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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

slowdream 2007. 9. 25. 21:14
 

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



유동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광동여자고등학교 교법사로 재직하며, 재가 불자들의 모임인 생활인의 불교도량 〈한길법당〉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 《서두를 때 서두르면 느릴 때는 얼마든지 느려도 좋다》(공저) 등이 있다.




1. 들어가는 말


불교를 비롯,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종교 현상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해명을 통해 개개인의 의미 있는 삶과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다. 사회가 변화의 과정에 있을수록 사람들은 개인적·집단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종교의 세계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때 기성의 종교가 그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화석화되거나, 새로운 종교 운동에 그 자리를 넘겨 주게 마련이다.


구한말에 전래된 크리스트교가 빠른 시간에 우리 민족의 주된 종교로 자리잡고, 그 사회적인 영향력은 오히려 기성종교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한 이유는 그들의 선교를 위한 노력이 주된 요소가 되었겠지만, 시대적인 변화의 조류에 적응하지 못한 기성 종교의 기능 부재가 그 토양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에 이르러 350종 가량의 신흥 종교가 범람하고 있다는 보고(한겨레신문 1998. 1. 24)는 이제 크리스트교를 포함한 기성 종교의 역할이 심각한 한계에 부딪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불교의 경우는 그런 문제가 한층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다. 타종교에 비해 신도의 숫자나 문화적 전통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개인적인 종교 생활의 적극성이나 사회적 기능의 측면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는 원래 개인적·사회적 기능이 약한 종교이기 때문일까?


조금이라도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불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그로 말미암은 신행 생활의 굴절된 목적 즉, 현세적, 또는 이기적인 기복신앙이 초래한 현상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표면적 교세의 확장이란 차원에서가 아니라 불교의 근본이념 구현을 위해서, 변질되고 왜곡된 신행 현실로부터 벗어나 불교의 본래 면목을 불교인 개개인은 물론 이 사회·대중 속에 회복시키는 일이 시급히 요청된다.


이 글의 주 논점은 기복불교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여 바람직한 불교 신행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불교 신행의 방식이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한국불교가 불교의 본래면목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으며, 그 문제들이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불교 신행의 본래적인 성격을 간략하게나마 우선 기술하고자 한다.



2. 불교적 신행의 성격


불교는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닫게 하려는 종교이다. 깨달음이야말로 불교를 불교이게 하며, 불교와 여타 종교의 차별성을 극명하는 유일한 척도가 된다. 불교 인구가 천만을 넘는다 해도, 그 가운데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성취한 자가 없다면 실제 불교 인구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불교가 믿음의 요소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법·승과 수행의 과보에 대한 믿음은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거의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끝내 깨달음을 지향, 가능케 하는 요소로서 그 의미가 부여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 진리(眞如)를 깨달을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믿음은 항상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과 함께 나타나고, 발심의 내용을 성취하고자 하는 실천의 행과 연결된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다. 불교적 신앙생활은 이렇듯 ‘믿음’과 ‘발심’과 ‘행’을 하나로 연결한 종교적 생활이며, 그런 종교적 생활, 즉 신행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성도 직후 자신이 깨달은 연기가 너무나 깊고 묘한 것이어서 애탐에 가린 중생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고 설교를 단념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법에 나서게 된 이유는 부처님 출세의 목적이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일대사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생의 근기는 연못에 무수한 청·홍·백련이 떠 있거나 또는 잠겨 있듯이 가지가지 양상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를 배려하여 그에 알맞는 다양한 법문을 설하셨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행해졌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은 이후 부처님 교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홍보,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설을 상황에 따른 대기설법으로 규정한 이해는 부처님 교설의 체계성(次第性 ; 차례성) 정립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이 되어 왔으며, 동시에 보편성 있는 신행 생활의 체계 확립을 약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부처님의 위대성을 도덕적 삶과 감화력의 측면에서만 찾고, 해탈·열반의 경지를 단순한 심적 평화의 상태로 이해하며, 심지어 경전을 경시하거나 깨달음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는 등의 부정적 현상들도 기실 부처님 교설의 성격을 대기설법의 측면에서만 이해한 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연기의 진리로 언표되고 있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부처님 자신의 고백은 물론 제자들과의 문답 속에서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경전에 설해진 다양한 법문은 그렇듯 어려운 깨달음을 중생에게 열어 보이기 위해 마련된 ‘방편 시설’이다.


