받듦으로써 국태민안을 보장하는 국왕의 위엄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다. 종교 미술이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초월적인 이상을 재현하여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권력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현실적 권력 관계를 신성화시키기도 한다. 그러한 면에서는, 8세기의 군주 경덕왕이 투자해서 만든 종교 미술품을 20세기의 군주 박정희가 다시 한번 "국위선양"을 위하여 썼다는 것은, 과연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인가?
이슬람이나 개신교의 다수의 교파 등 종교 미술을 예배 대상으로 하지 않는 일부의 고등 종교들과 달리, 불교는 천주교나 러시아 정교회,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불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종교 미술품을 신앙의 핵심적 도구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등 종교인만큼 불상 그 자체를 신앙하는 것이야 아니지만, 신앙의 필수적인 부분인 각종의 의례들이 분명히 불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불상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경우가 다수인 듯하고, 또 노전(爐殿)이라는, 불공을 전담하는 특수 공간 안에서 불상 앞에다가 마지 등의 불공을 드린다.
부처님이 계셨던 시대에 인도의 재가 신자들이 걸식 생활을 하던 부처님에게 공양을 드렸던 것을 본떠서, 하나의 종교적 미술품을 "부처님"으로 삼아 이렇게 하는 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고, 부모 친지의 정토 왕생을 바라는 이들이 아미타의 불상, 불화를 앞에 두고 의식을 진행하고, 각종의 기도를 드릴 때에 그 대상이 관세음보살부터 시작하여 여러 부처와 보살의 상 (像)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원칙상 이들 종교 미술품들이 생사를 초월하여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갖는 존재인 석가모니, 관세음 등을 상징할 뿐이지 흔히 말하는 "우상", 즉 그 자체로서의 초자연적인 힘을 갖는 대상물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수많은 신도의 머리 안에서는 "상징"으로서의 미술품이 곧 초자연적인 '영험'을 일으키는 "물신" (物神)으로 쉽게 둔갑한다. 예컨대 인구에 회자되는 전라도 곡성군 관음상에 대한 하나의 "현대적 설화"를 들어보다. 한국 전쟁의 난리통에 그 관음상의 머리만 남아 있었다던데, 그 머리가 찾아지게 된 연유를 신도들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산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사는 최유선 보살은 3년여 전부터 몸져누웠는데 백약이 무효하고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최보살은 신기한 꿈을 꾸었다. 흰 옷을 입은 부인이 ‘너는 전세의 과보로 이 같은 병고를 받고 있으니 지성으로 참회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행하면 병고가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최보살은 엎드려 애원하였다. 그랬더니 ‘너는 전라도 곡성 관음사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최보살은 아픈 몸을 이끌고 관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관음사는 잿더미 밖에 없고 부처님도 도난을 당하고 없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돌아 갈 길이 멀어 하루 밤을 묵었는데, 다시 흰 옷을 입은 부인이 나타나 ‘나는 이 곳 성덕산 관음보살이다. 나의 몸이 전화로 해서 얼굴만 남게 되었고, 지금은 광주의 고물상 마루 밑에 있으니 날이 밝으면 나의 얼굴을 찾아 다시 관음사에 모셔라’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최보살은 아들과 함께 고물상을 모두 뒤져 어느 고물상 마루 밑에서 정말 얼굴만 남은 관음보살상을 찾아내어 모셔오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찾은 관음상을 법당에 모시고 지극한 기도를 드린 후 잠이 들었다. 다시 꿈에 흰 옷 입은 관음보살이 나타나 ‘고맙다. 관음사에는 흰 불두화와 흰 만리향화, 흰 진달래 등 세 가지 꽃이 있으니 그것을 다려 먹어라. 그러면 병이 낫게 되리라.’하고 법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최보살은 씻은 듯 낫게 되었다고 한다.”
신앙심의 힘에 대한 이와 같은 스토리를 짓지 않는 종교란 아마도 이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종교로 성립되어 신도 집단을 구성, 유지시키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절대적 절망의 상황에서 무력감에 젖은 개인이 신앙의 초자연적 힘에 의존하려 한다는 것을 아마 누구도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물질적인 대상을 그 신앙의 중핵인 것처럼 만들어 그 대상물에게의 기도를 마치 만사형통의 비결로 만든다면 과연 흔히 이야기하는 "물신 신앙"과 다를 바 있을 것인가?
