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진 신 』 요약본
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진 신 』 요약본
요약본을 집필하신 분(?)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책소개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탐색하는 세기의 문제작!
<만들어진 신>은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살펴보는 책이다. 과학과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킨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최신작으로, 미국의 광적인 신앙을 비판하며 무신론자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저자는 신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기아와 빈곤 문제들을 일깨운다. 과학과 종교, 철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창조론의 이론적 모순과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결과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생물계의 복잡성이 이미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창조론을 과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적 사례를 통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초자연적 지성이 있다는 신 가설에서부터 신이 만들었다는 태초 우주까지, 창조론의 주요 쟁점들에 대한 반박 이론을 제시하면서 창조론의 허울과 실상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여러 논증을 역사적 증거와 과학적 논리로 파헤치며, 이런 논증들은 잘못된 믿음이 주는 환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 책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신이 사라진 이후의 사회가 오히려 더 희망적이라고 역설하며, 여러 사례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신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갔는지를 보여준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고, 미래 사회의 대안은 종교가 아닌 인간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책이다. [양장본]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지음·이한음 옮김/604쪽·2만5000원·김영사
“바보야, 해법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종교와의 전쟁’이야.”
지난해 9월 출간된 뒤 서구 지성 사회에 논란을 몰고 온 이 책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저자는 ‘이기적 유전자’(1976년)로 일약 진화생물학계의 스타로 떠오른 뒤 창조론을 비판해 온 리처드 도킨스(66·사진)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그는 ‘종교적 망상’을 뜻하는 신조어 ‘Relusion(religion+delusion)’이란 우회적 표현을 피하고 ‘신이라는 망상(God Delusion)’이란 직설적 표현을 원제로 해서 “극단적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 자체가 문제”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는 ‘무신론 근본주의’라 할 만큼 격렬한 어조로 종교, 특히 일신교 교리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인간의 삶에서 종교를 추방해야 평화와 행복이 온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 진화생물학, 천체물리학, 양자물리학, 지질학과 같은 과학뿐 아니라 논리학과 철학, 역사학, 문학까지 총동원한다.
몇 개를 둘러보자. 신의 존재를 입증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5대 논증 중 4개는 모두 격파됐고, 마지막 남은 1개가 ‘지적설계론’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진화론과 비교할 수 없는 조야한 논리일 뿐이다. 지난해 덴마크 신문에 실린 12컷 풍자만화에 대한 이슬람권의 집단 분노는 진짜 모욕적인 3컷의 만화를 집어넣은 이슬람 지도자들의 조작에 놀아난 것이었다. ‘이슬람은 평화다’라는 주문은 1400년에 이르지만 이슬람 역사에서 평화의 시기는 오직 13년에 불과했다.
미국이 ‘청교도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건국의 아버지들’인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존 애덤스는 종교의 유해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미국 보수주의의 이념을 새롭게 벼려낸 공화당의 영웅 배리 골드워터조차도. 그는 “그들(미국 내 종교집단)이 자신들의 도덕적 확신을 보수주의라는 이름하에 모든 미국인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나는 사사건건 그들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어떠한가.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무신론자를 동등한 시민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했다. 1999년 미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후보가 여성, 가톨릭 신자, 유대인, 흑인, 동성애자라는 점만 빼고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일 때 표를 주겠느냐는 여론조사에서 무신론자는 절반 이하의 가장 낮은 지지를 받았다. 저자는 이를 놓고 과거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 페미니즘 운동, 동성애 인권운동처럼 무신론자 인권운동이 필요한 시기라며 지식인부터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커밍아웃’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신론적 성격을 은폐해 온 이신론, 범신론, 불가지론을 향해 종교의 위세가 무서워 얼버무리는 짓을 그만두고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때로 그 비판의 칼날은 실명을 거론한 동료 과학자를 향한다.
저자는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엄격히 구분하려 한 스티븐 제이 굴드 등 과학자들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종교의 월권을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과학적 연구 결과는 적극 홍보하면서도 반대로 불리한 과학적 결과에 대해선 “과학은 그래서 안 돼”라는 식의 이중 플레이를 일삼는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까지 ‘지적설계론’을 교과 과정으로 채택하거나 지구의 나이를 성경의 역사에 뜯어 맞추는 ‘역사의 퇴보’도 발생하고 있다.
그는 또한 독자적 판단 능력이 없는 어린이에게 끔찍한 지옥 이야기를 들려주며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를 아동 성추행보다 더 끔찍한 짓이라고 매도한다.
이 책의 내용을 논박하는 것은 쉽다. 디트리히 본회퍼, 파울 틸리히 같은 고차원의 신학자나 테레사 수녀 같은 고결한 실천가들을 외면하고 물의를 일삼는 종교인들만 거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그런 종교인들은 희소하지만 대중적 종교인들은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조차 그러하지 않았는가.
진지한 종교인이라면 “왜 종교만 특수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이 책의 신랄한 비판을 겸허히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종교가 과학과 다른 존재 이유를 입증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한편 저자는 과학이 ‘어떻게’를 다룬다면 종교는 ‘왜’를 다룬다는 이분법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 책이야말로 계몽주의에 의해 고사 위기에 몰렸던 종교가 부활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는 보여 주지만 ‘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빠져 있다. 과학이 종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자기성찰 능력이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도킨스의 종교무용론이 아닌 종교해악론을 주장하는 냉엄한 지적인 책입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인의 필독서라 생각해 소개합니다.
아래는 인터넷에 올려진 책 소개입니다.
<세존사이트 성법스님>
<책 소개>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 원제 The God Delusion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이한음 (옮긴이) | 김영사
진화생물학자이자 현대 지적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리처드 도킨스가 광적인 신앙을 비판한 책. 초자연적 지성이 있다는 신 가설에서 신이 만들었다는 태초 우주까지, 창조론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지은이는 자연선택을 근거로 한 반박 이론을 제시하며 창조론의 허울과 실상을 예리하게 밝혀낸다.
지은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회귀적 ‘증명’과 성 안셀무스의 연역적 논증, 아름다움 논증과 개인적 ‘경험’ 논증 등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여러 논증을 역사적 증거와 과학적 논리를 통해 여지없이 깨부수며, 이런 논증들은 잘못된 믿음이 주는 환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 역시 이 책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그동안 종교는 강자에게는 지배이데올로기였으며, 약자에게는 삶의 위로이자 희망이 되어왔다. 착취와 위로를 동시에 주는 종교. 이것이 인간에 의해 왜곡된 종교의 모순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모순된 종교보다 신이 사라진 이후의 사회가 오히려 더 희망적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다윈의 설계 논증 타파만큼 대중 신앙을 철저히 패배시킨 탁월한 추론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뜻밖의 것이었다. 다윈 덕분에 우리가 아는 것 중 설계되지 않았으면서 설계된 듯이 보이는 것은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복잡성과 우아함을 경이로운 수준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설계되지 않은 것도 설계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p126 중에서
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객관성이 무뎌져 있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p381 중에서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 194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이자 작가이다.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 담당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에덴 밖의 강(River Out of Eden)>, <풀리는 무지개(Unweaving the Rainbow)>, <악마의 사도> 등이 있다.
