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 담론
정 각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동국대 강사. 논저서로 〈불교적 구원관〉 《한국의 불교의례》 《천수경 연구》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설》 등이 있다.
불교는 고(苦)의 인식(苦諦)과, 고의 원인(集諦), 고의 소멸(滅諦),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諦) 등을 통한 해탈의 실천적 원리 즉 사성제(四聖諦)와 일체개고(一切皆苦)를 기저로 한 연기법(緣起法)을 통찰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의 원리를 바탕으로 업(業)을 청정함으로써 아공(我空, 法空까지를 포함한)을 통한 윤회의 종식, 아집(我執)을(대승의 경우 法執까지를) 떠난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르고자 한다.
초기불교 수행자들은 팔정도(八正道)의 실행1)을 통해 해탈(解脫)과 함께 궁극적 열반으로 나아가기를 희구하였다. 그들이 붓다의 모범에 따른 수행 원리에 의해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인정한다면 ‘불교의 수행자’는 ‘팔정도의 실행을 통해 열반적정의 경지로 나아가는 자’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수행자란 탐·진·치의 불길을 잡는 소방수”임에도 불구하고 “소방수이어야 할 수행자들이 중생들처럼 불이 타오를 여건이나 만들고, 타는 불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2)는 한국불교 수행자들에 대한 우려는 앞서 말한 수행 원리의 표피에 묻어진 ‘얼룩’에 해당한다.
1) 팔정도의 실행은 동시에 탐·진·치 삼독에 대한 계·정·혜 삼학의 원리를 바탕한다. 한편 정견의 혜해탈을 거쳐 정사유·정어·정업 등의 원리인 계를 통한 신·구·의 삼업의 청정과, 정명·정정진·정념 등의 노력을 통해 정정의 심해탈(心解脫)에 이르를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궁극에 혜를 증득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채 열반적정을 증득케 되는 원리의 총체적 관점이 팔정도의 실행 속에 담겨져 있는 한에 있어, 팔정도는 불교 수행원리를 대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정각, 〈불교적 구원관〉 《신학과 사상》22호, pp.39∼43.)2) 도법, 〈경계해야 할 빈 수레의 요란함〉 《선우도량》 2호, p.5.
그럼, ‘얼룩’이란 무엇인가? 정견과 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3) 등 팔정도의 실행에 대한 그릇된 이해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현시대 한국불교 수행자들은 팔정도의 원리에 따른 바른 소견과 인식을 통해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을 설정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얼룩’들은 지워질 것이다.
3) ① 정견은 두루 가리어 가진 법을 결정하며, 두루 보고 관찰하여 환히 아는 것을 말한다. ② 정사유(正志)란 심(意)으로 살피어 생각할 만한 것이면 생각하고, 바랄 만한 것이면 바라는 것을 말한다. ③ 정어란 입의 사묘행(四妙行)을 제하고 다른 모든 입의 악행을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④ 정업이란 몸의 삼묘행을 제하고 다른 모든 몸의 악행을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⑤ 정명이란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욕심이 많아 만족할 줄 모르지 않으며, 온갖 기술과 주술의 삿된 직업으로써 생활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써 구하여 쓰는 것을 말한다. ⑥ 정정진(정방편)이란 한결같이 꾸준히 힘써 구하고 힘차게 나아가 물러나지도 않고 바르게 그 마음을 항복받는 것을 말한다. ⑦ 정념이란 따르는 생각은 생각하고 향하지 않는 생각은 등지며, 두루한 생각을 생각하고 되풀이한 마음을 기억하여, 바르게 마음의 응하는 바를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 정정이란 마음이 머무르고 선이 머무르고 순함이 머물러, 어지럽지 않고 흩어지지 않아 바른 정을 거두어 잡는 것을 말한다. 中阿含經(大正藏 1, p.469上)
최근 들어 한국불교 수행자상에 대한 많은 논의와 자기반성이 행해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시간과 공간의 만남으로서 형성된 역사적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 각 개체는 역사성의 주체가 된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는 개개의 실존 주체로서의 수행자들은 “불교라는 관념의 종(種)도 수천 수만 가지다. ……순수한 종을 가려내었다 하더라도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 종교가 될지는 모른다. 우리는 수많은 가지들 중에서 이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 기대할 뿐이다.”4)라는 대안을 내세우며, 대안으로서의 관념 자체가 궁극의 이념에 합일하기를 소망하기도 한다.종림, 〈미래의 승가상에 대한 모색〉 《선우도량》 9호, p.146.
