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있는가, 없는가?
윤회 있는가, 없는가?
최근 유투브에 몇몇 불교 출가승들이 윤회는 없다라는 주장을 하는 영상이 적지 않게 떠돌아다닌다.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과 익산 사자암에 거주하는 향봉스님이 대표적이다. 법륜스님이나 이중표교수도 마찬가지다. 결론인즉, 윤회의 주체 즉 아트만이 없는데 무아윤회라니 가당치 않다라는 얘기다. 윤회라면 당연히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할 것인데,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無我 아닌가. ‘나’랄 것이 없는데 무슨 윤회를 논하느냐, 이런 논지이겠다.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윤회는 존재하며, 윤회의 주체는 ‘나’라고 의심하지 않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이다. 즉 실체적 자아인 오취온이다. 무아는 깨달은 자의 세계이며, 윤회하는 범부중생들의 세계는 ‘나, 내 것, 나의 자아’로 뒤덮여 있다. 무아를 깨닫고 더 이상 안팎의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성자들이 비로소 윤회를 멈춘다.
중생의 자아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적 자아이다. 실체적 자아는 매트릭스 matrix이다. 꿈, 허상, 가상현실, 망상, 착각이라는 얘기다. 깨달으면 즉 실체적 자아가 소멸하고 나면 상호의존적인 연기적 자아가 전생의 과보인 금생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찰나생멸을 거듭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소멸한다. 이로써 윤회가 멈춘다. 궁극적 해탈, 열반이다.
“태어남은 부서졌다. 해야 할 일은 마쳤고 청정함은 이루어졌다.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해탈한 성자인 아라한의 선언이다. 선가의 오도송인 셈이다. 수수께끼 같고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선사들의 노래에 비하면 얼마나 깔끔하고 명확한가.
윤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논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초기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힌두교, 자이나교...물론 사후 천상세계로의 환생을 약속하는 유신론적 종교나 중국의 유교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윤회사상에 속한다. 불교 외부에서는 윤회가 사실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당연히 불교 내부에서는 윤회가 검증 가능한 사실의 영역이며 수행의 근거이다. 수행력이 깊어지면 과거생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꿈속에서든 현시에서든 인연 깊은 존재들에게서 귀띔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과거 삶의 모든 경험과 지식들을 어디에 저장되어 있을까? 경전에서는 명확히 그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비주의 계통에서는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하며(아카식 레코드 akashic records), 불교 유식학에 따르면 8식인 아뢰야식이다. 물론 초기불교에서는 6식(시각의식,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감촉의식, 생각의식)외에 또다른 의식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제6식(생각의식)이 그 모든 정보 덩어리라 여긴다.
다만 범부중생들의 경우, 과거 삶의 정보덩어리인 제6식을 소환하고 식별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능력이 계발되어 있지 않기에 윤회에 대한 확신과 검증이 어려울 따름이다. 수행력이 깊어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윤회를 부정한다면 불교는 설 자리를 잃는다. 사성제도 8정도도 12연기도 허망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뭇중생들이 태어날 때 초기조건(감성, 지능, 육체적 능력, 부모형제, 주위환경 등)이 제각기 판이한 이유도 그저 우연이거나 숙명에 지나지 않게 되며,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기에 그 어떤 의미 있는 노력도 우스꽝스러워진다. 어차피 한 번뿐인 삶인데, 도덕과 윤리, 이러저러한 수행 따위를 들먹여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진다.
윤회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과 그 결과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과 달리 이제는 제도권 학자들도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와 근거를 다양하게 제시한다. 3천여 사례를 기록한 정신과 의사인 이안 스티븐스 박사, 한국에서는 물리학자인 김성구 교수, 종교인류학자인 최준식 교수, 신경정신과 전현수 박사 등이 대표적이다.
상식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윤회의 증거를 몇 꼽아보자.
1. 초기조건의 상이성. 성별, 외모, 정신능력, 집안환경, 부모 등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출발선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윤회와 그 동력인 까르마 아니고서는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
2. 출생시의 기호. 갓 태어난 아기들 가운데 몇몇은 눈에 띄는 기호가 몸에 새겨져 있다. 숫자, 글씨, 반점 등으로 전생의 지위나 경험들을 유추할 수 있다.
3. 입덧. 산모의 취향이 아니라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전생 취향임에 분명하다.
4. 어린아이들의 기억. 특히 5세 이전의 어린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한다.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5. 죽은 이들과의 직간접적인 만남. 사후에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 가까운 존재들과의 만남도 드물지만 이루어진다. 포옹이나 가벼운 접촉,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6. 최면요법, 꿈속에서의 만남, 영매를 통한 접촉 등은 강하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조작 가능성이 높기에 굳이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초기불교 경전을 읽다 보면 자주 대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如理作意이다. ‘이치에 맞게끔 생각을 일으켜라’ 하는 정도로 이해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작의는 생각하는 작용인데 3가지로 나뉜다. 인식, 판단, 사유가 바로 그것이다. 인식은 의식이 대상(형상, 소리, 맛, 냄새, 감촉, 기억 등)을 확인하는 작용이다. 인식과정에 담긴 정보 data는 마음(감성, 이성)에서 개념적 분석을 거쳐 최종적 판단에 이르고, 대상과 나의 관계 설정을 위한 의도적 행위로 연결된다. 이것이 까르마(업)이며, 사유와 언어, 몸짓으로 전개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오롯이 마음 하나로 정리해 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식과정도 판단과정도 사유과정도 오로지 마음이 그 주체이며 주인공이다. 물론, 마음은 언어, 개념, 표상 등 인지에 관여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정신적 요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붓다께서 정신적 요소로 마음 하나만을 두지 않고 4가지(감성 受, 이성 想, 의도적 행위 行, 의식 識)로 구분하여 말씀하신 까닭에 주목해야만 한다. 식(인식)-수상(판단)-행(사유)-식-수상-행...대상을 마주한 나의 정신작용의 시스템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반복된다. 12연기는 바로 이 과정에 다름 아니다.
여리작의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지가 왜곡되어 있음을 깨닫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법의 보편적 성품인 3법인(무상, 고, 무아)이다. 3법인을 모르면, 우리는 대상을 실체적 자아인 5취온으로 착각하며, 3법인을 깨달으면 대상을 연기적 자아인 5온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인식론적 전환으로 인해 매트릭스가 깨지고, 무지와 집착이 남김없이 사라질 때 궁극적인 존재론적 전환으로 인해 범부에서 성자로 탈바뀜 된다.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윤회를 부정하면 불자가 아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인 4성제, 3법인, 12연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패륜적 악행인 것이다.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윤회의 종식, 소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