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사진>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 교수 간에 논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인경 스님이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네 번째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필자가 문제를 제기한 부분은 불교명상의 사띠와 심리치료의 마인드풀니스는 동일한 용어가 아니며, 이들을 ‘마음챙김’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챙기는 것이 명상인가? 마음을 챙긴다하는데, 과연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을 챙길 수가 있는가? 우리 사회가 온통 챙기라고 아우성인데, 우리까지 이 용어를 꼭 사용하여야 하는가?’ 묻게 된 것이다. 물론 김재성 교수의 명상수행과 학문적인 열정을 문제 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점은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첫째로, 먼저 빠알리어 ‘사띠’와 한글 ‘챙김’이란 용어의 의미는 동일한 개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챙김의 의미는 ‘서류를 챙긴다’는 실례에서 보듯이, 서류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사띠의 의미가 아니다. 챙김은 책상위의 사물로서 서류를 빠뜨리지 않고 소유하여 가진다는 의미이다. 나아가서 ‘네가 직접 (그것을) 챙겨라.’라고 할 때도 일과 사람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는 사띠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챙김이란 구체적인 행위로서 그것들을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띠는 기억과 상기와 같은 인지적인 측면을 말한다면, 챙김은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대상을 가져지니는 소유행위이다. 먼저 인지가 있고, 그런 다음에 행위가 뒤따른다. 사띠와 챙김은 서로 전혀 다른 용어이다.
둘째는 『숫타니파타』의 151게송에서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는 문장의 해석이다. 다른 경전적 사례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게송을 계속 고집하는 것 같다. 반복하지만, 이 게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굳게 지님의 대상은 사띠(목적격)이고 자애의 마음이지, 사띠의 의미가 굳게 지님이나 챙김임을 나타내는 게송은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자애와 사띠는 동일한 유형이 아닌, 서로 다른 독립된 수행체계로 설해지고 있다. 『숫타니파타』151게송은 사띠와 자애심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곧 ‘자애심의 개발에 사띠가 포함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자애의 마음은 사마타나 위빠사나에 의해서 개발되지만, 또한 사띠를 통해서도 자애의 마음이 개발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정확하다. 『숫타니파타』의 전체적 문맥을 보면, 먼저 애욕에서의 떠남을 말했고, 그 다음에 자애심을 설하고 있다. 왜냐면 애욕으로부터 떠남이 선행되지 않으면 자애심은 발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151게송의 실제적인 내용은 “애욕이 일어나면 곧 이것을 알아차리고, ‘걷거나 눕거나 깨어있는 한에서 이 알아차림를 굳게 지녀라.’ 그러면 자애의 마음이 개발된다”는 의미이다. 만약에 여기서 ‘알아차림’ 대신 ‘마음챙김’으로 바꾸어서 번역하면, ‘이 마음챙김을 굳게 지녀라’가 된다. 이것은 챙김과 지님이 중첩되고, 무슨 뜻인지 독자를 헷갈리게 한다. 더구나 친절과 사랑은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긍정적인 정서로서, 인위적으로 챙겨서 가져지닐 소유의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사띠가 아닌 한글의 마음챙김이란 신조어로는 자애명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셋째는 『염처경』의 ‘그는 마음챙겨(sato)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라는 문장의 해석 역시 문제가 된다. 이것은 호흡명상을 말하는 대목으로, 『염처경』의 전체적인 이해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장이다. 여기서 필자의 견해에 대해서 ‘시간적인 차이를 두는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sato는 문법적으로는 과거분사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띠를 신조어의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게 되면, 마음을 챙기는 일이 먼저 있고, 그런 다음에 들숨과 날숨이 있게 된다. 그래서 이 문장은 호흡에 관한 사띠가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마음에 관한 사띠로 본래적 의미가 변질된다.