그럼에도 상황윤리를 제시하는 현시대적 이념의 혼란은 상황원리의 수정을 요구한다. 이는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대안이 되어질 것이며, 무수한 자기변혁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동업(同業)을 바탕으로 한 연기론적 차원에서 현시대적 구원의 본질은 대중의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중의 현실적 삶과 관련된 주변 인식에 대한 근원적 수정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에 필자는 우리의 삶을 구획하는, 우리의 사념을 한정 짓는 몇몇 현상적 범주 안에서 붓다의 근본정신에 따른 현상 원리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는 바라문교적 통념에 대한 붓다의 해방자적 인식의 현대적 발현에 해당할 것이다. 이로써 팔정도의 원리 가운데 현상에 대한 정견(正見)의 인식을 공고히 하고 혜해탈(慧解脫)에 이를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마련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호국불교의 망령에서 벗어나라
전륜성왕(轉輪聖王)이기를 포기한 고타마 붓다의 정신을 우리는 안다. 출가 후, 제국의 반을 주겠다는 마가다 국 빔비사라 왕의 제의를 물리친 싯닷타는 마가다 국의 무력을 배경으로 코살라 국에 대해 자민족(自民族)을 해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다. 그는 더 나아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수많은 샤카 족 왕자들을 출가시킨다. 이로써 그는 자민족의 통솔력을 약화시키고, 코살라 국에 의한 조국의 멸망을 스스로 맞이한다. 그는 자민족이라는 소국주의(小國主義)적 관점을 멀리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기원하면서 전륜성왕이 아닌 법왕(法王)이기를 자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불교 승가(僧伽)는 스스로가 전륜성왕의 현신이거나 적어도 그 후원자이기를 자원한다. 마치 데바닷타가 아자타샤트루(Aja?as�tru, 阿淞世) 태자에게 제의했던 바와도 같이, 새로운 왕과 새로운 종교지도자가 결탁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자는 망상에 동의한다. ‘87년 10월 31일 ‘노태우 후보 당선 기념법회’를 열기도 한 승가는 작금에 이르기까지도 권력에 아부하는 데바닷타의 길을 걷고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자. “삼국에 있어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봉적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이같이 왕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히 지지·발전하게 된 것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계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 적합한 때문이었다고 믿어진다.”5)고 한다. 즉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신도의 관념은 하나의 왕을 받든다는 신민(臣民)”으로서 인식되었던 추세는 중국 북방불교의 유입을 전제한 것으로, 여기에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이념이 마련된다.6) 5)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9, p.77. 6) Ibid.
이차돈의 순교, 김대성의 불국사 석굴암 조영, 황룡사 9층탑의 건립, 대각국사에 의한 천태종 부흥 등은 모두 호국의 이념 속에 등장하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 불법 흥륜(興輪)의, 즉 정치적 전륜성왕이기를 자부한 법흥왕이 등장하며, 진흥왕은 스스로 아쇼카 왕이 조성하지 못한 석가 삼존상을 조성하는 인연 있는 나라의 전륜왕임을 자부하면서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 사문(沙門)의 길을 걷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 1948년 5월 승려 출신 최범술 및 유성갑은 제헌 국회의원에 진출하는가 하면, 50년 5월 승려 출신 이종도와 허영호, 박성우 등은 2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이와 같이 승가는 스스로 전륜성왕의 길로 나서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이른바 호국불교가 있었다.
‘호국불교의 망령’은 고타마 붓다의 무국주의 정신에 위배된다. 고려조 몽고 침입에 대한 승장(僧將)들의 활동으로부터 조선조 서산(西山)과 유정(惟政)의 승병 운동.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란 호를 수여받은 승병장 서산과,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고 ‘가의대부행용양위대호군(嘉義大夫行龍�衛大護軍)’이란 호를 하사받은 유정(惟政)의 이념 속에 깃든 호국불교의 이상(理想)으로부터 우리는 탈피해야 한다.
호국을 앞세운 최이(崔怡)와 정안(鄭晏)의 고려대장경 조판사업은 당시 집권자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책략이기도 하였는바, 수많은 전란 가운데 승장(僧將)들의 위력 속에서 우리는 세속 권력과 야합한, 적어도 그에 부합하려는 종교적 실체 내지 칼을 들고 타인의 생명을 죽이는 무자비한 세태의 양상을 엿볼 수 있게 된다.
