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최근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양자중력학자라고 설명이 되어 있던데, 이는 아인슈타인이 열망했던 ‘통일장이론, 그 모든 것의 이론(TOE ; theory of everything)’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이론물리학자임을 말합니다. 양자는 핵력과 전자기력이 작용하는 미시세계이고 중력은 거시세계의 힘인 즉 이 둘을 통합하면 우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뜻이겠죠.
어쨌든, 로벨리에 따르면 시공간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뉴튼, 아인슈타인, 그리고 양자역학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시간을 변화, 공간을 경계로 이해합니다. 뉴튼은 객관적이며 절대적 시공간을 설정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객관적이지만 상대적인 태도로 규정합니다. 로벨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들 모두를 실체론자로 규정하고, 말하자면 닐스 보어의 사고의 연장선에서 얘기합니다. 계량적인 시계의 시간(크로노스)가 아닌, 계량화할 수 없는 사건의 시간(카이로스). 주관과 객관이 관계를 맺는 순간, 시공간이 펼쳐진다는 주장입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균일한, 균질적이고 동일한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이는 연기를 토대로 하는 불교적 사유입니다. 빅뱅이라는 공통된 사건이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빅뱅은 인식주체인 내가 대상과 관계를 맺음이며, 빅크런치 또는 빅립은 그 관계의 소멸입니다. 인식 주체인 모두가 고유한 개별적 우주입니다.
시공간뿐만 아니라, 나와 내 밖의 모든 대상은 관계를 맺는 순간, 일어났다가 곧 사라집니다. 조건에 따라서 발생하고 소멸할 따름입니다. 그 무엇이 있어서 생멸이라는 현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 그 자체가 조건에 따라 펼쳐지는 연속적 흐름의 일부인 현상입니다. 그게 삶입니다. 연기입니다. 존재는 관계에 따라서, 사건의 맥락에 따라서 춤을 추는 유동적 현상일 따름입니다. 그 어디에도 ‘나, 내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프리초프 카프라의 저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도 불교적 사유를 읽을 수 있었죠. 대개의 양자물리학자들은 알든 모르든 불교적 사유에 접근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양자역학자인 리 스몰린 또한 존재란 ‘인과적 질서의 흐름’이라고 정리하고, 인간과 사물이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실체적으로 인식할 따름이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이들의 사유가 매트릭스를 설명하는 12연기에 어느 정도로 다가갔는지는 가늠키 어렵습니다. 관계맺음에 이어, 인식주체 곧 경험적 개체에 따라 대상이 규정되며, 그 대상에 따라서 또한 인식주체의 정체성이 규정된다는 사유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존재 혹은 존재 상태의 보편적 속성은 ‘늘 변화하고 불안정하며 실체가 없다(무상.고.무아)’이며, 그 개별적 속성은 연기하기에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인과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과의 동시성, 중첩성, 다의성을 정립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어찌됐든,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는 현대과학과 불교의 필연적 만남을 얘기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텍스트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