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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극단, '최고의 수행법'

slowdream 2007. 10. 23. 10:56
 

또 하나의 극단, '최고의 수행법'


호진스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 졸업. 종교학 박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역임. 저서로는 《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 《인도불적답사기》 등이 있다.


* 이 글은 동화사에서 2004년 9월 4일부터 12회에 걸쳐서 ‘참선(간화선)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개최된 담선대법회에서 호진 스님이 〈초기불교의 선사상과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재수록한 것이다.(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인생은 고(苦)라는 것과 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붓다는 이것을 단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苦)와 고로부터의 해탈만을 가르친다."1)라고 표현했다. 1) Mah vastu, 1, p. 246; 『잡아함』34권 965경(大正藏 2, p.247c).


불교의 궁극목표가 고에서 해탈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와 수행법이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경전에서는 이 사실을 비유해서 "바다는 한 가지 맛, 즉 짠맛이다. 이처럼 이 법과 율[붓다의 가르침]도 한 가지 맛, 즉 해탈의 맛이다."2) 라고 한다.2) Vinayapi aka V (PTS), p.335; 『南傳藏』4권(律部 4), p.357; 『중아함』8권 35경(大正藏 1, p.476c).


이 글에서는 초기불교의 수행법 가운데서도 그 범위를 좁혀 붓다 자신이 닦았던 수행과 최초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수행법, 그리고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특히 초기 불전인 아함경과 율장({4분율}과{5분율})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1. 싯다르타 수행의 구체적 내용


출가한 싯다르타는 먼저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으로 갔다. 그 곳에는 알라라 깔라마( l ra K l ma)와 우드라까 라마뿌뜨라(Udraka R maputra)라는 두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이 두 수행자로부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배워 실천했다.


앞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선정(禪定)'이고, 뒤의 것은 '거친 생각[麤想]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細想]은 있는 경지의 선정'이다. 이 선정들의 내용이나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싯다르타는 이 2가지 선정을 짧은 기간 동안에 닦아 스승들이 성취한 것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것은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3) 두 스승 밑에서 수행한 이야기는 {중아함} 56권, 204경(大正藏 1, pp. 776b-777a); 『4분율』31권(大正藏 22, p. 780 b-c); 『맛지마니까야』2권, pp. 115-119(전재성 역주)에 자세하게 나온다.


싯다르타는 두 스승을 떠나 남쪽으로 약 100km 거리에 위치한 가야(Gay )로 갔다. 5명의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니련선하(尼連禪河) 강변의 울비라(鬱 羅) 숲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고행을 실천했다.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닦았던 수행법은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정과 고행이었다. 싯다르타는 고행을 닦기 위해서 어떠한 스승의 지도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스승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행에 대해서는 선정의 경우와 달리 길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마음을 제압하고 호흡을 멈추는 고행을 했다. 마음을 제압하는 고행이란 아랫니 윗니를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날숨과 들숨을 멈추는 것이었다. 호흡을 멈추자 머리에는 힘센 사람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머리를 쪼개는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났고, 배에는 푸줏간 주인이 날카로운 칼로 창자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났다.


그리고 몸에는 힘센 장정이 두 팔로 붙잡고 뜨거운 화로에 넣어 굽는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났다.(『맛지마니까야』) 역시 육체적인 고행도 했다. 가시덤불과 쇠못을 박은 판자 위에 눕기도 하고, 새처럼 공중에 매달려 두 다리는 위로, 머리는 아래로 향하게 하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태우기도 했고, 추운 겨울날 얼음에 앉거나 물 속에 들어가기도 했다(『증일아함』). 감식(減食)과 단식(斷食)의 고행도 했다. 하루에 한 알씩의 깨와 한 알씩의 쌀밖에 먹지 않았다. 경전은 이 때의 고행이 얼마나 혹심했던가를 자세하게 말해 놓았다. 심신이 모두 피폐해질대로 해져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행에 바친 기간은 선정을 닦았을 때와는 달리 상당히 길었다. 출가 후 수행기간의 대부분을 고행하는 데 바쳤다. 『증일아함』(23권)과 『4분율』(31권)에서 '6년 고행'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데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싯다르타는 이처럼 오랫동안 고행을 했지만 심신만 해쳤을 뿐 자신이 추구했던 진정한 해탈에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이와 같은 고행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4) 고행에 대한 이야기는 『증일아함』23권(大正藏 2, p. 670c-671b); 『맛지마니까야』2권, pp.123-128(전재성 역주); 『4분율』31권 (大正藏 22, pp. 780 c-781a)에 자세하게 나온다.


