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나르시시즘
[천천히 사유하기]폭력과 나르시시즘
-자기도취의 망상-
죽음의 여파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찾아온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 특히 그렇지만 먼 사람들의 죽음 또한 가벼울 수는 없다. 느닷없고 무고한 것이었다면 그 죽음은 더 그렇다.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의 얼마 전 총기사건도 그렇다.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논평과 진단이 지금까지 있었다. 조승희씨의 원만하지 못했던 교우관계가 있고,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미국 환경이나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도 있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넘쳐나는 폭력물도 그렇고, 깊게는 대통령의 일가까지 연루된 군수산업의 성격도 있다. 실제로 부시는 사건 직후 총기 소유가 문제되자 그것이 ‘헌법적으로 보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이 사건의 얽힌 맥락을 선명하게 밝히기란 쉽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사회의 병리적 면모들이 바야흐로 국외적으로도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총기 난사범을 ‘모든 것을 자기와 연관시키는 극단적 나르시시즘의 인간’으로 규정한 범죄심리학자도 있지만, 이번 사건은 조씨의 내성적 성격에다 심리적 장애와 문화적 이질감, 인종차별과 총기문화 등이 얽혀 이런 나르시시즘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예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신문사에 보낸 비디오테이프에서 “당신들은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한 가지 선택만을 허용했다. 그래서 나는 힘없는 세대를 대신해 정의를 복원시킨다”고 말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세상을 고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자기도취적 망상으로 읽힌다. 이 망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 조사에 의하면, SAT(미국대학 수학시험)에서 아시아인들이 백인보다 높은 평균점수를 받는 것은 몇몇의 뛰어난 성적에 기인하며, 대개의 경우 좋지 못한 성적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고민을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좌절이나 부적응의 인정 자체를 가족의 수치로 여기는 ‘아시아적 관습’ 때문이다. 그러니 고민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더 나은 정신건강을 가져서가 아니라 터놓고 말하길 꺼리는 문화적 특성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한국 학생들의 경우 부모의 과도한 기대로 그 압박감은 더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성적고민으로 불안해하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더 높은 교육수준과 수입 그리고 낮은 범죄율로 ‘모범적 소수이민자’라던 기존의 한국 이민자의 이미지는 ‘신화’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한국 교육현장의 중심에는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가 있다. 이 땅의 학부모는 아이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교육에서 얻고자 한다. 부모의 바람이 없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필요하고 또 긍정적 역할도 한다. 그러나 지나치면 독이 된다. 한국의 부모는 아이가 제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보다는 부모가 원하는 삶-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길 바란다. 그것이 또 ‘자연스럽고’ ‘도리에 맞다’고 여긴다. 이때 부모는 아이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 아이를 꾸중한 교사를 학부모가 폭행하고, 아들을 때린 종업원을 찾아가 아버지가, 그것도 재벌 총수가 폭력배까지 동원해 구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난다. 그리고 몇 백만원 던져 주었다던가. 법치국가, 시민사회, 민주주의라는 말들이 이 땅에서는 허황되다고 나는 자주 생각한다.
자기 갈망을 타자에게 투사시키는 것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애로서의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심해지면 자기도취가 된다. 한국의 부모에게 흔히 있는 나르시시즘은 이런 도취에 가깝다. 이들은 자식의 독자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은 상호종속적 상태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사회 전체-친구나 선후배 사이, 나아가 직장동료 사이 등 인간관계 일반에까지 번져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무엇을 지적해주면, 그것이 바른 것이어도, 우리는 듣기 싫어한다. 상대의 주체성을 흔쾌히 인정하기보다는 그런 인정을 섭섭하게 여기기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말하고 생각하길 원하거나, 스스로 나서서 타자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번 총기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외국의 언론까지 놀랐던 한국사람 특유의 집단적 책임의식도 이런 망상적 동일화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 이때의 책임의식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에서라기보다는 예상되는 불이익에 대한 염려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는 한 건전한 공감도, 양심적인 책임의식도 아니었다. 우리의 감정은 비극적 사건 앞에서도 그리 순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심각하게 왜곡됐음을 보여준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자식은 현실의 좌절을 세계와 동일시된 폭력적 환상 속에서 해결하려 한다. 이런 망상 앞에서 타자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많은 한국적 병리현상을 파 들어가 보면 그 끝에는 이런 미분화된 정체성이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전체적으로는 집단주의적 쏠림으로 나타나고, 개별적으로는 돈과 물질과 지위에 대한 공격적 집착으로 드러난다. 연대의식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과도한) 일체감에 대한 불복종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알게 모르게 가슴에 키우고 산다. 좋은 사회란 갈등이 없는 곳이 아니라 갈등을 폭력 이외의 방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이다. 이런 사회는 비극의 원인을 특정인에게 덮어씌우기보다는 그가 그 일을 하기까지 사회는, 이웃은 그리고 가족과 동료는 무엇을 했던가를 먼저 성찰한다. 인간적 삶의 체제란 전가와 배제의 체제가 아니라 이해와 공존의 체제인 까닭이다. 자기 하는 일에서 물러나 다시 생각하는 일, 그것은 나르시시즘으로부터의 반성적 거리다. 반성되지 않는 사고는 독선이 되고, 이 독선은 언제든 폭력에 의존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거리감을 개인적으로 내면화하고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