요약본
1.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믿음을 믿다
나는 인격신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신은 우리의 불충분한 감각으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경외심을 품게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아인슈타인-
우리가 무지개의 신비를 풀었다고 해도 그 경이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이 종교적인 말을 하는 듯이 보여도 그들의 신념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대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들러난다.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은 분명히 그렇다.
아인슈타인의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흉기)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미신)이다”라는 말이 흔히 인용되고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내 안에 종교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밝혀 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무한한 찬탄이다.” “나는 매우 종교적 불신자이다. 인격신이라는 개념은 내게 아주 이질적이며 심지어 소박하게 까지 보인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유신론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유신론은 초자연적인 지성을 믿는 것이다. 그 지성은 우주를 창조했고 여전히 자신이 창조한 것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이신론(理神論)은 초자연적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만드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범신론은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우주나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은 약한 유신론이고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에 선택을 했을까”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우주가 다른 식으로 시작될 수 있었을까 하는 범신론적인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의 배후에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숭고함이 간접적으로 그리고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전해진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라는 말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법칙을 말한다면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정서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중력의 법칙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性이나 번식에 관한 윤리가 논쟁거리가 될 때마다 몇몇 종교집단의 대표들이 주요 패널로 참석하고는 한다. 왜 우리 사회는 그들이 철학자나 의사나 변호사에 필적하는 전문지식을 지닌 것처럼 그런 논쟁 거리가 생길 때 마다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의료용으로 대마초를 사용하는 환자는 연방법으로 기소대상이지만 ‘통일된 영혼’이라는 교파의 신자들은 환각제를 함유한 차를 마셔야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에 환각제를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에 저촉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인종 차별 등의 편견을 주장하면 의례 그 편견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종교인에게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꼴이 된다.
2005년 9월 덴마크의 신문에 마호메트를 묘사한 12컷 짜리 만화가 실렸다. 이슬람 세계에서 수 많은 성토대회가 열렸고 많은 이슬람 교도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흥분하였지만 이들은 아랍 언론에 실리는 판에 박힌 유대인 비방 만화들은 문제 삼지 않는 극명히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극히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걸맞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2. 神 假說
신은 착각?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천진무구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기독교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이 책은 우주를 설계한 초자연적 지성이 있다는 가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무엇인가를 설계할 정도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하는 것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착각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유해한 착각이다.
다신교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진보? 그러면 일신교에서 신이 하나 더 삭제되면 무신론이 될 것이다(Ibn Warraq). 힌두교는 사실 다신교가 아니라 위장된 일신교이다. 창조자인 브라흐마를 비롯하여 많은 신이 있지만 수 백 명의 신들은 모두 한 신의 다른 모습이거나 화신이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신학은 1800년 동안 발전이 없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이에 대해 말했다.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다. 이성이 작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교인들 누구도 명확한 삼위일체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칭 예수의 사제라는 협잡꾼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종교인들이 어떤 증거도 없을뿐더러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지나치게 확신을 가지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아마 삼위일체설이라는 분야가 그렇듯이, 그저 조금 다를 뿐인 견해들에 대해서는 유독 심한 적대감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신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신론을 붙들고 집적거리다가 오히려 다신교가 되어 버린 것은 로마 카톨릭이다. 우선 삼위일체에 거의 이름뿐인 마리아가 합류해 있다. 마리아는 거의 신에 버금가는 기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 만신전은 5,120명의 성인들이 합류하면서 더 확대된다. 그리고 네 무리의 천사들도 잊어서는 안된다.
일신교
우리 문화의 중심부에는 일신교라는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거대한 악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서라는 야만적인 청동기 시대의 문헌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3가지의 반 인간적인 종교가 나왔다(고어 바이델).
유대교는 원래 사막부족의 배타성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유독 사나운 신을 섬기는 한 부족의 신앙이었다. 바울은 이 보다는 덜 무자비하며 덜 배타적인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기독교를 창시하였다. 몇 세기 뒤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유대교 본연의 비타협적인 일신교로 회귀하여 이슬람을 창시하고,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을 차용하여 코란을 만들고 군사 정복을 통해 신앙을 전파한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덧붙였다.
기독교의 사법제도는 15세기 동안 재판에 적용되어 왔다. 어디에서든 성직자들은 오만함과 나태함을, 평신도들은 무지와 굴종을 보여왔다. 그리고 모두 미신, 편협한 신앙, 종교 박해를 가져 왔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등대가 교회보다 유용하다.”고 했고 존 애덤스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상의 것은 종교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뒤 섞이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는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슬픔을 악용한 사례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이지요. 그 슬픔이 나은 재앙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Robert Sherman이라는 기자가 아버지 부시에게 무신론자인 미국인들도 동등한 시민권과 애국심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를 물었을 때에 부시는 답했다. “아니오. 나는 무신론자들을 시민으로 보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곳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미국의 하원은 435명, 상원은 100명이다. 이들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면 통계적으로 그들의 상당수는 무신론자이어야 한다.
세속적인 인도를 꿈꾸었던 간디는 스스로 “나는 힌두교도이며, 이슬람교도이며 기독교이며 불교도다”라고 하였다. 이어 네루는 “많은 신앙과 종교를 지닌 인도 같은 국가에서는 세속주의를 토대로 하지 않으면 진정한 민족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不可知論者(Agnosticism), 불신자의 또 다른 이름?
“신이 존재하는지 나는 모른다. 따라서 그의 존재를 믿는 것을 보류하고 없다고 가정하겠다. 검증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다.” (Thomas Henry Huxley)
이렇게 말한 헉슬리는 신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확률의 점진적인 변화는 무시했던 것 같다.
과학 너머에 종교가 있다?
우리가 과학자로서 신에 관한 논평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창조적인 관리자가 있는 우주는 그것이 없는 우주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왜 그것이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천문학자인 마틴 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도대체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방정식들에 생명을 불어 넣고 그것들을 현실 우주로 구현시킨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그런 질문들은 과학 너머에 있다. 그것은 철학자나 신학자의 영역이다.” 신학자들이 어떤 전문지식이 있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심오한 우주론적 질문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 왜 과학자들은 자신들 보다 신학자들이 그런 질문에 대답할 자격을 더 많이 갖춘 것도 아닌데, 비겁할 정도로 공손하게 신학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떠 넘기는 것인가? 과학은 어떻게 라는 질문에만 관심이 있고 신학은 왜라는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있다는 말은 이제 지겹도록 진부하다. 왜로 시작되는 모든 문장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추상은 무슨 색깔일까? 희망은 무슨 냄새일까? 설령 그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 해도 과학이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종교가 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 신학이 하나의 학문이라고 가정할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종교가 인간의 지혜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렇다. 게다가 어느 종교에게 그런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것인가?
나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기적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물론 기적은 과학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조건으로서 기적의 이행을 요구한다. 고인이 된 벨기에의 국왕은 낙태에 반대 했다는 이유로 성인 후보자에 올라 있다. 현재 그의 사후에 그에게 기도한 사람들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 났는지를 놓고 집중적인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농담이 아니다.
종교가 과학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고 현실 세계에 관여하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기적이 없는 종교는 대다수의 유신론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임을 유념하자. 기적도 없고 기도자에게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기도하다’ 라는 동사에 대한 Ambrose Bierce의 재치 있는 정의가 있다.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을 무효화 하라고 요구하는 것.”