싯다르타는 고행처 근방 마을에 살고 있던 '수자타'라는 처녀에게서 우유죽[乳 ]을 공양 받고 기력을 회복했다. 이것을 본 5명의 도반들은 싯다르타가 '미치고 미혹해서 도(道)를 잃었다.'라고 하면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는 그 근처를 흐르고 있던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한 뒤 강을 건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필발라(畢鉢羅, pippala) 나무 아래로 갔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이때의 일을 전하고 있는 경전과 율장들은 한결같이 싯다르타가 4선정을 닦았다는 것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5) 『증일아함』23권(大正藏 2, p. 671c); {맛지마니까야』2권 pp. 130-131(전재성 역주); 『중아함』40권 157경(大正藏 1, p.679); 『4분율』31권(大正藏 22, p. 781a-b); 『5분율』15권(大正藏 22, p. 102c).


사실 싯다르타는 그 이전에도 두 번이나 선정을 닦아본 경험이 있었다. 아직 고행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그는 '이렇게 하는 것[고행하는 것]은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출가 전 부왕(父王)이 농경제(農耕祭)를 지내고 있을 때 염부수(閻浮樹) 아래에 앉아 선정을 닦았던 일을 기억했다. '이것이 혹 그 길일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 그 길을 찾자(此或能是道, 我今當求此道)'6) 『증일아함』23권(大正藏 2, p. 671c); 『맛지마니까야』2권 , pp. 128-129(전재성 역주); 『4분율』31권(同 22, p. 781a-b).라고 생각했다. 또 한번은 위에서 보았듯이 출가 직후 왕사성 근방에서 잠시 동안 두 스승 밑에서 선정을 배워 실천했다.


싯다르타가 성취한 이 깨달음을 경전은 정각 또는 무상정등각(無上等正覺)이라고 한다. 그는 이 '깨달음' 때문에 붓다(Buddha), 즉 '법(Dharma)을 깨달은 사람[覺者]'이 되었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장소를 '깨달음을 이룬 가야'라는 의미로 '보드가야(Bodh - Gay )'라 하고, 가부좌를 하고 그 밑에 앉았던 필발라 나무를 '깨달음을 이룬 나무'라는 의미로 '보리수[覺樹]'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서 싯다르타가 성취한 수행의 결과는 먼저 '깨달음[正覺]'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해탈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싯다르타의 수행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맨 처음 그는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이라는 선정을 잠깐 동안 닦았다. 그 다음 거의 6년 동안 여러 가지 고행을 했다. 이 두 가지 수행에서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고에서의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지난날 출가 전에 해보았던 선정을 닦았다. 그는 이것으로부터 정각과 해탈을 이룰 수 있었다.


필발라 나무 밑에 앉아 선정을 닦기 시작해서 정각을 할 때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밖에 경과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경전에서는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이 싯다르타가 정각 이전에 받은 마지막 음식이라 하고 있으므로(『유행경』, 『대반열반경』), 우유죽 한 그릇으로 얻은 기력이 다 떨어지기 전에 정각을 성취했을 것이다. 그것은 길어도 며칠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 단식고행을 그만두었던 싯다르타가 다시 고행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단 며칠 동안의 그 짧은 선정의 실천만으로서 정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싯다르타의 수행이야기의 구성에 있어서 고행 기간을 줄이고, 선정을 닦은 기간을 좀더 길게 연장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그것보다는 이전에 하다가 그만 두었던 수정행(修定行)과 고행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정각 성취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2. 싯다르타의 깨달음


싯다르타의 정각내용에 대해 가장 초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는 붓다의 첫 설법[初轉法輪]에 참석했던 5명의 비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설시(阿說示, A vasit)와 뒷날 붓다의 상수(上首) 제자가 된 사리불(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7) 『남전장』3권(율부 3, 대품, 1, 4, 23), pp. 71-73; 『4분율』33권(大正藏 22, p. 798c); 『5분율』16권(同, p. 110b).


