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불가지론과 여실지견

slowdream 2025. 4. 11. 19:56

불가지론과 여실지견

 

 

뇌과학에서는 정신적인 인식과정을 뇌신경세포의 작용으로 이해한다. 바깥 사물인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감각기관이 입력하면, 그 데이터를 뉴런과 시냅스를 토대로  화학신호와 전기신호로 전용한 후에 분석과 판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주체의 행위가 형성된다. 즉 입력 -> 판단 -> 출력의 시스템이 원활하게 진행되면서 대상과 주체의 상호작용이 또한 형성된다. 지극히 유물적 환원론이다. 인식과 판단, 그리고 행위의 조건인 의도. 이러한 정신작용이 물질과 상호의존적이지만 전혀 다른 실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지 못한다. 유기체는 물질 일원론이 아니라, 물질.정신 이원론이다.

 

그런 까닭에 바깥 대상의 실체 또는 본질을 결코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연하지만, 개미나 나비, 코끼리, 강아지가 보는 세상과 인간이 보는 세상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 나아가 같은 인간이라 해도 제각기 다른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그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칸트의 예지계, 물자체, 불가지론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깥 대상인 사물의 본질 또는 실체는 없다. 다만 그 보편적 성품, 특성은 규정할 수 있다. 불가지론은 설 자리가 없다. 본질이나 실체는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랄 수 있기에 불교에서는 그러한 개념을 부정한다. 모든 존재의 보편적 성품은 ‘무상, 고, 무아’이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여실지견이다. 다만, 개별적 성품은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까닭에 고정되지 않는다. 책은 펼쳐서 읽을 때에 책이며, 라면 그릇을 올려놓으면 그릇 받침대, 책장에 꽂혀 있으면 장식품, 누구를 향해서 집어던지면 흉기이며, 고물장수에게는 돈이며, 추운날 걸인에게는 몸을 덥히는 불쏘시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연기적 사유로 세상을 이해하고 마주하지는 않는다. 책은 늘 책이며, 선은 늘 선이고, 악은 늘 악이며, 한번 해병이면 영원히 해병이고, 남자는 항상 남자이며, 여자는 항상 여자다. 재떨이는 재떨이고, 밥그릇은 밥그릇이다. 늘 고정된 형태와 이름이 따라다닌다. 이를 가리켜서 ‘매트릭스’ ‘가상현실’ ‘전도몽상’이라 한다. ‘이것이 나다, 나의 자아다,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는 무지와 집착이 그 원인이다. 소유적 욕망과 존재적 착각이 삶의 본모습에 덧칠을 하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매트릭스의 인식을 ‘두번째 화살’이라 비유하고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도록 노력하라 당부하셨다. 첫 번째 화살은 ‘생로병사’인 과보로서의 현생 삶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기에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실체적 사유인 두 번째 화살에서 벗어나면, 첫 번째 화살이 꽂혀 있는 생멸하는 삶의 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즉 연기적 사유로써 세상을, 나를, 삶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여실지견이다.

 

불교수행론은 지극히 간단하다. 매트릭스를 깨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확인하는 것이다. 다만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수행체계를 제시한다. ‘정혜쌍수’ ‘지관겸수’ 등으로 얘기해도 무리가 없다. 이는 곧 붓다의 가르침을 일상에 접목시켜 검증확인하면서 체화하고 심화하는 과정이다. 초기경전인 <대념처경>에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져 있다. 선불교의 간화선 수행만으로 이러한 경지에는 오를 수 없다.

 

선불교의 영향 탓이지만,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이 지상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매우 한심한 작태이다. 깨달음은 이미 붓다께서 실현하시고 고스란히 건네주셨다. 우리는 깨달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행에 매진하면 될 따름이다. 또다른 붓다가 되고자 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붓다께서 건네주신 깨달음의 내용은 ‘사성제, 연기, 3법인’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이 있다면 붓다의 제자가 아니며 외도에 지나지 않는다. 선불교 일각에서 ‘분별 이전의 근본자리’ ‘그것’ 운운하곤 하는데 이는 어처구니 없는 패륜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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