기도의 힘
최근 종교인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너드가 템플턴 재단의 후원(240만 달러)으로 환자들을 위한 기도가 회복을 돕는다는 주장을 실험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1,802명의 심장병 환자를 세 무리로 나누고 첫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았으나 그 사실을 모르게 했고, 두 번째 집단은 기도를 안받았고 그 사실도 모르게 했고, 세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았으며 그 사실을 알게 했다. 2006년 4월 미국 심장학회지에 발표된 연구 결과는 명쾌했다. 기도를 받은 환자들과 안 받은 환자들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한편 자신이 기도를 받았다는 것을 안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이 연구가 실패로 끝나자 옥스포드 대학의 신학자인 리처드 스윈번은 신은 선한 이유로 한 기도에만 응답한다면서 그 연구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 아무튼 신의 존재 증거는 너무 많으며, 너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
과학은 합리주의의 한 형태인 반면 종교는 가장 흔한 형태의 미신이다. 종교는 창조론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창조론은 종교 없이 존재 할 수 없다.
외계인과 신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만일 외계에 수 백 만년 앞선 문명이 있다면….
3.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신에 대한 막연한 정의를 내렸을 뿐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그 외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논리학자들은 전능과 전지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의 전능을 발휘하여 우주 역사의 경로에 미리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 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즉, 신은 역사에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존재론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들
철학자의 일이란 관찰보다는 생각을 통해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Aldous Huxley의 <point point="Point" counter="Counter"></point>라는 책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수학적 증명을 발견한 노인이 나온다.
“ m / 0 = ¥ 이니 m = ¥ x 0 입니다. 즉, 무한한 힘이 무(0)에서 우주를 창조 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의 존재에 관한 터무니 없는 증명들은 http://www.godlessgeeks.com/ LINKS/GodProof.htm 에도 열거되어 있다.
예) 세계인구의 대다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악마가 의도한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아름다움 논증
종교인들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와 라파엘의 벽화가 탄생한 공로를 종교에 돌리고는 한다. 하지만 교회가 예술의 주된 후원자가 된 것은 엄청난 부 때문이었다.
만일 세익스피어가 교회의 의뢰로 소설을 썼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햄릿이나 리어왕, 맥베드를 잃었을 것이다.
개인적 경험 논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신이나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 혹은 신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말을 걸기도 한다. 요크셔의 살인마 피터 섯클리프는 여자들을 죽이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또렷이 들었다고 한다. 조지 W. 부시는 신으로부터 이라크를 침공하라는 말을 들렀다고 한다 (딱하게도 신은 거기에 대량살상 무기가 없다는 계시를 내려 주지는 않았다).
샘 해리스가 <신앙의 종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갖가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이 대단히 흔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미친’, ‘정신병적’, ‘망상’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수가 많으면 분명 제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우주의 창조자가 당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그가 모르스 부호처럼 빗방울로 창문을 두드려 당신에게 이야기 한다는 믿음은 정신병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인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일반적으로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으로 미친 짓이다”.
<st2:date day="11" month="9" year="2001" o:ls="trans" w:st=on">2001년 9월 11일</st2:date> 독실한 신자들은 뉴욕 쌍둥이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속에서 사탄의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유포된 한 장의 사진이 그 미신을 뒷받침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인간의 뇌는 모형 구축에 탁월하다. 잠을 잘 때에는 그것을 꿈이라고 한다. 깨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상상이라고 하지만 유독 생생할 때에는 환각이라고 한다.
성서 논증
19세기 이래로 신학자들은 기독교 복음서들이 현실세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믿을 만한 문헌들이 아니라는 압도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쓰여진 것들이다. 심지어 예수의 삶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 보다 한참 뒤에 쓰여진 것들이다. 그 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경사들을 통해 복사되고 또 복사되었다.
종교적 의도가 스며든 사례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의 전설과 헤롯왕이 유아들을 대량 학살한 당시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예수의 사후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에 따라 (미가서 5장 2절)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추종자들이 놀랐다고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Caesar Augustus가 과세 목적으로 모든 유대인들을 자신의 동네로 돌아가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말한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다윗이 실존 인물이라면 예수보다 거의 1,000 년 전의 인물이다. 도대체 로마인들이 요셉에게 1,000 년 전에 조상이 살았던 땅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실제로 인구조사가 있었지만 이것은 헤롯왕이 사망한 후인 서기 6년의 일이었다.
Robert Gillooly는 동쪽의 별, 처녀 출산, 왕들의 아기 숭배, 기적, 처형과 부활, 승천 등의 예수의 전설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모두 지중해와 근동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다른 종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라고 말한다마테오는 요셉이 다윗의 28대 후손이라 하고 누가는 41대 후손이라고 한다. 아무튼 예수가 정말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요셉의 족보는 그와 아무 상관도 없으므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수에게 맞추기 위해 요셉의 족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공식으로 인정된 4편의 복음서에 들지 않는 <도마서>에는 예수가 아이였을 때에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친구를 염소로 변하게 하고 진흙을 참새로 바꾸고 나무토막을 길어지게 하여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왔다는 등의 마법 능력을 남용하였다는 일화들이 실려 있다.
<다빈치 코드>와 복음서들의 유일한 차이는 복음서들이 오래된 소설인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대 소설이라는 것뿐이다.
독실한 과학자 논증
지적으로 저명한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를 불신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감춘다. 혹시 수입원을 잃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1998년 Nature지에 실린 글에는 미국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출된 저명한 미국 과학자들 중 인격신을 믿는 사람은 7%에 불과하다고 나와 있다. 이 보다 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약 40%가 인격신을 믿는다고 한다. 일반국민의 신앙심과 지적인 엘리트의 무신론이 비율상 정반대라는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수학자 파스칼은 신이 존재할 확률이 낮다고 해도 잘못 추정하였을 때에 닥칠 대가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신을 믿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당신이 신을 믿지 않을 때, 당신이 틀리다면 영원한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옳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을 믿어라.
그런데 왜 우리는 신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에 해야 하는 일들 중의 하나가 그를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고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헌신하고 그를 위해 싸우고 죽는 일에 고귀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건다면 더 낫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지는 않은가.
베이스 논증
“나는 증거가 전혀 없음을 인정하오. 그래서 그것을 신앙이라 하는 것입니다”.
4. 신이 없는 것이 확실한 이유
Boeing 747과 고물 야적장
현대의 가장 대중적인 설계 논증으로, 많은 유신론자들 사이에서 "완벽한고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비치는 비개연성(improbability) 논증을 살펴보자.
창조론자가 남용하는 비개연성 논증은 늘 똑같은 형식을 취하며, 그것은 창조론자가 정략적으로 지적 설계라는 세련된 옷을 입고 위장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호일(프레드 호일)은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 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낼 확률과 별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비유를 복잡한 생명체의 진화를 언급할 때 활용해왔으며, 그런 언급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 아주 간결하게 줄인 이것이 바로 창조론자가 선호하는 논증이다.
설계론자(혹은 창조론자)들의 비개연성 논증이 공격하는 지점은 크게 네 곳이다.
- 물리법칙들이 조금만 달랐어도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을터인데, 어떻게 물리법칙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는가?
