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누가 허물없이 자살할 수 있는가

slowdream 2007. 10. 16. 18:20
 

누가 허물없이 자살할 수 있는가


안양규

an1313@yahoo.com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영국 옥스퍼드 대학 철학박사. 일본 동경대학 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교수. 논문으로 〈대반열반경과 그 주석서에 보이는 불타관-붓다고사의 열반경 주석서 번역과 아울러〉, 역서로 《부처님의 생애》가 있다.



1.들어가는 말


세계적으로 40초마다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 전염병처럼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방지협회(IASP)는 지난 9월 10일 제1회 “세계 자살방지의 날”을 제정하여 자살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두 단체의 통계에 의하면 자살이 교통사고, 재난, 질병 등에 이어 열세 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주요 사인(死因)이라고 한다.


한국도 자살 사망자가 꾸준히 늘어나 작년에는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통계청은 밝히고 있다. 사망자 1백 명 중 4명(3.5%)이 자살로 숨지고 있으며 자살로 죽는 비율이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보다 많아질 정도로 근년 들어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4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통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근자에 들어와 자살에 관련된 뉴스를 연일 접하고 있다. 어느 재벌의 투신 자살, 카드 빚에 시달린 어머니가 아이들과 동반한 투신 자살,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한 대학생의 음독 자살, 수능시험으로 인한 수험생의 자살, 노동자의 분신 자살, 코리언 드림을 꿈꾸며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의 자살 등이 언론매체에 기사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사회의 병리현상으로 여겨져 왔으며 어느 인간 사회에서나 자살은 있었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와 자살은 일종의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듯하다. 현대 한국사회에 자살은 빈번히 발생하여 사회전체 구성원에게 커다란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그 기본 심리는 동일하다. 자살하는 것이 지금 이렇게 사는 것보다 낫다는 자포자기의 마음가짐이다. 이런 심리 태도엔 생명 경시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생명과 직접 관련된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의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찬반통계를 보면 높은 찬성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 생활상의 편리 등을 고려할 때 낙태 등에 찬성한다는 입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 한국인은 인간의 생명 존중 의식이 다소 약하다고 보인다. 어떻게 해서 이런 생명 경시 풍조가 자리잡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살펴볼 자살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자살의 접근 방식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는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인간은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개인이 마음대로 생명을 단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꼴이 되므로 커다란 죄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불교에는 그런 창조주가 없기 때문에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죄로 다루어질 수 없다.


불교는 인과응보의 업보교리로 자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무조건 자살이 사악한 행위라는 식의 통속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자살이 왜 유익하지 못한지, 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교리적으로 살펴보고, 자살이 허용되는 경우를 대조해 보고자 한다. 그로부터 육신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의미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자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모든 생명체는 해침을 당하지 않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자살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살인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코살라(Kosala)의 국왕인 파세나디(Pasenadi)와 그의 왕비 말리카(Mallika?의 대화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세나디 왕은 말리카 왕비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당신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는가?” 왕비는 대답했다. “위대한 왕이시여!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위대한 왕이시여! 당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는지요?” 왕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다고 대답한다.


왕이 왕비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물론 위대한 왕이신 당신입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왕비는 솔직하게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대답한다. 또한 왕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여 자신의 대답과 똑같은 답을 듣는다. 이들의 대화는 분명히 현실에 기초한 것이다. 어느 생명체나 자신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생태계의 기본 원칙이다. 이런 기본원칙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왕과 왕비의 대화에서 확인한다. 그들의 고백이 개인주의자 내지 이기주의자의 목소리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엄연한 현실에 기초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우리는 사실은 사실인 것으로 시인하고 나서 그 사실을 어떤 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왕은 왕비와의 대화 후 다소 자신이 없었던지 붓다를 찾아가서 자신들의 대화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붓다는 그들의 결론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결론이 이기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을 주의 깊게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각 개개인은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다루고 사랑하는 것일까? 붓다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신(身)·구(口)· 의(意)로 선한 행위를 하는 자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온다. 반대로 신·구· 의로 악한 행위를 하는 자는 원수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것과 같다.


일시적으로 비록 이익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 같지만 결국 고통과 상처를 안겨다 주므로 악한 행위는 원수의 행위와 같다. 자신이 행한 선업과 악업은 그림자처럼 끝까지 자기 자신을 따라가므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소중히 대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따위를 얻게 되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빠지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배척하기도 한다. 재물이나 사회적 명성을 완전히 잃거나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심한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히 목격하게 된다. 쾌락과 명성을 안겨 주던 것이 떠나게 되면 그런 것들을 소유했던 자들은 상실감으로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명예나, 쾌락의 상실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다. 붓다는 이런 것들은 무상하므로 결국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재산과 쾌락에 매료되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고 눈이 멀어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치게 멀리 간 것을 알지 못한다.

