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我 無常 不生不滅
마지막 날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일찍 시작된 포행(걷기명상)은 봄바람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듯한 행위였다. 아직은 한국의 봄바람이 차게 느껴지신 듯한 낫한 스님은 진갈색 옷을 두르시고는 동국대 교정을 조용히 조용히 어루만지시는 듯하다. 강연 첫 시작은 한 노비구니 스님께서 온몸의 긴장을 풀며 이완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시간이 있었고, 마무리는 조용한 노래로 끝냈다. 꽃처럼, 이슬처럼, 산처럼, 땅처럼....
그 노래를 들으시며 조용히 나오시는 낫한 스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나는 운이 좋아 스님의 얼굴이 바로 보이는 앞자리였다. 스님의 하나하나의 표정이 참 평온했다.
“저는 오늘 걷기명상을 하면서 나의 몸속에 있는 대대로의 조상들과 자연들을 만나 無我의 상태를 즐기며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라는 첫마디로 강연을 시작하신 낫한 스님.
Bellmaster(집전자)는 미국의 목사인 한 백인이 맡았으며, 아프리카의 목사인 한 분도 소개가 되었다. 5살 때 Plum village 에 들어와 15살에 사미계를 받은 백인스님도 소개가 되며, 그날의 강연은 시작되었다. 총무원 사회부장 스님이신 미산 스님의 조용하고도 정확한 통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인상이 깊었으리라..
스님의 오늘의 화두는 無我, 無常, 不生不滅이었다. 남방불교의 특징인 쉬운 설명과 은유, 예시는, 한국불자들에게 더욱 많은 이해와 신심을 일으키기에는 적당한 시기였다. 無我, 無常, 不生不滅의 이치를 쉽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 한 가지 예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드셨다.
앞서 말한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속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들의 인자가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전자입니다. 그 유전자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아버지의 것과 어머니의 것과 그리고 모든 조상의 융합체로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간의 다툼이 일어난다 했을 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그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잘못된 견해와 편견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은 잘못된 것이며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화엄경에 말하기를, 아들의 몸 세포 하나하나에 조상대대로의 인자가 그대로 전해진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수행자는 부모님에게 화를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無我의 상태를 즐기십시요. 조상과, 조사스님들의 자취와 힘을 느끼십시요. 無我에 대한 통찰은 무한한 에너지를 가져다 줍니다.
여기 한 송이 꽃이 있습니다. (노란 수선화인 듯한 한 송이 꽃을 들어올리신 낫한 스님) 이 꽃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緣起(연기-interbeing : 현재 영어사전에도 등록되어지지 않은 신조어)에 의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꽃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송이 꽃은 개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융합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송이 꽃에는 구름과 빗물과 햇살과 바람과 흙과 벌과 산소가 숨쉬며 같이 공존해 있고, 그것들로 인해 연기하여 이루어진 융합존재인 것입니다. 그 안에 또한 시간과 공간과 의식이 존재합니다.
또한 이 한 장 종이에도 한그루의 나무와 빗물과 흙과 구름이 있습니다. (흰 종이를 들어올리시며) 종이와 꽃의 진정한 모습은 태어남도 없고 멸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만들어졌다 창조되다. 만들어지다. 태어나다 하지만, 한 장의 종이를 보노라면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 장의 종이로 존재하기 전에, 이 종이가 나타난 것은 이 종이는 여러 가지 존재에 의해 형성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존재는 緣起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조건이 없어지면, 그 존재의 나타남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십시오. 푸른 하늘에 많은 구름들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의 구름을 골라 보십시요. 그 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구름은 어느새 모양을 바꿔 이내 흩어지고 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구름이 없어졌다고 해서 구름이 죽었다고 슬퍼할 것입니까?
구름은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그 구름은 단지 비나 물, 얼음으로 변할 뿐입니다. 구름이 없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 입니다.
구름 -> 비 -> 물 -> 얼음 -> 물 -> 수증기 -> 구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이와 같은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름은 다시 여러분을 부를 것입니다. 이것을 無我라 하며 無常하다 합니다. 無常의 지혜를 얻어, 해탈의 자유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럼 無常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니다. (성냥을 집어드시며.) 성냥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라 갖추어진 조건으로 인해 생성된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몸을 감추어 버립니다. 그 조건이 없어지면, 모든 사물들은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은 없습니다. 다만 새로운 모습으로 결합한 것입니다.
(성냥을 그어 불을 일으키시며) 이 성냥의 열은 나의 몸속으로 스며들었으며 연기는 우리 몸속 모든 우주 만물에 스며들었습니다. 몇 주 후의 비는 바로 이 성냥의 연속성입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종이 한장을 태우시며) 이틀 후 나는 France로 가지만 이 종이는 나와 함께 갑니다. 바로그 열기가 나의 몸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얻었을 때, 부조화, 원망, 화, 두려움 같은 부정적 존재를 없애고 대자유와 대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화두에 대해서 아실 겁니다. 공안이라고도 하는... 정념의 힘과 선정의 힘을 개발할 줄 안다면 여러분이 부처님의 영혼을 부르는 자이며, 그리고 그 부처를 깊이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의 명호를 부르는 자는 누구인가? 부처님은 누구인가? 바로 부르는 자가 부처님이니... 부처님은 부처가 아닌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못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흙이 있기에 풀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부처가 아닌 존재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있는 나도, 나란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처님이라 부르는 그 부처를 부처라 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Wrong) 것입니다. 절하는 나 자신이 공하고 부처님이 공하므로 그 안에 완전한 communication 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간이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견해, 편견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처님인지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空, 부처님의 성품도 공적하다...모든 공안은 緣起, 無我, 無常 위에 있어야 진정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초 한자루를 꺼내 불을 붙이시며)
촛불은 불꽃과 연기와 냄새가 끊임없이 발생됩니다. 그 불꽃이 타고 있는 동안은 그 불꽃이 순간순간 새로운 형태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로 찰나찰나 새롭게 태어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공안을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이 촛불이 다 타들어 갔을때 이 촛불을 계승할 수 있는가?
다시 촛불로 계승할 수 있는가?
출처 http://blog.daum.net/rand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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