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 혜능, 조주, 지눌, 숭산
달마, 혜능, 조주, 지눌, 숭산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내가 불사를 엄청 지었는데 공덕이 어찌합니까?”
“없다 無!”
또 양무제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몰라 不識!”
조주 선사에게 제자가 물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無!"
보조국사 지눌의 말씀이다.
但知不會 是卽見性
다만 몰라를 안다면 곧바로 성품을 깨닫는다
30여년간 해외포교에 나섰던 숭산스님 (1927-2004)은
“다만 모를 뿐, 다만 할 뿐!”을 일갈했다.
無와 不識, 不會는 저렇게 이해할 것이 아니다. 내 아무리 선불교에 비판적이긴 하여도, 이러한 해석 앞에서는 비판에 앞서서 무참해질 수밖에 없다. 선불교의 기치는 단연코 ‘不二, 곧 無分別’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한국의 숱한 선승들과 법사들이 주장자와 죽비,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을 내지르고, 일갈하면서 ‘분별이 일어나는 그 근본자리’를 직시하라고 다그친다. 근본자리는 곧 一心, 한마음, 참나, 如來藏, 眞如, 平常心, 法性 등으로 옷을 갈아입지만 죄다 한통속이다. '불이'사상은 '둘이 아닌 하나'가 아닌, 대립되는 두 실재(선악, 미추, 유무, 주객 등등)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라는 의미이다.
노장자를 계승한 선불교의 다수파 종취를 따르자면 여기에서의 ‘없다’ ‘몰라’는 ‘無爲, 무분별, 분별하지 말라’로 이해함이 옳다. 물론, 선불교에서 소수파에 지나지 않는 몇몇 선승들과 나로서는 이러한 그릇된 개념의 ‘무분별’이 마땅치 않다. 그 정법안장이 열리는 줄탁동시의 인연을 궁리하자면, ‘정확하게 분별하되 집착하지 말라’로 무분별이 제대로 가늠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기에. 선불교 6조 혜능이 금강경 낭독을 듣고서 깨쳤음에도 무분별의 자리인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일갈했다는 일화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지닌다. 게다가 혜능 이후 법을 이어받은 조사들이 여래선 如來禪, 조사선 祖師禪이라는 차별적 개념을 창안하는 망령된 짓거리를 펼친다. 조사선은 스승의 말끝에 문득 깨닫는다는 言下大悟 곧 頓悟이며, 여래선은 오랜 시간 교학과 수행을 거쳐야 하는 漸悟이기에 여래선은 조사선에 열등하다는 패륜적 작태를 거침없이 행한다.
대승불교 가운데 그나마 붓다의 가르침을 일부 전승해온 대승 반야부 경전인 <금강경>의 空사상은 ‘실체는 없되 실재한다’는 가르침이다. 무분별의 자리는 ‘실체’이다. 그러하기에 혜능의 태도는 공을 실체화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치이자 원리, 법칙인 공을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존재, 힘으로 착각함이다. 공은 존재의 3가지 성품, 특징(3법인)이다. ‘영원불변하지 않고 변하며 無常,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苦, 실체라고 할 것이 없다 無我.’
‘없다, 몰라’는 일종의 無爲인데, 무위 또한 有爲임을 아름다운 비유로써 드러내 보겠다.
거북이가 알을 낳으려고 바닷가로 간다. 알을 낳고서 천적들의 습격을 우려해 알을 모래로 덮는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발자국이 마음에 걸린다. 언덕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꼬리로 발자국을 지운다. 꼬리의 흔적은 어찌할 것인가.
이 무참한 형편을 어떻게 할꼬, 억!!!
*불교가 중국에 수입되면서 노장자 개념을 많이 차용한 까닭에, 노장자의 유위.무위 개념과 불교의 유위.무위 개념을 동등선에 놓고서 이해하는 폐단이 생겼다. 노장자와 다수파 선불교의 종취인 유위는 분별, 무위는 무분별이다. 반면, 근본불교의 유위(법)는 무지에서 비롯하는 실체적 분별로 집착과 과보 즉 윤회를 발생시키는 존재상태 또는 행위, 무위(법)는 지혜에서 비롯하는 연기적 분별이며 무집착과 무과보, 즉 윤회를 종식시키는 존재상태 또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즉 노장자의 유위.무위는 불교의 유위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