놓인 덫에 들어가는 사슴처럼

나중에 쓴 과보는 그들의 소유이다.

왜냐하면 그런 과보는 반드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미끼가 달려 있는 낚시 바늘을 무는 물고기처럼, 감각적 쾌락이나 재산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선업을 짓는 것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며 반대로 악업을 짓는 것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기할 때, 자살은 악업으로 더 많은 고통만 야기한다는 것이다. 간략히 말하면 악업과 선업의 분리점은 이기심의 여부에 있다. 이기적인 행위는 악업이며 붓다는 10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3. 자살은 자신을 해치는 나쁜 행위이다


생명 존중은 불교 가르침 중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오계 중 제일 첫 번째가 불살생계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이 가르침은 불교의 생명존중 의식을 잘 대변하여 주고 있다. 붓다는 당시 많은 동물을 죽여 제사 지내는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동물· 식물조차도 붓다는 함부로 훼손시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생명을 존중하였다.


사성제 중 고성제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8가지 고통을 가르치고 있다. 그 중 사고(死苦)가 제시되고 있는데, 죽음은 고통의 문제이지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은 고통을 해결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야기하는 악행이다.


사성제 중 두 번째 집성제는 고통의 근본원인으로 갈애(渴愛, tanha?를 제시하고 있다. 갈애는 욕애(欲愛, ka�a-tan?a?, 유애(有愛, bhava-tan?a?, 비유애(非有愛, vibhava-tan?a?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욕애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즐겁게 해주는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욕망을 말한다. 한마디로 오욕락으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욕망이다. 눈은 좋은 색을, 귀는 흥겨운 소리를, 코는 아름다운 향기를, 혀는 맛있는 음식을, 몸의 피부는 부드러운 감촉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행복을 느끼려는 욕망이다. 사실 현대인은 이런 것들을 돈으로 구입하며 애착한다. 그래서 돈이 어느 시대보다 주요한 행복의 지표로 여겨지고, 돈을 잘못 사용하여 고통을 초래하고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유애란 오욕락을 즐기며 계속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생존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다. 마지막으로 비유애란 유애의 반대로 생존을 끊으려는 충동이다. 이것이 본고에서 살피고 있는 주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자살 충동은 정상인이라도 일생 동안 한두 번 느끼는 감정이다. 심한 좌절감에 빠질 때나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때, 또는 격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어한다.


자살에 대한 충동을 인간이 구유하고 있는 욕망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살려는 본능’의 다른 모습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행복하게 살려는 욕망이 좌절될 때 반동으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강력한 생존의 욕망 이면에는 자살에 대한 본능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다닌다.


인간이 생사윤회의 고통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 욕망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타인의 장기를 매매하여 자신의 장기 일부를 바꿔 끼우는 탐욕스러운 사람의 유애도, 지금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결국 사후 재생의 고통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내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자살 행위가 고통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게 된다.