불교는 원칙상 그나마 불보살의 영험을 초월적인 존재들의 "자비"의 표현으로 인식하여 그 영험의 은택을 입는 신도들에게 타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같은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하는 정도의 "영험 신앙"의 고등 종교화(化)의 최소한의 논리를 보유하고 있는데, 만약 보살 자체보다도 그 보살의 특정의 상(像)이 신앙 대상화된다면 그 논리조차 상실되어 우리에게 남을 것은 "신비스러운 신상 (神像)이여 내 기도를 들어다오!" 정도의 원초적인 종교적 욕망일 것이다. 그러면, 그 욕망을 실천하려는 이들에게 자연히 신상(神像)을 보다 크게, 보다 장엄하게 짓는 경쟁이 붙게 돼 있는데, 우리가 지금 한국 불교에서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듯하다.
"초대형 불사"로 거대 사찰과 거부(巨富)인 시주들이 서로 "힘"을 과시하고 신도들을 끌어 모으려는 광경을, 우리가 최근에도 몇 번이나 목격할 수 있었다. 예컨대 지금이야 세인의 기억에서 사리진 듯하지만, 몇 년 전에 법보(法寶) 사찰인 해인사에서 그 당시의 주지가 65억원의 기부를 받아 높이 43미터의 "세계 최고(最高)"의 청동 불상을 건립하려 했다. 주변의 경관이 이렇게 해서 망가진다는 지적에, 대형 불사를 추진하려는 쪽이 반대 논리를 펴던 한 불교 환경 운동가의 처소에 난립하여 난동을 부리기까지 하는 등 불교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까지 다 벌어졌다. 결국 주지스님이 교체되어 빌딩만큼 높은 불상을 짓겠다는 이야기를 그만둔 듯하지만 과연 그 때 그 일이 "초대형 불사"에 대한 병적인 집착의 유일한 사례인가? 이와 같은 집착이, 불상 그 자체를 신앙 대상화, 신비화시키는 우리 불교의 보편적인 의식·태도 등과 직결돼 있다는 것은 바로 화근일 것이다.
불상이 "우상"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이미 거의 일세기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해 만해 한용운(1879-1944)이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의 탁월한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에서 "불교에서 숭배하는 조각과 그림을 논한다" (論佛家崇拜之塑繪)라는 꼭지가 따로 두어져 이 문제가 깊이 있게 다루어져 있다. 불교적인 "방편론"의 입장에 서 있던 한용운은, 부처님의 그림이나 조각을 숭배적인 태도로 대한다는 것을 반대했으나 불교 미술품이 신행(信行)을 위해 쓰인다는 것 자체를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실 그 자체가 실상이라기보다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거짓 모습"이고, 그 현실을 다시 한번 미술의 기법으로 재현한다면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 (假相之假相)이 될 셈이다. 즉, 부처님의 현실적인 신체 그 자체도 부처님의 법신(法身), 즉 진리를 깨달은 이의 초월적인 모습에 비해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은데, 굳이 그 신체를 조각하거나 그린다고 해서 그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대상물을 접하여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이 평범한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 지극히 지혜롭거나 우둔한 사람만 아닌 이상 대다수가 진리를 깨달은 이의 "거짓된" 모습이라도 봐야 그 "도덕적 영향"을 받아 진리에 대한 생각의 싹이 트고 좋은 일을 받들어 하고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쪽으로 행실이 고쳐진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을 봉독하는 불자마다 다 알다시피, 우리의 물질적, 정신적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의 요소, 즉 정신의 여러 작용을 나타내는 수(受: 즐거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감수 작용), 상(想: 대상을 인식하게 하는 표상작용). 행(行: 우리의 일체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의지), 식 (판단, 추리에 의한 식별의 작용)을 포함한 "오온" (五蘊)이 실제로는 다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개공 (五蘊皆空)의 실제를 단순히 알음알이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껴 체득하려면 상당한 정진이 필요한 것이고, 오온개공의 진리를 깨달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부처의 위용을 드러내는 조각과 그림을 보고 그 감회를 살려 계속 정진할 필요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흡한 수준에 있는 중생들의 용맹정진의 도구가 돼야 될 종교 미술품들이 "우상화"되는 걸 어떻게 방지해야 하는가? 길흉화복을 점치고 제사를 지내는 등 기복 신앙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된 나한, 칠성, 명부시왕, 신중상 등을 일체 철폐하고 여러 부처님과 보살의 대표로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상(像)만을 장엄하게 만들어 예배하면서 그의 사적을 생각하고 그의 감화를 다시 느끼고 그의 교화와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자는 것은 한용운의 제안이었다. 