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보편성에 대한 반론

slowdream 2025. 2. 28. 00:57

보편성에 대한 반론

 

 

살아가면서 누구나 예외없이 늘 자기 자리를 확인하려 애씁니다. 생명의 맹목적 추구인 ‘방향’에 대한 갈구라고 할 수 있겠죠. 안팎에 대한. ‘생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젖혀놓고 가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사유는 초월적 혹은 초월론적 경계는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 일반은 ‘보편, 일반’이라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정립합니다. ‘어떻게, 어디로’의 최종적 정립이죠. 역사 이래로 철학이라는 고상한 옷을 입은 모든 사유가 이 경계에 머물러 있고, 좀더 세련되게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고 가지쳐 왔습니다.

 

며칠 전 철학모임에서 ‘不定과 否定’에 대한 깊은 이해의 자리가 주어졌어요. 정말 즐거웠는데, 같이하지 못한 친구들의 자리가 좀 아쉽긴 했습니다. 어쨌든, <차이와 반복>의 저자인 들뢰즈의 ‘비존재’와 ‘(비)존재’의 차이-어떻게 보면 동아시아 철학의 표상인 反, 復, 回, 不, 非, 無 등에 대한 개념 이해의 연장이기도 할 텐데-를 들뢰즈 너머로 보내버린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들 생김새가 다르듯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삶이 더없이 편안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불안합니다. 불편합니다. 뭔가 있는데, 그 무엇이 있는데...합니다. 대체로 그 무엇을 내 밖에서 구합니다. 자기 밖에서 구하는 이런 태도가 바로 ‘보편성, 일반성, 이데올로기, 자본, 상품, 신, 초월적 존재, 형이상학, 우주, 아버지, 큰타자, 팔루스, 사랑, 자비, 언어, 질서, 문법, 규칙, 도덕’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런 태도는 그 외면적 질서가 내재화하고, 그럴 소지가 큽니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채우는 것이죠. 헤겔과 니체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입니다. 그 과정이 아주 매끄럽습니다. 투항입니다. 정신병리학적으로 얘기하자면, ‘거세’ ‘마조히즘’입니다. 서양철학사에서 니체, 기독교에서 예수, 인도에서 붓다의 출현이 감동적인 것은 이 모든 주어진 질서를 전복하는 힘, 저항에서입니다. ‘보편성’에 대한 의심, 부정, 전복입니다.

 

모든 사유는 변증법, 변중술, 변중론입니다. 핵심은 ‘변’입니다. 그 ‘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곧 나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며, 내 삶의 궁극적 가치가 무엇이냐로 귀결됩니다. 말하자면, 성은 없고 성욕만 난무합니다. 성과 성욕의 거리가 ‘변’이며, 그 자리를 메꾸는 것이 ‘보편성’이라는 허구의 실체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그 거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애틋한 노력이 철학이며 사유라는 것일진대. 진정한 좌표를 확인하는 태도가 보편성에 매몰되지 않은 ‘나’입니다. 그 무엇일 수도 없고 그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런 까닭에 ‘무엇’일 수 있고 ‘아무’일 수 있는...그...보편. 보편성. 헤겔 따위, 니체 정도...젠장. 몇 번째 봄날을 맞이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