1961년 7월 조계종은 국방부 군종실장에게 ‘군종 포교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 1975년 8월 ‘호국승군단’의 헌장과 종령을 발표한 바 있기도 하다. 이렇게 생겨난 군승(軍僧)제는 정훈장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유혈의 전장에 나서게 될 장병들에게 원광(圓光)의 세속오계적 차선이 아닌, 우리만의 조국을 위한 종부성사(終傅聖事), 예수재(預修齋)를 자청해서 행하였던 것이다.
군승의 기원이 어디 있는가? 군승은 중세 십자군전쟁 때 전쟁의 독려자로서 생겨난 것이며, 모택동식 인해전술을 위한 종교성의 증표로서 발현된 것이다. 붓다께서는 《율장》에서 수행자는 전쟁터에 나서지 말라 하셨다. 또한 그곳에 3일 이상 머물지 말라고 하셨다.
붓다는 콜리야 국 국경 사이를 흐르는 로히니(Rohni) 강의 수리권(水利權) 분쟁 해결을 위한 논의에서조차 “전쟁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살인은 살인자를 낳고, 정복자는 그 자신의 정복자를 만들며 약탈자는 자신을 약탈하는 자를 낳는다.”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크샤트리야의 책무를 포기한 채, 차라리 샤카 족 공회(公會)에서 추방당하는 운명을 택했다.7) 7) B. R. 암베드카르(박희준, 김기은 역), 《붓다와 다르마》, 민족사, 1991, pp.29∼34.
한편 진평왕 30년(608년), 국경선을 침범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나라로 군대를 청원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으라는 왕명에 원광은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려거든 그것은 사문의 도리가 아닙니다(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8)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나라 살리고자 생명을 죽이려는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 그 제도에 가입함은 사문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8) 《三國史記》 卷第4, 眞平王條.
군대는 포교(布敎)의 황금어장이라 말한다. 그렇다고 포교의 명목 아래 ‘사문의 도리’를 담보로 저당잡혀야 하는가? 전도를 중시하는 기독교의 아류 ‘여호아의 증인’은 왜 징집기피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면서까지 전도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가?
종교가 사회적 기반 위에 형성된 이상 사회적 요구에 자유롭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군복무가 의무화된 공업(共業)의 국가제도 안에 살고 있는 한 군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더라도 우리 불제자들은 최소한 군승의 목적이 군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것인지, 포교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인지부터 진지하게 논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민중신학적 아류를 지양하라
80년대 대학가의 민주화전선과 나란히 탄생한, 은둔과 무관심에서 탈피한 의식화 승려들은 스스로가 공업중생(共業衆生)의 대변자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민중불교운동연합·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동국대불교도연합·실천불교 전국승가회 등의 정치적 견해 속에 우리는 스스로가 민족정신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의문이 생긴다.
또한 불교는 남북 이념 통합의 이데올로기 속에 통일 한국의 지분 확보를 목적으로 한 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닦아가야 하는가? 인도 독립을 위한 국민의회(國民議會)의 암베드카르(B. R. Ambedkar)류, 서북인도 및 스리랑카 등지의 하층민 해방을 위한 불교이념으로부터 파생한 마르크스주의류의 불교 등을 혼합한 민중불교의 정신은 참다운 메시아, 미륵의 탄생을 예고할 것인가?
해방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문화식민지정책으로서 발현된 ‘정권 개입에 의한 종교 분쟁(정화)’ 54년 5월 이승만의 ‘대처승 축출 담화문’으로부터, 1955년 ‘제5차 사찰정화유시’ 이후 1959년 ‘비구승·대처승간의 분쟁 종결을 위한 성명서’ 발표 이래 수년간에 걸친 비구·대처 투쟁의 역사적 몰인식을 딛고서, 63년 9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창립으로부터 한국불교의 현실 인식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학원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83년 여익구는 ‘불교사회문화연구원’을 통해 ‘대불련’의 의식화와 함께 85년 5월에는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창립한다. 즉 독재에 항거하여 민중의 권익보장과 불법(佛法) 수호를 목적으로 무폭력의 아힘사(ahimsa) 운동을 전개하면서 ‘반정부적’ 정치운동의 노선에 뛰어든다. 그리고 86년 설립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아류인) ‘정토구현 전국승가회’는 반독재와 민주를 주장하면서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확충해 갔다.
