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은 왜 민중불교를 지향하였는가
-남종선 태동과 흥성의 정치사회적 배경
이은윤
전 〈중앙일보〉 국장·종교대기자.
불교 선종의 가르침은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첨예하고 격렬한 반역정신이 흘러 넘치는 해방사상이다. 선종의 실질적 창시자인 제6대 조사 조계혜능(曹溪慧能: 638∼713)이 강조한 “불성엔 남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佛性卽無南北)”는 만민 평등사상은 후기 봉건사회의 민권사상과 당시 신지식인이었던 서족 지주 가문, 이른바 한문(寒門) 출신 신진 관료들의 ‘평등’ 갈망이 낳은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돈오성불과 자성불도(自性佛道) 사상 또한 자급자족의 소농(小農)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한 시대 사조가 요구하는 역사적 필연이었다.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하는 선종의 격렬한 가불매조(呵佛罵祖)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사상 해방운동이며 인불(人佛) 평등사상의 구체적 실현이다. 이들 선사상은 모두가 하나 같이 8세기 이후 후기 봉건사회의 사조와 부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시대사조는 문벌 귀족이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누리는 출신별 계급구조를 타파하려는 한문 출신 신진 관료와 농민들의 열망이 요원의 불길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선불교는 이 같은 시대사상과 결합해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불교발전의 앞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혜능의 선종 출현은 당(唐) 중엽 이후의 사회적·경제적 발전과 사회 모순, 계급 갈등의 격화가 낳은 결과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은 사회적·역사적 각도에서 보면 반(反)권위·반우상·반체제를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해방사상이다. 그 해방의 구체적 지평은 자유·평등·정의다. 혜능선의 이 같은 해방사상은 종교 형식을 통한 전통 사상과 통치체제에 대한 대항이기도 했다. 선종의 자유사상은 종교적 형식을 빌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정신적 해탈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안에 내포된 사회적 의미를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가령 선방의 유별난 도반(道伴) 윤리 강조는 ‘민간 비밀 결사(結社)’의 자유가 종교의 틀 안에서 내면화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당시 시대사조에서 최첨예했던 평등사상은 혜능선에서 “중생이 곧 부처(衆生是佛)”라는 한마디로 요약, 강조돼 있다. 중생과 부처간의 차별을 인정치 않는 선종의 절대 평등사상은 출신 신분에 따른 품급(品級)의 차등이나 빈부의 차별 등과 같은 사회적 모순까지를 포함하는 드넓은 평등의 지평(地平)이다.
정의는 자성(自性)의 청정성을 강조한 심성설로 수용했다. 혜능선은 자유·평등·정의라는 3대 사회사상을 “자성삼귀의(自性三歸依)”라는 종교 형식을 빌어 수납하고 있다. 혜능은 불가에서 거듭 강조하는 3보(寶)를 부처(佛)는 자각, 경전(法)은 정의, 승가(僧)는 청정이라고 풀이했다. 현대 어법으로 정리하면 ‘부처란 자유와 평등을, 경전은 사회 정의를, 승려는 도덕성을 각각 상징한다’는 것이다.
혜능선이 가장 힘주어 강조한 정치사회사상은 평등사상이다. 혜능의 평등사상은 그의 재전(再傳) 제자인 마조(馬祖: 709∼788)의 홍주선(洪州禪: 일명 홍주종·마조선)이 전개한 ‘진리는 청정한 인간 본성(양심)을 따라 펼쳐지는 일상생활 속에 내재한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중생을 일깨운 민중사상을 거쳐 임제(臨濟: ?∼867)의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는 자유인’, 이른바 무위진인(無位眞人)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중·만당(晩唐) 이후 선종의 기본 사상은 홍주종(洪州宗) 사상이었다. 홍주선은 대사회적으론 유교적 권위주의와 계급 타파를 지향하면서 개인 심성의 가치와 개성의 독립을 추구했다. 혜능선―마조선―임제선으로 이어진 이 같은 선사상은 당 중기 한문 진사(進士) 출신 신진 사대부들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는 열망과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선종의 태동과 발전 배경을 주로 불교사적 관점에서 연구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중국 선학(禪學) 연구 열풍을 필두로 선불교의 흥성 배경을 사회사적 각도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폭넓게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경향을 중심으로 선종의 태동과 발전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선종 또는 선불교는 혜능―마조―임제로 이어진 돈오 남종선에 초점을 맞추고 때로는 4조 도신(道信)과 5조 홍인(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 일명 東山宗) 및 신수(神秀)의 북종선까지도 포함한다.
