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옳음을 기뻐하는 것!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것의 하나는 초월적 형이상학적 바탕일 것이다. 신은 이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현대는 근본적으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형이하학적인 까닭이다. 신 대신 ‘신적인’ 것은 조금 덜 부담된다. 가령 신적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렘브란트의 판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655년, 5판)다.
렘브란트의 ‘이 사람을 보라’(부분도)에서 예수는 두 손을 모은 채 그냥 서 있다.
모함과 아우성 속에서도 그는 죄인들의 죄인으로 판결을 기다린다.
놀라운 것은, 그 진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무 것도 선언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가 극단적이었던 것은 오로지 한 가지-사랑의 실천에서였다.
그는 만인사랑의 극단주의자였고, 바로 이 사랑으로 죽어간다
유대인들이 고발하기 위해 끌고 온 예수를 보고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렇게 묻는다. “네가 유대인 왕이냐?” 그러자 예수는 대답한다. “그것은 네 스스로 하는 말인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네게 한 말인가?”(요한, 18:34) 빌라도의 명령으로 병사들은 예수를 매질한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엮은 왕관을 그의 머리에 씌운 후 사람들 앞에 다시 끌고 나온다. 이때 빌라도가 외친다. “이 사람을 보라.” 판화는 이 순간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권력자 빌라도 옆에 서 있다. 두 손이 묶인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래를 쳐다보고 있다. 앙상한 손마디와 다리. 눈빛에는 아무런 결의나 다짐도 없어 보인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십자가에 그를 못 박아라”고 소리치고 있고, 유대 율법사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누구는 그에게 침을 뱉고 누구는 때리며, 누구는 밀치고 또 누구는 그를 짓밟았다. 제자인 유다마저 은화 30전에 그를 팔았다. 그러자 예수는 “유다여, 네가 입맞춤으로 날 팔려 하느냐?”고 말했다. 사랑을 침 뱉으며 갚고, 헌신을 짓밟으며 되파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서구의 정신사는 흔히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두 원천으로 설명된다. 헤브라이즘이 유대적 기독교적 신앙의 원천으로서 신비와 직관과 감정을 중시한다면, 헬레니즘은 합리주의 사상의 원천으로서 논리와 탐구 그리고 지성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브라이즘의 중심에 인간과 신의 관계-복종과 경배가 있다면, 헬레니즘에는 이성과 원리의 정신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개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기 독자성 속에서도 상대를 포용한다면, 그것은 더 온전해질 것이다. 이것을 사랑에 적용시키면 어떨까?
우리는 사랑을 대개 감정의 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감정만의 사랑이 믿을 만하고, 더욱이 오래갈 것인가? 그러기는 어렵다. 이것을 직시했을까? ‘고린도전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은 한 사람의 잘못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옳음을 보고 기뻐한다.”(13:6) 모든 사랑이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이어질 때 진실해진다. 옳음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이때 사랑은 이성의 도움으로 변덕을 넘어 바르게 인식한다. 바르게 사고할 수 있을 때 사랑도 바르게 선다.
예수의 사랑에서 돋보이는 것은 고통의 인내만이 아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경멸과 모욕감일 것이다. 그는 나중에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세워졌고, 남은 겉옷과 속옷은 병정들이 제비뽑아 나눠가진다.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 앞에서 그는 스스로 죄인으로 그냥 서 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사욕을 품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랑은 단순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 정을 주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상대를 헤아리고 스스로 모멸을 견디며 이 견딤 속에서도 그 옳음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선언이나 확인은 사랑이 아닌 까닭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사랑’인지도 모른다.
예수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서 있다. 그는 이해되기보다는 오해되었고, 경외되기보다는 시기되었으며, 칭송받기보다는 비난받았다. 사랑을 전하는 그의 진실을 많은 이들은 신성모독이라 했다.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 숱한 질시와 오해와 모함을 그는 어떻게 홀로 삭였을까? 그의 사랑은 말이나 얼굴에서가 아니라 눈빛과 몸짓 그리고 자태에 배어 있다. 그는 바로 이런 사랑으로 죽어간다. 옆구리 상처를 헤집고 나서야 의심을 푸는 제자 토마처럼 우리는 그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선의를 행한다. 의심 없이 사랑하는 자는 행복할 것이다.
나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랑이 얼마나 허약한지 잘 안다. 그것은 힘없고 잘 속으며 눈멀고 아둔한 것이다. 종파적 감정을 부추기는 갖가지 단체나, 민족이나 애국주의를 들먹이는 정치가와 학자들을 보라. 믿음으로 테러가 자행되기도 하고, 폭력도 영웅적 행동인 양 미화되기도 한다. 정의와 불의는 자주 다르지 않다. 사랑마저 옳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랑의 이름으로 교사는 아이를 벌주고, 부모는 편법과 수작을 가르친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변종이 사랑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수록 원숙해지는 것은 자기변명의 기교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이것으로 어떤 이는 고통받기도 한다. 이런 불행한 틈을 삶은 너무 자주 허용하고, 이 틈으로 인간의 우매함은 더 커진다. 반성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언제든 악용될 수 있다. 물론 사랑이 늘 검토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재미도 없거니와 자연스럽지도 않다. 바람직한 것은 그런 의도 없이도 사랑이 행해지는 단계일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가. 사랑이 결의로 되지 않듯, 이성으로 통제되지도 않는다.
눈멀지 않기 위해 사랑은 이성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이 이성은 믿음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믿음도 이성도 자기를 넘어선다. 이 점에서 이성과 믿음, 합리성과 종교는 배치되지 않는다. 이 둘은 드높은 곳에서 서로 만난다. 사랑은 이 교차점이고, 이런 교차를 통한 넘어섬의 형식이다. 이때는 ‘기독교적’이란 말을 빼도 무방할 것이다. 판화 속의 예수는 이런 사랑의 원형-일체의 구분과 경계를 넘어서는 숭고한 인간애를 떠올리게 한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