1400년 동안의 기독교적 미술 전통 그 자체를 뿌리째 흔들기까지 한 16세기 유럽 신교도들의 "우상 파괴 운동"에 비해서는, 한용운의 생각은 꽤나 온건하고 균형잡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 사찰에 들러 본적이 있는 그 누구도 증명해줄 수 있는 것처럼, 이 온건한 "신행 개혁안"마저도 실천에 옮겨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만큼 불상의 "우상화"는 기복화(祈福化)돼 있는 한국 불교에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가 중도(中道)에 있는 이상, 한용운의 불교 종교미술론을 아마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용운과 많은 측면에서 상당히 가까웠던 또 한 명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톨스토이(1828-1910)도 비슷한 차원에서 종교미술을 제한적으로 긍정했다. 그에게는 "진정한 미술"의 척도란 종교적인 선(善)을 향하는가의 여부와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보편성을 보유하고 있는가의 여부, 그리고는 미술품 제조자의 진솔성으로 인해서 생긴 "전염의 힘", 즉 감화력이 강한가의 여부 등이었는데, 폭넓은 대중들의 선(善)의 이해에 바탕을 두어 그 이해를 넓히고 심화시키는 종교 미술이 인생의 중심인 종교적 수양의 중요한 일부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 미술의 보편성이나 대중성, 감화력 등을 높이 사준 톨스토이이었지만, 종교 미술이 종교의 보편적인 원리 그 자체보다는 전문적인 종교인들이 기득권층의 이해 관계에 따라 만들어 보급시키는 "사이비 종교적 신화"들을 대중화시킴으로써 대중의 종교적 감각을 왜곡시키고 지배층의 "주류"에 복속시킨다는 데에 대해 그가 크게 걱정하기도 했다.
위에서 내가 이야기한 석굴암의 본존불에 대한 이중적인 느낌은, 톨스토이의 논리와 어떤 면에서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같은 종교 미술품의 성격은, 대중들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 심리와 직접 상통하는 측면과, 지배계급의 착취자와 살인자들을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신성화까지 시키는 "지배이념 주입적인" 측면을 동시에 보유하는 것이다. 만약 종교 미술의 명암을 동시에 고려하는 이 관점에서 불교의 종교 미술의 교의적 배경과 역사적 추이를 고찰해본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초기 불교 공동체에서는 인간 붓다에 대한 일종의 "향수"의 분위기가 강했던 것을 여러 문헌에서 엿볼 수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붓다 자신이 "한 번 가버린 뒤에는 깨달은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바람에 꺼버린 불이 없어져서 더 이상 '불'로서 존재하지 않듯이 한번 신체를 벗어난 깨달은 이는 없어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가고 없어진 이를 더 이상 재볼 수 없다 (…) 모든 요소들이 소멸되고 나서는 더 이상 이야기될 만한 부분도 없다."
초기 불교의 이 가르침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미 없어짐으로써 그 의미를 상실한 붓다의 형상보다 붓다의 말, 즉 붓다가 이야기한 해방으로의 길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리어 <법구경>도 "겁에 질려 [신성하다 싶은] 산림, 신사(神社)가 있는 숲에 가서 귀의하려는 사람"들에 비해 마음속으로 삼보에 귀의하여 영원히 공포심을 초월하게 되는 이들아 훨씬 우월하다고 강조했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법 그 자체를 크게 갈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붓다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이 정말로 엄금된 것이었는지 우리가 지금으로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러한 형상을 우선시할 필요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음에 틀림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법을 인류에게 처음에 알린 인간 붓다에 대한 애착은, 그 제자들 사이에서는 매우 강한 것이었다. 예컨대 일찍부터 붓다의 탄생, 깨달음, 첫 설법, 그리고 열반의 네 가지 성지(聖地)가 제자들의 순례의 대상이 됐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stiv�da) 학파 같으면, 계율상으로 공식적으로 이 네 가지 성지에 대한 순례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붓다에 대한 "경외"의 태도가 여실히 보여도 그를 그리는 미술품까지 어떤 종교적인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불상은 기원후 1세기 이전까지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일찍이 만들어진 석탑(石塔)의 미술에서는 붓다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대신에 그 제자들에게 어떤 교훈이 될 만한 붓다 관련의 이야기가 주로 재현됐다.