-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지금과 조금 달랐거나, 지구의 자전궤도가 조금만 더 타원이었거나, 목성이라는 거대한 중력 방어막이 없었다면 지구에는 생명이 살 수 없었을터인데, 어떻게 지구가 딱 이와 같은 환경을 갖추게 되었을까?
- 원시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이 우연히 탄생할 확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어떻게 지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 원시 생명체가 어떻게 지금과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유기체로 변할 수 있었는가?
설계논증에 의하면 위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초월적 설계자에 즉, 신에 의해서"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1,2,3번에 대해서는 "인본 원리"로, 4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각성제로서의 자연선택
지질학은 우리가 개인으로나 종으로나 생존기간이 짧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존 러스킨(19C 영국 작가)의 의식을 일깨웠으며 1851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지질학자들은 나를 그냥 놔두면 아무 문제 없으련만. 그 끔찍한 지질 망치들! 내게는 성서의 각 절이 끝날 때마다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대 우주론은 사실상 다윈과 Wallace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어느 누구와도 달리, 그들은 초자연적 행위자를 전적으로 배제한 채 우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었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란 어떤 것의 부분 중에서 단 하나라도 빠지면 모든 기능이 정지되는 경우를 말한다. 창조론자 Michael J. Behe가 1996년에 창안한 개념(단어)이다. 창조론자들은 모든 생명체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졌으므로 신이 창조했다는 주장을 한다.
어떤 산의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오를 수가 없지만 다른 한 쪽은 정상까지 완만한 비탈을 이루고 있다. 창조는 밑에서 단 한번에 정상을 뛰어 오르는 것이지만 진화는 완만한 비탈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다윈이 그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너무 긴 세월을 기다렸다는 사실이 놀랍게 여겨진다. 다윈(1809~1882)의 업적은 훨씬 대단해 보이는 뉴턴의 업적이 이루어진 해(1666) 보다 거의 3세기가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틈새 숭배 (God of Gaps)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 다닌다. 틈새가 발견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이 채워야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신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과학이 발전할수록 틈새가 줄어들며, 결국 할 일이 전혀 없고 숨을 곳도 없어 짐으로써 신이 위태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무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무지를 앞으로 정복할 과제로 보고 기뻐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수수께끼에 기뻐하며 그것이 신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께끼에 기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창조론자들은 화석에서 발견되는 틈새에 애착을 갖는다. 진화에서든 뭐든, 어떤 이야기의 모든 단계들이 하나하나 완벽한 증거자료를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는 지극히 비논리적이다. 누군가가 범죄자임을 인정하려면 그 모든 과정이 한 장면도 빠지지 말고 비디오로 기록되어있어야 한다는 논리와도 같다.
사체들 중 화석으로 남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진화론은 하나의 화석이 엉뚱한 지층에서 발견된다면 그 이론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떤 창조론자는 이런 말을 했다. “선캄브리아대의 토끼 화석이면 돼”. 그런 시대가 어긋난 화석이 진짜로 발견된 일은 없다. 비록 창조론자들이 석탄기 단층에서 인간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거나 인간의 발자국이 공룡의 발자국에 사이에 섞여 있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전설을 제시하곤 하지만 말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니케아 공회의 조정자, 고백록의 저자, AD 353-430)는 말했다. “더욱 위험이 큰 또 하나의 유혹이 있다. 바로 호기심이라는 병이다. 자연의 비밀들,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며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어느 누구도 알고 싶어하지 않을 비밀들을 탐구하여 규명하라고 우리들을 충동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진화한 기관들은 뛰어나고 효율적이지만 종종 결함도 보인다. 쓸데 없이 목적지까지 멀리 우회함으로써 진화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되돌이 후두신경’이 한 예다. 요통, 탈장, 자궁 탈출증, 굴염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질병 중 많은 것이 네 발로 걷도록 다듬어진 몸을 그대로 지닌 채 두발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난 것들이다.
포식자들은 먹이를 잡기 위해 아름답게 설계된 듯하며, 먹이감들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설계된 듯하다. 신은 도대체 누구 편일까?
인본 원리: 행성 편
이 인간 원리, 혹은 인본 원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만약 세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수많은 자연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인간은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된 세계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보는 자연 법칙이란 인간이 나타날 수 있는 법칙을 가진 우주의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만약 우리에게 있어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태양과 같은 항성의 주위에는 Goldilocks zone이 있다.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는 그 영역에서 행성에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은하에는 10억~300억 개의 행성들이 있고 우주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생명의 기원 즉, DNA에 상응하는 무엇인가가 자발적으로 출현할 사건이 있다고 가정하자. 아주 낮은 확률로 계산하여도 생명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은 10억 개는 족히 된다.
인본 원리: 우주 편
우주의 모든 원소들은 궁극적으로 수소의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핵융합은 별의 내부라는 엄청난 고온의 조건에서 만들어 지는 과정이다. 태양과 같이 상대적으로 작은 별은 헬륨과 같이 가벼운 원소들만 만들 수 있다. 더 무거운 원소들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고온을 얻으려면 더 크고 더 뜨거운 별이 있어야 한다. 그런 별은 폭발하여 초신성이 되면서 (92 종류의) 자연계 원소들을 포함한 먼지 구름으로 흩뿌린다. 이 먼지 구름이 응축되면서 행성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다양한 원소들이 없었다면 화학 작용도 생명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물리법칙과 상수들이 아주 조금만 달랐어도 우주는 생명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곳으로 발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Martin Rees의 <여섯 개의 수>에서 우주 전역에 적용되는 근본 상수 여섯 가지를 나열한다. 이중 하나가 강력의 크기이다. 강력은 원자핵의 구성 요소를 묶는 힘이다. 강력은 수소가 결합하여 헬륨을 형성할 때에 에너지로 전환되는 질량의 비로 측정하며 이 값은 0.007이다. 만일 강력의 값이 0.006이면 우주에는 수소 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 어떤 화학작용도 일어날 수 없다. 반대로 강력이 0.008이라면 수소는 모두 융합되어 버린다. 수소 없는 화학작용은 물이 없다는 의미가 되므로 생명을 발생시킬 수 없게 된다.
유신론자들은 신이 우주를 만들 때에 우주의 근본 상수들을 각각 생명을 형성하기에 알맞은 골디락스 영역에 맞추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리 역시 신의 존재를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여섯 개의 골디락스 값들을 계산할 수 있는 신은 그 미세한 숫자들의 조합만큼이나 있을 법하지 않다.
케임브리지의 막간극
신이 정말로 인간과 대화를 한다면 그 사실 자체는 결코 과학의 바깥에 놓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세계에 체류하는 신이 우리 세계로 들어 오며 인간의 뇌는 그 메시지를 수신한다. 신이 수 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통신한다면 그 엄청난 대역폭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신은 우리가 아는 어떤 두뇌나 컴퓨터보다도 정교하며 계획적으로 구축된 무엇인가 여야 한다.
5. 종교의 뿌리
종교, 다윈주의를 비켜가다.
왜 모든 인류 문화가 종교를 지니고 있는 가에 대해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론을 갖고 있다. 종교는 위안과 평안을 제공한다. 집단에 연대감을 부여한다. 왜 우리가 존재하는가에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다윈주의가 본래 경제성을 따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종교는 너무 낭비적이며 사치스럽다.
