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업은 늘 좋은 과보를 낳을까?
선업은 늘 좋은 과보를 낳을까?
불교 이론의 핵심인 진리는 연기법이다. 이는 4성제에서 고성제(유전문)와 고멸성제(환멸문)를 가리킨다. 그리고 고집성제는 고성제의 조건으로 무지와 집착을 밝히며, 고멸도성제는 고멸성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수행론으로 8정도인 바 이것이 곧 선업이다. 그런 즉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이해를 떠나 일상에서의 우리 행위는 8정도인 선업에 초점을 맞추어야 마땅하다.
인간의 행위는 세 가지로 나뉜다. 사유, 언어, 몸짓. 언어와 몸짓은 의도적 사유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결국 업은 의도라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업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다. 선업은 늘 좋은 과보를 낳아야 하고, 불선업은 늘 나쁜 과보를 낳아야만 하는지?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대체로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반대의 상황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선악의 의도 또한 법이기에 맥락에 따라 연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선업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악업으로, 악업이라 여겼던 것이 선업으로 돌변함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업은 지혜가 바탕해야만 한다. 의도하고 말로 내뱉고 몸짓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지혜가 발동해야만이 의도했던 대로 과보가 발생한다. 조건법 또는 인과법은 원인과 조건이 결과와 동시에 발행함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모든 조건이 부합해야만 의도가 100퍼센트 실현되는데, 의도나 의지 또한 다양한 조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기에 결과는 대체로 기대에 못 미치기 마련이다.
배가 부른 아이에게 밥이 보약이라며 한 숟가락 더 먹이고자 하는 모성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 한 숟가락이 아이의 비만과 다양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면, 그순간 엄마의 선한 의도는 불선한 의도로 돌변해 버린다. 굶주린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손길 또한 마찬가지다. 길고양이의 굶주림을 조금이나마 면하게 해주겠다는 애틋한 마음은 하위 포식자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생태계 질서를 뒤흔는다. 지혜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집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에게 교화하겠다는 선한 의도가 아니라 화가 나서 나무랐는데, 청소년이 내심 각성하여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면, 행위의 대상으로 인하여 악업이 선업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조건법 또는 인과법은 결과 또한 원인의 조건인 까닭이다.
선과 악의 실체가 없기에 선이 악 되고, 악이 선 되는 일이 드물게 발생하긴 하지만, 대체로 선업은 좋은 결과를 낳고, 불선업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다만,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에 우리의 이해가 갇혀서는 안 된다. 인과법칙의 동시성, 상호성, 다양성을 간과하지 말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그치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생각을 청정히 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일세
<칠불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