방편 시설은 ‘가까이 가 알아내게 하다’는 뜻이므로, 그 속에는 초보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심심 미묘한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법과 율에서도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을 설정할 수 있다.”거나, “나는 단번에 완성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에 의해 완성된 지식은 획득되는 것이다.” 하면서, 그것을 불법의 첫번째 특징으로 꼽는 부처님의 말씀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 경전(아함경) 속에는 6근·12처 등 범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5온·4제·12연기 등 성인이 깨달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설이 정교한 짜임새로 조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교설(법문)이 선·후 관계를 이루며 점차 깊어져 가는(漸次第作) 구조를 학계에서는 ‘점교성’이라고 부르거니와, 이 점교성이야말로 어리석은 중생에게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불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아함경》과 초기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반야·법화·화엄경 등)들이 모두 이 점교성에 입각하여 수행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근본적 입장이라고 할 만한 점교성이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지 않아도 복잡다단한 아함의 경설이 부파불교시대를 거치면서 착간되어 더욱 난해하게 된 데다가 번쇄한 사변 철학적 주석이 부가된 점, 대승반야 사상이 《아함경》의 교설을 소승이라 비하하며 배척한 점, 그리고 불교가 중국화의 과정을 거치며 돈오적인 선종 가풍이 지배적인 불교 사상으로 정착된 점 등을 주된 불교 내적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점교성을 인지한 이상, 이제 대기설법은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점교성이 인지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대기설법은 모든 교설이 해탈과 직결된 한 맛(一味)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기설법은 점교성의 체계 속에서는 더이상 존립할 수가 없다. 오히려 대기설법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법문의 수준에 맞춰 법을 설하는, 그리하여 그의 수준을 점차 향상시켜 끝내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방식을 표현한 개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점교성(체계성)과 대기설법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모순적 개념이 아니라 부처님의 의도를 전체와 부분으로서 함께 구현하고 있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이 드러난다.


이와 같이 깨달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발심, 그리고 깨달음에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실천행이란 세 요소가 갖추어졌을 때 온전한 불교 신행은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요소라도 결여되거나 경시될 경우, 온전한 불교 신행은 기대할 수 없으며, 현시점의 불교를 되살펴볼 때 그 요소들이 제대로 갖춰진 불교 신행의 실례를 쉬 찾을 수 없음을 시인치 않을 수 없다. 아니, 오늘날의 불교 신행이 진정한 불교 신행이 아님은, 최소한 불교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갖춘 자에겐 이미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명제가 아닐까 하는 참담함마저 드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는 교훈을 따라, 두 눈 바로 뜨고 나름대로의 소견을 피력코자 한다.



3. 한국불교의 제반 문제와 기복적 신행


우리나라 불교 현실의 문제점은 다양한 계층에서 끊임없이 제기·논의되어 왔다. 그 문제점들은 시대적 상황에 연유하기도 하고, 오랜 불교적 전통에 말미암기도 하여 보다 깊은 분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줄기는 대개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므로 이곳에서는 필자의 소견에 따라 표면적으로 드러난 점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본다.