중세의 성당은 수세기에 걸쳐 완공되었지만 거주 등 다른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된 일이 없다. 독실한 사람들은 신을 위해 죽었고 신을 위해 살인을 했다. 그렇다면 종교의 혜택은 과연 무엇인가?
종교의 직접적인 이점들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된다.”
종교가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준다는 증거가 일부 있다. 즉, 플라시보 효과를 주어 생명을 연장시킨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가톨릭 교도들의 병적인 죄의식이 건강을 증진시킨다고는 믿기 어렵다.
집단선택
이른바 종교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은 집단선택 이론이다.
호전적인 ‘전쟁의 신’을 섬기는 부족은 평화와 조화를 역설하는 신을 섬기거나 신을 섬기지 않는 부족과 전쟁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순교하면 곧장 낙원으로 간다고 굳게 믿는 전사들은 용감해지며 기꺼이 목숨을 바치기 때문이다. 결국 승리한 부족은 가축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첩으로 소유하게 된다. 결국에는 더 크고 많은 수의 부족이 같은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부산물로서의 종교
왜 나방들은 불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는 것인가?
자연선택은 생존을 위해 아이들의 뇌에 부모나 다른 어떤 어른이 하는 말을 믿도록 하는 경향을 심어 놓았다. 그것은 나방이 달을 기준으로 이동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믿고 따르는 것의 또 다른 측면은 나방처럼 속는 것이다.
아이는 “악어가 있는 강에서 헤엄치지 말라”는 좋은 조언이지만 “보름달이 뜰 때 염소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는 기껏해야 시간과 염소를 낭비하는 조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예수회는 호언장담한다. “내게 일곱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오면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
모든 종교 신앙들은 그 안에서 양육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이해 보인다.
종교를 위한 심리적 준비
심리학자 Paul Bloom은 아이들은 본래 二元論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볼 때 종교는 그런 본능적인 이원론의 부산물이다. 이원론자는 물질과 마음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반면에 一元論자는 마음이 물질의 한 표현이며 물질과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원론자는 마음이 몸을 떠나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블룸은 우리가 천성적으로 창조론자의 성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자연선택은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또 심리학자 Deborah Keleman은 아이들은 모든 것에 목적을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구름은 비를 내리기 위한 것이고 뾰족한 바위는 동물들이 등을 긁기 위한 것이다 등이다. 아이들은 타고난 목적론자이며 자라서도 거기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천성적으로 이원론과 목적론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게끔 우리에게 성향을 부여한다.
일부 학자들은 종교가 부산물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즉, 종교가 갖고 있는 비합리성이 우리의 뇌에 들어 있는 특정한 비합리성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전적인 이점을 지닌 것으로 바로 사랑에 빠지는 성향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한눈에 반하는 비합리적인 현상이 오랫동안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도록 상대에게 충실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동의한다. 좋지 않은 배우자를 선택했을지라도 아이를 잉태하면 적어도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그 선택을 한결 같이 고수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위험한 세계에서 사랑과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상실, 기도에 대한 응답 기대 등이 그렇다. 촛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과 같은 빗나간 부산물은 신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좋은 유전자가 아니라도 단지 운이 좋아서 집단 전체로 퍼질 수도 있음도 인정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의 (적자)생존을 돕는 비법들을 말로 전파하는 데에 능통하다. Martin Luther는 “이성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모든 것에 경멸하며 신과 맞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성으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운운.
밈, 문화적인 유전의 단위
종교에서의 진리란 그저 살아남은 견해를 지칭한다(오스카 와일드).
밈(Meme)은 문화적인 유전의 단위이다. 밈 이론의 핵심질문은 유전자처럼 자기복제 행위를 하는 문화적 모방단위가 있느냐의 여부다. 내가 밈을 주창한 원래의 목적은 유전자가 다윈 주의의 유일한 도구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강한 생명력을 갖는 ‘종교적 밈’들의 목록을 몇 가지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li style="FONT-SIZE: 12pt">당신은 죽어도 살 것이다. </li><li style="FONT-SIZE: 12pt">당신이 순교한다면 72명의 처녀와 즐길 수 있는, 천국 중의 천국으로 갈 것이다 </li><li style="FONT-SIZE: 12pt">(그 불운한 처녀들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li><li style="FONT-SIZE: 12pt">이교도, 신성 모독자, 배교자는 죽여야 한다 </li><li style="FONT-SIZE: 12pt">(혹은 가문에서 추방하는 등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li><li style="FONT-SIZE: 12pt">신을 믿는 것은 가장 큰 미덕이다. 믿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신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라. </li><li style="FONT-SIZE: 12pt">신앙(증거 없는 믿음)은 미덕이다. 당신의 믿음이 증거와 어긋날수록, 당신은 더 고결해진다. 증거와 이성에 맞서, 진정으로 기이하고, 지지를 못 받고, 지탱될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든 믿는 믿음의 대가는 특히 커다란 보상을 받는다. </li><li style="FONT-SIZE: 12pt">모든 사람들, 종교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종교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존경을 자동적으로 표해야 한다. </li><li style="FONT-SIZE: 12pt">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것들(삼위일체, 성체화, 성육화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라. 그 시도가 그것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신비라고 부르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라. </li><li>아름다운 음악, 미술, 조각은 자기 증식하는 종교 개념의 발현물들이다.</li>
즉, 종교들도 진화한다.
화물 숭배 의식
태평양 멜라네시아와 뉴기니의 화물 숭배 의식은 실제 사례이다.
20세기 초의 식민지 개척과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섬 주민들은 경이로운 물건들을 쓰는 백인들이 결코 그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수리가 필요하면 백인들은 물건을 멀리 보냈고, 배나 나중에는 비행기의 '화물'로 새 물건들이 계속 도착했다. 백인들은 물건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고, 유용성이 있어 보이는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책상 뒤에 앉아서 서류를 만지작 거리는 행위는 일종의 종교 의식처럼 보인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화물은 초자연적인 기원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그 점을 확인해주려는 듯, 백인들은 종교 의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특정한 행동들을 했다:
그들은 높다란 기둥을 세우고 전선을 매달았다. 그들은 불빛을 반짝이며 신기한 잡음과 억눌린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작은 상자들 앞에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고 위 아래로 행진하라고 시켰다. 그보다 더 쓸모없는 짓은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원주민들은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백인들이 신에게 화물을 보내달라고 올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원주민도 화물을 원한다면,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의식을 위한 제단 가짜비행기, 가짜관제탑...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종류의 의식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문화적 교류 없이) 수십차례 발생했다는 것이며, 그 의식들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뉴칼레도니아에서 두 번, 솔로몬 제도에서 네 번, 피지에서 네 번, 뉴헤브리디스에서 일곱 번, 뉴기니에서 50번 이상 독자적으로 그런 의식이 출현했으며, 대부분은 아무 연관도 없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종교들은 대부분 메시아가 묵시록의 날에 화물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1950년대에 젊은 아텐버로는 사진사 제프리 멀리건과 함께 존 프럼 숭배 의식을 조사하기 위해 탄나 섬으로 갔다. 그들은 그 종교의 증거들을 많이 찾아냈고, 수소문 끝에 고위 사제인 남바스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남바스는 자신의 구세주를 존이라고 친숙하게 불렀고, '라디오'를 통해 정기적으로 그와 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존의 것인 라디오)은 허리에 전선을 '노파'인데, 그녀가 무아지경에 빠져서 중얼거리면 자신이 존 프럼의 말을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남바스는 아텐버로가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존 프럼이 라디오로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아텐버로는 라디오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이해할 수 있다). 그는 화제를 바꾸어서 존 프럼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남바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보았지."
