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95

선업은 늘 좋은 과보를 낳을까?

선업은 늘 좋은 과보를 낳을까? 불교 이론의 핵심인 진리는 연기법이다. 이는 4성제에서 고성제(유전문)와 고멸성제(환멸문)를 가리킨다. 그리고 고집성제는 고성제의 조건으로 무지와 집착을 밝히며, 고멸도성제는 고멸성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수행론으로 8정도인 바 이것이 곧 선업이다. 그런 즉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이해를 떠나 일상에서의 우리 행위는 8정도인 선업에 초점을 맞추어야 마땅하다. 인간의 행위는 세 가지로 나뉜다. 사유, 언어, 몸짓. 언어와 몸짓은 의도적 사유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결국 업은 의도라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업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다. 선업은 늘 좋은 과보를 낳아야 하고, 불선업은 늘 나쁜 과보를 낳아야만 하는지?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대체로 결과가 기대에 미..

그 모든 것의 시작, 처음

그 모든 것의 시작, 처음 삶은 신비합니다. 이는 곧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고백입니다. 인류 지성사는 이러한 신비의 영역을 벗겨내고, 무지를 깨뜨리기 위한 장엄한 서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천체물리학, 양자역학, 생명과학, 뇌과학, 인공지능, 심리학 등의 학문은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냈고, 또 어제의 업적이 무시될 만큼 환상적인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를 궁금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정신과 물질의 처음, 시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시작, 처음을 알면 그 과정과 끝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사유와 관찰은 제 1원인에 대한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거나, ‘부동의 원동자’라는..

일체(一切)란 무엇인가

일체(一切)란 무엇인가 붓다께서는 일체(세상)가 무엇인지 묻는 제자에게 일체란 12입처(入處)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입처는 익히 알다시피 인식주체인 6근과 인식대상인 6경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6외입처와 6내입처를 가리켜 12입처라 합니다. 입처는 6근과 6경에 어떤 자리가 있음을 가리킵니다. 곧 마음이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어떤 마음이 자리하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인지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6외입처에 하나님이나 브라만 등의 본질이 자리하면 객관적 실체론, 6내입처에 아트만, 자아, 참나가 자리하면 주관적 유아론의 덫에 걸립니다. 불교는 당연하게도 이 모두를 여윈 연기론입니다. 아공법공(我空法空)입니다.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과 풍경의 속성에 좋은 맛과 멋짐..

우주의 신비, 타임슬립과 타임루프

우주의 신비, 타임슬립과 타임루프 인간은 막연하나마 우주를 동경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갈릴레오, 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스티븐 호킹 등의 훌륭한 과학자들에 의해 그 신비의 세계를 조금씩 엿보게 되었죠. 물론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고작 4-5%만을 밝혀냈을 뿐, 그 나머지는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설정해 놓았을 따름입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열망했던 통일장이론(TOE, 모든 것의 이론) 또한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그 숙제를 풀었다며 끈이론이 등장했지만, 이는 관찰과 검증이 불가능한 관념적 차원이라서 학계에서는 신뢰를 주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양자과학이나 생물학, 심리학 등이 불교적 사유에 접근하고 있지요. 이는 곧 2600년 전 붓다의 ..

매트릭스에서의 탈출 가이드 - 12연기

매트릭스에서의 탈출 가이드 - 12연기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계를 진실된 사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각하고 지각하는 이 생생한 순간이 허구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2600여 년전 고대 인도의 성자 붓다께서는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무지와 욕망에서 비롯한 착각이라고 단호히 일깨워주셨습니다. 요즘 언어로 얘기하자면, 증강현실 AR, 가상현실 VR, 매트릭스 matrix, 시뮬라크르simulacre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눈앞의 현상계는 진실하지 않으며, 우리의 무지와 욕망으로 덧칠된 망념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삶의 본모습은 무지와 욕망을 걷어내면 당연히 드러나겠지요. 간략히 추리자면, 무지는 존재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불가지론과 여실지견

불가지론과 여실지견  뇌과학에서는 정신적인 인식과정을 뇌신경세포의 작용으로 이해한다. 바깥 사물인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감각기관이 입력하면, 그 데이터를 뉴런과 시냅스를 토대로  화학신호와 전기신호로 전용한 후에 분석과 판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주체의 행위가 형성된다. 즉 입력 -> 판단 -> 출력의 시스템이 원활하게 진행되면서 대상과 주체의 상호작용이 또한 형성된다. 지극히 유물적 환원론이다. 인식과 판단, 그리고 행위의 조건인 의도. 이러한 정신작용이 물질과 상호의존적이지만 전혀 다른 실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지 못한다. 유기체는 물질 일원론이 아니라, 물질.정신 이원론이다. 그런 까닭에 바깥 대상의 실체 또는 본질을 결코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연하지만, 개미나 나비..