1) 대·소승의 차별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그 역사성과 본래의 체계성을 대부분 상실, 초기불교(아함경)를 배제한 대승 중심의 불교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 사상에 근거하여 발전·완성된 것이므로, 그에 대한 몰이해는 불교를 지나치게 직관화·신비화하여 불교 본연의 모습을 가려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구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아함경》을 소승이라 비하한 결과 대중적 신행 체계를 정립할 수 있는 바탕마저 상실케 되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그런 중국 대승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아함경》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가고는 있지만, 승단(강원, 선방)의 교육 체계 속에 반영되어 있듯 지도적인 승려 사회에서는 뿌리 깊은 대·소승의 차별 의식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그런 교육 체계를 익힌 승려가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어떠한 가르침을 베풀 것인가는 명약관화한 일이며, 일반 신자는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아함경》을 익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금언집의 일종으로 여겨 설법의 자료 정도로 활용할 뿐, 그 속에 설해진 법문을 실제로 닦아가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처럼 경험적인 현실에 입각하여 논리적 체계성을 정립하고 있는 《아함경》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는 일반 불자들이 각자의 수준에서 깨달음을 추구해가는 신행 생활의 길을 애초에 차단하는 폐해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아함경》만이 부처님의 친설이라거나, 《아함경》의 사상으로써 대승불교를 해석해 버리는 경우도 발견된다. 이 역시 불법의 깊이를 자의적으로 제한하여 불교를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특히 초기대승불교)를 상호 보완적이며 점진적 체계로 이어진 부처님의 근본 교설로서 함께 인식하여, 체계화된 신행을 영위하는 바탕으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2) 선·교의 분리

신라 하대에 전래한 선은 고려시대에는 선과 교의 대립과 지양이라는 현상을 드러낸다. 특히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 혜심(慧諶)에 의해 창도된 간화선(看話禪)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捨敎入禪)’는 위치로 부상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에 반해 경전적 지식의 의미로 흔히 사용되는 ‘교’는, 사실은 경전보다는 경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부파불교시대의 수많은 논서나 대승의 중관·유식학파, 그리고 중국에서 경전 연구를 바탕으로 성립된 삼론·법상·화엄·천태 등의 제 종파의 이론 체계 등이 모두 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불교의 종파적 교학은 신라 통일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해지고, 세월이 흐르며 한국적 사유가 가해져 그 내용이 풍부해지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선에 대한 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적인 교학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로는 교학의 학습처라고 볼 수 있는 강원의 커리큘럼(四集·四敎·大敎)에 의거할 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하는 화엄학을 뜻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선과 교가 역사상 갈등과 조화의 과정을 수차례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호 대립적인 길로 인식되고 있고, 교에 대한 선의 우위성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교의 사상적 연관성 여부는 학계에서도 주요한 논점으로 다뤄져 왔으므로 굳이 이곳에서는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선·교의 대립적 양상과 교에 대한 선의 우월성 주장이 이미 보조 국사가 지적했듯이 ‘문자만 따르는 미친 지혜(尋文之狂慧)’와 ‘고요만 지키는 어리석음(守默之癡禪)’을 오늘날에도 노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의 폐해가 모두 불교의 근본정신과 사상을 크게 훼손시킴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교를 경전적 지식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함에 따라, 불교의 근본일 수밖에 없는 경전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부정적으로 취급당하는 자기 모순적인 행태가 일반화되어 버렸다.


경전은 깨달음에로의 길을 제시해 주는 근본적이고 유일한 표지이다. 그러하기에 역대의 조사치고 경전에 무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에는 경전의 내용을 그저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입문자가 익혀야 할 기초교리 정도로 비하시켜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불교 교양대학 등의 확산이 불교 인구의 증가와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 신도 교육의 바람직한 한 모델로 자리잡고 있음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교리에 대한 단순한 접근과 왜곡된 인식을 굳히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음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함경》의 중심 교설인 3법인·4성제·12연기 등은, 그것을 통하여 범부들이 성현으로 탈바꿈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는 깊은 이치의 법문들이다. 적어도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으로 제시되는 교설들을, 제자들이 그것을 통해 깨달음의 눈을 열고 해탈 열반을 성취한 법문들을 단순한 암기 대상쯤으로 치부하게 된 연유 역시, 교를 경전 사상으로 이해하고 선에 비해 열등한 가르침으로 격하하고 있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은 중국적인 선·교 분립 이전의 소식이다. 그 속에는 정(定)과 혜(慧)가 애초 하나의 체계로 통일을 이룬 부처님의 근본 교설이 온전히 담겨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일반 불자들에게 신행 생활의 지침을 제시하고자 할 때, 방대하고 복잡하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교학이나, 일체의 언어적·논리적 사유가 끊어진 경계에서 파격적 독창성을 구가하는 선은 결코 적당하지도, 용이하지도 않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기존의 교학이나 선을 불교의 핵심으로 고집하는 한, 그에 다가서기 어려운 일반 불자의 신행은 끝내 기복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임 역시…….