사리불은 그 당시 왕사성 근방에서 산자야(Sa jaya)를 스승으로 모시고 친구 목건련과 함께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왕사성 거리에 탁발을 나온 아설시 비구를 만났다. 그는 아설시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진리[法]를 배웠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설시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 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붓다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것은 짤막한 한 수의 게송(偈頌)이었는데,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내용이었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다. 모든 것은 원인을 따라 소멸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 緣盡, 是大沙門說).


사리불과 아설시의 이 만남과,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 지도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다."고 한 아설시의 고백에서, 붓다의 정각과 그의 첫 설법, 그리고 사리불과 아설시의 만남 등, 이 3가지 사건이 짧은 기간 내에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붓다가 깨달은 것을 곧 녹야원에서 아설시에게 가르쳤고, 그것을 배운 아설시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리불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이 게송에서 붓다의 정각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설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리불은 아설시로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곧 친구 목건련(目 連)과 함께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다른 몇몇 경전에서는 붓다가 깨달은 법이 다름 아닌 연기법이라는 것을 더욱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잡아함』의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如來]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法界)에 항상 머물러 있다. 나[如來]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고, 모든 중생들을 위해 분별해 연설하고 드러내 보였다."8) 『잡아함』12권 299경(大正藏 1, p. 85 b); 『상윳따니까야} 2권, p. 110(전재성 역주).


이 말에서 "나는 이 법[=연기법]을 스스로 깨달아(彼如來 自覺此法)"라고 하며, 붓다 자신이 '깨달은 법'이 바로 연기법이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역시 "연기(緣起)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9)라든지,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고, 나를 보면 법을 본다."10) 라고, 연기법이 붓다 자신이 깨달은 법이라는 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9) 『중아함』7권 30경(大正藏 1, p. 467 a); 『맛지마니까야』1권, p. 573(전재성 역주). 『남전장』14권(상응부경전 3, 제1의 4-87), p. 190.


『잡아함』의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은 이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1)『잡아함』13권 335경(大正藏 2, p. 92 c); 『중아함』21권 86경(同 1, p. 562 c);『중아함』42권 181경(同 1, 723c).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한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우연히 존재하거나 아무런 원인이나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반대로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원인과 조건이 없어질 때 역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연기법이란 한마디로 '관계성의 법칙'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보편적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이다.



3. 고(苦)의 해결방법과 연기법


붓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던 것은 고에서 해탈하기 위해서였다. 마가다에서 두 스승을 만나 수행을 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을 떠났던 것도, 니련선하 강변의 숲 속[苦行林]에서 오랫동안 고행을 하다가 그것을 포기했던 이유도, '진리 또는 존재의 이법'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리의 발견'이라는 문제는 그가 출가해서 정각할 때까지 문제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6년 수행 끝에 그가 도달한 것은 존재의 이법인 연기법의 발견이었다. 싯다르타가 '고의 해탈자'라는 이름 대신 붓다(Buddha), 즉 '법=진리를 깨달은 자[覺者]'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에서의 해탈'과 직접 관계된 것이 아니라, 연기법과의 관계에서 나온 명칭이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붓다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du kha)라는 문제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정각을 성취한 뒤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우려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뿐, 종교가나 사상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고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역시 신(神)과 같은 어떤 존재가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리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에서12) "고는 성인(聖人)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인연이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성질을 가진) 이 고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끊어 없앤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12) 『장아함』1권 1경(大正藏 1, p. 8a).,


붓다는 자신이 해결하고자 했던 고 문제에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의 원리에 따라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해탈, 열반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법을 이해함으로서 고를 원천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자설경(自說經)』의 「보리품(菩提品)」에서(1. 1),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법을 알았으므로."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연기법을 바탕으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명과 방법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람들의 지혜의 수준이나 성향, 처해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가르침이 필요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많은 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이유이다. 무아, 무상이론이 그것이고, 4성제, 12연기, 공(空)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은 모든 불교 교리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이론들이고, 인생에 있어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 방법들이다.



4. 붓다의 수행법


1) 첫 설법에서 가르친 수행법


붓다는 정각을 성취한 뒤 보리수 밑에서 결가부좌 한 채 얼마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앉아 있었다. 그 후, 자신이 깨달은 연기법과 체험한 '해탈의 경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 그와 함께 니련선하의 강변에서 고행을 했던 5명의 도반들을 찾아 바라나시 근처의 녹야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수행하고 있던 도반들은 붓다가 그들을 향해 오는 것을 보자 '고행을 포기하고 타락한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을 하고, 가까이 다가온 붓다에게 상당히 거센 거부반응을 나타내었다.13) 『맛지마니까야』1권, p. 526-528(전재성 역주); 『중아함』56권 204경(大正藏 1, p. 777c); 『증일아함』14권 5경(同 2, pp. 618c -619a); 『4분율』32권(同 22, p. 787c); 『5분율』15권(同 22, p. 104 b); 『남전장』3권(율부 3), pp. 16-18.