들뢰즈와 禪

들뢰즈와 禪  질 들뢰즈는 ‘동일성’을 혐오하는 ‘차이’의 철학자다. 그의 주저인 에서 ‘차이’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거칠게나마 이해해 본다. 그는 존재와 존재가 현실로 드러나기까지의 상태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이념(미분화)-강도(개체화)-반복(분화). 프로이트의 무의식-전의식-표층의식, 라캉의 실재계-상상계-상징계의 구도와 비교해 본다면 이해의 접근이 한결 가뿐해질 듯도 싶다. ‘이념’은 곧 ‘차이’로 존재적 개념이 아니고 존재의 속성인 ‘이치, 원리’이다. ‘강도’는 바깥인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각인되는 내적 크기, 깊이, 충격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실의 층에 모습을 드러내는 ‘반복’은 존재의 생성이다. 모든 존재는 ‘차이’를 그 태생적 한계로 지닌다. 말하자면, 동일성을 근거로 하는 똑같은 또..

달마, 혜능, 조주, 지눌, 숭산

달마, 혜능, 조주, 지눌, 숭산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내가 불사를 엄청 지었는데 공덕이 어찌합니까?”“없다 無!”또 양무제가 물었다.“당신은 누구요?”“몰라 不識!” 조주 선사에게 제자가 물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없다 無!" 보조국사 지눌의 말씀이다.但知不會 是卽見性다만 몰라를 안다면 곧바로 성품을 깨닫는다 30여년간 해외포교에 나섰던 숭산스님 (1927-2004)은“다만 모를 뿐, 다만 할 뿐!”을 일갈했다. 無와 不識, 不會는 저렇게 이해할 것이 아니다. 내 아무리 선불교에 비판적이긴 하여도, 이러한 해석 앞에서는 비판에 앞서서 무참해질 수밖에 없다. 선불교의 기치는 단연코 ‘不二, 곧 無分別’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한국의 숱한 선승들과 법..

보편성에 대한 반론

보편성에 대한 반론  살아가면서 누구나 예외없이 늘 자기 자리를 확인하려 애씁니다. 생명의 맹목적 추구인 ‘방향’에 대한 갈구라고 할 수 있겠죠. 안팎에 대한. ‘생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젖혀놓고 가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사유는 초월적 혹은 초월론적 경계는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 일반은 ‘보편, 일반’이라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정립합니다. ‘어떻게, 어디로’의 최종적 정립이죠. 역사 이래로 철학이라는 고상한 옷을 입은 모든 사유가 이 경계에 머물러 있고, 좀더 세련되게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고 가지쳐 왔습니다. 며칠 전 철학모임에서 ‘不定과 否定’에 대한 깊은 이해의 자리가 주어졌어요. 정말 즐거웠는데, 같이하지 못한 친구들의 자리가 좀 아쉽긴 했습니다. 어쨌든, 의 저자인 들..

근심과 멧돼지 / 조영관

근심과 멧돼지 / 조영관  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이리 힘든 것은내 안의 깊은 근심 때문이다, 라고썼다가 지운다. 이를테면 이러한 우울이란 얼마나 맑고 뜨겁고 쾌한 것인가 그래서 나, 그러한 쾌함이질박하고 넉넉할 수만 있다면그 사랑이 얼마나 장엄한 것일 것인가, 라고 썼다가또 지운다. 장엄하지 않으면 또 어쩔 것인가. 멧돼지처럼 진퇴를 모르고앞으로만 달려가는 그 외로운 질주들 그래서, 나 감히 쓴다.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너만을,이 문장 위에서 잠시 나는 숨이 가쁘다. 그건 또 얼마나 컴컴한 벼랑일 것인가 영원함을 믿었던 그것으로, 솔직하다는 것으로힘들었던그 많은 날들은 그래서, 나, 내 사랑은 근심이거나 통속이거나, 라고 쓰다가,이렇게 쾌한 우울 속에 있는 내가 바로 너이기에너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