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풍혈화상에게 질문을 하였다.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리(離)와 징(徵)을 범하는데 어떻게 해야 범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풍혈화상은 말하였다. “참 그립구나, 강남의 삼월이여! 자고새가 우는 곳에 온갖 꽃이 만발하였네.”
풍혈화상(896~973)은 송초 임제종의 승려로서 4대 법손에 해당된다. 여기서 리징(離徵)이 핵심구절이다. ‘떠날 리(離)’는 번뇌로부터 멀리 떠남을 말한다면, ‘거둘 징(徵)’은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들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이 두 가지를 잘 사용해야 한다. 집착하여 그로 인해 고통이 심하면, 번뇌에서 벗어나 떠나야 한다. 또한 마음이 너무 외계의 대상에 끌려가면 이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離)와 징(徵)은 명상의 기술이고, 모두 필요한 마음의 운영방식이다. 리(離)는 의식이 밖으로 향한 반면에 징(徵)은 내면으로 향한다. 진리를 말하게 되면 그것은 집착이 되어 밖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다고 침묵한다면 그것은 안으로 무기에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안으로나 밖으로나 떨어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질문의 요점이다. 곧 말과 침묵, 리(離)와 징(徵)은 양극단이다. 이것의 중도는 무엇일까?
중도(中道). 얼마나 많이 들어본 용어인가? 중도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에서 설하신 불교의 핵심교설이다.
“비구들이여. 양극단을 가지 말라. 무엇이 두 극단인가? 하나는 쾌락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고행의 길이다. 나는 이 어느 쪽에서도 열반을 얻지 못했고, 지혜를 성취하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양극단을 가지 말고 중도의 길을 가라.”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이론적인 철학이기보다는 실제로 손수 절실하게 체득한 심리적인 진실이다. 왕자로서 궁전에서 쾌락의 길을 걸었고, 출가한 이후에는 고행의 길을 몸소 걸었다. 그러나 이 두 길에서 어느 쪽에서도 궁극적인 진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현실의 연기를 여실하게 관찰하고 사물의 진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이다. 이것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이런 불교의 가르침은 선종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문답이다. 말과 침묵, 떠남과 돌아옴, 이런 종류의 문답은 풍혈화상의 경우에 다른 공안에서도 엿보인다. 영주의 관가에서 법문을 하면서 풍혈화상은 대중에게 물었다.
“조사의 마음도장[心印]은 무쇠소 뿔처럼 생겼다. 도장을 떼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요, 찍으면 그것이 무너진다. 찍어야 옳을까? 찍지 않아야 옳을까?”
일상에서 도장을 찍으면 계약이 성립된다. 하지만 이런 계약은 결국은 집착이 되고 번거로운 일이 된다. 그렇다면 마음의 도장을 찍지 않으면 계약이 성립되지 않아서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양극단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풍혈화상은 이렇게 노래한다.
“참 그립구나. 강남의 삼월이여! 자고새가 우는 곳에 온갖 꽃이 만발하였네.”
그렇다. 양극단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중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삼월엔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있지 않는가? 여름엔 덥지만 소낙비가 있지 않는가? 가을엔 멋진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 눈발이 날리지 않는가? 이것으로 족하지 않는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8호 [2010년 08월 02일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