이러한 것들이 샤카 족에 앞서 이발사 우바리를 출가케 한 붓다의 계급투쟁의 현실체인가? 필자가 보기에 현시대적 상황 속에 붓다의 이슈였던 사성평등(四性平等)의 전제는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이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북한 쌀 보내기 운동’과 같은 현실 인식은 진정 자비의 소산인가, 아니면 통일 한국을 대비한 지분 확보의 수단인가?
88년 법성 스님의 ‘근본불교연구소’ 설립은 적어도 위와 같은 세속적 이념을 멀리한 듯 보인다. 80년 전서암의 〈민중불교론〉과, 81년 〈새로운 불교운동으로서 사원화운동〉 등은 ‘사원의 세간화와 세간의 사원화’를 주장하였다. 86년 ‘9·7 해인사 전국 승려대회’는 〈불교 자주화 선언문〉을 통해 “호국불교는 정권에 봉사하는 것이 아닌 국민에 봉사하는 것”이라 말함으로써 호국불교에 대한 인식 전환을 가져왔는바, 이는 80년대 불교 사회운동의 최대성과라 할 수 있다.
1981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보고서에서 말하는 ‘사원의 세간화, 세간의 사원화’라는 슬로건은 적어도 세간과 사원의 불이(不二)를 통한 통일의 현실 인식을 대변한다. 만해(卍海)는 말한다. “불교가 민중과 더불어 화(化)하는 길은 무엇이뇨? 그 교리를 민중화함이며 그 경전을 민중화함이며, 그 제도를 민중화함이며, 그 재산을 민중화함이다.”
교리·경전·제도·재산 등 종교에 관련된 모든 것을 민중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민중적이라 한다면 민중과 함께 하는 실천이 있어야 하고 민중과 역사를 같이 하고 민중의 고통을 함께 하며 민중의 억압받는 삶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9)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에는 수정적 차원이 있다. 붓다는 단지 차별을 멀리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워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자칫 ‘억압에 대한 투쟁논리’를 내세우는 남미(南美) 민중신학(民衆神學)의 아류로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9) 효림,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 《선우도량》 2호, p.93.
4. 그릇된 방편을 버려라
기독교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이 주장한 비신화화(非神話化 : Demythologizing)의 관념은 신(神)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이는 인간 중심주의 이론으로서 제2의 인본주의(人本主義), 르네상스를 예기케 하는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성서 특유의 인간 중심주의가 내재해 있다.
불교는 시작으로부터 신(神) 중심의 바라문교와 힌두교적 제사주의(祭祀主義)의 입장을 떠난, 연기적 세계관 속에서 만유불성(萬有佛性)을 전제한다. 그러나 불교의 인간 중심주의는 성서적 인본주의(人本主義)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에 휴암 스님의 경우 “자신이 주인이면서 왜 하느님 같은 불보살(佛菩薩)로 먹고 살려 하나? 이건 위선 아닌가? 이것은 자기기만 아닌가? 왜 자신이 일체의 주인이라면서 화복(禍福)의 노예가 되는 진리를 앞장서서 전파할까?”10)라는 의구심을 표현하는 가운데 “방편(方便)을 버려라.”라고 또한 강조하는 바, 붓다께서는 다음의 비유를 들고 있기도 하다. 10) 휴암, 〈깨달음의 문제〉 《선우도량》 2호, p.21.
만약 아치라바티 강이 불어나 범람하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저쪽 강 건너에 볼일이 있어서 건너가겠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강가에 서서 “어이 그쪽에서 이쪽으로 와 주시오.” 하고 기슭에다 대고 기도할 것 같습니까? 그 사람의 기원·기도·소원에 응하여 저쪽 기슭이 이쪽으로 올 것으로 생각합니까? ……마찬가지로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이 참된 바라문으로서의 수행을 쌓지 않고 아무리 인드라·브라흐마·이슈와라 등을 불러낸들 사후에 브라흐만과 합일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조건은 결코 있을 수 없11) B. R. 암베드카르(박희준, 김기은 역), 《붓다와 다르마》, 민족사, 1991, p.261.
