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에서의 탈출 가이드 - 12연기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계를 진실된 사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각하고 지각하는 이 생생한 순간이 허구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2600여 년전 고대 인도의 성자 붓다께서는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무지와 욕망에서 비롯한 착각이라고 단호히 일깨워주셨습니다. 요즘 언어로 얘기하자면, 증강현실 AR, 가상현실 VR, 매트릭스 matrix, 시뮬라크르simulacre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눈앞의 현상계는 진실하지 않으며, 우리의 무지와 욕망으로 덧칠된 망념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삶의 본모습은 무지와 욕망을 걷어내면 당연히 드러나겠지요. 간략히 추리자면, 무지는 존재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는 형태는 변화하면서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그 무엇(자아, 영혼, 초월적 힘)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욕망은 그런 무지를 토대로 형성된 소유욕을 가리킵니다. 무지와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8정도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해는 어렵지 않지만, 그 실천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 성자의 출현이 드문 까닭일 겁니다.
12연기는 범부중생들이 펼치는 현실 즉 매트릭스의 전개를 보여주는 도식입니다. 눈앞에서 현란하게 벌어지는 이 생생한 삶의 민낯이 이것이었구나 철저하게 확인해야만, 진정한 삶의 목적지를 설정하고 길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불교의 역사가 수천 년인 만큼 12연기에 대한 해설은 다양하고 어지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12연기에 대한 독법은 그들과 결이 같은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큽니다. 숙고하시고 수행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無明 - 行 - 識 <-> 名色 - 6入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苦
첫머리에 무명이 등장합니다. 이는 곧 연기의 전개가 경험적 주체인 주관의 인지적인 문제임을 가리킵니다. 존재를 ‘나, 나의 것’이라는 실체론적인 태도로 이해하는 매트릭스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행이 등장합니다. 행은 무지에 사로잡힌 한 개인이 펼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의도적 사유, 언어, 몸짓 등입니다. 이 행에 나머지 10지 연기(식 - 노사)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무명과 행은 붓다 열반 후 덧붙여진 부분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식과 명색이 환원적인 의존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명은 연기의 각 고리에 함께하지만 드러나지 않기에, 무명이 근본적 번뇌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첫머리에 놓았다는 얘기입니다.
식과 명색은 5취온입니다. 존재를 형성하는 5온이 색수상행식인데, 무지로 인한 인지의 왜곡, 전도가 발생하여 ‘나, 내 것, 자아’로 덧칠된 것입니다. 수행은 어떤 면에서 5취온을 깨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명색은 식을 제외한 나머지 색수상행입니다. 식과 명색은 늘 함께 합니다. 명색과 식을 떨어뜨려놓은 것은, 의식의 기능이 대상을 지향하는 것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식이 보다 본질적인 것이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기법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조건일 따름입니다.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관건이지, 실체론적 관점에서 무엇이 무엇의 원인이냐는 형이상학적인 태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6입은 감각기관의 작용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야 대상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6근이 아닌 6입입니다. 눈이 있어야 보지만, 눈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감각기관과 대상에 마음이 개입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입입니다. 그래서 6입입니다. 촉은 대상-의식-감각기관의 만남입니다. 수는 감수, 감정, 느낌 작용입니다.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느낌과 인지(지각, 상)의 종합적 판단에 따라 애는 그중 어느 하나의 마음으로 정리된 상태입니다. 인지는 매우 중요한 기능입니다. 기억, 개념, 추론, 판단, 표상, 언어 등의 작용을 하기에 무명과 깊은 관계를 갖습니다. 인지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앎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취는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의도적 사유가 확고하게 진행된 상태입니다. 꽃을 보고서 마음에 들어 고민합니다. 꺾어 가져갈 것인가, 바라만 보고 지나갈 것인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쓰다듬기라도 할까...등등의 갈등 끝에 하나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당연하게도 어떤 행위를 합니다. 이것이 유입니다. 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한 존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지갑을 발견합니다. 집어가면 도둑놈이며, 근처 지구대에 가져다주면 의인이며, 아무런 동요없이 갈길을 그저 간다면 도인입니다.
생-노사.고는 이러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하루는 숱한 사건.사태.만남으로 이루어지니까요. 집에서는 아들이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은 행인이며, 버스에 타면 승객이고, 회사에 가면 대리이며, 밥집에 가면 밥손님이고, 퇴근후에 연인을 만나면 그 또한 여자친구를 아끼는 연인입니다. 고는 이러한 전개가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상황에 따라 만족스럽게 전개되기도 하겠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한 만족은 더한 만족을 꿈꾸기에 결국은 고통, 결핍, 불만족으로 귀결됩니다.