"어떻게 생겼나요?"
남바스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당신처럼 생겼어. 얼굴이 하얗고, 키가 컸지. 그리고 남아메리카에 오래 살았대."
이 세부 묘사는 존 프럼의 키가 작다는 전설과 모순된다. 그것이 바로 전설이 진화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존 프럼이 돌아오는 날을 2월 15일이라고 믿었지만, 연도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해마다2월 15일에 모여서 그를 맞이하는 종교 의식을 올린다. 아직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텐버로는 샘이라는 숭배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샘. 존이 화물이 올 거라고 말한 지 19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는 약속하고 또 약속했지만 화물은 아직 안 오고 있어요. 19년이면 좀 오래 기다린 거 아닌가요?"
샘은 땅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오기를 2000년 동안 기다릴 수 있었다면, 나도 존을 19년 이상 기다릴 수 있지요."
의식의 일환으로 미군을 흉내내는 원주민
이러한 사례는 종교가 거의 무에서 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흥미롭고 현대적인 모형이다
특히 그것들은 종교의 기원 전반에 관해 네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1.하나의숭배 의식이 놀라운 속도로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출현 과정이 그 궤적을 감춘다는 것이다. 존 프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실존 인물로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주 최근 사람일텐데, 그가 정말로 살아 있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3.비슷한 숭배 의식들이 다양한 섬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한다는 점이다. 이 유사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 인간의 심리와 그것의 종교 수용성에 관해 무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4.화물 숭배 의식은 서로 비슷할 뿐 아니라 더 오래된 종교들과도 비슷하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를 비롯한 고대 종교들은 존 프럼에 대한 숭배처럼 지역 숭배 의식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유대학 교수인 게자 베르메스 같은 사람들은 예수가 당시 비슷한 전설들이 무성했던 팔레스타인에서 출현한 여러 인물들 중 하나였다고 주장해왔다. 그 숭배 의식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6.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
신과 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증오의 감정을 격발시키는 종교인들이 많다. 특히 자기 종교를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는 무섭다. 그들은 왜 신을 위해 난폭한 방어를 하려고 하는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전능하다고 믿겨지지 않기 때문인가.
다윈 주의와 도덕의 기원
다윈 주의 논리는 자연선택이라는 여과지를 통과한 단위가 이기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다고 결론 짖는다. 생물은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생존을 도모하는 상황들도 많이 있다. 첫째의 경우는 친족이타주의이다. 다른 유형의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공생관계)이다. 이들을 바탕으로 한 이차적인 것들도 있다. 하나는 언어와 소문을 지닌 인간 사회의 평판이다. 또 하나는 기증이다. 이타주의적 기증은 지배나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례 연구로 살펴 본 도덕의 뿌리
우리의 도덕이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종교인과 무신론자의 도덕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하버드의 생물학자 마크 하우저는 도덕적 판단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이들간에 통계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이것은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와 들어 맞는다.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고 애쓰겠는가?
신이 없을 때에 자신이 강도, 강간,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스스로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이 없을 때에도 항상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선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치명적으로 훼손하게 된다. 나는 아주 많은 종교인들이 종교가 자신들에게 선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할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개인의 죄를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신앙을 지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샘 해리스가 에서 서술한 자료는 놀랍다. “폭력 범죄율이 가장 낮은 25개 도시 가운데 72%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주에 있으며 38%는 공화당(기독교 근본주의자) 지지 주에 있다. 25개 가장 위험한 도시 중에서 76%가 공화당 주에 있으며 24%는 민주당 주이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다섯 곳 중 세 곳이 텍사스 주에 있고 강도 발생률이 가장 높은 12개 주는 공화당 지지 주이다. 절도 발생률이 가장 높은 29개 주 가운데 24개는 공화당 지지 주이다. 살인 발생률이 가장 높은 22개 주 가운데 17개 주가 공화당 지지 주이다.
7.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의 정신
기이한 책
성경의 상당 부분은 그저 기이할 뿐이다. 수 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필사자 등이 9세기에 걸쳐 지리 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선집이다. 성경을 곧이곧대로 도덕의 근간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구약성서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 없이 이 도덕규정이나 저 도덕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판단 문제이다.
아직도 미국 선거민의 50%가 노아의 방주를 비롯한 성서의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2004년에 일어난 지지 해일이 판 구조의 변동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죄악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난한 한국의 성직자들 중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성서의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에는 무지한 그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창조와 내세를 관장하는 신성한 존재가 왜 인간의 비행과 같은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 인간은 자신의 하찮은 죄를 우주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확대시키면서까지 으스대고 있는 것이다.
2005년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으로 뉴올리언즈 시가 물에 잠겼을 때 미국의 유명한 TV 전도사이며 대통령 후보로 나온 적도 있는 Pat Robertson은 뉴올리언즈에 살고 있는 레즈비언 코메디언 때문에 허리케인이 닥친 것이라고 말을 했다. 신이 전능하다면 왜 좀더 표적을 좁혀서 범죄자를 해치우지 않았을까?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될 때 유독 정직하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게 된 인물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었다.
‘천사 둘이 소돔에 다다른 것은 저녁때였다. 롯이 그의 지에서 쉬어 가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롯을 따라 그의 집에 들어갔다. 롯은 그들에게 빵을 구워주며 대접하였다.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소돔 시민들이 온통 몰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늘 밤 네 집에 든 자들이 어디 있으냐? 그자들하고 재미(비역질)를 보게 끌어내어라."
롯이 밖으로 나가 사정하였다. "여보시오, 제발 이런 못된 짓은 하지들 마시오.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터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내가 모신 분들에게만은 아무 짓도 말아주시오."’ (창세기 19장)
하지만 롯의 영광은 그가 제시한 조건 때문에 흐려진다. 이 기인한 이야기는 종교가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해준다.
‘롯이 산에 올라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이튿날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들어가 아비와 동침하니라.’
이 일그러진 가족이 소돔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면 신과 그의 천벌에 공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롯과 소돔의 이야기는 <판관기> 19장에서 섬뜩하게 반복된다.
‘이름 모를 사제가 첩과 함께 기브아로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노인의 집에서 후한 접대를 받으며 묵었다. 그 때 남자들이 몰려 와서 노인에게 남자 손님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했다. 알아 볼 것이 있다, 즉 비역질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롯과 똑 같은 말을 했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의 첩이 있소. 그들을 내어 줄 테니 욕보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결국 사제는 그의 첩을 내어주었고, 폭도들은 밤새도록 그녀를 집단 강간하였다. 동이 틀 무렵 그녀는 남편이 머무는 집 앞에 와서 쓰러졌고 아침에 이를 발견한 사제는 “일어나라.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 있었다. 사제는 칼을 들어 첩을 뼈째로 열두 조각으로 잘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해안으로 보냈다.’ 이는 신성한 경전의 출처가 잡다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브라함은 세 개의 위대한 일신교의 창시자였다. 아브라함은 기근에서 벗어나고자 아내인 사라와 이집트로 갔다. 아내가 이집트인들이 탐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인지라 남편인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를 여동생인체 하기로 했다. 미모에 힘입어 그녀는 파라오의 할렘에 들어 갔고 아브라함은 파라오의 총애를 받아 부자가 되었다. 신은 이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파라오와 그의 일가에 전염병을 퍼뜨렸다(왜 아브라함에게 퍼뜨리지 않았을까?). 파라오는 결국 아브라함을 이집트에서 내 쫓았다(창세기 12장 18-19절).
