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사진>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 교수 간에 열띤 논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김재성 교수가 다시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세 번째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빠알리어의 사띠(sati), 영어의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의 문제로 인경스님의 문제 제기에 대해 3번째 글을 쓰면서, 언어의 의미와 용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하고 숙고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이 용어의 우리말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는 불교학과 불교수행에 관심이 있는 불교계는 물론 이 용어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계에서도 신선하게 지켜보고 있다. 번역 용어의 선택은 의미있는 문제제기임을 확인하면서, ‘마음챙김’이 지닌 다의적인 측면을 되새기게 되었다. 토론의 장을 만들어주신 인경스님께 다시 감사드린다.
지난 1029호에서 필자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사띠’의 다양한 용례를 제시하였으며, ‘기억’, ‘상기’, ‘현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국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는 조어를 만들어 사용해 왔고,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문제없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적절한 번역어가 나온다면 필자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마음챙김’과 함께 ‘알아차림’은 그 후보 중 하나이며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논의가 사띠와 마인드풀니스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며,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직접 확인해보기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정리해본다.
인경스님이 제기한 문제의 표현은 ‘마음챙김’, ‘챙김’이라는 표현이다. 필자는 ‘마음챙김’의 ‘챙김’을 사띠의 원래 의미인 ‘대상을 놓치거나 잊지 않음’, ‘대상을 잘 포착하고 있음’으로 이해한다. 인경스님은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의 일부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환자의 증상에 해당된다. 무엇인가 결핍감을 느끼는,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허구적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적인 심리기제”라고 한다(법보신문 1026호). 이러한 해석은 ‘챙김’이라는 용어의 다의성(多義性)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지만 실제 수행을 통해 경험하지 않는 한 이러한 ‘기우’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은 받아들인다. ‘챙김’이나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번뇌로 사용되고, 환자의 증상이며, 방어적인 심리기제임을 밝히는 연구성과물이 있다면 이 용어에 대한 사용을 더 신중하게 고려해보아야겠다. 현재 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용어에 의해 그 같은 문제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챙김’이라는 용어의 다의성 때문에 ‘기우’에 빠져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난 호에서 사띠가 기억 또는 상기의 의미로 사용되는 한 예로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을 들어서 이야기했다.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Sn 151게)”에서 ‘이 (자애의) 마음챙김’은, 자애의 마음을 잊지 않고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법보신문 1029호). 이 글에 대한 인경스님은 반론으로 “위의 문장(Etam satim)은 사띠를 통해서 자애의 마음이 개발된다는 견해(Tse-fu Kuan, 2008)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법보신문 1030호). 콴 박사의 정확한 표현은 ‘자애명상을 닦는 과정에는 사띠가 포함된다(Mindfulness in Early Buddhism, p. 56)’는 것이다. 사띠가 없는 불교명상(사마타, 위빠사나)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해석은 타당하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자애를 가리켜 ‘이 사띠’라고 제시한 이유는 ‘자애(metta)’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자애를 잊지 않음(사띠)’의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항상 자애를 잊지 않고 챙김’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경우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다.
