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대하여
[천천히 사유하기]‘슬픔’에 대하여
-왜 쫓기듯, 혼을 뺀 채 내달려야 하는가-
호들러 ‘삶에 지친 자들’
이즈음 보게 되는 것, 또 마주치게 되는 것은 왜 슬프게 느껴지는가. 학교를 오가면서, 전철 안에서 아니면 지하도를 나오거나 들어가면서 잠시 스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표정이나 차림, 주름과 기미는 왜 내게 슬픈 감정을 자아내는가. 올 겨울 날씨는 그리 춥지도 않았는데, 사람의 행색이나 도시의 풍경은 여느 겨울처럼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 내 마음은 이들 앞에서 왜 저려오는가? 올해 들어 몇 차례 칼럼을 썼지만, 사실 요즘의 날 채우는 건 슬픔이다.
나는 ‘슬픔’이나 ‘절망’ 같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주 사용하면, 마치 ‘가격파괴’란 단어처럼 허황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나는 이즈음 우울하다. 거리와 나무와 사람과 바람, 공허한 말과 행동의 교차가 무수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대개 지쳐 보인다. 토요일 쉬는 이가 없지는 않건만, 허겁지겁 허둥대거나 어깨를 늘어뜨리며 걷거나 고개를 숙인 채 한 구석에서 졸고 있다. 깨어 있는 이는 무가지 신문을 읽고 있고(무가지 신문은 무가치하지요?). 못 먹어 핏기가 없거나 너무 먹어 비대하거나 아니면 그 눈빛은 사납다. 계산기인가 게임기인가, 어떤 이는 무엇인가 열심히 두드리고, 그 옆 사람의 휴대전화는 쉴 사이 없이 울린다. 이어지는 인공음 “전화 왔어요”. 일렬로 서서 내달리듯 일렬로 앉아 넋을 놓고 있다. 호들러(F. Hodler)의 한 그림처럼, 이들은 ‘삶에 지친 자들’이다. 왜 이렇게 다들 쫓기듯 살고, 왜 혼을 뺀 채 내달려야 하는가. 아이들은 왜 하루 종일 분주해야 하고, 학생들은 왜 자정 넘긴 시간에도 학원버스에서 내리는가.
거리를 지나다가 ‘베트남 캄보디아 결혼 주선’ 현수막을 보게 될 때, ‘도와 달라’는 쪽지를 준 노인을 다음날에도 만날 때, 내 마음은 가라앉는다. 1000원짜리 김밥 하나 말면 200원 남는다고 들었을 때 떠오른 건 7년 일해 번 돈이 117만원이었다는 한 가장이었다. 그는 예르킨이라는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다. 여수출입국관리소에서 불타 죽은 9명의 이주노동자 중에 그가 있었다. ‘사장님’이란 단어는 그들에게 ‘일만 부려먹고 돈 주지 않는 인간’이라 했다. 왜 우리 사는 땅과 집은 하루가 멀게 값이 치솟고, 자살률은 세계 제일인가. 나는 술에 취해 귀가하는 사람이나 이 땅을 떠나는 이민자들을 이해한다.
낙담케 하는 일이 사방에서 일어나면 자포자기도 번거로워진다. 있어 왔던 일들은 ‘있어 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자연스레 돼버린다. 그래서 슬퍼할 거리도 못 된다. 구제란 처음부터 인간 세상에 어울릴 수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슬퍼해야 할 것은 이 모든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무감각일 것이다. 그러니까 슬픔에도 여러 층위가 있는 것이다. 보이는 슬픔과 보이지 않는 슬픔, 현상적 슬픔과 내밀한 슬픔을 나는 떠올린다. 현실의 어떤 사건이 현상적 슬픔이라면, 내 몸이 느끼는 어떤 변화는 내밀한 슬픔이다. 무감각과 타성은 이 내밀한 슬픔을 이룬다. 여기에는 나이 탓도 있을 게다.
불혹이란 마흔 나이를 난 이전부터 두려워했다. 얼마나 굳은 신조를 가져야 미혹되지 않을 것인가?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런 불안한 시절을 십여 년 겪는 동안 나 역시 그 대열에 끼게 되었다. 너는 이제 굳건히 살아가고 있는가? 글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마흔은 ‘흔들림 없는 신념의 연령’이 아니라 ‘온갖 아집에 빠져 요지부동인 연령’이라고 나는 어딘가에 쓴 적이 있다. 좋게 보면 자기 일을 성실히 한다고 하겠지만, 나쁘게 해석하면 달리 어쩔 수가 없는, 기껏해야 해온 것을 할 뿐인 때가 사람 나이 마흔인 것이다. 아이들은 커가고 있고,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누군가를 믿고 따르기도 어렵지만 드물게 믿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고, 또 이들에게 실망하기도 하는가. 잘못이 쌓이고 쌓이면 용서란 말도 꺼내기가 주저된다. 그럴 즈음 용서받을 것은 지나간 일만큼이나 다가올 일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제가 알고 믿고 행하는 것에 희생될 뿐이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이런 회한마저 곧 휘발될 것이라는 점이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가장 깊은 슬픔은 이 살아있는 생존의 현실이 훼손되는 데 있다.
한탄과 부정(否定)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살아있는 기쁨을 북돋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투정이 될 수도 있다. 삶의 확연한 진실 하나는, 노래하든 울든, 이렇게 ‘무어라고 하는 순간에도 내가 소진해간다’는 사실이다. 일할 때도 우리는 늙어가고, 쉴 때도 생명은 녹아간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소중한 것은 여기 있음-지금 살아 있음일 것이다. 삶의 경이를 새롭게 발견하는, 발견하려는 일일 것이다. 힘겨워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삶 속에서가 아닌가. 우리가 죽음을 향유할 수는 없다. 이 생존의 놀라움에 비하면 슬픔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의 일과 하루의 저녁과 다시 아침으로 이어지는 나날들. 곳곳에 침묵이 어려 있고, 이 침묵에서 나는 길고 짧은 죽음을 본다. 그림자들은 고개 숙인 채 울고, 생활의 먼지는 진군하는 적들 마냥 이곳으로 덮쳐온다. 나무와 의자와 하얗게 펼쳐진 종이 그리고 지우개. 지워야 하고 또 기억해야 할 무수한 것들. 우울도 해묵으면 에너지가 된다던가. 곪고 찢어진 마음들이 만나 서로 위로받길 우리는 기대한다. 부질없는 기대는 실망을 낳고, 이 실망은 쌓여 환멸이 된다. 환멸 속에서 모욕은 자산처럼 쌓여가지만 그래도 명심하자. 무엇보다 먼저 존중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나의 안위로부터 세계의 평화는 발원한다고. 개체의 안녕은 물과 공기처럼, 또 뿌리처럼 근본적이다. 삶의 많은 의미는 아마도 이 뿌리를 타고 올 것이다. 이 거대한 뿌리는 땅 밑으로, 내 속으로 나 있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