3) 기복적 신행-승·속의 괴리

한국 불교는 초전기(初傳期)부터 기존 토착신앙의 현세구복적 성향을 포섭하는 양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조선조의 억불 기간에는 산중 총림 불교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데 역량이 집중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상류층의 생활원리는 유교에 의해 대체되었고, 유교적 윤리관념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서민적 종교심은 불교에 의해 추구되었지만, 교학의 침체와 전법교육 활동의 결핍은 기복화로 대표되는 불교의 왜곡 및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불교는 사회를 정화, 계도하는 가치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내세와 개인적 안위를 기원하는 비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종교로 변질된 것이었다.


불교 신행의 기복화는 필연적으로 수행자·교화자로서의 승려를 사제로 전락시키고 만다. 동일한 가르침을 앞뒤에서 함께 닦아야 할 승·속이 서로 다른 차원의 행동 양식을 굳혀가며 승·속의 괴리는 더욱 심해졌고, 이는 신도의 교육은 물론 위에서 제시한 체계적인 신행 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비록 총림에서는 법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여도 일반 신자들과는 현격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 신자의 저조한 법회 참석율과 수행력의 약화, 그리고 대사회적 활동에 대한 미약한 관심은 모두 그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일어날 당시 브라만교의 제사만능주의와 그로 기인한 사제 제일주의는 부처님의 비판 대상 중의 하나였건만, 오늘날 우리 불교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행해지는 각종 제사 의례와 그것을 진행하는 승려의 모습은 당시의 브라만교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승려는 앞에 서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복잡한 의례를 행해 나가고, 일반 불자는 뒤에 서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목탁만 울리면 부리나케 절만 하는 모습은 더 이상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신행의 기복화는 승속의 괴리를 초래하고, 승속의 괴리는 다시 신행의 기복화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지적한 경전의 폄하와 선종 중심의 수행 풍토, 합리적인 체계성을 갖춘 《아함경》을 소승이라 비하 또는 외면하며 대승 경전을 우선시하는 대소승 분별의 오랜 전통 또한 일반 불자들의 신행을 기복적인 차원에 머물게 한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보아지지만, 승속의 괴리야말로 현실적으로 불자의 신행을 기본적 수준에 머물게 하는 제1요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기복불교’는 한국불교의 제반 문제점이 집약적으로 돌출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기복불교에서 공덕불교로


1) 불교에서의 복

기복(祈福)은 말 그대로 복받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복 그 자체가 타파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을 기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불교나 불교인이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불교야말로 현실 세계에 그 사상과 가치의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이므로 복을 긍정적으로 바라봄이 지극히 당연한 입장인 것이다. 실제로 경전에서는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니 마음으로 늘 생각하라.”(중아함경 138 복경)는 표현이 보이고, 복을 지음에 ‘이 정도면 되겠지’라며 만족해 그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도 있다.(증일아함 제23 지주품)


복은 “불에 타지도 않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물에도 젖지 않고 땅에서도 썩지 않으며, 왕이나 도둑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사나운 벼락에도 부서지지 않으며, 창고에 두고 지키지 않아도 줄어들지 않는”(출요경 제9권), 유일한 “후세의 자본”(대장엄론경 제3권)인 까닭이다.

부처님께서 눈 먼 제자 아니룻다가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하고 힘겨워 할 때, 그 실을 꿰어 주시면서 ‘나야말로 가장 열심히 복을 구하는 자’라 하신 대목은 불교가 복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단적인 예화인 것이다.


이처럼 경전 곳곳에서 발견되는 복에 대한 강조는 불교를 ‘복의 종교’라 해도 무방할 만큼 그 횟수가 빈번하며, 심도 깊게 행해지고 있다. 물론 불교의 복은 현세나 내세의 안락과 연결되어서만 설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을 성취하여 생사를 해탈한 후 다시 남을 위해 그 법을 연설하는 것이야말로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행하는 것(중아함경 143 상가라경)이라며, 복을 열반과 전법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은, 생사의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생사를 떠난 열반의 경계이거나를 막론하고, 어떤 경우라 해도 복은 곧 즐거움으로서 반드시 또 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함이 표명되어 있는 것이다.