8세기 이후 한·중·일 동북아 3국 대승불교의 주류를 이루어 온 선종은 단연코 돈오 남종선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돈오 남종선의 발전은 결코 우연이 아닌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점과 당시 사회적 사조가 만들어 낸 시대적 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담론은 종교 형식 속에 감추어진 선사상의 정치·경제·사회적 의미를 표출시키는 데 그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이번 담론에서는 선종의 태동 및 흥성에 관련한 한문(寒門) 출신 신진 관료의 부상과 가불매조·재가불교 등을 조명해 본다.
혜능 선종의 출현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시대 사조가 요구하는 역사적 필연의 산물이었다. 혜능의 생존 시대는 당 왕조가 개국에서 번영의 시대로 진입하는 시기였다. 당시 당 왕조는 농민 봉기에 의한 수나라 멸망의 원인을 교훈삼아 경제적 생산을 발전시키고 계층간의 갈등과 모순을 완화하는 조치들을 취해 나갔다. 당 왕조는 본래가 유교·불교·도교 등 3교 사상을 사상 통치에 병용했으며 사회사상 환경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당나라 초의 정치 상황은 수나라 말 농민전쟁의 타격으로 위진남북조 이래의 문벌 사족 집단의 정치적 지위가 몰락해 있었고 ‘고위 관료에 한문 출신 없고, 하위직에 사족이 없던(上品無寒門 下品無士族)’ 위진 이래 문벌 사족 중심의 품급 구조에 일대 변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문벌 사족의 몰락이 초래한 통치구조상의 공백을 당 왕조는 과거제도를 통해 한문번인(寒門潘人)을 중용, 관계에 대거 진출시킴으로서 메웠다. 구체적으로는 대대적 관료 직제 개혁을 통해 문벌 사족 출신과 한문 출신을 결합시킨 새로운 등급제(等級制)를 구축했다.
당 태종은 앞 세대의 일은 논하지 말도록 하고 관직의 고하에 등급을 매기는 것을 금하도록 했다. 신·구 세력을 아우르는 평형 정책을 시행해 봉건 품급 구조를 새롭게 개혁하는 게 당시의 정치적 최우선 과제였다. 구체적 시행방안으로는 한문 서족 지주 출신들을 진사시(進士試)를 통해 관직에 대거 등용, 정치에 참여케 함으로써 새로운 통치 계급(新士族)을 형성시켰다.
새로운 통치 계급으로 부상한 한문 출신 신진관료들은 기존 문벌 지주와 서족 지주간의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일반 서족 지주 계층의 지식 분자와 평민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승려 지주와 이미 장원경제화한 사원 경제를 경영하는 귀족 승려들도 비판하고 반대했다.
‘한문’이란 일반 서족 지주의 가문을 말한다. 수나라 말 농민 봉기로 균전제(均田制)가 파괴되면서 토지의 합병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출현한 서족 지주들과 전래로 자급자족할 만한 토지를 가지고 경제적 자립을 유지해 왔으나 계급신분 때문에 관계 진출이 막혀 있던 소지주 가문이 바로 ‘한문’이다.
측천무후의 집권기(7세기 말∼8세기 초)에는 법령을 제정해 다시 한 번 품급 구조를 조정하고 과거제도를 더욱 확대해 한문 서족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문벌 지주 계급 중심의 통치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무측천(623∼705)은 수시로 실시하는 어전시(御殿試) 등을 통해 과거제도를 확대했고 한문 출신들의 등용을 위한 진사시와 동몽박사제(童蒙博士制)를 통해 선발한 신지식인들을 중요 관직에 대거 진출시켰다. 이에 따라 한문 출신의 관료 진출이 급격히 확대됐다.
한문 서족 지주 출신 관료들과 문벌 사족 출신의 기득권층 간에는 필연적으로 정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권력 투쟁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한문 출신 신관료들은 투쟁의 우선적 명분으로 한문과 문벌 출신 간의 차별을 없애는 ‘평등’을 주장했다. 당시의 시대 사조 역시 농민들의 민권 의식이 성숙하면서 출신 성분에 따르는 계급적 차별을 타파하고자 하는 평등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혜능선의 출현은 이같은 신지식인(신진관료)과 민중의 평등사상·민권사상·해방사상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불교의 중국화 발전의 수요에 대한 순응이었다.
천부적 재능을 가진 6조 혜능은 광대한 민중적 수요와 정치사회적 시대 사조를 재빨리 읽고 한문 출신 신진 관료들과 민중의 열망을 모아 종교적 형식의 이론화를 완성했다. 그 결정판이 선종의 바이블격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이다. 《단경》에는 혜능의 사회·인생에 대한 사고와 불교에 대한 천부적 재능 및 독창적 견해가 칠흙 속의 번개처럼 번뜩인다.
