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삼프로tv> 기독교인과의 대화

slowdream 2024. 9. 26. 14:21

<삼프로tv> 기독교인과의 대화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에 흥미로운 자리가 펼쳐졌더군요. 얼마전에 서울대 종교학과 강성용 교수와 불교 얘기를 했던 때문인지 균형을 맞추고자 기독교인인 연세대 김학철 교수를 모셨더군요.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유일신론자, 실체론자, 플라톤주의자, 본질과 현상의 이원론자의 강론은 표현이 아무리 매끄럽고 그럴듯해 보여도 그 사유와 논리의 밑천이 어설픈 까닭입니다.

 

오래전에 기독교인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답을 준다면 저도 기꺼이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말이죠.

 

1. 무지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왜 삶과 그 의미를 모른 채로 태어나는지, 맹목적으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존재케 한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왜 존재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극적인 예로, 선천적 지적 장애인 경우입니다. 그들에게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 있을까요. 조물주는 왜 자신이 만든 세계에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요. 김교수 말대로라면,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질서입니다. 무지와 죄악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런 질서라면 저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2. 고통의 문제입니다. 김교수님은 부인의 예를 들면서 일상의 소소함에 감사하자는 혹은 그렇게 삶의 충만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위의 제 친구 또한 그런 태도였지요. 그런 감상적 태도는 동양의 노장자, 현학으로 충분합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친구에게 아직 한쪽 다리가 남아 있으니, 삶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은 소아암병동에 가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요즘도 진행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삶을 둘러보면 고통의 현장은 쉽게 확인됩니다. 출생시 조건의 차이로 인한 고통, 무한경쟁의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함으로써 받는 온갖 상대적 박탈감, 숱한 사고와 재난, 질병, 전쟁, 가족내 혹은 지인,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스트레스...이런 참혹함의 현실에서 삶의 긍정적 의미를 과연 추출해 낼 수 있는지.

 

3. 죄악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장담합니다. 이는 곧 욕망의 문제와 결부되는데, 우리 인간은 무엇 때문에 불손한, 거추장스러운,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는 곧 세상이 결코 좋아질 수 없으며, 좋아질 것이었다면 성인과 현자들이 즐비했던 오래 전 과거에 좋아졌어야 한다는 판단과 결을 같이합니다. 기독교적인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니체가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저도 기꺼이 동의합니다.

 

4. 신성모독입니다. 저는 예수님이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은 인정한다, 그러나 세상의 창조자인 그런 초월적 존재는 없다, 만약 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도 좋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성모독으로 벼락 맞을 일은 없다고 또한 반전의 토를 달았습니다. 신이란 전지, 전능, 전선한 자기완결적인 존재이기에 그 어떤 내적, 외적 자극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기에. 허공에 똥물을 혹은 꽃을 뿌린다 해도 허공이 좋다 싫다 반응할 리 만무하지요. 그런 완전한 신성의 소유자가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이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 해서 징벌을 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불량품을 생산한 창조자 자신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뭐 얼추 이런 소박하고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예상했지만, 친구는 머릿속에 각인된 교과서적인 답을 늘어놓았고, 이는 경험적 추론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에, 저를 기독교인으로 거듭 태어나게끔은 하지 못했습니다.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님은 어떻게 답을 하실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