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복을 바라는(祈福)’ 마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기복’은 이제 불교 신행의 필요조건이라고 해야 옳으며, 그 기복은 현세의 즐거움과 내세의 안락은 물론 열반의 성취를 기원함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보시 등의 선업을 통한 즐거움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곳에는 여전히 덧없음의 괴로움이 남아 있지만, 선정을 통해 얻는 열반은 ‘한결같은 즐거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중아함경 208 전모경 하)


그러나 ‘기복불교’의 문제점은 기복불교가 말 그대로 ‘기복’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복을 구하고자 하면 복을 구하는 행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을 구하는 행(福業)은커녕 오히려 복을 멀리하는 행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인 것이다. 뱀을 잡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뱀의 머리를 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뱀의 꼬리나 허리 부분을 잡아 오히려 화를 당하는 꼴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악업을 그치고 선업을 닦는 것이다. 악업은 살생으로부터 우치에 이르는 열 가지로 정리되어 열거되고 있으며, 그 십악업은 다시 5계를 통해 경계되고 있다. 살생·도둑질·사음·거짓말 등의 악업은 남으로부터 소중한 것을 ‘빼앗는’ 행위이다. 따라서 선업은 그 반대로 ‘주는’ 행위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경전에서는 ‘보시’를 대표적인 선업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계가 악을 그치게 하는 소극적 덕목이라면, 보시는 선업을 행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덕목인 것이다.


기복은 이제 실제로 복을 짓는 작복(作福)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5계 수지와 보시행을 통한 작복 없이는 어떤 기복도 성취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행과 괴로움을 초래하는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와 축원의 힘으로 죽은 자를 천상에 태어나게 하려고 시도하는 바라문들을 향해 부처님께서, “연못에 돌을 던지고 나서 ‘돌아 떠올라라’ 기도하고 축원하면 그 돌이 과연 떠오르겠느냐?”며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경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 당시에 행해지던 제사 등의 종교 의례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신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제물을 바친다는 명목으로 살생이 저질러지는 제사 의례는 배척하셨지만, 제사를 통해 보시행이 이뤄지는 경우는 용인하셨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선업(지계·보시)을 행하는 한 형식으로서의 제사 의례가 아니라면, 불교에서의 제사 의례는 어떤 의미도 부여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숱한 제사 의례가 이와 같은 불교적 의미를 견지하고 있는가 여실히 살펴볼 일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복을 바라는 마음(발심)으로 지계나 보시 등의 선업을 짓고(실천행), 그 과보로 현세와 내세의 즐거움을 직접 누리는 것(증득)이야말로 불교 신행의 가장 초보적인 완성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신행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선업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과보가 따른다’는 3세업보의 교설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져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복은 그와 같은 수준에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업을 통한 복은 여전히 덧없는 것이며, 따라서 보다 차원 높은 복이 추구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전도 선언을 통해 ‘사람과 하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기치를 표방하셨거니와, 이는 곧 복업의 결과로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들인 하늘 세계의 중생들에게도 더해 줄 행복이 있음을 뜻한다. 바로 열반의 행복인 것이다.


2) 공덕을 지은 아라한이 되라

열반의 경지를 체득함은 전문적인 수행자에게조차 결코 쉬운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재가자에게는 더욱 요원한 이상으로 여겨질 것이 당연하다. 재가자들의 신행 활동이 기복의 수준에 머물거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해도 대부분 재계나 보시행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질적인 이유 중 하나가 열반의 체득이 실질적이고 전문적인 수행 과정을 요한다는 점에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기복불교의 한계를 탈피하여 불교 신행의 본래 면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함경》으로부터 《반야경》 《법화경》 내지 《화엄경》 정토경전 등 초기 대승불교를 잇는 한줄기 깨달음의 길을 부처님의 근본 교설로 인식하여 닦아 나가야 함을 제안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함경》의 교설은 애초 무속적·사제적(司祭的)인 신행을 배제, 승·속이 함께 불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점진적인 수행 체계를 시설하고 있으므로 미신적인 기복불교와 승·속의 괴리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출가 수행자 못지않은 수많은 재가의 제자들이 등장하여 선업행은 물론 출세간적인 수행의 과보까지 당당히 성취하는 기사가 다수 실려 있어, 재가 불자들로 하여금 그 신행의 차원을 고양하는 충분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함경》 속에 설해진 각각의 법문들은 예외 없이 현실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解)·그에 입각한 체계적인 선정(行), 그 결과 도달되는 깨달음의 세계(證)가 연계된 유기적인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선·교의 별립에 따른 암증선사(暗證禪師 ; 맹목적·자의적 불교)나 문자법사(文字法師 ; 이론적 불교)의 폐해를 원초적으로 방지할 수도 있다.