대승의 감상적 신관(神觀)은 자칫 불교를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체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 종교적 상징으로서 미륵사상의 구조를 살펴볼 때 그 안에는 성(聖)과 속(俗)의 만남을 통한 성불 가능성이 내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속화(俗化)에서 상생(上生)의 성화(聖化)를 통한 깨달음의 방식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본다면 흡사 아가페와 에로스의 만남의 장(場) 가운데 종교의 본질이 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구원(救援) 아닌 우리 내면의 노력이 기술되고 있다.
형이상학의 목적은 세계의 시초를 설명하는 일이고, 다르마의 목적은 세계의 개혁에 있다. 칸트(Kant)가 정언명법(定言命法)의 당위(當爲)에 대한 도덕성과 그에 따른 신의 요청을 행하였다면, 불교인에게 있어 당위는 다르마를 통한 자신의 변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 이후 다수의 불·보살의 의지에 우리의 화복(禍福)을 맡겨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자칫 저급한 칸트류의 격률(格率)과 요청(要請)을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라리 “뜬구름 같은 나의 육체여, 그대로가 부처가 사는 법당인 것을(幻化空身 卽法身)”이라는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를 노래하여야 할 것이다.
5. 제2의 결집(結集)을 위하여
불멸 후 약 100년경, 제2차 경전결집이 행해진 중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금은전의 소유 문제였다. 전통 율(律)의 입장에서 비구는 금은전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음에도, 신흥 상업도시 바이샬리의 단월(檀越)들은 비구들에게 음식과 옷을 보시하는 대신 돈을 제공하였던 바, 이에 대한 계율 이행의 적법성 논란에 의해 승단은 대중부와 상좌부의 근본분열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500여 년이 흐른 지금, 현대와 같은 경제의 시대에 ‘불교 승단 역시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비구 개개인의 경제생활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등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초기 율장의 입장에서 보면 비구의 경제생활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금은(金銀) 등의 보물을 받지 말아야 했으며, 물건을 판매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일상적 삶의 유지는 철저히 공양과 탁발에 의존하게끔 되어 있었다. ‘출가자에 대한 공양은 복전(福田)이 된다’는 재가자들의 관념과 함께, 탁발은 출가자가 자비를 행하는 방편 내지 출가자 스스로의 해탈을 구하는 방편으로 이해되었는바, 반승(飯僧) 즉 재(齋)의 청(請)이 없는 경우 승려들은 발우를 손에 든 채 탁발을 행하였다.12)는 것입니다.12) 楞嚴經(大正藏 19, p.106 中∼下)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발에 의한 수행자들의 생활 유지는 붓다 재세 당시 때부터 간혹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당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십시오.”라 하여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다른 계층 사람들에 의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붓다께서는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소.”라 말씀하신 후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며, 지혜는 쟁기와 호미, 의지는 잡아매는 줄이고, 생각은 호미날과 작대기라오. 몸을 근신하고 …… 노력은 나의 황소,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주오. ……나의 밭갈이는 이렇게 이루어지며, 감로(甘露)의 과보를 가져오는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오.”13)라 말씀하고 계시다.13) 《숫타니파타》(법정 역, 정음문고 49), 1986, pp.23∼25. 잡아함, 《경전경》.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비구에게 있어 밭을 간다는 것은, 믿음과 고행·지혜·의지·생각·말·행위·진실·온화함·노력을 통한 것으로, 이로써 감로의 과보와 함께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는 자신의 내면의 밭을 간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 의식주 등은 철저히 탁발과 공양에만 의존했음을 우리는 안다. 즉 경제행위란 관점에서는 철저히 소비자적 입장만을 견지하였는바, 물질적 생산이란 여전히 배격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번뇌의 때를 다 없애고 나쁜 행위를 소멸해 버린 사람에게는 다른 음식을 드리시오. 그것은 공덕을 바라는 이의 복밭이 될 것이오.”라 말하면서 법(法)을 설함으로써 얻게 되는 보답으로서의 공양 역시 철저히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도 있다. 더구나 탁발 자체가 출가자의 12두타행 가운데 하나로서 인식되는 한에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경제 전반에 대한 입장에는 다소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아함경》 가운데 “만약 옷을 축적하여 선법(善法)이 증대하고 악법(惡法)이 쇠퇴한다면 나는 그런 옷을 축적해도 좋다고 설한다. 옷뿐만이 아닌 음식·도구·주택·촌락 등도 마찬가지다.”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선법 증대를 위한 ‘율(律)의 목적론적 정지’를 뜻하는 것이라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선법 증대를 목적으로 우리는 율장의 기본 정신을 다소 유보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불멸 후 승단은 선법 증대라는 이념 아래 다소의 경제행위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 성립 당시 이미 교단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율장에 의하면 사원에 소작인을 두고 경작시키는 일종의 자급자족적 경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또한 중세 굽타 왕조에 이르게 되자 불교교단의 부동산은 급격히 증대되었으며, 여기서 생겨난 막대한 지대(地代)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인도(印度)뿐만이 아닌, 이후 중국과 일본,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큰 문제가 된 바 있다. 단월(檀越)들이 금품을 기증할 경우 그것을 대부하여 생겨나는 이익에 대한 처리방식으로서의 ‘대여’와 ‘보시’의 개념이 생겨났다. 신라 때부터 시작된 보(寶), 고려의 장생고(長生庫) 등이 그 예이다.
