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수능엄경(首楞嚴經)

譯註 首楞嚴經 제 120 회(제6권 <정종분> 修道分:2. 修行眞要)

slowdream 2008. 6. 13. 15:36
 

 ㈃ 揀七大

 若以地性觀하면

 堅礙非通達이라

 有爲非聖性어늘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水性觀하면

 想念非眞實이라

 如如非覺觀이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火姓觀하면

 厭有非眞離

 非初心方便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風性觀하면

 動寂非無對이니

 對非無上覺어늘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空性觀하면

 昏鈍先非覺이라

 無覺非菩提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識性觀하면

 觀識非常住

 存心乃虛妄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諸行是無常어니

 念生元生滅이라

 因果今殊感어늘

云何獲圓通이리요


 만약 흙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단단하고 장애되어 통달함이 없고 유위(有爲)는 성스러운 성품이 아닌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물[水]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분별[想念]은 진실이 아니고, 참다운 여여(如如)는 각관(覺觀)이 아닌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불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유(有)를 싫어하는 것은 참으로 여읜 것이 아니요, 초심자에게 맞는 방편이 아니거늘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바람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상대[對]가 끊어지지 아니했으며, 상대가 있음은 최상의 깨달음이 아닌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허공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혼둔(昏鈍)은 애당초 깨달음이 아니요, 깨달음이 없는 것은 보리(菩提)의 길과 다르거늘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인식하는 성품을 관찰해 보면 관찰하려 해도 식(識)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을 붙들어 둔다는 것이 이처럼 허망한 것인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행(諸行)이 무상하니 성품을 생각하는 것도 원래 생멸이요, 수행의 인(因)과 증득의 과(果)가 지금 다르게 감득(感得)되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 選耳根 ㉠ 序已見

我今白世尊호니다

 佛出娑婆界하야

 此方眞敎體

 淸淨諸音聞이니

 欲取三摩提인댄

 實以聞中入이니다


 제가 지금 세존께 아뢰옵니다.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시어 이곳에서 설하신 진실한 가르침의 실체는 청정하게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만약 삼마제를 닦으려 한다면 참으로 듣는 것으로부터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 歎觀音

離苦得解脫하니

 良哉觀世音이며

 於恒沙劫中

 入微塵佛國하야

 得大自在力하고

 無畏施衆生하며

 妙音觀世音

 梵音觀世音

 救世悉安寧하여

出世獲常住니이다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니 훌륭하구나! 관세음이여!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수없이 오랜 겁(劫, 시간) 가운데 작은 티끌처럼 많은 불국토에 들어가서 대자재력(大自在力)을 얻고, 두려움이 없이 중생에게 베풀어 묘음(妙音)과 관세음(觀世音)과 범음(梵音)과 해조음(海潮音)으로 세상을 다 구제하여 다 편안케 하며 세상을 벗어나 영원을 얻었습니다.



 ㉢ 明眞選 Ⓐ 圓眞

我今啓如來하노니

 如觀音所說하야

 譬如人靜居

 十方俱擊鼓어든

 十處一時聞하나니

 此則圓眞實이니다


 제가 이제 부처님께 아뢰옵니다. 관음도 설명했지만, 이는 마치 사람들이 조용히 쉬고 있을 때에 시방에서 한꺼번에 북을 치면 열 곳의 소리를 일시에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원진실(圓眞實)인가 합니다.



 Ⓑ 通眞

目非觀障外하고

 口鼻亦復然하며

 身以合方知하고

 心念紛無緖이니와

 隔垣聽音響하고

 遐邇俱可聞하니

 五根所不齊하야

 是則通眞實이니다


 눈은 담장 밖의 것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도 다시 그러하며, 몸은 접촉하는 대상과 합해야 앎이 생기고, 마음과 생각은 분잡하여 단서가 없는 것이지만, 이근(耳根)은 담장에 막혀도 음향을 듣고,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으니 앞의 오근(五根)과는 같지 아니하여 이것만이 통진실(通眞實)인가 합니다.



 Ⓒ 常眞

音聲性動靜하야

 聞中爲有無이라

 無聲號無聞이나

 非實聞無性이니다

 聲無旣無滅이며

 聲有亦非生이니

 生滅二圓離일새

 是則常眞實이니다


 소리의 성품은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해서 듣는 가운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소리가 없을 때 들음도 없다고 말하나 참으로 듣는 성품은 없는 것이 아니요, 소리가 없더라도 그 성품은 없어진 것이 아니며, 소리가 있어도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생멸의 두 가지를 다 여의었기에 이것이 곧 상진실(常眞實)인가 합니다.



 縱令在夢想하여

 不爲不思無이며

 覺觀出思惟하니

 身心不能及이니다


 비록 꿈속에서 사유하지 않더라도 들음이 없지 않듯이, 이근(耳根)의 원만한 각관(覺觀)은 사유에서 벗어났으니 몸이나 마음으로는 능히 미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