자살이 고통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다음 세상에 어떤 상태로 태어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중의 하나는 임종할 때 의식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임종의식은 곧바로 내생의 재생의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임종의식(cuti-citta)이 재생의식(patisandhi-citta)을 조건 지우는 것이다. 임종의식이 어두우면 재생의식도 어두울 것이고 임종의식이 밝으면 재생의식도 밝을 것이다. 임종의식이 고통과 좌절로 가득 차 있으면 당연히 재생의식도 고통으로 짓눌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선 임종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거나, 수행자의 가사나 염주를 보여줌으로써 마음을 맑고 밝게 만들어주어 내세에 좋은 상태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한다. 임종의식은 곧 죽는 이의 의식을 정화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이생에서의 죽음에 이르러 이제까지 쌓아온 온갖 종류의 상처와 원한을 짊어지고 다음 세상으로 가면 그 짐은 다음 생에 그대로 유지되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너무 행복하여 자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로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죽음을 선택하는데, 그 때 마음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음 생애에 그대로 계승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자살이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외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 생애에 이전의 고통과 여기에다 자살이라는 행위가 가져 온 고통을 모두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욕애·유애· 비유애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으로 이들 욕망은 ‘자아의식(에고)’과 연결되어 있다. 욕망은 모두 자아의식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이다. 욕애는 감각적인 쾌락을 자아의식에게 제공하는 것이고, 유애는 자아의식의 영속을 도모하는 것이다. 반면에 비유애는 이상 두 개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자아의식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명을 끊는 자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살은 그 본성상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고 풀어보려는 노력보다도 그 고통을 외면하려는 이기적인 욕구에서 자살이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자살의 주요원인으로 카드빚이 등장하고 있다. 카드빚을 진 것은 사용자가 무분별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용자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카드빚 독촉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카드회사는 영리목적으로 카드를 남발하고, 카드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만든 책임이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사용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 실제로 비구들이 자살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육신이 부정하다는 부정관(不淨觀)을 지나치게 수행한 비구들은 자신들의 육체에 너무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한 비구들은 다른 사람에게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그 수가 경전마다 다르지만 베살리(Vesa�i)의 교단에 비구가 몇 사람 남지 않을 정도로 많은 비구들이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목격한 붓다는 남아 있는 비구들을 모아 놓고 부정관 대신 수식관을 가르치고 나서 자살에 대하여 엄명했다. “비구들이 이런 식으로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살을 희망하는 자를 죽여주는 비구는 교단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이상의 비극은 부정관을 잘못 수행한 데서 비롯된 자살로, 단지 육신에 대한 혐오감이 자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의 성취나 정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릇된 수행에서 비롯된 염세주의(厭世主義) 아니 염신주의자(厭身主義者)의 도피행각일 뿐이다. 그리고 자살을 방조한 자에겐 교단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죄(바라이죄)를 내린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자살을 돕는 것은 중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각종 자살 사이트를 운영하여 자살 희망자를 행동으로 실행하게끔 돕거나 자살을 부추기는 것도 살인만큼이나 중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일화는 자살을 찬양한 경우에 대한 대응이다. 어떤 재가 남자 신자가 심한 병에 걸렸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을 얻기 위해 일단의 비구들이 중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재가신자에게 죽음을 찬양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는 것보다 죽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죽음을 유도했다. 재가신자는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 해로운 음식을 먹고 죽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죽음을 찬양한 승려를 승단에서 추방당하는 죄를 범한 것이라고 엄명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또는 신체의 일부를 손상당한 사람에게 죽음을 찬양하여 자살을 유도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경제적인 빈곤에 의한 생활고나 신체 손상에 따른 고통도 자살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붓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자살을 돕는 일이나, 그리고 자살을 찬양하는 일 모두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가난도 신체장애도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특히 현대 한국사회에서 생활고로 가족들이 동반 자살하는 것을 들으면 사회복지 차원에서 해결해야 되리라고 생각이 들지만 기본적으로 개개인들이 자신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각인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쉽게 자살을 해결책으로 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붓다는 인간의 행위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가장 바람직한 행위는 자신과 주위의 사람에게 동시에 유익한 것이다. 반대로 최악의 행위는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해악을 가져오는 경우이다.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타인을 괴롭히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타인의 행복은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권장하며 칭송한다. 이런 이타적인 행위는 드물어 도덕적인 귀감이 된다. 이상 4가지 범주는 붓다가 제시한 행위와 그 과보에 관한 것이다. 그럼 자살은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보통 사람들이 행하는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빼앗고 부모형제나 친지에게 격심한 고통을 야기하는 측면에서 네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대체로 자살의 동기가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외면하기 위한 것이므로 다분히 이기적이며, 도피적인 성격이 농후하다.



4. 허물 없는 자살


붓다는 자살을 무조건 비난하지 않았다. 극히 제한된 경우에 붓다는 자살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거나 간접적으로 자살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밧칼리(Vakkali) 비구, 고디카(Godhika), 찬나(Channa) 비구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자살에 대해 붓다는 비난하지 않았다.


고디카 비구는 일시적으로 심해탈(心解脫)을 얻었지만, 곧 잃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해탈의 성취와 상실이 6번 반복되었다. 7번째로 일시적인 심해탈을 얻게 되자 고디카 비구는 칼로 자살했다. 붓다는 제자들을 데리고 고디카 비구가 자살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검은 연기가 동서남북상하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말했다.


“비구들이여! 저것은 사악한 자, 즉 마라(Mara)이다. 그는 고디카 비구의 식(識, vinnana)을 찾고 있다. 지금 어디에 고디카 비구의 식이 머물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그렇지만 비구들이여! 고디카 비구의 식은 소멸된 채 무여의열반을 성취하였다.”


