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임제의 3구

slowdream 2025. 12. 8. 13:03

중국 선종의 대표주자인 6조 혜능 이후로 그 법맥을 이어받은 선사 가운데 유명한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임제 의현이다. ‘임제 할[喝], 덕산 방[棒]’이 회자될 만큼 임제의 언어를 떠난 돈오적 가르침은 유명하다.

 

<임제어록>에 다음의 3구가 나온다.

 

“약 제1구(句) 가운데 얻음이 있다면 조사와 부처에게 스승이 될 수 있고, 만약 제2구 가운데 얻음이 있다면 천인(天人)에게 스승이 될 수 있으며, 만약 제3구 가운데 얻음이 있다면 자신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제자가 바로 묻기를 “무엇이 제1구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삼요(三要)에 주점(朱點)을 찍어 주인과 객을 헤아려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제2구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묘해(妙解)가 어찌 무착(無著)의 질문을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방편 번뇌의 흐름을 끊은 근기(根機)를 저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엇이 제3구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무대 위의 놀아나는 꼭두각시를 보아라. 그를 당기고 늘어뜨리는 것은 모두 그 뒤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임제삼구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일반적으로는 제1구는 바로 조사선의 본연인 돈오를 확철하게 이룬 경지, 제2구는 방편적인 여래선 혹은 교학에서 추구하는 경지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제3구는 그대로 중생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1구는 무분별인 조사선의 경지, 2구는 분별하되 집착하지 않는 여래선의 경지, 3구는 분별하고 집착하는 범부선의 경지라 하겠다. 이는 유식 3성(三性)에 비견할 만하겠다. 1구는 원성실성, 2구는 의타기성, 3구는 변계소집성이다.

 

헌데 근본불교에서 보면 1구는 어불성설이자 자가당착의 자리다. 선종의 본래면목, 진여, 한마음의 그 자리는 분별 이전인데, 분별 이전의 자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직지인심을 직관이라 해도, 직관 또한 의식 작용 즉 분별이지 않은가. 분별은 언어이며, 사유이며 개념이다. 즉 마음의 기능이다. 마음을 가리키는 작용은 무엇인가. 한순간 이전의 마음을 인식하는 것은 의식이다. 즉 우리는 정신작용인 수(감성), 상(이성), 행(의지), 식(의식)에서 한순간도 떠날 수 없다. 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쉬지 않고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며, 난데없이 기억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선에서는 언어와 사유를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로 부정한다. 언어도단, 불립문자. 언어와 사유가 일어나기 전의 그 자리를 운운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하지만, 무분별의 그 자리를 자각하라고 다그친다 한들 자기최면이며 기만에 지나지 않다. 무분별은 주객불이, 선악불이 등으로 전개되며, 깨달은 자에게는 업의 흔적이 남지 않기에 막행막식에 거침없다. 선불교 수행자들에게 유독 이성, 음주, 돈, 도박, 폭력 문제가 따라다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본래면목이자 진여, 한마음인 ‘그것, 그것’을 외친다 하여도 고작 느낌의 수준에서 머물 따름이다. 느낌 또한 정신작용이며, 분별이다. 무분별 또한 분별이다. 의식 또한 분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분별이냐이다. 중도인 8정도의 첫 자리가 정견(正見)이다. 이는 바른 견해, 바른 분별에 다르지 않다. 실체론이냐, 연기론이냐의 갈림길이다. 불교는 현상 일원론이다. 현상 너머의 어떤 자리, 실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를 이원론적인 신비의 영역으로 펼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