기이한 점은 그 부부가 나중에 똑 같은 술수를 쓰려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랄의 왕이 대상이었다. 그도 아브라함의 권유로 사라와 결혼했다. 그 역시 나중에는 파라오와 똑 같은 말로 분노를 표현했다. 이 유사성이 원문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그러한 불쾌한 이야기들은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는 일화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슬람 경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쌓은 뒤 칼을 손에 쥐었을 때에 극적으로 천사가 개입하여 그의 믿음을 시험했음을 알린다. 하지만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아동학대이며 권력에 의한 핍박이다.
<판관기> 11장에 등장하는 입다는 신과 거래를 했다. 암몬군을 이기게 해주면 집으로 돌아 갈 때에 누가 맨 처음 문을 열고 마중을 나오든 그를 제물로 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입다는 정말 암몬군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외동 딸이 춤을 추면서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입다는 울부짖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딸은 순순히 제물이 되겠다고 했다. 그녀는 처녀로 죽은 것이 안타까우니 두 달간 산에 가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만 하였다. 두 달 후, 그녀는 돌아 왔고 입다는 딸을 불태웠다. 신은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민수기>에는 신이 모세를 시켜 미디안인들을 공격하도록 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의 군대는 순식간에 모든 남자들을 살해했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죽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이 자애로운 행동에 분개한 모세는 남자들과 처녀가 아닌 여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남자를 알지 못한 여자 아이들은 너희를 위해 살려 두어라”. 십계명을 가져왔다는 모세는 현대의 도덕주의자를 위한 역할 모델이 아니다.
……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헐고 석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잘라버려라.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라.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탈출기 34장 13-17절>
…… 훌륭하고 노련한 여호수아는 남녀노소, 소와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철저히 몰살시킬 때까지 쉬지 않았다<여호수아서 6장 21절>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파괴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약속의 땅을 침략하는 과정을 담은 성경의 이야기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략, 후세인의 쿠르드 족과 습지 아랍인의 대량학살과 도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성경이 인상적이고 시적인 작품일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도덕을 함양하라고 권해 줄만한 책은 아니다.
<레위기> 20장에 따르면 다음의 죄들은 죽음의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부모를 비방하는 것, 불륜, 동성애, 수간, 안식일에 일하는 것 등등. <민수기> 15장에는 안식일에 한 남자가 장작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 신에게 어떻게 처리할 지를 물었다. 신은 모세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돌로 쳐죽였다.
우리가 십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다른 신의 숭배와 우상 제작이 가장 큰 죄가 된다. 그러면 바미얀의 불상을 파괴한 탈레반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그들의 강직한 신앙심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우상숭배는 원칙적으로 참수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나는 메카나 노틀담, 동양의 사찰들, 바미얀의 석불들을 불도저로 밀어 버릴 무신론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미국의 물리학자 Steven Weinberg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도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질 때에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우리가 성경에서 도덕을 이끌어냈다면 우리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킬 것이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처형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처형할 것이다.
신약성서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잔혹한 도깨비 같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한 예로 그는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를 무시했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가족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퉁명스러울 정도로 무뚝뚝하게 대했고, 사도들에게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누구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도 따라 올 수 없는 새로운 가학피학증을 완성함으로써 새로운 부정의를 추가한다. 특정 종교가 고문이나 처형 도구를 신성한 상징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목에 걸기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Lenny Bruce는 이렇게 꼬집었다. “만일 예수가 20년 전에 죽었다면 신자들은 목에 십자가 대신 작은 전기의자를 걸고 다닐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다. 그 이전에는 ‘조상의 죄’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가 부계를 따라 정액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압도적으로 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신은 유전되는 아담과 이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예수가 우리 모두를 대속하기 위해 처형 당했고, 속죄를 받았다면 사람들은 왜 대를 이어 유다와 유대인들에게 보복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해독된 <유다 복음서>에는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오로지 예수가 그 역할을 맡으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교리도 이상하지만 그 이후로 유다가 비난을 받아 왔다는 점도 이해가 안된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되는 대신에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그렇게 하여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예수 살해자”라고 박해 받고 수 백만 명이 학살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 인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John Hartung은 예수는 구원을 받을 자신의 內集團을 엄격하게 유대인으로 한정했다고 말한다. 또 “너희는 살인하지 마라” 는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구체적인 의미였다. ‘네 이웃’과 관련된 계명들은 모두 똑같이 배타적이다. 12세기의 랍비였던 Moses Maimonides는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누군가가 이스라엘인을 죽이면 계율을 위배한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를 죽이면 처형되지 않는다.” 하텅은 유대최고법원이 내놓은 말도 인용한다. 동물이나 이교도를 죽이려다 이스라엘인을 죽이면 무죄라는 것이다. 또, ‘봉인된(구원된)’ 사람의 수가 14만 4천명이라고 한정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은 유대인 12부족에서 각각 12,000명을 뽑은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이들 모두 여자에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뜻은 그들 중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며, 그것이 종교에 가해지는 주된 비난 중 하나이다. 인도가 분리될 당시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폭동으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누가 누구를 살해할지를 정하는 꼬리표는 종교적인 것밖에 없었다.
도덕적 시대정신
여성 참정권, 노예 해방, 식민지 해방 등을 비롯하여 그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변화였으며, 그 변화는 종교와 아무 관계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은 ‘종교 때문에’ 가 아니라 ‘종교에도 불구하고’ 에 해당된다.
악의 경계를 전인미답의 경지까지 확장했다고 평가를 받는 히틀러가 유독 사악해 보이는 것은 우리시대의 더 자애로운 기준으로 보기 때문인 듯하다. 비록 히틀러가 끔찍했다고 해도 당시의 시대정신에서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시대정신은 빠르게 변하며 그리고 넓게 퍼져간다. 언젠가는 동물해방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시대정신이 변하는 것은 관찰된 사실이며 종교가 그것을 이끌지는 않았다. 킹 목사는 성경이 아닌 휴머니스트 간디에게서 자신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의 철학을 이끌어 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무신론자였을까?
스탈린은 무신론자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를 다녔지만 성년이 된 후 러시아정교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전반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의 무신론이 야만적 행위의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증거는 없다.
히틀러가 무신론자라는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퍼뜨려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며 종교인들이 무신론을 비판하는 사례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가톨릭 신앙을 버렸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없다. 반면에 <나의 투쟁>에는 그가 가톨릭 신자였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많이 나와 있다. 훗날 부총통이 된 Rudolf Hess는 1920년에 보낸 편지에서 히틀러가 독실하고 훌륭한 가톨릭 신자라고 언급했다.