고디카 비구가 자살한 이유는 심해탈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경전은 밝히고 있다. 주석서에는 해탈심을 계속 유지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격심한 육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디카의 자살은 전혀 붓다로부터 비난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붓다는 그의 자살을 무여의열반의 성취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고디카가 죽을 때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마라의 헛된 시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신인 마라는 사람의 식을 잡아가기 위해 이곳 저곳을 찾았지만 이미 고디카 비구는 아라한이 되었으므로 생사윤회의 식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생사윤회를 벗어난 아라한의 죽음(자살을 포함하여)은 곧 무여의열반의 성취로 그것은 결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고디카의 경우에서 우리는 도출할 수 있다.


찬나 비구는 힘센 장사가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절개하는 것과 같은 두통 등 전신이 병환으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사리풋다(Sariputta) 비구를 위사한 동료 비구들은 찬나 비구를 설득하여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찬나 비구는 칼로 자살을 하였다. 사리풋다가 붓다에게 찬나 비구의 자살을 알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서 묻자 붓다는 대답했다. “사리풋다여! 이 육신을 내려놓고 다른 육신을 취하게 될 때, 그때 나는 그런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찬나 비구의 경우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찬나 비구는 허물 없이 칼을 사용하였다.”



찬나 비구는 자살하기 이전에 이미 생사윤회를 초월한 아라한이었다. 격심한 질병으로 더 이상 생존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리풋다 비구는 자살에 대해 무조건적인 저항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살은 좋지 않은 행위이므로 찬나 비구로 하여금 설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나 비구는 자살하였으므로 좋은 곳으로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붓다에게 물었다. 하지만 붓다는 오히려 찬나 비구의 자살행위에 대해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고, 그가 생사를 초월한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생사를 벗어난 열반에 있다. 죽음의 종류가 무엇이든 나고 죽고를 반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자살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자살이 비난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물 없는 자살을 할 수 있으려면 모든 번뇌를 제거한 아라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밧칼리 비구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도중 붓다를 친견하고 싶었다. 밧칼리 비구는 언제나 붓다의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붓다의 충고로 떨어져 수행하였다. 질병에 걸려 직접 붓다를 찾아가지 못하는 사정이 동료 비구들을 통해 붓다에게 전하여지자 붓다는 밧칼리 비구를 문병한다.


붓다는 법을 보는 것이 자신을 보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이라는 유명한 충고를 하며 붓다의 육신조화에도 애착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붓다가 떠난 뒤, 밧칼리 비구는 동료 비구들에게 자신을 절벽 근처의 큰 바위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두 천신으로부터 밧칼리 비구가 지금 해탈을 위하여 수행하고 있으며 곧 해탈을 성취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붓다는 듣고 나서 비구들로 하여금 밧칼리 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라고 한다. “밧칼리 비구여! 두려워 마라. 두려워 마라. 너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너의 운명은 나쁘지 않다.”


동료 비구들이 밧칼리 비구에게 찾아가 붓다의 말씀과 천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자 밧칼리 비구는 색온(色蘊) 등 오온에 대한 무상· 고· 무아의 진실을 확신하며 칼로 자살하였다. 밧칼리 비구의 자살을 전해들은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밧칼리 비구가 자살한 곳으로 갔다. 검은 연기가 동서남북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며 더러운 마라가 밧칼리 비구의 식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밧칼리는 재생의 식을 소유하지 않은 채 무여의열반에 들어갔기 때문에 마라가 밧칼리 비구의 사식(死識)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앞서 살펴본 고디카 비구의 경우와 일치한다.


고디카 비구와 다른 것은 붓다는 간접적으로 밧칼리 비구의 자살을 방조한 부분이다. 얼핏보면 붓다가 자살을 방조하거나 부추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어서 의아한 기분이다. 그러나 좀더 냉정히 생각해 보면 붓다의 진의를 읽을 수 있다. 밧칼리 비구의 경우 육신의 질병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격심하였다.


그리고 육신(色蘊)에 대한 애착 등 여러 정신적인 번뇌가 거의 소진한 상태이므로 아라한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육체의 질병으로 무의미하게 고통받는 것보다는 육신의 고통스러운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도록―이미 밧칼리는 열반을 성취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자살을 유도(?)하거나 허용한 것이다. 아무런 이익도 없이 질병으로 고통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일반적인 범부의 자살이 왜 금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본 세 비구의 자살은 전혀 붓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 찬나 비구는 자살하기 이전에 이미 아라한이었고, 나머지 두 비구는 자살행위와 관련하여 무여의열반을 성취하였다. 우리는 편의상 이들의 자살을 아라한의 자살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라한의 자살은 전혀 붓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질병으로 인해 격심한 고통을 무익하게 받고 있을 때라는 전제가 있음은 잊어서는 안 된다.