이런 상황에서 붓다는 자신이 발견했던 '심심난해(甚深難解)'한 연기법을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실천했던 새로운 수행법과 그것에서 얻은 결과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행을 포기한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 '고행도 쾌락적인 행도 아닌 중도행(非苦非樂의 道行)'이 바른 길이란 것, 자신은 이 중도행을 닦음으로서 정각과 해탈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라.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배워서는 안 될 두 가지 치우친 행이 있다. 하나는 욕심과 쾌락의 하천한 업(業)으로서 범부의 행에 집착하는 것이고[樂行], 두 번째는 스스로 번거롭게 하고 스스로 괴롭히는 일로서[苦行], (두 가지 모두) 성현이 구하는 법이 아니고, 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다섯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치우친 행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면 밝음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며, 정(定)을 성취하여 자재를 얻고,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覺: sa bodhi]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14) 『중아함』56권 204경(大正藏 1, p. 777c- 778a); 『4분율』32권(同 22, p.788a); 『5분율』15권(同 22, p. 104 b).


이것이 붓다의 첫 가르침이었다.

붓다가 이와 같이 설명하자, 5명의 도반들은 그의 말을 좀 더 자세하게 들어 보기로 했다. 붓다는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과 추구해야 할 목표를 설명하고, 그 다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즉 인생은 고라는 것과 고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고, 고의 원인을 제거할 때 도달하게 되는 해탈, 열반에 대해 가르쳤다.


이 3가지의 가르침은 인간들이 처한 상황과 추구해야할 목표에 대한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해탈,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 방법으로서 중도행을 설했다. 중도행이란 구체적으로 8정도,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4가지 가르침은 '4성제(四聖諦)'라는 이름으로 모든 불교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15) 『중아함』56권 204경(大正藏 1, p. 778a-b); 『4분율』32권(同 22, p.788a); 5분율』15권(同 22, p. 104 b-c); 『남전장』3권(율부 3, 大品, 제1 度), p. 18-19.



마침내 5명의 도반들은 한 사람씩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들 역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성취했다. 5명의 도반들은 모두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8정도와 4성제에 대한 이 가르침이 붓다가 정각 후에 했던 최초의 설법으로서, 불교의 출발점이 되었다.16) 『중아함』56권 204경(大正藏 1, p.777c-778a); 『증일아함』14권 5경((同 2, p. 619a-b); 『4분율』32권(同 22, p. 787c-788b); 『5분율』15권(同 22, p. 104c-105a); 『남전장』3권 (율부 3, 大品, 제1 度), p. 21-23.


첫 설법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라나시 출신의 야사(耶舍)와 그의 친구 4명, 그리고 다시 50명의 다른 친구들이 붓다에게 귀의했다. 그들 역시 모두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성취했다. 그때마다 붓다는 자신을 그들 가운데에 포함시켜 "이 세상에는 (나를 포함한 ) 6명의 아라한이 있다.", "… 11명의 아라한이 있다", "…61명의 아라한이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그들 모두를 붓다 자신과 똑 같은 성자인 아라한으로 인정해 주었다.17) 『4분율』32권(大正藏 22, p. 789a-790c); 『5분율』15권(同 22, p. 105a-106a); 『남전장』3권(율부 3, 大品, 제1 度), p. 26, 34, 36.


이것은 그들 역시 '법을 깨친 자[覺者]'가 되었고 고에서 해탈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붓다가 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모두 4성제였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4성제 가운데 첫 3성제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과 추구해야 할 목표에 대한 설명이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네 번째 성제인 도성제(道聖諦), 즉 8정도의 실천이었다. 한마디로 불교의 가장 초기의 수행법은 중도였고, 구체적으로 그것은 8정도였다.


