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dream 2023. 4. 14. 22:25

식과 명색

 

붓다께서 체득하신 진리인 연기법과 그 법칙의 현상적 전개인 12연기는 인류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라 할 수 있습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범부중생에게 이보다 더 기쁜 복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사에 명멸한 숱한 성인과 현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붓다께서만이 삶을 정확히 진단하고(苦聖諦,) 그 원인을 파악하고(苦集聖諦),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고(苦滅聖諦),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苦滅道聖諦)을 제시하셨습니다.

 

12연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6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수비우고뇌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지분이 ‘식 <-> 명색’입니다. 12연기를 3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부파불교의 한 부류는 식을 현생의 시작인 ‘재생연결식’으로 명색을 ‘수정란’으로 해석합니다. 또다른 이들은 12연기를 찰라 혹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전개되는 연기로 이해하면서 식과 명색을 ‘자아인 5취온’으로 해석합니다. 식과 명색을 분별한 것은, 윤회에서 식이 좀더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나머지 4온(색.수.상.행)인 명색은 식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 6입을 ‘내입처와 외입처인 12입처’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일부분 수긍이 가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식과 명색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명색을 6내입처로, 6입을 6외입처로, 촉을 앞의 지분들(식, 내입처, 외입처)을 조건으로 하는 만남(3사화합)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부파불교나 대승불교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데, 어찌 보면 가장 설득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인식론적인 측면이 좀더 강조되었다고나 할까요.

 

연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한 삶의 주기가 끝나고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었을 때,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는 사례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회의 주체인 5온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몸과 정신으로 재구성(reset, 단절과 상속)되는데, 전생의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 것이며 어떻게 재현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문은 12연기의 이해와도 맞물려 있다고 봅니다. 지혜가 무르익어서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면 해결될 문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