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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자본주의 모순과 대안으로서 불교-1

slowdream 2011. 12. 6. 16:23

9. 자본주의 모순과 대안으로서 불교-1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관계로 인식
물질은 풍요롭지만 고독과 불안감 증대
 

비약엔 늘 대가가 따른다.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모순의 근저에 비약으로 인한 문화지체(cultural lag)가 자리한다. 한국사회는 서양에서 300년이 넘게 걸렸던 자본주의화와 근대화를 수십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룩하였다. 이로 한국사회는, 몸은 성인으로 성장하였는데 정신은 아직 유아에 머물고 있는 아이처럼, 물리적인 환경은 발전하였는데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가 아직 정립되지 못해서 생기는 문화지체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근대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합리성(rationality)인데, 세계 10위권에 이르는 경제대국인 한국에서 기업은 물론 대학과 시민단체에서조차 학연, 지연, 혈연이 권력을 행사할 정도로 전근대적이다. 포스트모던을 말하기 전에 근대성을 완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취지로 불교가 자본주의와 동거할 수 있는 정당성의 기반을 먼저 탐색하였다.


산업사회의 토대를 다지는 가운데 IT, NT 등 디지털 사회에 맞는 첨단산업을 발전시켜야 21세기에 건실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처럼, 근대성을 완성하는 가운데 근대성의 모순극복으로서 탈근대를 모색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과제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이 있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 또한 시대적 과제이다. 그럼 그 모순은 무엇이고, 불교의 어떤 면이 대안으로서 유용할 것인가.


자본주의는 소외를 심화한다. 이는 대략 세 가지, 곧 노동의 소외, 자기로부터 소외, 인간 및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다. 이 체제에서 세계개조 및 자아실현으로서 노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본은 노동력을 구매하여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잉여가치만큼 이윤을 확보하여 이를 자본으로 축적한다. 노동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포드시스템 속에서 한 부품을 조립하는 노동자는 컨베이어 벨트에 딸린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 장애를 극복하는 주체, 다른 노동자와 소통하는 인간은 없다.


자신을 청렴한 선생, 기자, 공무원으로 여기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문득 촌지나 뇌물을 받고 이를 관례로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얼마나 낯설까. 정도 차이일 뿐이지 우리는 이 체제 안에서 모두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소외된다. 개인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선한 자마저 타락시킨다. 이 체제 속에서 누구나 자기를 상실하기에, 자기조차 낯선 타인이다.


젊은 날의 숱한 추억이 어리고 여러 의미있는 글을 쓴 역사가 담긴 만년필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지만, 그를 백화점에 가서 명품 가방과 바꾸려 한다면 점원은 나를 미친놈으로 알 것이다. 자본주의는 교환가치를 우선시하면서 모든 것을 물질로, 돈으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물화(物化)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배우자를 고를 때조차 그의 교환가치를 따지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 타인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며 나 스스로도 인간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니 이 체제 속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모두가 고독하고 늘 불안하고 낯선 타인들이다.


자본주의의 기업은 올해 100을 생산하였다면 내년에는 최소한 103 정도는 생산하여야 망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며, 자본은 무한하게 이윤을 증식하려 한다. 자본의 증식은 탐욕을 확대하고 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로 나타난다.

 

▲이도흠 교수

아울러 자본은 시장에서 많은 상품을 팔아야 하기에 소비를 진작하려 광고와 매스미디어를 이용하여 대중의 욕망을 조장한다. 결국, 자본의 과도한 탐욕에 노동자는 산업예비군, 곧 실업자로 전락하고 자연은 무참히 파괴당한다. 대중은 더욱 탐욕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