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불교도장깨기> 비판적 고찰 3

slowdream 2025. 11. 30. 18:47

217쪽. 正定

 

<성도경>(중아함)의 正定 正解脫 원문 해석을 비교해 보자.

云何正定?比丘者,離欲、離惡不善之法,至得第四禪成就遊,是謂正定。云何正解脫?比丘者,欲心解脫,恚、癡心解脫,是謂正解脫。

 

“무엇을 바른 선정이라 일러주는가? 비구라는 자는 욕망을 떠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서 제4선을 성취하여 노니는 데까지 이르는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고 이른다. 무엇을 바른 해탈이라 일러주는가? 비구라는 자는 마음이 해탈하길 바라지만, 어리석은 마음작용에 화가 나 해탈되는 이것을 바른 해탈이라 이른다.”(고광스님 번역)

 

“어떤 것을 바른 선정[正定]이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악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4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해탈[正解脫]이라 하는가? 욕심내는 마음으로부터 해탈하고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해탈한다. 이것을 바른 해탈이라 하느니라.”(불교학술원 번역)

 

 

236쪽. 12연기

 

“우리는 전통적으로 12연기는 ‘윤회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과거(전생), 현재(현생), 미래(내생)로 나누고 여기에 2번의 인과를 적용하는 삼세양중인과로 12연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12연기는 사실 윤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중생은 왜 윤회한다고 어리석게 생각하는지’를 명백히 밝히는 가르침이다. 몰랐기[無明] 때문에 존재한다[五取蘊]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업과 악업에 얽혀 윤회한다거나 죽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12연기는 3세에 걸친 윤회를 설명했다기보다 ‘윤회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중생의 그 어리석은 생각’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했다고 보는 게 옳다. 붓다는 결코 외부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의 망상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그 상태’를 붓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12연기는 모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설명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322쪽)

 

-부파불교의 이론인 ‘3세양중인과설’이 불교계에 널리 알려지고 정착된 지 오래지만, 그 모순됨은 이미 밝혀졌기에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 문제는 12연기가 과연 윤회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이다. 12연기는 중생의 살림살이인 5취온 즉 번뇌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그 궁극적 의미인 苦를 밝히는 가르침임은 분명하다. 마지막 지분인 ‘生-老死.苦’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겠다. 찰라연기로 볼 수도 있고, 업감연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연기경>의 노사 원문을 들여다보자.

生緣老死者,云何爲老?謂髮衰變,皮膚緩皺,衰熟損壞,身脊傴曲黑黶閒身,喘息奔急,形貌僂前,馮據策杖,惛昧羸劣,損減衰退,諸根耄熟,功用破壞,諸行朽故,其形腐敗,是名爲老。云何爲死?謂彼彼有情,從彼彼有情類,終盡壞沒,捨壽捨煖,命根謝滅,棄捨諸薀,死時運盡,是名爲死。此死前老摠略爲一,合名老死。

 

“생은 노사(老死)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무엇이 노인가. 노(老)란 머리카락이 빠지고 변하며, 피부는 늘어지고 쭈그러지고 온몸이 쇠약해지고 제 모습을 잃어가며,몸과 등은 구부러지고 굽으며, 검버섯이 몸의 여기저기에 피어나고, 숨결은 가빠지고,몸의 모양은 구부정해져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정신이 혼미하고 몸은 파리하여 줄어들고 쇠퇴하며, 모든 감관은 노화하여 기능을 상실해가고, 모든 행동이 부자유스럽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노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사(死)인가. 사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마침내 사라지고 없어지게 되어, 목숨과 따뜻함을 버리고 그 생명이 끊어지고 5온(蘊)도 버리고, 죽을 때가 되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러한 사와 앞에서 말한 노를 통틀어서 하나로 하여 노사라고 한다.”(불교학술원번역)

 