예컨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불교 건축 및 미술의 유적이라 부를 만한 중부 인도의 산치(S�n�i)근교 기원전 2-1세기의 석탑의 문이나 난간에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보륜(寶輪)이나 붓다 그 자신이 보이지 않는 그의 탄생의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는 물론 불제자들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붓다 전생의 이야기들, 즉 소위 본생담(本生譚: J�taka)의 장면들이 흔히 보인다. 인기가 많아 산치뿐만 아니라 바르하트(Bh�rhut) 등의 여러 가지 초기 석탑에서 새겨진 본생담의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예컨대 차단타(Chaddanta)라는 이름의 코끼리의 왕으로 한때 태어나 살았던 붓다의 전생 이야기다. 앙심을 품은 왕비의 권고로 한 왕국의 임금이 사문(沙門)을 시켜 차단타를 죽이라 했는데, 차단타는 자기 방어를 하여 사문을 분명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수행자를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경외심으로 자기 자신을 차라리 희생시켰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아니면, 바르하트 석탑의 난간에서 새겨진 루루(Ruru)라는 이름의 황금 노루의 이야기는 어떤가? 자비심이 강한 그 황금색의 노루가 한 번 물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해주었는데, 그 사람에게 제발 자신의 처소를 인간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나라 임금이 황금색 노루를 잡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하자 탐심이 난 그 사람이 배은망덕하여 루루의 처소로 임금의 군사를 데려간 것이었다. 한데 그 노루가 자신이 배신 당했다는 이야기로 임금을 감화시켜 죽임을 면한데다가 배신자를 죽이겠다는 임금의 손을 붙잡는 등 계속해서 자비 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인도 민중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자비 관련의 미담들이 순박한 그림으로 새겨져 있는 석탑은, "예배의 장소"이기 이전에 하나의 불교의 교과서이었다. 합목적(合目的)의 종교 미술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는 것은, 초기 불교의 도덕적 열정을 뿜는 그 최고(最古)의 석탑 미술에서도 불교 그 자체와 굳이 관련이 없는 모티브들이 꽤 많이 보인다는 부분이다. 토착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지(聖地)로 여겨 참배하러 오는 탑이라, 그들에게 성지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생각되어지는 다산(多産)의 풍만한 여신들의 신체나, 다산 기원 의미의 교태(嬌態)의 장면, 신성한 나무와 코끼리 등이 초기의 석탑들을 장식한다.
연기(緣起), 공(空), 그리고 자비 중심의 붓다 가르침은 교리상 기존의 인도 종교, 신앙과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많은 재가 불자의 입장에서는 종교로서의 불교는 이미 초기 단계부터 기존의 신앙 형태들과 혼합되기도 했다. 하기야, 붓다 자신도 신사(神社)에 대한 공동체적 숭배를 정치 공동체 화합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았던가? 불교는 기존 종교의 초자연적 힘에 대한 인식을 자기 가르침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지만, 정면으로 반박하지도 않고 일단 시인하긴 했다. 그러기에 불교적 신앙이 비(非)불교적 신앙과 점차 습합돼 가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결과이기도 했다.
