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들뢰즈와 禪

slowdream 2025. 4. 1. 22:35

들뢰즈와 禪

 

 

질 들뢰즈는 ‘동일성’을 혐오하는 ‘차이’의 철학자다. 그의 주저인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거칠게나마 이해해 본다. 그는 존재와 존재가 현실로 드러나기까지의 상태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이념(미분화)-강도(개체화)-반복(분화). 프로이트의 무의식-전의식-표층의식, 라캉의 실재계-상상계-상징계의 구도와 비교해 본다면 이해의 접근이 한결 가뿐해질 듯도 싶다.

 

‘이념’은 곧 ‘차이’로 존재적 개념이 아니고 존재의 속성인 ‘이치, 원리’이다. ‘강도’는 바깥인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각인되는 내적 크기, 깊이, 충격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실의 층에 모습을 드러내는 ‘반복’은 존재의 생성이다.

 

모든 존재는 ‘차이’를 그 태생적 한계로 지닌다. 말하자면, 동일성을 근거로 하는 똑같은 또는 유사한 존재는 없다. 그가 생물학에서 계통(계문강목과속종)의 분류와, 발생에서 전성설을 부정하는 태도는 일관성이 있다. 일테면 ‘호모사피엔스’라는 분류를 거부한다. 모든 개체가 제각기 다른 고유의 종이라는 얘기다. 그런 까닭에 배아의 형성 이전에 이미 개체의 프로그램이 설정되어 있다는 ‘전성설’ 또한 부정하고, 배아 이후에 개체가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달되어 간다는 ‘후성설’을 지지한다. 당연한 귀결이다.

 

들뢰즈의 독특한 개념으로 ‘무-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무의미’의 무(없음)는 유(있음)의 상대적 개념으로 동일성에 기초한다. 하이픈(-)이 개입된 ‘무-의미’의 무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有無의미의 모순대립적인 실체적(동일성) 개념을 초월한, 의미를 산출하는 토대, 바탕으로서의 無이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禪과 만난다. 선불교의 ‘無’ 또는 ‘無分別’은 들뢰즈의 ‘무’와 다르지 않다. 선의 ‘無’ 를 절대적인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동일성, 실체성의 사유이다. 선에서의 ‘無’는 ‘무실체’이며 ‘무분별’은 ‘무실체분별’의 뜻이다. 이러한 無는 곧 空이며, 들뢰즈의 ‘차이’이다.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들뢰즈나 데리다, 니체,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를 애정하는 것도, 현대철학자들 다수가 불교를 명시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그들의 사유가 불교의 핵심이론인 無, 空, 緣起法 등과 큰 접점을 갖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