-이는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늙음과 죽음이다. 물론 고광스님은 이러한 해석을 義說(거짓주장)에 지나지 않다며 거부한다. 12연기에서 노사는 앞의 有를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때의 有인 존재는 愛-取의 단계에서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가 발생하며 생-노사의 과정을 밟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 삶을 주기로 하는 과정에서도 수없이 다양한 존재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찰라연기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한 삶을 마감하고 다음 삶으로 연기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업감연기라 할 수 있다. 학술원번역은 여기에 충실하다고 보인다. 찰라연기와 업감연기가 중첩된 부분이며, 이는 삶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239쪽. 無明

 

<연기경>의 無明에 관한 서술이다.

世尊告苾芻衆:“吾當爲汝宣說緣起初差別義,汝應諦聽,極善思惟。吾今爲汝分別解說。

 

“나는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연기의 근원[緣起初]과 어긋난 분별[差別義]의 거짓을 설명할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잘 듣고 지극히 훌륭하게 사유하여야 한다. 내가 머금은 것을 너희를 위하여 나누어서 해설할 것이다.”(고광스님 번역)

 

“그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들에게, 연기의 처음[緣起初]과 그 차별된 이치[差別義]를 말하겠다. 그대들은 반드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학술원 번역)

 

-학술원 번역에서 ‘연기초’는 일테면 연기의 총론, ‘차별의’는 12가지 지분의 각론이라 할 수 있겠다. 고광스님에 따르면 연기초는 법설이며, 차별의는 의설인데, 법설은 매우 짧고, 의설은 장황하다. 붓다의 가르침이 구전으로 전승되었는데, 의설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또 전승해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고광스님의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설득력을 갖추기에는 갈 길이 멀어보인다.

 

 

274쪽. 6입처와 촉

 

<연기성도경>의 6입처와 촉의 부분이다.

我復思惟, 由誰有故,而得有觸,如是觸者,復由何緣, 我於此事,如理思時,便生如是如實現觀,由有六處,便得有觸,如是觸者,六處爲緣。

 

“자아로 거듭 사유하게 되면 누군가가 원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존재의 접촉을 얻는다. 이러한 것이 접촉[觸]이라는 자는 거듭 무엇을 원인이라지만 연기한 자아[我]이다. 이 일을 이치에 맞게 생각할 때 곧바로 이러한 명료한 관점[現觀]이 있는 그대로 생겨났다. ‘존재가 원인이 된 6처이기 때문에, 곧 존재의 접촉을 얻는다. 이렇게 접촉한다는 자는 6처가 원인이라지만, 연기하는 것이다’라고.”(고광스님 번역)

 

“나는 다시 생각하였다.

‘무슨 까닭이 있어서 촉이 있으며, 이러한 촉은 또 무슨 연을 말미암는가?’

내가 이 일을 이치와 같이 생각할 때에 문득 이렇게 여실한 현관을 내었다.

‘6처(處)가 있는 까닭에 문득 촉이 있고, 이러한 촉은 6처로써 연을 삼는다.’”(학술원 번역)

 

-‘거듭 무엇을 원인이라지만 연기한 자아[我]이다. 이 일을...’라는 고광스님의 번역은 원문인 復由何緣 我於此事에서 我를 앞쪽 문장에 붙이고 復由何緣我 於此事로 이해한 결과이다. 학술원 번역은 復由何緣 我於此事로 전혀 다르다. 我復思惟에서 붓다는 무아를 주창한 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我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고광스님은 주장한다. 그렇기에 ‘자아로 거듭 사유하게 되면’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독특하다. 者도 그렇다. “경전에서 ‘-者’라고 표현된 문구는 의설을 주장하거나 외도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기술할 때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 따라서 愛緣取者도 ‘갈애를 연한 게 취라는 자’라는 뜻으로 ‘의설을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갈애를 연하는 게 취라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305쪽)

 

 

349쪽. 一切諸受悉皆是苦

 