혜능의 돈오 남종선은 불교사적으론 위진(魏晋) 이래 진행돼 온 불교의 중국화 전통에 기초한 진일보적 혁신이며 사회사적으론 사회문화의 다방면적 수요에 대한 적응이었다. 혜능의 출신 성분은 “영남(嶺南)이라는 변방의 몰락한 하급 관리 가정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여읜 채 찌든 가난 속에서 자랐고 학교는 문턱도 못가본 일자무식의 나뭇꾼 출신”이었다.
혜능의 가난과 무식은 ‘민중성’을 상징하고 나무 장사로 노모를 봉양한 효심은 선불교 윤리의 초석이 된 유가 윤리의 흡수를 뜻한다. 혜능의 출신성분은 지리적으론 영남(嶺南)이라는 변방, 민족적으로는 소수 야만족, 가정상으로는 몰락 관리 가정, 문화적으로는 무식군, 계층별로는 빈민으로 묘사돼 있다.
혜능선은 이같은 혜능의 출신성분 묘사부터가 “정치적 경향”을 띄고 있다. 당시의 시대 사조와 정치적 입장에서 볼 때 혜능은 가히 백성의 심태(心態)에 어울리는 선불교의 영수로 부상할 만했다. 혜능과 돈오 남종선의 출현은 역사적 필연에 따른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혜능선의 출현과 발전은 정치적·경제적 요인과 그 제자들의 선양 노력 외에도 시대의 문화 심리적 요소가 그 관건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혜능선의 부상은 전적으로 한문 출신 서족 지주 계층의 역량 증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 종파의 성쇠는 시대적, 정치적 기류와의 대응 관계로 점철돼 있다. 무측천은 과거제도뿐만 아니라 연은궤(延恩櫃)·초간궤(招諫櫃) 등을 설치하고 시를 지어 올려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상부송(上賦頌) 제도를 통해 한문 출신 신진 관료들의 정치 비판과 직언을 경쟁시켰다. 무측천이 신지식인을 중용한 의도는 이(李)씨 당 왕조의 권세와 부귀에 타격을 가해 자신의 혁명정권인 무주(武周)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정치적 책략이었다.
객관적인 결과는 문벌 지주 계급 중심의 통치구조에 일대의 변혁을 가져왔다. 실제로 정치 능력과 문재(文才)가 있는 한문의 서족과 상인·승려 등과 같은 지식인들이 통치 집단에 흡수돼 권력 구조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기존 문벌 지주 계급과 한문 지주 연합의 광범한 통치구조가 확립됐다. 여기서 신진 한문 출신 관료들은 기존의 문벌 귀족·환관과 밀착해 있는 통치 계층에 대항하는 권력 투쟁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 일명 東山宗)과 혜능선의 평등사상을 사상적 무기로 원용했다.
이들은 혜능선의 “중생이 바로 부처다(衆生是佛)”라는 교의(敎義)를 통해 반전통, 반권위, 반품급제 투쟁을 전개했다. 불교 내적으로는 부처와 조사를 욕하는 가불매조(呵佛罵祖)와 번쇄한 귀족불교에 대항하는 간이법문(簡易法門)·무보시·당하(當下: 찰나)의 돈오·농선병행(農禪倂行) 등의 해탈론과 수행방식을 통해 실천했고 대사회적으로는 한문 출신 신진 관료들과 협력했다. 또 인간 본연의 존엄성에는 범부와 성인이 균등하고(品均凡聖), 행동을 함에는 전후가 없으며(行無前後), 도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결코 사물에 있지 않다(道在心不在事)는 선리(禪理)를 통해 인간의 신분적 불평등을 부정하는 심성평등을 주장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돈오 남종선의 이 같은 선사상을 형성시킨 중요 배경이 선사상 정립에 한발 앞선 시대 사조인 한문 출신 신진 관료와 민중의 자유·평등을 열망하는 사상적 수요였다는 점이다. 신진 관료와 농민들은 이 같은 자신들의 수요에 의해 태동된 선사상을 다시 자기들의 투쟁에 끌어다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대체로 앞의 배경은 생략하고 뒤의 선사상 원용만 부각시키는 우(愚)를 범하거나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아리송한 논리를 전개해왔다. 거듭 강조하지만 선사상의 정립은 한발 앞선 시대 사조에 대한 부응이고 응답이었다.