대·소승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이미 대·소승을 ‘한줄기 깨달음의 길(一佛乘)’로 파악하고, 그에 입각한 보살행도(10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금의 한국 사회는 크리스트교의 놀랄 만한 성세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의 거대한 물결이 지배적인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간의 교류는 물론 종교와 여타 학문과의 대화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조류 속에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적 바탕을 지니지 못한 종교는 사회적으로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고 그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기능과 위상의 상실은 물론 존립 자체마저 위협받게 된다. 《아함경》의 중요성은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한층 부각된다.


《아함경》 속에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적인 세계관과 그 사유의 궤를 같이 하고 있는 6사 외도를 비롯, 크리스트교를 연상케 하는 브라만교 등 당시의 모든 사상들이 소재로 등장하여 논의·비판되고 있으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의 진리성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고로 훈련된 현대인들에게 근본 교설의 이런 요소는 불자들로 하여금 불교 수행이 자신의 사유 체계로도 능히 접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아함경》을 기초로 한 그와 같은 근본 교설의 체계는 기복적 행태를 포함한 한국불교의 제반 문제점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아니 유일한 신행 체계로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함경》(증일아함경 제29 고락품2)에는 그와 같은 체계를 통해 이룩되는 이상적인 불자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어떤 사람은 몸은 즐거우나 마음은 즐겁지 않고, 어떤 사람은 마음은 즐거우나 몸은 즐겁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마음도 즐겁지 않고 몸도 즐겁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몸도 즐겁고 마음도 즐거우니라.


어떤 사람이 몸은 즐거우나 마음이 즐겁지 않은가. 복을 지은 범부들은 의복·음식·침구·의약의 네 가지 공양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아귀·축생·지옥의 길과 그 밖의 나쁜 세계를 면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몸은 즐거우나 마음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니라.


어떤 사람이 마음은 즐거우나 몸은 즐겁지 않은가. 이른바 아라한으로서, 그는 공덕을 짓지 않아 네 가지 공양을 스스로 마련해 얻지 못한다. 그러나 지옥·아귀·축생의 길을 면하는 것은 저 아라한의 유유(唯喩)와 같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마음은 즐거우나 몸은 즐겁지 않은 사람이니라.


어떤 사람이 몸도 즐겁지 않고 마음도 즐겁지 않은가. 이른바 범부로서 공덕을 짓지 않아 의복·음식·침구·의약의 네 가지 공양을 얻지 못하고 다시 지옥·아귀·축생의 길을 면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몸도 즐겁지 않고 마음도 즐겁지 않은 사람이니라.


