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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 61. 남전의 평상심시도

slowdream 2010. 7. 5. 16:39

[선문답 산책] 61. 남전의 평상심시도
평상심은 허공처럼 확 터져있는 마음
道란 현존하면서 규정되지 않는 생명
기사등록일 [2010년 06월 29일 15:18 화요일]
 

어느날 조주가 남전화상에게 도가 무엇인지를 묻자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라고 답했다. 조주는 다시 “그곳에로 다시 애써 나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곳에로 나아가려 애쓰는 즉시 곧 어긋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주는 “나아가고자 애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남전은 “도는 앎에도 속하지 않고, 알지 못함에도 속하지 않는다. 앎은 잘못된 깨달음이요, 알지 못함은 무기이다. 만약에 참으로 의심이 없는 도에 이른다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고 확연하게 툭 터져있다. 어찌 억지로 시비를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말에 조주는 문득 깨달았다.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道)’라는 말은 중국 선종, 그것도 조사선을 대표하는 언구이다. 하지만 이 언구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특히 성리학작자들은 의도적으로 이 언구를 왜곡하였다. 일상에서 거짓말하고 악행을 저지른 마음도 그대로 도란 말인가? 어떻게 평상의 번뇌가 도가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아무런 노력도 없이 도에 이를 수가 있단 말이냐? 조선시대에는 이런 비난과 더불어서 혹독한 불교탄압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문답은 매우 명료하고 왜곡시킬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 문답에서 말하는 도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도란 허공과 같아서 확연하게 확 눈앞이 뚫린 마음(廓然洞豁)이다. 무엇에 의해서 물들지 않는 채로 고요한 가운데 청정하면서 밝게 깨어있다. 이것이 바로 평상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선과 악의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초월된 마음이고, 세간을 초탈한 본성, 불성을 말함이다. 결코 세속적인 마음이 아니다. 그러나 평상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이 지금여기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밥 먹고 세수하고 걷는 현재에 하는 일상의 활동과 전혀 다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인 까닭에 평상심시도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그렇지만 이 마음은 앎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도는 어떤 대상을 인식하여 안다는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의 개념적인 이해는 일종의 지식이다. 밝게 깨어있음은 언어적인 개념에 의한 사유도, 지적인 앎도 결코 아니다. 이것은 확연하게 내게 드러나는 행위이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재의 경험이다. 이 경험은 언어적인 판단의 이전에 존재하였고, 개념화된 지식과는 전혀 무관한 현존이다. 물론 남전화상과 조주의 문답이 보여주듯이 앎은 도의 현존에로 이끄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언어적이 이해, 개념적 지식이 그대로 현존일수는 없다.

 

셋째, 도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인위적인 노력은 애착이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게 된다. 행위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시장으로 가는 걷는 행위는 물건을 구매하기 위함이다. 걷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다. 분명하게 다른 목적에 봉사한다. 도란 가는 길 자체로서 작용한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필요하지만 인위적인 노력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방해한다. 진리는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진리가 내게로 닥쳐오는 것이다.

 

넷째, 도란 지금 여기의 현존이다. 이것은 규정되지 않는 생명이다. 규정하는 순간에 이것은 소멸되는 매우 조심스런 ‘처음마음’이다. 익숙하여진, 숙달된, 정해진 어떤 패턴이나 형식이 아니다. 이것은 이런 형식을 깨뜨림으로서 드러난 날개짓이다. 도란 자유이고 해탈이다. 봄에는 새가 울고, 여름에는 무덥고, 가을엔 꽃보다 붉은 낙엽이 있고, 겨울에 설설 눈이 날린다. 다시 무엇이 부족하여 시비하겠는가?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4호 [2010년 06월 29일 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