“모든 존재를 소유하면 한결같이 이것을 괴로움으로 새겨서 느낀다[一切諸受悉皆是苦]라는 느낌의 표현이 등장한다.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느낌을 ‘삼수(三受)’로 알고 있을 것이다. 불교를 언급하는 모든 책에 그렇게 쓰여 있고 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義說이다...‘一切諸受悉皆是苦’는 고성제의 정의로 ‘일체라는 존재로 바라보니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가슴에 새겨서 느낀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나와 세상이 존재한다는 착각, 無明에서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얘기이다. 12연기의 진행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무명이 깨지면 괴로움은 소멸하는 것일까. 해탈하면 정신적 괴로움, 불만족은 소멸한다. 하지만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과보로서 주어진 경험적 개체[5온]의 육체적 괴로움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4고 8고에서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과보이기에 피할 수 없고, 뒤의 4고는 5취온에서 벗어나면서 사라진다. 범부중생은 5취온, 성자는 5온으로 삶을 꾸리는데, 첫 번째 화살이 5온에 꽂힌 육체적 괴로움, 두 번째 화살은 5취온에 꽂히는 정신적 괴로움이다.

 

 

352쪽. 뇌와 환상

 

“사실 ‘눈앞에 드러난 대상’은 ‘내가 눈을 통해서 본 대상’이 아니다. 눈으로 들어온신호를 감지해서 생체 신호로 변환해 신경망이 뇌에 전달하면, 전달받은 신호를 해석한 뇌가 순간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대상과 나를 동시에 구현해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나와 보이는 대상[色]은 뇌가 만들어낸 환상[法]일 뿐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문장이다. 인간 감각기관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바깥 대상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지 못한다. 모든 유기체는 감각기관을 갖고 있다. 인간으로 한정하자면 눈, 코, 입, 혀, 피부, 뇌가 있다. 이것을 토대로 바깥 세계를 접촉하고 이해하고 판단한다. 각각의 감각기관에 해당하는 세계는 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이다. 생각기관인 뇌의 대상인 사실은 눈, 코, 입, 혀, 피부로 감각한 세계의 정보를 취합한 것뿐 아니라, 기억과 상상 또한 포함된다.

 

이러한 인간의 감각기관은 바깥 세계를 완전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눈은 가시광선만을 인식하고 자외선과 적외선은 감각하지 못한다. 또한 귀는 아주 큰 소리나 아주 작은 소리는 인식하지 못한다. 냄새와 맛, 감촉 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인간 개개인의 성별, 나이, 건강상태, 개인적인 성장환경에 따라서 그 인식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감각기관의 기능적 한계로 우리는 세계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며, 뇌의 신경 시스템에 의해 정리된 정보를 실제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이랄까. 그렇다면 세계를 구성하는 나와 자연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데, 진정한 깨달음과 해탈이 가능한 것일지 궁금하다. 지극히 원론적이며 매우 중요한 이러한 물음에 유일하게 답을 주신 분이 바로 붓다이다. 붓다께서는 인식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존재 혹은 존재상태[有無生滅]의 속성이 3법인인 ‘無上, 苦, 無我’임을 밝혀냈다. 감각기관의 한계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와 그 상태의 참된 속성과 원리, 이치, 질서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위의 문장을 감각기관의 한계로 인한 세상을 불완전하게 반영한다가 아니라, ‘나와 대상의 실체’를 ‘뇌가 만들어낸 낸 착각’이라고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이는 지극히 유물론적 사고이다. 뇌는 매체일 뿐이다. 바깥 경계인 대상과 안의 인식 주체인 감각기관의 실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정신적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지각,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상(想)이다. ‘뒤집힌 헛된 생각[顚倒妄念]’은 뇌가 아니라, 想이 그 범인이다. 이 상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 正見이며, 메타인지(meta-cognition)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궁극적 지혜인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은 감각기관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대상에게 ‘실체’가 있느냐를 통찰하는 차원을 가리킨다. 착각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