어떤 사람이 몸도 즐겁고 마음도 즐거운가. 이른바 공덕을 지은 아라한이니, 그는 의복·음식·침구·의약의 네 가지 공양에 모자람이 없고, 또 지옥·아귀·축생의 길을 면하는 것은 바로 시파라 비구와 같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세상에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방편을 구해 저 시파라 비구처럼 되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이곳에서 우리는 ‘공덕을 지은 아라한’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함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불교의 목적은 열반의 체득, 즉 아라한과의 성취이다. 흔히 아라한이라고 하면 세간적인 차원을 초월한 존재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의 경설은 아라한이 세간적인 복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간적인 복덕과 출세간적인 깨달음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불제자의 이상적 상태임을 밝혀주고 있다. 물론 부처님을 지혜와 복덕이 구족한 분이라 칭할 때 그런 점은 이미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같은 경설 안에서 ‘복’을 ‘공덕’이라는 표현으로 전환하고 있는 부분을 강조하고자 한다. ‘복’과 ‘공덕’은 대·소승 경전을 통틀어 숱하게 나타나며 그 의미가 혼용되어 쓰이는 술어이다. 현실적으로도 ‘공덕을 쌓는다’고 할 때의 그 공덕은, 많은 경우 개인적이고 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기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과 공덕은 그 의미상 상당히 다른 면모를 또한 보이고 있다. 복이 주로 선업의 결과로서 받게 되는 과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술어라면―실제로 기복불교의 문제점 역시 복을 받을 만한 선업은 행하지도 않고서 결과만 바란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공덕’은 선업의 과보로서 누리는 복락의 의미와 함께, 선업을 행함으로써 그 자신에게 갖추어지는 능력이나 덕을 아울러 일컫는 개념이다.


또한 복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세간적인 안락에 비중이 두어지고 또 개인적인 차원의 뉘앙스가 짙은 반면, 공덕은 세간·출세간의 복락을 연결 내지 포괄하는 용법으로, 특히 대승경전에서 더 많이 사용됨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을 구하는 중생의 자연스런 성향을 애써 절복하지 않고 그 마음을 승화시켜 보다 차원 높고 불교적인 이상에 부합하는 신행 생활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개념으로는 ‘공덕’이라는 술어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공덕’은 경전(正法)의 수지 독송 서사 유포는 물론, ‘회향’이라는 불교의 궁극적 실천 항목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함경》과는 달리 대승경전은 예외 없이 불교의 궁극 목적을 성불과 불국토 건설이라 천명하고 있다.


성불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불국토 건설은 성불의 사회적 표현이다. 성불 이후에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선후관계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성불이 곧 불국토의 건설이라는 상즉(相卽)의 이치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반야부 경전에서 선업이나 수행의 모든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거나, 《화엄경》 등에서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 회향한다는 교설이 줄기차게 설해지고 있는 것은 ‘공덕’이 ‘복’과는 달리 성불과 불국토 건설이라는 불교의 궁극 목적에 닿아 있는 술어임을 알게 한다. 이렇게 볼 때 ‘공덕’은 불교 신행의 첫 단계로부터 궁극적 이상까지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실천행의 슬로건으로 채택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기복불교에서 공덕불교로의 전환. 《아함경》의 교설로부터 초기대승불교의 법문에 이르는 부처님의 근본 교설을 실제적인 신행의 내용으로 갈무리한 공덕의 추구. 미래 한국불교의 희망은 그것이 얼마나 성취, 정착되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5. 군더더기 말


1) 그릇된 방편의 추방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이라고 함은 이미 말한 바가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제법의 실상은 사실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므로,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근기를 서서히 성숙시키는 체계를 마련하여 당신이 깨달으신 바에 접근케 하려고 하셨다. 불교의 모든 법문은 그렇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중생들로 하여금 직접 깨닫게 하기 위해 마련된 뗏목과 같은 것이다. 방편(upa?a)의 원래 의미가 ‘가까이 가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방편은 일종의 수단적인 의미를 띤 술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방편의 그런 수단적인 의미에만 주목하여 그 가치를 폄하, 왜곡하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음은 매우 위험스런 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방편은 4성제·12연기·6바라밀설 등과 같은 부처님의 법문 그 자체를 가리킴에 다름이 아니다. 중생은 그런 방편의 뗏목을 타고 마침내 붓다의 깨달음이란 저쪽 언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방편은 사주나 관상을 봐주거나, 부적을 판매하는 등 사람들을 사찰로 불러들이기 위해 자행되는 비법(非法)을 합리화시켜 주는 말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런 행위가 사찰에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려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 거룩한 길이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으로부터 멀게 하고, 악도에 떨어지게 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빗나간 방편이 횡행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짐작이라도 하셨던 것일까? 부처님은 “잘 생각하여 방편을 구하고 이치가 아니거든 권혜를 쓰지 말라.”(출요경 제8권)며 경계하고 계신다. 만약 그런 행위를 방편이라며 버젓이 행하는 불교인이 있다면 그는 이미 불교인이 아니라 불교인의 옷을 입은 외도요, 마군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방편의 의미와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한국불교가 기복적인 수준을 탈피하는 중요한 요소가 됨을 지적해 둔다.