사리풋타는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스스로 단축하지 않는다고 시로 말하고 있다.


나는 죽는 것에도 즐거워하지 않고,

나는 사는 것에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시간을 기다린다.

마치 피고용인이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아라한은 생(生)에도 사(死)에도 어떠한 집착도 하지 않음을 노래하고 있다. 생에도 사에도 집착없이 육체가 끝나는 시간이 도래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은 아라한이 자신의 수명을 포기하는 원인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아라한이 스스로 자기가 세상에 머물러도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거나 안락되게 하는 일이 적음을 관찰한다. 혹은 병 등의 고통이 자신의 육체를 핍박한다.” 정법(正法)으로 중생을 더 이상 요익되게 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 더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수명 포기의 원인으로 육체의 격심한 질병이 고려되고 있음을 본다. 육체의 질병이 너무 심한 경우, 당연히 중생들에게 설법하기 힘들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라한이 자신의 목숨을 버림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아라한의 자살 허용은 일차적으로 병고에 근거한 것이지만, 아울러 중생 교화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과도 맞물러 있다. 결국 아라한의 수명 방기 이유는 중생 교화를 할 수 없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자발적 죽음이 타자를 위한 것인 경우는 불교문헌에서 찾아보면 붓다의 전생이야기(《자타카》)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보살이 자신의 육신을 보시하는 경우나, 허기에 지친 수행자를 위해 보살(토끼로 태어난)이 장작불로 뛰어든 이야기, 자신의 육신을 매에게 보시한 이야기 등은 이른바 종교적인 자살, 보살행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자타카》에 나오는 자살은 오로지 깨달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이타적인 성격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런 종교적인 자살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님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5. 육신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


쿠마라 카삿파(Kuma�a-Kassapa) 비구와 파야시(Pa�a�i) 왕자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중 수행자가 육신을 훼손하지 않는 이유를 읽을 수 있다. 파야시 왕자는 인과응보나, 내세 사상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쿠마라 카삿파 비구와 대론하였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과응보, 내세의 존재에 대해 왕자가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서 내세가 없음을 주장한다.


계율을 잘 준수하고 덕 있는 수행자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은 모두 살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이들 수행자들은 모두 선인선과의 업보를 믿고 있으므로 자신들이 죽으면 더 나은 천상계에 태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자살하지 않는 것은 내세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왕자의 질문에 비구는 비유로 설명한다. 어떤 브라흐만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두 아내 중 한 명은 10여 세 된 아들이 있었고 또 다른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남편이 죽고 말았다. 어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상속자임을 자처하였다. 이에 임신한 부인은 태어날 아이가 사내면 당연히 자신의 아이도 일부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였다.


다른 부인의 아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유산 상속자라고 임신한 부인에게 말했다. 이에 임신한 부인은 뱃속의 아이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알고 싶은 나머지 방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배를 절개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태아의 목숨도 해치게 되었다. 어리석은 자는 저 여인과 같이 섣불리 기다리지 못하고 행동하여 자신과 주위 사람을 해친다.


