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장자(莊子)

slowdream 2010. 4. 26. 00:38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장자(莊子)
“자유와 해탈 얻으려면 비우고 다만 흘러가라”
기사등록일 [2008년 04월 07일 14:22 월요일]
 

 

필자가 몇 년 전에 현암사를 통해 펴낸 『장자』 풀이 첫머리에 이런 말을 썼다.
“캐나다에 와 살면서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는 이곳 서양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장자』를 접한 이후, 그리고 지금껏 이곳 캐나다 대학생들과 『장자』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가 가장 맛있는 음식이듯이 한마디로 『장자』는 저에게 가장 신나는 책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운명적 해후’인 듯합니다.”

 

사실 『장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중국 고전 번역가로 유명한 웨일리(Arthur Waley)는 장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하고,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일본인 선사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도 장자가 중국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 했다. 그 외에도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로 알려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유대인으로 세계적 철학자로 꼽히는 마틴 부버(Martin Buber),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마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하버드 대학교 세계종교 연구소 소장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등 많은 사람들이 장자에 매료되었다고 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장자의 사상은, 불교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중 중국 당(唐) 대에 와서 선불교(禪佛敎)를 꽃피우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9세기 유명한 선승 임제(臨濟)야말로 장자의 참된 계승자라 일컬어질 정도이다. 선불교는 사실 인도 불교를 아버지로 하고, 중국 도가 사상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후예라 해도 무관할 정도로 도가 사상, 특히 장자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오늘은 장자와 그와 그의 후학들이 남긴 『장자』에 대해 알아본다.

 

장자의 생존연대를 보통 서력기원전 369~286년으로 본다. 이 연대를 받아들인다면 맹자(371-289)와 같은 때 사람이다. 그러나 장자도 맹자를 몰랐던 것 같고, 맹자도 장자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의 책에는 상대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장자는 전국(戰國) 시대 송(宋)나라 옻나무 밭에서 일했다고 한다.

 

‘장자’는 그가 남긴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원후 4세기 곽상(郭象)이라는 사람이 그때까지 떠돌아다니던 사본을 모아 32편으로 정리했는데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자』라는 책으로서 내편(內篇)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내편 7편만 장자의 글이고 나머지는 장자의 후학들이 장자의 이름으로 덧붙인 것이라고 본다. 내편마저도 모두가 장자 자신의 저작인가 하는 것도 모를 일이고, 심지어 그것이 『도덕경』보다 미리 기록된 것이 아닌가 보는 설까지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거기 실린 사상이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훈적인 가르침이 거의 없다.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데 반하여 『장자』는 거의 전부가 이야기로 되어 있어 읽는 이가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게 필요한 깨우침을 얻도록 되어 있다. 사실 장자는 무엇을 가르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고정관념, 이분법적 사고방식, 거기에 기초한 인습적 세계관이나 종교관의 내적 모순을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스스로 타파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러나 『장자』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몇 가지 주제를 잡아보라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도는 『도덕경』에 나오는 도의 개념과 기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도는 우주의 초월적인 궁극 실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만물 속에 내재하는 존재의 근원이기도 하다. 도는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심지어 배설물 속에도 있어 그야말로 “없는 데가 없다”고 했다. 이런 사상을 요즘 말로 고치면 궁극실재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라 할 수 있다.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라는 제목이 붙은 제1편 첫머리는 북쪽 깊은 바다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가 변해 그 등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붕(鵬)이라는 새가 되고, 그 붕새가 구만리나 되는 하늘 길에 올랐다(鵬程)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실존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실현한 사례를 말해주는 상징으로 장자의 전체 사상을 집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장자는 어느 면에서 인간 해방과 거기에 따르는 자유를 선언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장자에게 있어서 행복은 우리에게 주어진 천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학의 다리가 길면 거기 맞추어 긴대로 살고, 오리의 다리가 짧으면 거기 맞추어 짧은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다. 학의 다리를 짧게 하려 하거나 오리의 다리를 길게 하려고 무리한 일을 하면 불행이 따른다는 것이다. 바다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새를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그 새를 위해 술과 음악과 소고기 등으로 대접했지만 그 새는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새는 새 나름대로의 천성을 따를 때만 행복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모든 정치 제도나 법률, 도덕 같은 것도 기본적으로 모두 인위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배격했다.

 

장자는 우리가 어느 면에서 모두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왜곡되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원숭이’ 같다는 것이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다가 지금부터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화를 내었다. 이른바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것이다. 사물을 양쪽으로 볼 수 있는 ‘양행’(兩行)의 길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사물의 양면, 사물을 여러 가지 시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인습적 시각에서 일면만을 보고 그것을 절대화하므로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희비하거나 거기에 목숨을 건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비의 꿈’이라는 장자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비와 장자 사이에 거침이 없이 넘나드는 유동적 변화의 장이라는 것이다. 다각적 시각에서 봄으로 가늠할 수 있는 사물의 진실을 더욱 깊이 볼 때 그만큼 더욱 자유스러워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사물을 더욱 깊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결국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인습적인 이분법적 의식(意識)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을 바꾸는 방법의 한 가지 예가 바로 ‘술(術)’이 아니라 ‘도(道)’로 소의 각을 뜨기에 눈을 감고 ‘신이 나는 대로’ 해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포정(?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런 의식의 변화가 생기면 ‘아침 햇살 같은 밝음’(朝撤)을 얻어 ‘하나를 보는’(見獨)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자가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마음 굶김’(心齋), ‘나를 여읨’(吾喪我), ‘앉아서 잊어버림’(坐忘) 등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적인 이분법적 의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하는 이야기들인 셈이다. 이 점에서 장자와 선(禪) 불교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가 있게 되면 죽음과 삶마저도 초월하게 된다. 장자 스스로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 것과 같다. 이를 보고 놀라는 친구에게 자기도 물론 슬펐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죽음은 사계절의 바뀜과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봐야 공연한 일, 사물의 실재를 직관함으로 죽음과 삶이 두 가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 면일 뿐임을 알게 됐기에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죽음을 극복한 셈이다. 안명(安命)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amor fati’(숙명을 사랑함)를 연상하게 한다.

 

장자가 사회나 정치에 상관없이 살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사회를 등지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가 있기 전에 사회를 위해 일한다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공자의 제자 안회가 위나라 백성들이 독재자의 폭정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 가서 그들을 도울 마음이 있으니 그곳에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자는 안 된다고 했다. 학식과 예의와 용기 등 모든 것을 갖춘 안회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다. 안회는 도대체 무엇을 더 갖추어야 하는가 물었는데 공자는 ‘마음을 굶겨야 한다’고 일러준다. 마음을 굶기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소아(小我)가 사라지고 대아(大我)가 등장하는 것이다. 옛날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갖추어진 사람이야말로 사회를 위해 일을 하더라도 진정으로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자』에 나오는 ‘빈 배’ 이야기를 인용하고 끝맺는다. “누가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하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보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우리를 해하겠습니까?”

(『장자』의 우리말 번역과 자세한 해설을 위해 필자의 『장자: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현암사, 1999)을 참조할 수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44호 [2008년 04월 07일 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