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 스미스의 에세이를 읽고
[천천히 사유하기]차디 스미스의 에세이를 읽고
차디 스미스의 에세이는 ‘좋은 글’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현재라는 제약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다른 삶, 자유의 다른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전철을 타고 오가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간단하다. 그런데 이렇게 읽은 것이 인상적일 때도 있다. 또 이 인상이 고마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주 읽은 글은 내게 그러했다. 그것은 차디 스미스(Zadie Smith)라는 작가가 쓴 ‘더 잘 실패하라(Fail better)’는 에세이였다. 지난 1월 중순 ‘가디언’지에 실린 것으로, 출력하면 A4용지로 13쪽 되는, 신문에 싣기엔 좀 긴 글이다.
스미스의 글은 ‘좋은 작가란 어떠한가?’ ‘왜 위대한 소설은 그다지 적은가?’ ‘작가의 의무는?’ 등을 언급하면서, 편집자 설명에 따르면, ‘명예로운 실패’라는 문학적 유산을 적은 것이다. 이것도 흥미로웠지만, 내 관심을 끈 이유는 더 간단하다. 읽는 내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 글은 신선했고, 그래서 나는 아껴서, 밑줄 쳐 가며, 야금야금 읽었다.
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개개인은 나름의 취향과 기질, 성격과 지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글이 제각각이고, 그래서 ‘아무래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글은 삶의 눈부신 다채로움을 말하면서도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며, 이렇게 찾은 공통점이 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또 다른 풍요로움-인간과 사물과 세계를 같고도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어떤 원리를 찾아 나선다. 하나의 것은 다른 무수한 것들로 이어지고 이 무수한 것에서 각각은 다시 나오는 까닭이다. 이렇듯 큰 문학은 삶의 온전성을 추구한다. 그러니 좋은 글에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스미스의 글에서 내가 느낀 것도 이 삶의 감정이었다.
그 글의 중심에는 개인에 대한 생생한 이해가 있지 않나 여겨진다. 그는 자아를 “헛되고 망상적이며 근시안적이고 비겁하고 잘 굽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자아의 이 같은 인성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표현하는 것은 작가의 중대한 의무다. 이 점에서 그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T S 엘리엇의 생각과 갈라진다. 즉 전통을 존중하는 엘리엇에 동의하지만, 엘리엇이 사적 영역을 전기적 사실로 축소시킨 점을 비판한다. 개인적 인성이란 단순한 전기적 사실의 총합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
작가는 한편으로 과거의 작품이나 문화와 대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아의 정원’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이 정원은 가꾸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푸코의 생각이 배어 있지만, 그는 다른 비평가를 끌어들이며 ‘편애’나 ‘강박관념’에 주목하기도 하고, ‘개인적 특이성을 억누른다면 인간은 빈곤해질 것’이란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가 역사 영웅주의와도 거리를 갖는 것 또한 개인성에 대한 이런 이해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작전에 참가했다는-와의 대화가, 이것은 다른 에세이에 실려 있는데, 한 몫 하는 듯하다.
그는 묻는다. “아빠, 노르망디 해안가로 정말 진격했나요?” 아버지의 대답:“진격이라고? 거기에 있긴 있었지. 그렇지만 진격했는지는 몰라.” 나이가 더 들면서 그는 전쟁에 관해 이런저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노르망디의 공포와 영웅담을 자애롭고 신중한 아버지와 일치시키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한다. 이런 경험 덕분에 그는 역사를 그 흔한 영웅담이나 순교주의가 아닌, 우발적 운명 속에 희생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파악하게 된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개 용기 없이, 용기가 있어도 그게 뭔지 잘 모른 채, 늘 속이거나 속으면서, 또 사소한 것만을 기억하며 매일 살아가지 않는가.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개인성이 사적 자아의 정원으로부터 공적 영역으로 나아가야 함을 스미스가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적 관점에 근접하는 공적 언어의 사용이 글 쓰는 자의 의무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글은 늘 자기기만이요 실패가 된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는다.
“우리 작가, 우리 비평가, 우리 독자는 얼마나 기이한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실패한 것을 쓰고, 실패한 것을 읽으며, 실패한 것을 공부하고 논평한다. 다이어트약이나 발모제나 이카루스 날개처럼, 말한 것을 못 지키는 발명품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상상해보라. 그러나 이 불완전한 문학을 나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인간적이라고 여긴다…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듯 우리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세계는 단순히 우리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 ‘실패 없이 윤리도 없다’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
스미스의 작가적 위상은 응당 작품을 본 후에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산문도 이미 어떤 크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살아있다. 느낌은 솔직하고 생각은 열려있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잊지 않으며, 나아가 이 책임은 강제된 의무로서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의 자연스러운 요구로써 거론된다. 그래서 그 글은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억누르지 않는다. 나는 어느 문장에서나 그의 존재와 목소리를 느낀다.
인간은 가장 고유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을 때, 진실의 의무도 다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스미스가 말했듯이, 글이 단순한 손작업이 아니라면, 그래서 세계 속에서 내가 행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런 글의 필자가 ‘그렇고 그런’ 사람일 수는 없다. 그는 꾸미거나 치장하지 않는다. 단정하고 확언하는 데 자족한다면, 그것은 나쁜 언어요 나쁜 문학이다. 문학은 언어적 숙련성 이상으로 사람의 전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스미스의 글은 현재라는 제약 안에서 문학이 어떻게 다른 삶-자유의 다른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글을 읽으며 나는 적어도 ‘서구에서 검증받은 작가의 크기는 어떤가’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여기 이 땅의 문학을 돌아보는 데 어떤 반성적 자료가 될 만하다. 차디 스미스는 자메이카 이민자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 난 올해 서른살의 여성이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