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dream 2024. 8. 26. 00:23

진리인 연기법

 

연기는 ‘상호의존적 발생’입니다.

연기하는 법(존재)의 속성은 無常, 苦, 無我입니다.

무상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한다

고는 불만족, 불완전, 실존의 한계상황

무아는 고정불변의 실체(아트만)는 없다

 

연기하는 법의 존재형식은 관계 속에서의 인과적 질서이며,

인과는 동시성, 중첩성, 다의성의 성질을 갖습니다. 

공시적 차원에서는 이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부부가 좋은 예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동시적으로 발생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원인이자 결과이며, 남편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다른 상황, 가게에서는 손님이며, 부모 앞에서는 자식이며, 자식 앞에서는 부모이며, 친구 앞에서는 친구이며, 직장에서는 각자의 지위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통시적 차원, 전후의 시차가 주어지는 차원에서는 인과의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예로써, 씨앗은 열매를 맺어야만 원인으로서의 성질을 드러냅니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지 않고,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부패해서 거름이 되거나 하면 다른 결과의 원인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또한 열매는 원인인 씨앗을 존재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원인과 결과의 이중성, 중첩성의 성질을 띄게 됩니다. 그리고 열매는 어떤 상황, 사건,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음식이 되기도 하고,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이 되기도 하며, 해치려는 의도로 상대의 눈에 던지면 흉기가 되며, 접시에 놓여서 인테리어의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다의적인 기능입니다.

 

인과에 관한 이러한 설명은 30여년 가까이 불교를 공부하면서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 여러 학술서들을 통해서 출가수행자 또는 재가수행자, 숱한 학자들의 고견을 접했지만 아쉽게도 일반론에 머물기 마련이었습니다. 물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유와 철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불교적 입장에서는 인과보다는 '조건'이 더욱 어울리는 개념입니다. 인과를 거론하면, 대체로 기계적이거나 단선적, 혹은 제 1원인을 추정하게 되는 그릇된 태도에 머물기 십상입니다. 그럼에도 과학적 방법론이 대세인 요즘에는 어쩔수없이 인과를 내세우는 것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 무아입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연기하는 것이며,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고정불변의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아트만)로서의 자아’는 없습니다. 하지만 경험적 개체인 ‘연기적 자아’는 존재합니다. 경험적 개체인 ‘나’는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입니다. 5온(色-몸, 受-감성, 想-인지, 行-의지, 識-의식)입니다. 물론 대다수가 범부중생인 인간은 '나, 나의 것'을 고집하는 '실체적 자아'로서 일상을 영위하기 때문에 5온이 아닌 5취온(5온을 나, 내것이라고 착각)입니다. 일정한 경지에 오른 성자만이 5취온이 아닌 5온으로 존재의 실상을 확인합니다. 

 

붓다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는 세상과 나의 관계, 상호작용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감각기관인 6根(눈, 귀, 코, 혀, 몸, 뇌)은 하드웨어입니다.

의식은 데이터베이스로 가치중립적입니다.

그리고 受와 想으로 이루어진 마음(心)은 소프트웨어로 언어, 개념, 표상 등의 기능으로 가치판단을 합니다.

즉, 바깥대상인 6境(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에 감각기관인 6근, 그리고 각각의 사건, 사태에 부합하는 6가지 의식(시각의식,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촉각의식, 생각의식)이 함께 만나서(3사화합) 정보가 마음에 입력됩니다.

입력된 정보를 마음에서 분류, 재해석하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린 후에 의도적 행위(업)인 생각, 언어, 몸짓을 출력시킵니다. 이러한 매커니즘이 나와 세상의 상호작용이며 이른바 경험적 총체로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같은 음식을 먹거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맛을 느끼고, 다른 감동을 받습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이 다릅니다. 이는 마음이 제각기 다른 까닭에서입니다. 모두가 고유의 색안경을 걸치고서 세상을 대하는 것입니다. 법의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여 인식론적 전환(감성, 인지 정화)을 이루고, 범부에서 성자로의 인격적 탈바꿈인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는 것, 이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무아를 통찰하고 그 깨달음을 일상에 체화, 심화시키는 의지적인 노력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천황도오 선사가 제자 숭신의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건넨 '수연청정'이 다름 아닌 깨달음의 일상적 체화와 심화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 흐를 뿐, 나를 세우지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