‘선법의 증대와 악법의 쇠퇴’라는 차선적 목적의 추구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내재해 있다. 1956년 11월 14일 〈동아일보〉는 ‘불국사에서 징수하는 입장료에 관광객들 불평’이란 기사를 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관광사찰의 경우 전체 사찰 예산의 50% 내지 80%로까지 확충되고 있는 국립공원 입장료 수입을 받아들임으로써 현 승가는 공원 관리자 내지 문화재 관리자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에 대승불교 불탑 관리자에게 허용되었던 제사장의 몫을 우리는 챙겨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한편 1959년 8월 〈동아일보〉는 ‘3·7제 소작료 내라고 해인사에서 폭행함에 행패에 못이긴 농민 280여 세대 진정’이란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경제활동의 슬로건 아래 조선시대 선문(禪門)에서는 절 안에서 누룩을 빚어 파는 등 자급자족 내지 생산경제에 열중하기도 하였으며, 최근까지도 대찰(大刹)에서는 소유 토지를 기반으로 소작농을 바탕으로 한 봉건적 지주계급의 형태를 유지한 채 메주와 녹차뿐만이 아닌, 예수재(預修齋)의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불탑에 바쳐진 물건, 승단에 바쳐진 물건, 즉 현전승가의 삼보정재 역시 비구 개개인의 확충에 사용되고, 영단(靈壇)에 바쳐진 영가(靈駕)의 노잣돈까지도 삼보정재의 하나로 귀속하는 승가의 발상 속에서 많은 이들은 오히려 선법 아닌 악법의 증대를 보게 된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걸량승(乞粮僧), 즉 탁발승을 동량승(棟樑僧)이라 불러왔다. 어구상 ‘용마루와 대들보(棟樑)와 같은 승려’를 말하는 것이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왕륜사 장육금상 영험수습기〉에 의할 것 같으면, “옛날 거빈(巨貧)과 교광(皎光)이란 두 비구가 금상(金像)을 주조키를 바란 채 속된 말로 동량(棟樑)이란 말을 지어냈다. 여기서 동량이라 함은 헛된 구상(浮圖)으로서 보시를 권함으로 행하는 불사(佛事)를 칭하는 것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몸과 도(道)의 빈궁함만을 꾀하는 것이라. 속된 말로 ‘��’이란 말은 권선(勸善)하는 동발(銅鉢 : 鉢羅)의 소리로서 그를 이름한 것이다.”라고 《조선불교통사》는 적고 있기도 하다.14) 즉 ‘헛된 구상으로서 보시를 권함’, 그리하여 속칭 ‘��이’라는 관념 속에 우리는 60년대 보릿고개를 넘는 한국의 경제실정 속에서 불렀던 노래,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라 하더니, 매미채로 돈 내노라 하더라.”라는 부정적 가사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에 78년 법정 스님은 “사찰의 복전함(福田函)을 없애라.”15)라고 말한 바 있14) 李能和, 《朝鮮佛敎通史(下)》, pp.1009∼1012.15) 법정, 〈다시 읽는 부처님 前上書〉 《다보》(통권 제19호), 1996.
