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부처님의 법에는 정의가 있는가
- 불교는 세상의 정신적 정의 설파하지 않아
세간의 정의는 관념의 공상적 조작에 불과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만물을 이익되게 하며 때를 응함에서 끝내 아낌이 없으리라.”
무가보는 중생이나 부처가 공통으로 마음에 지닌 무진장한 보배인데, 그 보배는 곧 중생들과 만물들을 무진장으로 이익되게 할 힘을 말한다. 만물들을 이익되게 함에서 반드시 때에 따라 때에 알맞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가 유교나 기독교처럼 정의를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이 점이 그동안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세상의 정신문화를 왜곡되게 하였다. 불교는 기독교나 유교처럼 세상의 정신적 정의를 설파하고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그런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다. 그동안 동양의 유교문화권은 이 맹자의 언설을 대단히 중요한 사상으로 귀하게 여겼다.
맹자의 정의 사랑에 깊이 매료되어 왔던 한국인에게 정의를 논하지 않고 이익을 말하는 불교의 정신은 불만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불교인도 불교가 정의의 구현에 별로 신경을 안쓴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더구나 안중근 의사가 견리사의(見利思義=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를 옥중 친필로 남긴 것을 생각하면 정의의 의미는 아주 한국인에게 지중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미국인 교수 미이클 센더스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서가 무려 12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인이 그만큼 정의라는 말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힌국인의 정의사랑이 그토록 강렬하다 하여도, 그 정의는 하나의 관념적 허구요, 사실이 아닌 관념의 공상적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기서 감히 말하려 한다. 이런 주장이 한국인의 정의사랑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지만, 우리는 불법의 생활화를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필자가 아는 한에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불법의 존재론적 의미가 충분히 음미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두가지 종류밖에 없겠다. 하나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범주에 속하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존재하는 자연스런 것이 아니다. 예컨대 사회적인 법과 제도, 그것에 의하여 만들어진 습관 등이 지능의 작품이요, 과학기술적으로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다 여기에 속한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취급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양식을 말한다. 이것들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자연적으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존재방식일 뿐이다. 예컨대 이익은 생명이 있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모든 생명은 다 자기 생명에 이익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해로운 것을 다 싫어한다. 이것은 자연의 보편적 현상이고 사실이다. 여기에 어떤 예외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은 자연의 보편적 현상과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정의는 자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적인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회적인 요청일 뿐이다. 그 요청은 허구며 망상이다. 실제로 자연 속에 정의가 존재하지도 않고, 다만 사회적으로 인간이 지성적 사고로 요청한 공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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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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