12연기는 결국 5취온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는지, 그 결과는 어떤지를 보여주는 도식입니다. 이는 한 생각과 그 생각이 일으키는 존재 상태의 주기이며,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경험적 개체의 패턴화, 코드화를 진행합니다. 5취온의 온蘊은 경험에 따른 누적됨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회전이 집착과 습관, 성격, 성향, 기호, 태도를 고착시킵니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속설이 나름 근거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12연기의 전개는 신경과학 쪽에서 보자면, 정보의 입력(식) - 판단(수.상) - 출력(행)입니다. 바깥 세계를 탐구하는 일반의 과학적 접근과 달리, 12연기에는 바깥에 대한 분석적 접근이 없습니다. 이는 존재를 독립된 실체로 이해하는 과학적 태도와는 다른 까닭입니다. 불교에서는 존재를 상호의존적인 관계의 산물로 확인합니다. 양자역학자인 닐스 보어와 천체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논쟁이 있지요. 달을 가리키며 보어는 내 눈에 띄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고, 아인슈타인은 내가 보든 보지 않든 달은 늘 거기 있다라고 상반된 주장을 하였죠.
최근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양자중력학자라고 설명이 되어 있던데, 이는 아인슈타인이 열망했던 ‘통일장이론, 그 모든 것의 이론(TOE ; theory of everything)’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이론물리학자임을 말합니다. 양자는 핵력과 전자기력이 작용하는 미시세계이고 중력은 거시세계의 힘인 즉 이 둘을 통합하면 우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뜻이겠죠.
어쨌든, 로벨리에 따르면 시공간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뉴튼, 아인슈타인, 그리고 양자역학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시간을 변화, 공간을 경계로 이해합니다. 뉴튼은 객관적이며 절대적 시공간을 설정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객관적이지만 상대적인 태도로 규정합니다. 로벨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들 모두를 실체론자로 규정하고, 말하자면 닐스 보어의 사고의 연장선에서 얘기합니다. 계량적인 시계의 시간(크로노스)가 아닌, 계량화할 수 없는 사건의 시간(카이로스). 주관과 객관이 관계를 맺는 순간, 시공간이 펼쳐진다는 주장입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균일한, 균질적이고 동일한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이는 연기를 토대로 하는 불교적 사유입니다. 빅뱅이라는 공통된 사건이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빅뱅은 인식주체인 내가 대상과 관계를 맺음이며, 빅크런치 또는 빅립은 그 관계의 소멸입니다. 인식 주체인 모두가 고유한 개별적 우주입니다.
시공간뿐만 아니라, 나와 내 밖의 모든 대상은 관계를 맺는 순간, 일어났다가 곧 사라집니다. 조건에 따라서 발생하고 소멸할 따름입니다. 그 무엇이 있어서 생멸이라는 현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 그 자체가 조건에 따라 펼쳐지는 연속적 흐름의 일부인 현상입니다. 그게 삶입니다. 연기입니다. 존재는 관계에 따라서, 사건의 맥락에 따라서 춤을 추는 유동적 현상일 따름입니다. 그 어디에도 ‘나, 내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프리초프 카프라의 저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도 불교적 사유를 읽을 수 있었죠. 대개의 양자물리학자들은 알든 모르든 불교적 사유에 접근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양자역학자인 리 스몰린 또한 존재란 ‘인과적 질서의 흐름’이라고 정리하고, 인간과 사물이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실체적으로 인식할 따름이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이들의 사유가 매트릭스를 설명하는 12연기에 어느 정도로 다가갔는지는 가늠키 어렵습니다. 관계맺음에 이어, 인식주체 곧 경험적 개체에 따라 대상이 규정되며, 그 대상에 따라서 또한 인식주체의 정체성이 규정된다는 사유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존재 혹은 존재 상태의 보편적 속성은 ‘늘 변화하고 불안정하며 실체가 없다(무상.고.무아)’이며, 그 개별적 속성은 연기하기에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인과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과의 동시성, 중첩성, 다의성을 정립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글이 산만해졌지만, 어쨌든 12연기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허구적 현실 곧 5취온이 어떻게 생성되고 전개되느냐를 세심하게 설명한 가르침입니다. 경험적 개체로서의 나(5취온)는 안팎의 경계를 유지하는 차별화된 고유의 정신물질 복합체로서 한 삶을 주기(週期)로 합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시공간, 대상이 한 생각에 따라 어떻게 현란한 그림을 펼치는지 보여줍니다. 통찰, 곧 무아의 지혜로써 무명을 타파하면 매트릭스가 벗겨지고 삶은 있는 그대로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줍니다. 현대철학과 과학이 여전히 서성대고 있는 진실의 문을 2600년 전 붓다께서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중생들에게 열어주셨다는 그 역사적 사실이 참으로 감동적일 따름입니다.
'***풍경소리 > 如如한 날들의 閑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가지론과 여실지견 (0) | 2025.04.11 |
---|---|
들뢰즈와 禪 (0) | 2025.04.01 |
달마, 혜능, 조주, 지눌, 숭산 (0) | 2025.03.05 |
보편성에 대한 반론 (0) | 2025.02.28 |
근심과 멧돼지 / 조영관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