최근 가톨릭에서는 ‘개개 성직자들의 경제활동 금지’ 훈령을 발표한 바, 교회에서 지급하는 성무비(聖務費), ‘제사장의 몫’에 의거해 중산층 정도의 삶을 유지토록 하고 있다. 이에 “눈뜬 사람들은 시(詩)를 읊어 생긴 것을 받지 않는다.(즉 대가로서 무엇인가를 받지 않는다.)”는 붓다의 입장을 거슬러 본인 역시 법문을 통한 법사비와 강사료, 원고료 내지 소임 실비 등을 통한 적지 않은 수입을 얻고 있다. 그리고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단월들의 보시, 그것들을 얻음으로써 내면의 혼란을 동시에 얻는다.
근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에 의해 ‘세속 초월의 윤리’로서 이름지어진, 생산활동에 대한 금기가 풀려지고 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불교 역시 세속화(世俗化)에로 치닫고 있음을 말하는가? 그러나 세속화란 하아비 콕스(Harvey Cox)의 개념적 전환 이래 비속한 것으로서가 아닌, 역사성(歷史性)을 수반한 수평적 원리를 형성코자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면 종단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천명하여 승가 개개인이 경제 문제로 인한 곤혹 속에 빠져들지 않게끔 해주었으면 한다. 그 옛날 상업도시 바이샬리의 현실 속에 살고 있는 현시대의 몽매한 수행자들을 위해, 선각자들에 의한 ‘제2의 결집’이 행해져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아울러 의(衣)와 식(食)에 대한 고찰 또한 요구된다. 법복(法服)의 경우 모시·삼베·무명옷이 승복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옷을 풀하기 위해 사람의 음식을 옷에게 먹이는 몰염치한 처사를 무의식중에 행한다. 그리고 여름 옷 40∼50만원, 겨울 옷 60∼70만원으로 봉급생활자의 한 달 살림에 맞먹는 옷 한 벌을 승복집에서 돈주고 사 입는다. 가톨릭의 경우 특정 수녀원에서 제의(祭衣)를 만든다. 특정 사찰을 지정해 성스런 옷(聖衣)을 만들어야 한다. 승려 아닌 이들이 시중에서 승복을 사서 입고 승려를 사칭하는 일을 경계하여야 한다.
한편 탁발에 의해 얻어진 음식은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건 허용이 되었다. 《사분율》을 보면 비구가 “대덕 세존이시여, 어떤 음식을 먹으리까?”라는 물음에 “다섯 음식을 걸식해 먹으라.” 하셨는바, 비구들이 걸식하다가 밥을 얻으니 “먹으라.” 하셨고 국수를 얻으니 “먹으라.” 하셨으며, 생선을 얻으니 “먹으라.” 하셨고 고기를 얻으니 “갖가지 고기를 먹으라.” 하셨다.16) 심지어 “(탁발에 의한) 여덟 가지 술을 마셔도 좋다. 만일 취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 때나 마셔도 좋고, 취하는 사람이거든 마시지 말라.”17)는 규정조차 존재함을 볼 수 있다.18) 었다.
16) 大正藏 22, p.866下. 심지어 코끼리 고기며 용(뱀을 말함)의 고기, 개고기(往?陀羅家 於彼得狗肉食之 諸比丘乞食 諸狗僧逐吠之. p.868下), 사람 고기까지 얻어 먹는 예가 생겨났는바(汝痴人食人肉 自今已去 不得食人肉. p.869上), 이러한 고기 등은 금하되, 이후 ‘고의로 자신을 위해 죽인 고기, 즉 ①고의로 자기를 위해 죽였다 함을 ‘보았거나’, ②‘들었거나’, ③‘의심이 들거나’ 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셨다.(是中故爲殺者 若故見故聞故疑 有如此三事因緣不淨肉 我說不應食. p.872中)’. 17) 大正藏 22, p.873下. “聽飮八種漿 若不醉人應非時飮 若醉人不應飮 若飮如法治” 18) 이외에도 《사분율》 가운데 “비구들이 과일밭을 얻었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받아도 좋다’ 하시고, 누가 관리할지 모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절을 지키는 사람이나 사미나 우바새를 시키라’”(大正藏 22, p.875上)는 구절이 보이는바, 탁발에 있어 음식뿐만이 아닌 물건 등 기타 재산까지도 이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규정들의 근본 정신은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별(辨別)을 떠남을 의미한다. 《유마경》 〈성문품(聲聞品)〉 가운데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던 마하가섭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자들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서 걸식을 하는 것은 자비심을 널리 펼 수 없는 것입니다. 평등한 법에 머물러 마땅히 차례에 따라 걸식해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유마 거사로부터 들었던 까닭에 부끄러워 문병(問病)하지 못하겠노라 말하고 있다. 대승의 정신은 변별을 떠나는 것이다.