2) 8정도(八正道)


8정도는 독립해서 단독으로 설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4성제와 함께 설해졌다. 그것은 의사가 병자를 치료할 때, 먼저 병의 정확한 진단과 그 원인, 그리고 병의 원인을 제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건강 상태를 설명한 뒤, 치료 방법을 제시해야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을 '대의왕(大醫王)'에 비유하면서 4성제를 설하기도 했다.18) 『잡아함』15권, 389경(大正藏 2, p.105 a-b).


8정도의 명칭과 그 순서는 전 경전을 통해 동일하다. 6정도나 7정도를 말했거나 8정도의 순서를 바꿔 놓은 곳은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경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정견, 정정진, 정념이 그렇다.19) 『맛지마니까야』5권 p. 354- 358 ;『중아함』7권 31경(大正藏 1, p.469 a-b). 여기서는 잡아함(28권 784경)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20) 『잡아함』28권, 784-785경(大正藏 2, p.203a-b); 『중아함』49권 189경(同 1, p.735c).


정견-보시와 공양, 그리고 선행과 악행에 대한 과보가 있고,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고, 아라한은 다음 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너무 장황해서 약간 손질했음).

정사-탐욕이 없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

정어-거짓말, 이간시키는 말, 욕설,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정업-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을 하지 않는 것.

정명-의복, 음식, 와구(臥具), 약(藥)을 법답게 구하는 것.

정정진-꾸준히 힘써 번뇌를 떠나려 하고, 항상 물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정념-생각을 따르고, 생각을 잊지 않으며, 헛되지 않게 하는 것(念隨順 念不妄 念不虛 ; 念念不忘 專念集注).

정정-마음을 어지럽지 않은데 두고, 굳게 거두어 가져 고요한 삼매에 들어 한 마음이 되는 것(住心不亂 堅固攝持 寂止三昧一心). 구체적으로는 4禪을 닦는 것이다.

21)『남전장』11권 하(중부경전4), p. 355; 『중아함』49권 190경(大正藏 1, p. 736 b).


8정도는 그 순서대로 하나씩 차례로 닦아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가 생기고 … 정념을 닦아야 정정이 생기기 때문이다."22) 『중아함』47권 179경(大正藏 1, p. 721 c). 『잡아함』28권, 749경(大正藏 2, p. 198b)에서는 "正見生已起正思 … 正念 正定次第而起."라고 하며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8정도 가운데서 목표는 마지막 지(支)인 정정(正定)이다. 앞의 7지는 정정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그것을 『중아함』에서는 "한 도(道)가 있으니 … 이른바 정정으로서, 그것을 익히고 도우며 또한 그것을 준비하는 7지가 있다. … 이 7지의 익힘과 도움과 준비가 있어 잘 나아가 마음이 하나가 되는데[心一境性], 이것을 정정이라 한다."23)라고 설명하고 있다. 23) 『중아함』49권 189경(大正藏 1, p 735c). 『잡아함』28권(大正藏 2 , p. 199a)에서는 "… 이 7도를 기초행위로 삼으면 그 마음이 하나가 된다[正定](於此七道分 爲基業已 得一其心)"라고 좀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정정은 제1선(禪), 제2선, 제3선, 제4선 등 4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정(定, sam dhi)은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선(禪)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두 말을 합해서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선이란 dhy na의 음역(音譯)인 선나(禪那)를 줄인 말이다.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라고 번역하지만,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명상이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4선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서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경마다 약간씩 다르다. 『중아함』의 『행선경(行禪經)』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24) 『중아함』46권 176경(同 1, p. 713c-714a); 『중아함』40권, 157의 6(大正藏 1, p. 679 c). 『중아함』 25권 102경(同 1, p. 589c); 『중아함』203경(同 1, p. 775a); 『증일아함』7권(同 2, p. 582b).



(1) 제1선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각(覺, 거친 생각)도 있고 관(觀, 세밀한 생각)도 있으면서, [번뇌를] 떠남으로서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생기는 경지(離欲離惡不善之法 有覺有觀 離生喜樂得).


(2) 제2선

각과 관이 쉬고, 속이 고요하고 한 마음이 되어, 각도 없고 관도 없어, 정(定)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경지(覺觀已息內靖一心 無覺無觀 定生喜樂得).


(3) 제3선

기쁨과 욕심을 떠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구함이 없게 되어,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에 즐거움을 깨닫는 경지(離於喜欲 捨無求遊 正念正智 而身覺樂).


(4) 제4선

즐거움도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지고, 기쁨과 근심의 근본이 없어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念]을 버리고 청정하게 된 경지(樂滅苦滅 喜憂本已滅 不苦不樂 捨念淸淨得).