2) ‘신행’이라는 술어의 문제

최근에 이르러 조계종단 등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에서는 신도들의 신행 활동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노력은 불자들의 신행을 기복의 차원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람직한 결실을 이끌어 낼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 전에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신행 체계화의 실제 내용은 둘째치고, 일단 ‘신행(信行)’이라는 말 속에 반영되어 있는 한국불교의 이분법적 신행 구조이다.


불교는 법문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유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그런 법문을 닦아 나아가는 생활 역시 신해행증의 과정을 지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해·행·증의 항목 중,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知見)과 연관된 것은 해와 증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그 네 가지 항목을 짝지을 경우, ‘신해’와 ‘행증’이 짝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믿음은 이해로 나아가야 하고, 실천행의 목적은 깨달음의 증득이라는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이해 없는 믿음은 맹목이요, 증득 없는 수행은 공허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신행’이란 말을 보자. 이는 당연히 신해행증을 축약한 표현이지만, 그 가운데 목적(깨달음)에 해당하는 항목은 빠져 있는 것이다. ‘믿고 행함’이란 말은 비유하자면 눈과 머리보다는 몸과 다리에 비중을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해’라는 말도, ‘행증’이라는 말도, ‘해행’이라는 말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행’이라는 표현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행’이란 말은 거의 전적으로 재가 불자를 대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출가 승려를 대상으로 ‘신행’ 생활, ‘신행’ 활동이라는 표현이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들어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행증’이란 표현은 승가 내에서 종종 쓰이고 있음을 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가 불자에게는 깨달음과 그를 위한 실천행보다는 믿음과 그 믿음에 입각한 실천행이 본분사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은 출가 수행자의 몫이요, 재가자는 그런 출가 수행자를 믿고 따르며 보시행 등을 통해 그 수행을 돕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일종의 역할 분담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인 상황을 볼 때 그런 역할 분담이 불가피함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상황일 뿐, 불교인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형태는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재가 불자에겐 당연히 출가승을 공경, 공양해야 할 의무(이는 권리이기도 하다)가 있지만, 그것이 재가 불자의 신행 생활의 전부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지향하는 동반자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출가자는 수행과 전법에 매진하며 재가자를 이끌고, 재가자는 그들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며 서로를 보완해 주는 관계를 이루지만, 그런 관계 속에서 재가자 역시 깨달음을 지향해 나가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엄연한 명제를 뒤로 한 채 고정적인 역할 분담의 사고를 부지불식간에 견지하고 있는 한, 한국불교는 작금의 기복적 수준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기복적 행위는, 달리 표현하면 깨달음을 지향하지 않는 선업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도’나 ‘신자’라는 말 역시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심각하게 음미해 보아야 할 말이다. 그 말 역시 재가자를 대상으로만 쓰이는데, 재가자를 단순히 믿는 자의 차원에 묶어 놓고 있는 표현인 까닭이다. 불교가 그 질적 측면이나 양적 측면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었다고 할 수 있는 시대의 경전인 《아함경》이나 대승경전을 볼 때, 재가자들을 그렇게 규정하거나 부르고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법화경》이나 《화엄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모든 불교인을 ‘불자(佛子)’라 하여 굳이 출가나 재가를 분별하지 않고 있다. ‘불자’라는 호칭 속엔 출·재가는 모두가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니고 깨달음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란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신행’이라는 말을 빌미 삼은 이와 같은 생각은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소견일 뿐으로, 이미 정착된 그 말을 폐기처분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또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며 내세울 만한 마땅한 대안도 가지고 있지 못함이 사실이다.(‘신자’ 또는 ‘신도’란 표현은 ‘불자’로 바꿔 부르는 것이 좋고,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단지 이를 계기로 하여 출가 수행자나 재가 불자들이 모두 불교인의 본분사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불국토 건설’이라는 불자 공동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데 함께 힘 모으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