6. 아란야(阿蘭若), 그 역사성을 확립하라
절(寺)은 민중의 것이다. 절의 문(門)을 개방하라는 구호가 난무하다. 그럼에도 관광수입과 사찰 재정과의 함수관계 속에 수행자들은 공원 내지 문화유산의 관리인으로, 스스로가 동물원의 호랑이가 되는 세태에 살고 있다. 돈을 받게 됨으로써, 그리고 돈을 냄으로써 사찰은 말초적 유희, 감정 배설의 관광문화 정착지, 그 카타르시스의 장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경건성 대신 고기 냄새와 함께 입장표의 반 조각 쓰레기를 남기고 간다.
명동성당은 현시대의 길목에서 종교성의 중심지, 소도(蘇塗)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적어도 94년 이전, 종단개혁 이전에는) 조계사에 운동권 학생들이 잠시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하면 곧 냉대를 받았으며, 승단은 과거 사회적 양심의 고백성사(告白聖事)에 대한 묵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종교의 성지, 소도(蘇塗)는 세속법의 완충지대이다. 인간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신령스런 기운이 서려진 성스런 땅. 그곳은 승려들만이 아닌 민중들에 의해 전승된 무형적 자산의 보고이다.
소도는 세속을 떠난 속리(俗離)의 은둔주의적 상황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정처(寂靜處), 아란야(阿蘭若) 가운데 존재한다. 아랸야의 수도승이 왜 소방울 소리 들리는 곳,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자리했는가?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이다. 탁발을 통해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민중의 생활을 탐색하여 이념적으로나마 그들과 빈부(貧富)를 같이하기 위해서다. 절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역사성 확립의 장소인 것이다.
7. 맺으며
이상의 언급에는 상황윤리적 측면이 담겨 있다. 휴암 스님은 ‘무엇-존재’ ‘어떻게-가치정신’이란 도식을 이용하여 ‘깨달음’이란 문제를 제기하면서 “존재를 건지기 위해 정신을 죽인다. ……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하고, 그것으로 족하고 뒷소리는 아예 필요 없다. 윤리적 자기부정은 문제거리가 아니다.”19)는 식의 발상을 경계하고 있다. 그 요지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와 관련된, ‘목적을 위한 수단’을 ‘수단을 위한 목적’으로 혼동해 버리는 식의 사고 속에, ‘목적을 위한 수단’ 자체를 떠난 ‘순수 목적의 원리’를 강조하는 철저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계초심학인문》에서 말하는 ‘지범개차(持犯開遮)’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무명(無明)을 떠난,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전제로 한 헤겔(Hegel)의 매개(媒介, Vermittelung)적 측면이 아닌, 그렇다고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직접성(直接性, unmittelbarkeit)을 통한 만남의 개념과도 거리가 먼,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원리를 제시한다. 즉 자기구현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구현에는 그 이념이 요구된다. 앙굴리마라의 살인 역시 도를 위한 윤리적 자기부정이라 치부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도(道)를 위한 윤리적 자기부정의 필연성 자체가 우리를 찾아올 때, 그때에만 우리는 차선의 방법으로서 선법의 증대를 위한, 악법의 쇠퇴를 위한 지범개차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방법 모색이야말로 스스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어질 것이다.
출신이나 가문이 아닌 행위에 의해 수행자가 된다. 불교는 신학(神學) 아닌 인간론(人間論), 아니 불성론(佛性論)을 말한다. 불교는 무교주(無敎主)의 교주를 모시며, 삶의 상황 가운데 펼쳐진 무교리의 연기적 교리를 지닌다. 불교는 삶 속에서 전개되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한 자기 완성의 길이며, 그 길을 사회에 환원하는 가운데 현실사회와 불교가 만난다. 그리고 이 가운데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참된 지평이 있다.
코살라 국의 침공에 그늘 없는 나무 아래 두 번이나 앉았던 붓다는 마침내 숙업(宿業)의 논리를 거역하지 않았다. 방편이 대안인가? 대안은 없어 보인다. 아니 대안은 우리의 내면 속에 있다. 방편보다는 업(業)의 종식을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붓다의 근본정신에 바탕한 정신적 이념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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