불교 미술의 기능과 형태의 변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결국 국가 권력과 종교의 관계의 변화이었다. 사실, 붓다 생전의 가르침과 뚜렷한 연관이 보이지 않는 오히려 차라리 인도 전통의 성직자 장례식이나 제사 습속과의 연결이 입증될 수 있는 석탑의 신앙이 기원전 3세기 이후에 크게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이 정복한 곳마다 탑을 세움으로써 불법 (佛法)의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는 아쇼카 왕(기원전 270-230년 추정)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본다. 아쇼카 이후에 성립된 산스크리트어 원본의 <열반경>(Mah�parinirv�nas�tra)에서야 붓다의 사리(舍利)를 숭배하라는 발언이 붓다에게 가탁돼 있지만, 이것은 다른 초기의 경전에서 알 수 있는 붓다 가르침의 원리와 많이 상반됐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붓다의 권위를 빌어 자신을 세계의 "평화로운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쯤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쇼카이었기에 그 시대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아마라바티(Amar�vat�)의 석탑에서 법륜(法輪)을 굴려 세계를 정복해가는 전륜성왕의 그림까지 보인다. 불교의 원리상 세속적인 권력을 무엇보다 멀리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아쇼카 이후로는 바로 세속 권력과의 관계는 불교의 고급 종교 미술의 발전을 주도한 모양이었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일부를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때에 점령한 그리스인들의 신상(神像) 미술의 강한 영향을 받아 기원후 1세기경에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영토인 간다라(Gandh�ra)에서 최초의 불상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나서도 그 모습의 변천 과정이 정치 권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그 지역을 통치했던 쿠샨 왕조의 가장 강력한 군주인 가니스카(迦腻色伽기원후 2세기)는 그의 일부 동전에서 앞면에서 자신의 그림을 새기고 뒷면에서 붓다의 그림을 새겨 그 밑에다가 그리스 글자로 "붓다 석가모니"라고 설명하기까지 했다. 쿠샨 미술의 가장 잘 알려진 명품인 가니스카의 127년의 금동 사리함(舍利函: Reliquary)을 자세히 보면, 위에다 군주를 호위하다 싶은 붓다 등의 여러 신들이 서 있으며, 밑에다 가니스카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붓다가 권위의 원천이자 자신을 보호하는 신이었던 모양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의 주된 시주인 경덕왕의 붓다 "이용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군주의 이와 같은 종교관은 붓다에 대한 미술 제조 주체들의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후 2-3세기 마투라(Mathur�)라는 북부 인도의 종교 미술 중심지에서 만들어지는 불상의 일부는 사실 가니스카 자신을 꽤나 닮기도 했다. 권력자들이 초(超)인간적, 신비적 차원을 띠는 동시에, 권력자들의 보호를 받아 "주류화"되는 종교도 권력화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기원전 석탑들의 본샘담 장면에서는 붓다의 모습이 보이지조차 않았지만, 간다라 미술에서는 본생담이 새겨지는 경우 그 장면에서는 붓다의 키는 그 옆의 일반 인간에 비해 확실히 커보였다. 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권력과 결탁한 불교 신앙 공동체는, 진리를 깨달은 한 인간을 사후에 미술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신적 존재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탈레반 정권이 쿠샨 이후, 즉 6-9세기에 만들어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Bamiyan) 대불(大佛)을 파괴함으로써 각국의 불자를 비롯한 전세계 여론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보는 이를 압도하여 붓다의 무한한 권위를 실감하게 하는 바미안의 "초대형 불사"야말로 미술을 통한 붓다 신격화, 권력화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다. 쿠샨 미술에서 이미 보이는 붓다의 신격화 경향은, 바미안의 대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것을 파괴하려 했단 탈레반 정권이야 야만을 저질렀지만, 우리가 굳이 "힘"을 상징하는 커다란 부처님의 모습 앞에서 자비의 가르침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
불교의 역사적 발전의 역설이라 할까? 우리가 동아시아의 "전통"으로 알고 있는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이해의 중심에 그의 영원하고 감각으로 접할 수 없는, 우주적 "몸", 즉 법신(法身)이 있다. 업(業)도 과(果)도 행(行)도 멸(滅)도 아닌, 한량도 없고 자취도 없는 이 법신을 그리기는커녕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의 조계종 같으면 거기에다 '살불살조'(殺佛殺祖) 풍의 "우상 파괴적인" 선불교의 전통까지 계승한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같으면 일개 조각이나 그림을 숭배할 일은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찰들의 각종 불상과 불화들은 지금도 그 장엄함으로 신도들을 압도하여 "기적", "영험"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또 각종 의례의 중심에 놓여 있기도 한다.
그리고 천여년 전의 불교적인 바미안 왕국과 별로 다르지 않게 "초대형 불사"는 아직까지 개인 시주와 사찰의 권위를 세우는 중요한 방법으로 통하기까지 한다. 물론 인간이 시력을 갖고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이상 시각적인 "종교 교재"로서의 종교 미술이 필요할 것이고, 가족관계나 사제관계를 통례로 하는 사회에서 사는 이상 부처님에다 "아버지", "스승"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여 경외,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한용운이 제시한 대로, 사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상(像)을 놓고 존경을 표하는 것이 불교로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불상, 불화의 신격화나 "대형 불사"에 대한 집착은, 정말로 붓다의 원래 가르침이나 초기 불교의 본질적인 승가 생활·신앙 형태와 부합 (附合)될 수 있는 일인가? 우리가 연기, 공, 자비의 가르침으로서의 불교의 원래 모습을 되찾자면 이 부분에 대한 수술은 분명히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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