그러나 계율을 잘 지키는 수행자는 서둘러 익지 않는 목숨을 끝내지 않는다. 목숨이 익을 때까지 현명하게 기다린다. 그들의 생존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을 더 지을 수 있고, 그리고 또한 다른 생명체에게 유익한 선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힘들게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수행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즉 자신을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이고, 두 번째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선행을 베풀려는 것이다. 결국 한 개인의 존재이유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자살을 하면 이런 자리이타의 행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더 많은 공덕을 지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다른 이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없애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살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다소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육신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은 상황설정을 하여 육신을 보존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어떤 부부가 외아들을 데리고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사막횡단 도중에 그들이 가져간 음식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부부는 의논하였다. 아이를 죽여 음식으로 만들어 사막을 횡단하기로 결심했다. 모두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사랑스러운 독자를 죽이고 음식으로 만들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부부는 통곡하며 사막을 건넜다. 아이를 죽여서라도 육신을 보존한 것은 사막을 건너가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사막이란 생사윤회의 세계를 의미한다.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여 육체를 보존하는 이유는 색욕 등 오욕락을 즐기려는 것도 아니고, 아름답게 꾸며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것도 아니다. 윤회의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건강한 육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육체는 붓다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붓다의 가르침을 담는 그릇, 즉 법기(法器)로 여겨야 한다. 법기의 가치는 재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담겨 있는 내용물에 의해 매겨진다. 겉모양은 훌륭한데 그릇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탐욕, 분노, 무지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그릇에 개밥을 넣는 것과 같다. 자살은 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스스로 깨어 버리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 가운데 인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기독교에서도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유독 인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이 다른 5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신)의 중생들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과 능력을 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즐겁지도, 너무 괴롭지도 않은 환경에 태어나서 적당히 고통스럽고 적당히 행복을 느끼게 되므로 열반을 추구할 수 있는 보리심을 발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존재들에 비교하여 학습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열반의 성취에 더 적합한 존재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도솔천에서 보살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고 했다고 불교도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중생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후생을 받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죽어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인간이 죽어 아귀의 몸을 받기도 한다. 이렇듯 자신의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하면서 여러 종류의 몸을 받는다. 인간이 죽어 짐승이나 아귀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은 쉽지만 반대로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중생이 죽어 인간의 몸 받기는 어렵다. 중생은 선업보다 악업을 더 잘 짓기 때문이다.


중생이 윤회하면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 눈먼 거북의 비유이다. 붓다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난 널빤지를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그리고 그 넓은 바다에는 눈먼 거북이가 한 마리 있어 100년에 한번씩 해면 위로 머리를 내민다고 하자. 그 눈먼 거북이가 해면 위로 떠올라 널판지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할까?” 제자들로부터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자, 붓다는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는 비유를 또 하나 살펴보자. 붓다는 한때 손톱 끝 약간의 흙을 집어들고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손톱 끝으로 집어든 흙과 땅 위의 흙 중 어느 것이 더 많으냐고 물었다. 제자들이 땅위의 흙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대답하자 붓다는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난 중생의 수는 매우 적고 인간이 아닌 중생으로 태어난 수는 훨씬 많다.”며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비유의 요지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 열심히 수행하여 고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크게 소중히 여기거나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짐승과 같은 짓을 하여 지탄을 받는다. 이 비유를 받아들이면 인간으로 태어난 지금 우리의 삶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되새기게 된다. 거북이가 살고 있는 물밑은 삼악도를 가리키고 있다. 삼악도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염두에 두면 설령 더 나은 삶은 살지 못하더라도 악도에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악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불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6. 맺는 말


인간을 위시한 모든 생명체는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붓다는 중생들에게 진정한 행복인 열반과 거기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최고의 행복인 열반은 추구하지 않고 일시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물질적인 행복을 다투어 추구하다 보니 각종 갈등관계가 발생하고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며 스스로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외부에서 오는 무거운 중압감으로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살은 덧없는 행복을 추구하다가 만나게 된 문제에 짓눌려 이루어진 것으로 이기적인 또는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웃이나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해로움만 가져오고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자살은 비난받지 않았다. 보살이나 아라한은 타인을 위해서 또는 다른 중생을 더 이상 이롭게 할 수 없을 때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기도 한다. 붓다는 자리이타의 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대부분의 경우 치명적인 질병)에 봉착하게 될 때 행한 아라한의 자살은 비난하지 않았다. 자살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다.


극단적인 행위를 하게끔 밀어붙이는 사람이나 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개개인이 붓다가 실현한 최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환경을 만드는 것이 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자살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단절하는 행위이다. 넓은 의미에서 자살을 정의해 보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의하에선 순간적인 자해행위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스스로 천천히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나쁜 생활습관, 예를 들면 과음, 흡연, 과식 등은 생명에 치명적인 해를 즉각적으로 가져오지 않지만 계속 반복되면 결국 생명을 해치게 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나쁜 습관도 자살행위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그리고 탐욕, 분노, 무지 등의 번뇌도 건강을 해치는 것이므로 스스로 이런 번뇌를 발생하고 간직하면 자해하게 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릇된 생각과 감정에 빠져 있으면 그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도 자살행위에 해당한다.


단지 즉각적으로 그 해로움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각하게 다루지 않지만 그 해독은 결코 칼이나 독약 못지 않다. 탐· 진· 치를 세 개의 화염으로 보기도 하고 세 종류의 독약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자살, 즉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자살을 생각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스로 죽임은 이기적인 자신을 스스로 자발적으로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의 실현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