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화상은 세 가지의 관문(三關)을 시설하여 학인들을 점검하였다. 첫째는 선지식을 직접 발로 찾아가 참문하는 것은 단지 본성을 보기(見性) 위함이다. 지금 그대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둘째는 문득 자성을 알았다면 생사로부터 해탈할 수가 있다. 안광(眼光)이 떨어질 때(죽음에 임박하여) 어떻게 생사에서 벗어나는가? 셋째는 문득 가는 곳을 알 것이다. 사대(四大)가 분리되면 그대는 어디로 향하여 가는가?
여기 도솔화상의 세 개의 관문은 서로 다른 내용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내용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다. 그것은 바로 생멸의 본성을 보는 견성(見性)이다. 견성은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이란 바로 생멸을 말한다.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존재하는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보는 것이 바로 견성이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진다. 여기에 어떤 차별도 없다. 때가 되면 나뭇잎은 노랑, 빨강으로 물들다가 바람에 떨어진다. 여기에는 분별심이 없다. 그대로 존재하는 여실한 모습이다. 그 자체로 문제가 없는 여여(如如)함이다.
그런데 도솔화상은 ‘그대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본성은 바람에 낙엽이 떨어짐이다. 바람과 낙엽과 떨어짐의 맥락에서 벗어난 본성이란 따로 없다. 이런 맥락을 떠나서 본성의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분별심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본성은 어디에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본성은 바로 연기적 맥락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언어적인 분별을 피할 길이 없다.
둘째로 안광이 떨어질 때 생사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죽음의 순간에 생사를 벗어날 수가 있을까? 생사란 발생과 소멸이다. 발생이란 탄생이요, 소멸이란 죽음이다. 탄생과 죽음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 생사를 벗어난 그 무엇이 있을까? 생멸을 벗어난 그 무엇을 갈망한다면 그것은 상견(常見)이다. 반대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집착하면 이것은 단견(斷見)이다.
그런데 상견과 단견은 논리적인 유무(有無)의 판단이다. 판단은 단지 언어적인 개념으로서 토끼뿔처럼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마찬가지로 생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태어남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이것들은 모두 분별이 아닌가? 언어적인 분별이니, 생사는 모두 토끼뿔이다.
셋째로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사대로 분리되면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아침에 가스불을 사용한다. 가스불을 켜고 아침밥을 짓는다. 그런 다음에 가스불을 끈다. 이때 가스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사람은 천당으로 갔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모두 어린 시절에 동화책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가스불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면 질문이 잘못 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스불은 어디에서 왔다거나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에 의해서 왔다가 인연이 다하여 갔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간다면, 변화되지 않는 어떤 실체를 다시 상정하고, 이것은 바로 상견에 대한 집착의 결과로서 존재의 실상이 아니라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그러니 활구는 바로 지금 여기이다. 단지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아침에 세수하듯이 분명하고 분명하다. 바로 숨 쉬는 코끝 앞에서.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8호 [2010년 10월 18일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