히틀러는 1933년에 베를린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신앙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신론 운동에 맞서 싸움을 시작했고 …” 1941년에도 그는 측근 Engel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영원히 가톨릭 신자로 남을거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을 예수의 살해자라고 보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히틀러는 묘하게도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늘 단호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세네카는 “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라고 했다.
교황 피오12세는 나치스와 맞서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거부했다. 그 문제는 지금도 가톨릭 계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히틀러는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독일 기독교인들과 가톨릭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짜로 믿는 척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히틀러의 악행이 무신론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없다.
1939년 11월 뮌헨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가 있은 후, 뮌헨 대주교였던 파울하버 추기경은 성당에서 히틀러의 안전에 감사하는 기도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나는 무신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8.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근본주의와 과학
성경의 진리란 추론과정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이다. 그 책은 옳으며 만일 증거가 그것과 모순이 되면 버려야 할 것은 책이 아니라 그 증거여야 한다. 대조적으로 과학자인 내가 믿는 것은 성경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어느 과학책이 틀렸다면 누군가 그 잘못을 말할 것이고 책의 수정본이 나온다. 하지만 종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은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절대론의 어두운 이면
절대론은 오늘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며 특히 이슬람과 초기 신정국가 단계에 있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절대론은 언제나 강력한 종교 신앙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종교가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된다.
<구약>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의 하나는 불경죄에 가해지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형법은 불경죄를 저지른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의 헌법에도 여전히 배교행위는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라고 더 나을 것은 없다. 불경죄는 영국 법전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2005년 한 기독교 단체가 BBC 방송국을 불경죄로 고발한 사례도 있다.
American Taliban이라는 웹 사이트에는 현 미국 여권 인사들의 어록이 실려 있다. “우리는 그들의 국가를 침략하여 지도자들을 죽이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 “조지 부시는 미국 투표자의 다수가 선출한 것이 아니라 신이 임명한 것이다.”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우리는 환경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전직 장관의 말 등등.
신앙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
나는 배아를 죽이는 것에 열렬히 반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어른을 죽이는 것에는 열광하는 듯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지 부시는 텍사스 주지사 재임 시에 그 어떤 주지사보다 많은 사형을 집행했다. 평균 9일에 한 명씩 사형이 집행되었다. CNN 기자 터커 칼슨은 이런 기사를 썼다고 한다. 부시가 사형수였던 여자가 집행유예를 탄원하던 모습을 흉내 내는데 부시는 입술을 오므리고 훌쩍이며 “제발요,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했다고 한다. 그 여성은 자신이 한때 배아였던 점을 언급했다면 좀더 공감을 얻었을지 모르겠다.
위대한 베토벤 오류
“임신 중절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습니다. 그녀는 이미 자식이 여덟인데, 세 명은 귀가 먹었고 두 명은 눈이 멀었고 한 명은 정신지체아입니다. 당신이라면 어찌 하겠습니까?” “ 임신 중절을 시키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살해한 겁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으며 이야기마다 사실을 가리키는 전제들이 멋대로 변형되어 있다. 사실 베토벤은 장남이었다. 첫째가 유아 때 죽었으니 장남이 되었고, 첫째는 눈이 멀거나 장님도 정신지체도 아니었다. 물론 부모가 매독에 걸리지도 않았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나중에 결핵으로 사망하였지만 당시에는 흔한 병이었다.
구글에서 검색되는 43개의 임신중절 합법화 반대 사이트는 모두 베토벤 전설을 인용하고 있었지만 그 논증이 비논리적임을 지적한 곳은 없었다. 한 마디 덧붙이면 모두 종교사이트들이다.
온건한 신앙이 광신을 부추긴다
우리는 종교 극단주의가 아니라 바로 종교 자체를 비난해야 한다. 즉, 끔찍하게 왜곡된 종교가 아니라 정상적인 종교 말이다. 볼테르는 오래 전에 그 점을 간파했다.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 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다.” 버트런드 러셀도 같은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한다.” 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비록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
이븐 와라크는 <내가 이슬람 교도가 아닌 이유>에서 “대다수의 이슬람 교도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간다. 코란은 이것 저것 뒤섞어 놓은 잡탕과 비슷하기 때문에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로운 구절을 찾아 낼 수 있고 전쟁을 원한다면 호전적인 구절을 찾아 낼 수 있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이다. 신앙은 그 어떠한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디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가질 수 없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9. 종교로부터의 도피
모든 마을에는 횃불이 있다. 바로 교사이다. 그리고 그 횃불을 끄는 사람이 있다. 성직자가 그렇다. (빅토르 위고)
기타 내용(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의 상습적인 아동 성추행과 폭행 내용들은 이제는 진부하므로)은 생략함.
10.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상상의 친구
모든 어린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상상의 친구이며 동료이며 비밀을 털어 놓을 자기만의 친구가 있다. 어린 애들이 특히 좋아하는 귀여운 인형이 그런 친구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신을 떠나 보내면 남게 될 틈새 중 하나이다. 세대를 거치면서 아이들이 이러한 상상의 친구와 결별하는 시기가 서서히 연기되면서 종교로 진화한 것이 아닐까?
위로
신이 존재하지 않고 도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신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 바 신의 심리적 정서적 필요성이다. 종교를 버리면 그 자리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 비록 종교가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위로를 두 종류로 나누고자 한다.
첫째, 직접적인 위로이다. 추운 산길에서 실을 잃은 사람에게는 세인트버나드 개와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브랜디 한 통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둘째,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얻는 위로가 있다. 전쟁 미망인이 그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에게서 위로를 받거나 그의 남편이 영웅적으로 전사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어떤 상황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철학자는 노인이 죽는 순간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한 때 그였던 아이는 오래 전에 죽었다. 갑자기 목숨이 끊어져서가 아니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론 조사결과 미국인의 95%가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진정으로 믿는다면 왜 그들은 앰플포스 대수도원장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한 추기경이 자신이 죽어간다고 말하자, 그는 기뻐하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축하합니다. 아주 희소식이네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거의 웃음을 불러 올 정도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아주 드문 의외의 일화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믿음이 독실한 환자에게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이야기해주면 왜 그녀의 침대 옆이 모인 독실한 문병객들은 먼저 떠난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이것 저것 주문하지 않는 것인가. “ 로버트 삼촌을 만나면 우리 모두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세요….”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가장 소리 높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종교인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인들이 세속적인 삶에 집착할 가능성이 가장 낮아야 한다. 모든 살인을 죄라고 하지만 불쌍한 환자의 천국 여행을 진심으로 돕는다고 믿으면 왜 그것이 죄가 되는가?
안락사나 조력자살에 저항해야 할 사람들은 죽음을 轉移가 아니라 종말로 보는 우리 같은 무신론자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지한다.
오랜 세월 동안 노인들의 죽음을 지켜 본 한 간호사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종교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종교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할 힘을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부르카 안에서 바라본 세계
남성의 지독한 잔인성과 여성들의 비극적인 굴종을 상징하는 부르카는 표준 크기 2.5cm의 눈구멍을 가진 검은 옷이다. 종교의 거대한 힘 앞에 우리 모두는 부르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는 셈이다.
과학이 할 일은 바로 그 부르카의 창문을 넓히는 것이다.
한국불교개혁카페 원불사(原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출처] 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진 신 』 요약본|작성자 돈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