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사띠’의 번역과 풀이를 둘러싸고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과 김재성 서울대학원대 교수가 열띤 지상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자비선 명상센타 지도법사 지운 스님이 이에 대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지운 스님은 송광사·동화사 강주와 조계종 교재 편찬위원 등을 역임한 학승으로 『찻잔 속에 달이 뜨네』 『몸과 마음이 사라져가는 여행』 『깨달음으로 가는 길』 등 저서가 있다. 편집자
요즈음, 심리치료의 용어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사례들이 많다. 마인드풀니스는 또한 사띠(sati, 念)에서 유래된 번역어이다. 이와 관련해서 문제점을 제기한 인경 스님과 반론을 제기한 김재성 교수의 대론으로 불교계가 뜨겁다. 특히 수행자들은 관심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사띠의 한역은 정념이다. 정념에 대해 『대승기신론』에서는 밖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정념에 머물게 하면 적정에 들어간다고 하며, 『원각경』에서는 몸과 마음의 번뇌를 정념으로 제거한다고 하며, 『원각경 함허해』에서 함허 선사는 수행자는 정념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기불교부터 대승에 이르기까지 사띠는 중요한 수행의 수단이다.
사띠에 대해 인경 스님은 ‘마음챙김’은 소유한다는 의미로 보고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진 용어이며 정체불명의 명상 술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김재성 교수는 ‘마음챙김’은 ‘알아차림’과 마찬가지로 번뇌를 막아내고 없애는 역할을 하는 마음작용이지 번뇌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마음챙김’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위빠사나 수행 경험으로나 수행지도 경험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자기 관리나 통제’의 의미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의 견해로는 사띠의 해석에 있어서 서로 간에 일정 부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사띠는 『청정도론』에 의하면 기억, 혹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대상과 직면함’으로 혹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한역에서는 사띠를 정념(正念)으로 번역하는데 정념은 ‘바른 기억’으로 번역된다. 기억은 이미 경험한 것을 밝게 기억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청정도론』에서와 같이 염(念)에는 첫째 기억, 불망(不忘). 둘째는 ‘앎’의 뜻이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마음챙김’의 의미가 ‘소유’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단지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하는’이란 뜻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의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소유’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
김재성 교수는 사띠를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마음을 챙기다’ 또는 ‘마음이 대상을 챙기다’라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면서, ‘마음챙김’을 ‘마음으로 현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대상을 마음이 챙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면 변하지 않는 고정된 대상을 챙긴다고 했을 때는 맞지만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는 뜻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사마타의 대상을 기억하여 놓치지 않고 지속시키는 데는 ‘마음이 대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챙기다’라는 뜻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대상 즉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하는 대상을 포착한다’는 뜻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는 뜻이다. 챙길 때는 이미 대상이 순간 변해버리고 난 뒤이기 때문이다. ‘챙긴다’는 말은 필자에게는 매우 둔탁한 느낌이다.
신·수·심·법(身受心法)은 관찰 대상이다. 따라서 신수심법에 대한 마음챙김보다는 대상챙김이 더 타당하게 보인다. 신수심법을 ‘마음이 챙긴다’는 뜻의 ‘마음챙김’은 챙긴다는 말속에 이미 ‘마음’이 들어가 있다. 때문에 신수심법이라는 관찰대상을 챙긴다는 뜻으로 ‘대상챙김’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신수심법의 매순간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챙긴다’는 것보다는 ‘알아차림’이 더 타당해 보인다.
또 ‘마음을 챙기다’는 뜻을 살펴보면 ‘마음을 챙길 때’, 김재성 교수는 ‘우리는 순간순간 경험의 영역에 나타나는 대상에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심리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번뇌의 침입에서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마음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물론 마음의 보호라는 뜻도 사띠에는 있다(『청정도론』).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한다.’는 것은 ‘대상을 놓치지 않고 챙길 때’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어져 마음이 번뇌로부터 보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의 변화란 인연의 변화이므로 인연의 변화를 ‘챙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사띠를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챙김’은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진다, 지닌다는 뜻이므로 기억의 의미 불망의 의미에 가깝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대상을 ‘챙긴다’는 말은 대상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대상에 깊이 들어간다.’는 말은 ‘관찰대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챙긴다’와 ‘깊이 들어간다’라는 것은 서로 어감이 다르고 뜻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기억된 앎이 주축이 되면 인연의 흐름에 어둡게 된다. 인연의 변화를 알아차려야만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즉 일어남과 사라짐의 변화에는 고정된 실체 없음과 자아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마음챙김’은 사마타의 ‘대상을 잃지 않고 기억하여 지닌다.’는 뜻으로 사마타 수행에 적합한 용어이다. 또 마음을 보호한다는 점에서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대상을 사띠할 때 그 사띠에 대해 ‘마음챙김’한다는 것보다는 ‘알아차림’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또 김재성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사띠는 두 가지 용어 중에 ‘챙기다’에 가깝고, 삼빠잔나는 ‘알아차리다’에 가깝다.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포착함’이라는 의미로 ‘마음챙김’을 이해하며, ‘마음챙겨서 알아차린 것, ‘알게 된 것’은 정지(正知)로서 ‘알아차림’이라 이해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띠에는 ‘기억’의 뜻 말고도 ‘앎’의 뜻이 있다. 대상을 기억한다는 자체가 앎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띠에는 바로 앎이 있는 것이다.
한역 『염처경』에 의하면 “어떤 것을 몸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다니면 다니는 줄 알고, 머무르면 머무는 줄 알며, 앉으면 앉는 줄 알고, 누우면 눕는 줄 알며, 자면 자는 줄 알고, 깨면 깨는 줄 알며, 자다 깨면 자다 깨는 줄 안다.”라고 하여 사띠를 앎으로 표시하고 있다. ‘알아’는 앎이며 ‘차림’은 대상에 대한 ‘정신이 듦’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알아차림은 대상을 기억하고 알기는 알되 판단작용이 없이 단지 아는 것뿐이다. 그러나 삼빠잔나(sampajañña)는 바른 앎(正知), 즉 지혜를 말한다. 지혜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아는 것을 말한다. 몸과 마음을 무상으로 바르게 보고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바른 앎’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인경 스님은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김 재성 교수는 “우리는 현재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노력하며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하며 수행을 한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우리의 명상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진행된다.”라고 주장한다.
사띠는 행온에 연결된다. 행온에 대해 『청정도론』에 의하면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있는 것 모두를 의도 작용 무더기라고 안다”라고 말하였다.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수행이며 사띠의 성격이라 말하기도 한다. 즉 대상을 사띠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이다. 하지만 대상을 사띠하는 내용은 곧 대상에 대하여 느끼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감정, 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다른 것과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에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필자도 일선에서 자비선(慈悲禪)을 지도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사띠에 대한 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띠에 대한 필자의 견해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이제는 수행에 관련되는 용어에 관하여 학자와 수행자들의 많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사띠에 대한 바른 견해, 바른 번역도 이루어질 때가 되었다고 본다. 사띠에 관한 가장 적절한 번역이 수행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띠에 관한 보다 좋은 의견으로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기를 바란다.
출처 법보신문 1033호 [2010년 01월 22일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