이것은 명백하게 몸과 마음의 영역을 뒤섞는 범주의 오류이다. 김 교수는 실제 수행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데, 초기불교 수행은 철저하게 경전의 교설에 바탕을 두고 그 이해를 출발점으로 하여 수행이 시작된다. 그래서 경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절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잘못된 이해는 곧 잘못된 수행으로 연결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삼빠잔나의 해석이다. 김 교수는 삼빠잔나가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한다는 이해는 고엔카의 독특한 견해라고 가볍게 치부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지난 호에서 삼빠잔나가 ‘개별보다는 보편적인 특성[無常], 혹은 부분보다는 전체성에 대한 이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고엔카 개인뿐만 아니라, 아나라요 스님, 냐나포니카 스님, 실라난다 스님의 이해방식을 제시한 바가 있다. 하지만 우 빤디따 사야도의 경우는 제시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 빤디따 사야도께서는 홍원사에서 2005년에 개최된 학술회의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하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종합토론 사회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스님께서는 삼빠잔나에 대해서 “동물인 개도 자기가 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빠자나티(삼빠자나와 동일의미)는 단순하게 가는 것을 안다는 의미보다는 위빠사나의 분명한 앎을 의미합니다. 가는 동작 하나를 보면서 무상, 고, 무아라는 다양한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위빠사나의 분명한 앎을 의미합니다.”고 말하고 있다. 나중에 이런 내용을 통역자와 함께 정리하여 논문집(『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 2005, p.255)의 부록에 게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김 교수 본인이었다. 삼빠잔나를 무상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에 대한 분명한 앎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고엔카의 개인적인 독특한 이해가 아니고, 남방불교의 전통적 해석이라는 점이다. 국내 몇몇 전공자들이 삼빠잔나를 단순하게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마음챙김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오역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문제제기한 부분으로, 심리치료적 측면에서 마인드풀니스의 이해이다. 물론 심리치료자들이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의 의미가 사띠를 포함하지만, 오히려 위빠사나에 상응하는 개념이며, 특히 DBT(변증법적 행동치료)와 ACT(수용 및 전념치료)에서는 선(禪)의 관점을 포괄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마인드풀니스(단순하게 사띠의 번역어가 아님)를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포괄적 의미의 ‘명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명상기술이 어떻게 심리치료에 활용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에 등장한 제1세대의 행동치료(Behavior therapy), 1970년대에 우울증 치료를 위해서 생겨난 제2세대의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 1990년대 이후에 동양적 가치를 통합한 제3세대의 명상치료(Mindfulness therapy)로 전개되는 역사적인 과정(Hayes, 2002)을 간단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고통을 받는 내담자가 여기에 있다고 하자. 행동치료는 불안을 자극과 반응에 의한 조건화된 학습의 결과로 본다. 그래서 그 처치로서 선행하는 자극을 노출시키고 불안에 대한 반응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체계적 둔감법을 사용한다. 반면에 인지치료는 우울이란 감정은 역기능적인 사고작용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 처치로 불안 정서를 재생산해 내는 자동사고와 신념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논박이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등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치료과정에는 공통적으로 불안과 우울은 건강하지 못한 마음상태로서, 통제하고 없애야 한다는 암묵적인 의료적 전제가 있다. 부정적 정서를 억압하거나 회피행동을 하는 내담자뿐만 아니라, DSMⅣ(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4판, 1994)의 관점을 가진 치료자도 마찬가지다.(Ciarrochi & Bailey, 2008) 이들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을 통제하고 제거해야할 대상이라는 기계론적인 관점을 취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오히려 우울증을 재발시키며(Segal 등, 2002) 불안을 역설적으로 강화시킨다(Eifert & Forsyth, 2003)는 많은 연구보고서가 나왔다. 그러면서 새로운 대안으로서 동양적 불교명상이 도입된 명상치료가 대두된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명상의 어떤 요소가 이들 심리치료자에게 대안이 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거리를 두는 ‘내려놓음’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수용’이다. ‘내려놓음’은 우울과 불안의 감정이 일어나면 단지 알아차려서 한 걸음 물러나는 관조적인 태도를 말한다. ‘수용’은 그런 감정들을 온전하게 존재하는 그대로 허용하여 그것들이 지나갈 것임을 ‘분명한 앎’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건강함이란 걱정과 불안이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려는 ‘인위적인 행위[有爲法]’를 내려놓은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서구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건강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관점 자체가 바뀐 것이다.
‘삶이란 고통이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고통을 제거하라’거나 ‘부족함이 있으니 챙겨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고통이 있는 삶을 그 자체로 ‘기꺼이 받아들이라(Kabat-Zinn, 2005)’는 말이다.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선(禪)의 관점처럼(Linehan, 2004), 불안과 우울은 우리의 건강[本性]에 근본적으로 어떤 손상도 주지 못함을 분명하게 알기에, 그것을 제거하거나 챙기려는 조작, 노력을 하지 않는다. 평상심은 그 자체로 본래 부족함이 없는 온전함이다.
김 교수는 현재 ‘부족하기에’ 마음챙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명상치료자는 부족함의 증상을 열거하는 DSMⅣ가 아닌, 삶의 온전함이란 관점에서 내담자의 내적 현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보면, 어떤 특정한 마음을 지키고 챙기는 ‘인위적인 수행’은 자발적인 자애의 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자애의 마음을 방해하는 장애가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챙길 수 없는 대상(몸, 느낌, 마음, 현상)을 챙기려는 헛된 노력이고, 결국 존재하지 않는 대상[法]과 그것을 챙기려는 허구의 마음[我]을 설정한다. 필자는 이것을 부족감에서 비롯된 방어적인 심리기제라고 본다. 필연적으로 챙김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과 조작적인 의지가 개입된다. 이것은 불안과 우울을 재생산하는 현대 자본사회의 소유방식과 상통한 것으로, 대상 자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여 온전함을 드러내는 동양적 명상이 결코 아니다.
출처 법보신문 1032호 [2010년 01월 14일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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