사띠(sati, 正念)와 삼빠잔나(sampajañña, 正知)의 관계에서 인경스님은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Goenka, 1999; Analāyo, 2003) 사띠와 삼빠잔나는 개별과 보편, 부분과 전체의 관계처럼 인식 대상의 범위가 서로 다르다. 삼빠잔나는 사띠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사띠와는 다르게 삶의 넓은 부분(목적, 적절성 등)에 걸쳐 관여하고(Nyanaponika, 1962), 대상의 전체적인 특성과 변화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U Sīlānanda, 2002)”라고 하였다. 삼빠잔나를 무상에 대한 이해로 보는 것은 고엔카지의 독특한 해석이다. 주석서에는 네 가지 삼빠잔나(유용성, 적절성, 대상, 무지가 없음: 각묵스님,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136쪽 이하, 우 빤디따 사야도, 위빠사나 수행의 길, 219쪽 이하)를 제시하고 있고, 냐나포니카 스님과 실라난다 스님을 포함한 위빠사나 지도자들도 그러한 주석문헌의 전통에서 해석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 일상의 행위를 삼빠잔나와 결합해서 제시할 때, 일상행위(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보고, 말하고, 침묵하고,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등의 행위)를 할 때마다 그 때 그 때 그 행위를 분명히 알고 또는 알아차리고 하라는 것이다. 네 가지 삼빠잔나를 적용시켜 이해해보자. 걷기를 명상 주제로 삼을 때, 걸음의 유용성을 알고, 지금 걸어도 좋은지 적절성을 알고, 걸으면서 걸음이라는 대상을 분명히 안다. 그러면 걸음이라는 동작에 어떤 고유한 특성(움직임 등의 특성)과 보편적인 특성(무상, 무아 등)이 있는지 무지가 없는 분명한 앎이 생긴다. 이러한 삼빠잔나에 사띠는 함께 작용하고 있다. 경전의 내용이나 실제수행에서 사띠-삼빠잔나는 새의 두 날개처럼 함께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인경스님은 ‘챙김’이 행동양식이라고 하면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각이라면, 챙김은 그 대상을 소유하여 가지는 행위이다. 먼저 알아차림의 인식이 있고, 나중에 챙김의 효과적인 행위가 뒤따른다.”라고 한다. 사띠는 마음의 행위이지만,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존재 양식(being mode)’과 반대되는 소유양식으로서의 행동 양식(doing mode)은 아니다. 하지만 사띠 자체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아라한의 경지를 제외하고는 인위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사띠를 포함한 불교의 팔정도를 번뇌에 물들지 않은 무루(無漏)의 인위적인 유위법(有爲法)이라는 초기불교 및 아비달마불교의 이해를 따르고 있다. 이 점에서는 선불교적인 이해방식과 인도불교적인 이해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1029호에서 설명하였지만, 『염처경』에 나타난 수행법인 사띠의 확립(사띠빳타나)은 아누빠사나(anuppassanā, 隨觀) 즉 ‘반복적인 또는 지속적인 관찰’로 제시된다. 사띠를 확립시키는 방법이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말이다. 『염처경』 서문에서 사띠의 확립을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삼빠잔나를 지니고(분명히 알아차리고), 사띠를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경전에 따라 정진과 사띠와 삼빠잔나를 지니고 몸 등의 대상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면, 결과적으로 대상의 생멸을 이해하는 무상의 지혜 즉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 경전과 실제 위빠사나 수행의 절차이다. 지속적인 관찰은 노력+사띠+삼빠잔나+비판단적 수용의 태도로 진행되고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서양 심리학자들이 마인드풀니스 명상이라고 할 때 이 모두가 포함되어있다. 이 때 사띠는 마음의 현존(presence of mind)로 이해한다.
인경스님은 “‘그는 마음챙겨(sato)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는 말을 ‘마음의 챙김’이 먼저 있고, 그런 다음에 ‘숨을 들이쉰다’는 의미로서, ‘호흡’ 챙김이 아니라 ‘마음’챙김 하는 내용이다.”고 하면서 명상주제는 몸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되어 몸과 마음의 범주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챙기며(sato)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는 말을 시간적 차이가 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구절은 ‘마음챙겨 호흡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범주 오류가 생기지 않는다. 실제 수행에서도 이런 범주 오류를 범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마음챙김’을 사용할 때 이와 같은 오해가 없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적으로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지나친 우려라는 생각이 든다.
인경스님은 “사띠를 챙김으로 번역하면, 결국 “챙기라! 챙기라!”는 말을 자주할 수밖에 없다.…호흡을 챙기면 챙길수록 더욱 숨이 막히고, 마음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호흡을 챙기려는 능동적인 의지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고 하였지만, ‘호흡을 챙기다’는 말을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라고 이해하고, ‘자연스런 호흡에 마음챙김하라’고 하면 이러한 부작용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능동적 의지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써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사띠의 힘이 약한 초보자들은 사띠의 대상을 잘 놓치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긴장과 불안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과 불안은 한 두 번의 면담을 통해서 바로 해소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경스님이 말하는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적어도 사띠에 근거를 둔 위빠사나 수행에는 적절하지 않은 정의이다.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참여와 힘찬 노력이 필요하다(『마음챙김과 심리치료』, 47쪽). 우리는 현재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노력하며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하며 수행을 한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우리의 명상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진행된다. ‘본래 부족함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명상의 결과 얻어지는 마지막 경지이다.
출처 법보신문 1031호 [2010년 01월 08일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