제 4선에 도달하면 정신은 청정해져서 법(法)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眼目)과 지혜가 생기게 되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이것을 『5분율』등 여러 곳에서는, "(8정도를 닦아) 눈(=法眼)과 지혜와 밝음이 생기고, 깨달음을 얻게 되고 (마침내) 열반으로 향한다(生眼[法眼]智明覺向於泥洹)."25)고 말하고 있다. 25) 『5분율』 제15권(대정장 22, p. 104b); 『4분율』 제32권(同2, p. 788a); 『중아함』 제56권 204경( 同1, 777c-778a); 『잡아함』제 12권 287경(동2, p. 81a).


여기서는 각(覺) 또는 정각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이곳에서도 그것은 연기법의 깨달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서 '각(覺)' 다음에 "열반으로 향한다(向於泥洹)."라고 되어 있는 것은 연기법을 깨달은 것 그 자체가 열반=해탈이 아니라, 열반은 깨달음의 다음 단계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의 성취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전에 '깨달음'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5. 맺는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단이 팽창되고, 전도(傳道)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교리와 수행법이 만들어졌다. 그 후로, 8만 4천 가지의 교리 또는 수행법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가르침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수행법이나 교리 형태야 어떠하든 간에, 그리고 그 이름이야 무엇이라고 하던 간에, 그것이 진정한 불교라면 연기법, 선정, 해탈이라는 3가지 요소가 어떤 식으로든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사상으로서의 연기법, 수행법으로서의 선정, 그리고 목표로서의 해탈=열반이다. 연기법은 싯다르타가 성취한 정각의 내용이고, 그것을 응용해서 고를 소멸시키는 수많은 방법들이 고안되었고, 그 방법들을 실천함으로서 궁극 목표인 고에서의 해탈,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연기법은 불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과 차별화되는 핵심적인 요소다. 불교가 종교적 또는 사상적으로 고유성, 독자성을 가지게 된 것은 고문제의 해결방법인 수행법보다는 연기법을 근거로 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제행(諸行)은 무상하고, 제법(諸法)은 무아(無我)한가? 그것은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왜 인생은 고인가? 그것은 제법이 연기법적으로 존재하고 소멸한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부작용[무명, 욕망, 업 등] 때문이다.26) 『중아함』24권 97경(大正藏 1, p. 578b).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연기법적인 원리에 의해서 고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실천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러 가지 교리와 수행방법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27) 불교의 해탈 또는 열반이 범(梵)과 아(我) 또는 지바(J va, 영혼)와 같은 존재를 주장하는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해탈, 열반과 다른 이유는 근본적으로 연기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불변적인 영혼을 주장하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불교 사이에는 해탈, 열반에 대한 개념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을 수 없다[梵我一如(힌두교) 또는 물질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자이나교)].


이 글을 끝내면서 두 가지 문제점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그 한 가지는 '깨달음'과 '해탈[열반]'을 동일시하는 문제다. 초기 경전 내에서도 이미 이와 같은 설명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 경향은 더욱 심화된 것 같다. 그러나 깨달음과 해탈은 분명히 같은 내용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붓다의 깨침의 내용은 연기법으로서 제법에 통하는 '존재의 이법(理法)'이다. 열반이란 연기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응용해, 인간의 무명과 욕망 때문에 발생한 고(苦)문제를 해결한 '결과'이다.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법의 이해'이고, 해탈(열반)이란 고를 소멸시킨 '상태' 이다. 달리 표현하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고, 열반은 '체험의 영역'이다.


붓다 자신도 말씀했듯이 연기법은 자신이 이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진리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나 열반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와 같은 '경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수행법에 대한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어떤 하나의 수행법 또는 최고의 수행법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는 그 시작부터 '병에 따라 약을 준다(應病與藥).',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가르친다(對機說法).'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긴 불교역사를 통해 계승되어온 전통이기도 하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실천방법이 다양하게 변천되어 왔다는 것은 불교역사가 무엇보다도 잘 말해 주고 있다.


인간들은 가지각색의 성향과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어떤 한두 가지의 실천 방법만으로서 그것에 대처할 수는 없다. 어떤 하나의 수행 방법이나 교리를 고집할 때 그것은 붓다가 가장 먼저 설했던 '중도'라는 가르침에 위배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극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