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88

달마, 조주, 지눌, 숭산

달마, 조주, 지눌, 숭산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내가 불사를 엄청 지었는데 공덕이 어찌합니까?”“없다 無!”또 양무제가 물었다.“당신은 누구요?”“몰라 不識!” 조주 선사에게 제자가 물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없다 無!"  보조국사 지눌의 말씀이다.但知不會 是卽見性다만 몰라를 안다면 곧바로 성품을 깨닫는다 30여년간 해외포교에 나섰던 숭산스님 (1927-2004)은“다만 모를 뿐, 다만 할 뿐!”을 일갈했다. 無와 不識, 不會는 저렇게 이해할 것이 아니다. 내 아무리 선불교에 비판적이긴 하여도, 이러한 해석 앞에서는 비판에 앞서서 무참해질 수밖에 없다. 선불교의 기치는 단연코 ‘不二, 곧 無分別’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한국의 숱한 선승들과 법사들이 ..

보편성에 대한 반론

보편성에 대한 반론  살아가면서 누구나 예외없이 늘 자기 자리를 확인하려 애씁니다. 생명의 맹목적 추구인 ‘방향’에 대한 갈구라고 할 수 있겠죠. 안팎에 대한. ‘생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젖혀놓고 가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사유는 초월적 혹은 초월론적 경계는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 일반은 ‘보편, 일반’이라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정립합니다. ‘어떻게, 어디로’의 최종적 정립이죠. 역사 이래로 철학이라는 고상한 옷을 입은 모든 사유가 이 경계에 머물러 있고, 좀더 세련되게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고 가지쳐 왔습니다. 며칠 전 철학모임에서 ‘不定과 否定’에 대한 깊은 이해의 자리가 주어졌어요. 정말 즐거웠는데, 같이하지 못한 친구들의 자리가 좀 아쉽긴 했습니다. 어쨌든, 의 저자인 들..

근심과 멧돼지 / 조영관

근심과 멧돼지 / 조영관  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이리 힘든 것은내 안의 깊은 근심 때문이다, 라고썼다가 지운다. 이를테면 이러한 우울이란 얼마나 맑고 뜨겁고 쾌한 것인가 그래서 나, 그러한 쾌함이질박하고 넉넉할 수만 있다면그 사랑이 얼마나 장엄한 것일 것인가, 라고 썼다가또 지운다. 장엄하지 않으면 또 어쩔 것인가. 멧돼지처럼 진퇴를 모르고앞으로만 달려가는 그 외로운 질주들 그래서, 나 감히 쓴다.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너만을,이 문장 위에서 잠시 나는 숨이 가쁘다. 그건 또 얼마나 컴컴한 벼랑일 것인가 영원함을 믿었던 그것으로, 솔직하다는 것으로힘들었던그 많은 날들은 그래서, 나, 내 사랑은 근심이거나 통속이거나, 라고 쓰다가,이렇게 쾌한 우울 속에 있는 내가 바로 너이기에너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헤겔 변증법의 치명적 오류

헤겔 변증법의 치명적 오류헤겔은 칸트, 피히테, 셀링에 이어 독일관념론의 정점에 이른 철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피히테의 자아 변증법(자아.동일성-비자아.비동일성-.절대자아.통일)에 영향을 받아 정립한 부정의 변증법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정.즉자-반.대자-통일. 주체 안팎의 관념과 사물이 모순대립적 관계를 지양하면서 의식이 마침내 세계정신, 절대이성으로 귀결된다는 합목적적 이론입니다. 하지만 타자와의 관계를 ‘모순대립적’으로 규정하면, 소유와 지배 그리고 폭력적 수단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타자가 전락합니다. 존중과 배려, 공존의 ‘상호의존적’ 관계로 타자를 이해해야 함에도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헤겔의 자유, 자유의지, 이성의 자기 증식확장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자유, 자유의지, 이성..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 프로이트와 라캉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 프로이트와 라캉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의 신학시대를 마감하고 합리적 이성의 근대를 열어젖힌 사람을 데카르트로 이해하자면, 근대와 현대의 경계에 선 사람을 니체로 설정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의 차별점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바로 구조주의입니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 하이데거 등등. 그렇다면 라캉, 들뢰즈, 데리다 등 구조주의를 계승한 탈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존재론과 인식론을 좀더 세련되고 성숙하게 다듬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들 모두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불교의 철학과 사유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니체, 하이데거, 라캉, 들뢰즈 등의 주요 철학자들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불교에 영향을 받았음을 부..

설익은 깨달음의 하나

- 돈오라는 점에서 내가 어디 부처와 다르겠느냐만, 다생의 습기가 깊어서...바람은 멎었느나 물결은 아직 일렁이고, 진리를 알았지만, 상념과 정념이 여전히 침노한다頓悟踰同佛,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원효 스님에 감히 견줄 수 있는 경허 선사의 말씀인데요, 후대의 어느 학자가 원문을 이해가 얕은 수준에서 곡해한 사례입니다. 작고하신 한형조 교수(1958-2024)의 저서 (2011)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 책은 무슨무슨 학술상도 받았습니다. 한 교수의 학문적 업적이나 도덕적 품성을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 관심도 없습니다.  철학, 사유, 형이상학을 뛰어넘은 붓다의 가르침은 심오하기 그지 없습니다. 다만, 속지 않고, 속이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김수영과 이중섭, 혹은 나의 하루를 잠식하는 그 무엇

김수영과 이중섭, 혹은 나의 하루를 잠식하는 그 무엇 /  너는 어떤 일에든 정성을 기울인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거든. 먹거리든 옷가지든 짜증날 정도로 아주 꼼꼼하게 살펴본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그런 것이 아님을 모르지 않아. 손과 눈에 닿는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이야. 아주 드물긴 하지만, 깊고 섬세한 그늘을 들춰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잖아. 그들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어설픈 것과 진정한 것, 소리를 내는 것과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주름 사이를 거닐며 그, 오묘한 몸짓으로 낯선 아름다움을 집어내고는 하지. 너의 하루는 무미한 시간의 덧칠에 지나지 않는 연속일 뿐이야. 시선을 단단히 붙들어맸기라도 한 양 초점은 비틀거리지도, 멀리 뻗지도 않거든...

좀더 그늘이 짙고, 우울한 곳에서 /

좀더 그늘이 짙고, 우울한 곳에서 /  사물에는 무게가 없다. 그러나 내 시선과 손길이 닿는 순간, 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함수에 갇힌다. 얇은 인화지 한 장에 가시적인 또는 비가시적인 무게가 내려앉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게는 나를 비웃으며 숨결을 거머쥔다. 나는 결코 정직해질 수 없다. 뒷걸음질을 칠망정, 1인칭의 초점은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서이다. 1인칭은 알코올 몇 도에서 용해되며 비등점은 얼마인가. 이별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출발선이다.

눈 / 記憶을, 지우고 싶어서일까. 다시금 눈을 뜨는데, 스산한 창밖 풍경을 무심히 담는 눈길에 피로가 묻어온다. 눈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눈으로 마음을 전할 때면 서두르지 않게 됨을. 진정한 것은 아주 서서히 스며든다. 몇 걸음 뒤의 슬픔이 그러지 않던가. 슬픔이, 11월의 오늘처럼 입을 다문 채 다가온다. 육체의 깊숙한 곳으로, 깊숙한, 너무 깊숙해서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그곳까지. 그러나 그 출렁거림에 익숙해지면, 더이상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無味한 나는 시선을 거둔다. 내 밖의 잠재적 슬픔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