무측천 시기의 급격한 통치 계급구조의 변혁은 사상계·문화계에도 같은 변동을 반영하는 일대의 변혁을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선종이다. 혜능선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였던 동산법문은 조정의 지지를 받아 타불교 종파를 압도했고 사회 변혁과 궤를 같이하여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적극적인 사회 역량을 발휘했다. 선종의 반전통, 반체제적 사상은 신진 관료와 문인·농민들의 요구에 대한 부응이었고 현실 체제에 모순을 느끼는 새롭게 부상한 통치계급의 신진 관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동산법문은 신진 세력의 변혁 열망과 해방 의식을 접수, 고무시키는 사상을 개발했다. 새롭게 개발한 사상을 경전 형식을 빌어 사회에 제공한 것이 6조 혜능의 《단경》이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남·북 불교는 모두가 통치자의 비호와 강동 사(謝)씨·소(蕭)씨·왕(王)씨 등과 같은 문벌 호족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발전했다. 당나라 초기에도 소우(蕭瑀)·두여해(杜如海) 등과 같은 구귀족세력의 호족 불자들이 건재했었다. 수·당 시기의 천태·법상·화엄종 등과 같은 불교 종파는 모두 이 같은 구귀족 계층의 지지를 받아 발전했다. 그러나 동산법문과 혜능선은 이와는 전혀 달리 전기 봉건사회의 사회 기초세력인 문벌 호족이 아니라 당시 사회 변혁 속에서 부상한 한문 출신 신진 관료와 문인 등 신지식인들이 중요 지지 세력이었다.
측천무후는 초기 선불교 부상의 초석을 놓는 데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한 관건 인물이다. 당시의 정치 주제와 사회 변혁은 불교에 다음 두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① 정치 능력과 문재를 가진 신지식인들인 한문 서족 지주 출신 관료들이 기존 문벌 사족들의 국정 농단과 정치적 특권을 타파한 것과 똑같은 불교 내부의 변혁을 가져왔다. 즉 귀족 고승 세력이 쇠퇴하고 하층 승려들의 지위가 상승했다. 위진·당 초의 고승은 거의가 명문 족벌 출신이었다. 무측천 시기에는 명문 출신 승려들이 더 이상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서족·농민 출신 승려들이 경성(京城: 장안·낙양)과 궁궐에 진입해 극진한 예우와 영예를 누렸다. 혜능과 같은 일자무식의 나뭇꾼 출신 승려가 예우를 받고 한 지방의 선불교 종주(宗主)가 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② 무측천이 선불교를 높이 받듦으로써 선종의 지위가 높아졌다. 따라서 귀족 문벌들의 재보시(財布施)를 받아 대지주화, 귀족화한 의학(義學) 고승들이 이끄는 종파는 쇠퇴하고 평민화한 쉽고 간편한 선불교가 급격히 부상했다.
무측천은 ‘남능북수(南能北秀)’로 대표되던 남쪽의 혜능 대사와 북쪽의 신수 선사를 극진히 모셨다. 신수를 직접 궁궐로 모셔 법문을 듣고 제자의 예를 갖추어 국사로 받들었다. 혜능도 신수의 추천으로 무측천의 소칙(召勅)을 받았으나 건강을 핑계로 거절하자 금란가사를 하사하는 등 높이 예우했다. 무측천은 또 숭산 회선사에 주석하는 혜안(慧安, 일명 老安) 선사를 친히 찾아가 예를 갖추어 법문을 듣기도 했다. 그의 호불(好佛) 감정은 황제에 오르기 전 권력 투쟁에서 밀려 일시 비구니 생활을 했던 인연과도 무관치는 않았다.
무측천 시기를 지나 중국 고대 봉건문화의 최고 황금시대인 동시에 세계 문명의 최정상이었던 당 중엽 현종 개원 연간(713∼741)에 접어들면서는 진사 급제로 진출한 한문 출신 관료들이 재상·지방장관에까지 올라 확고한 통치 계급을 형성했다. 조정의 선불교 숭신(崇信)은 무측천 후에도 계속되면서 선종 태동과 깊이 연관된 한문 출신 관료들이 자연스럽게 선불교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재상 장열(張說)·우승 엄정지(嚴挺之)·문인 이옹(李邕) 등을 손꼽을 수 있다.
1) 장열(667∼730)
무측천 시기의 대표적인 신진 관료로 그의 조부나 부친이 전혀 무명인인 한문 출신이다. 진사 급제로 관계에 진출해 개원 연간 두 번씩이나 재상을 역임했다. 그는 신수가 701년 국사로 장안에 초빙돼 법문을 할 때 이교·유지기·심전기·송지문·염조은 등과 함께 열심히 경청하면서 불도(佛道)를 물었다. 그가 선종사에 남긴 유명한 족적은 신수의 비명(碑銘)을 지은 것이다. 그가 찬(撰)한 〈당형주옥천사대통선사비명병서(唐荊州玉泉寺大通禪師碑銘竝序)〉(《全唐文》 권23)는 선종의 중요 사료다. ‘대통’은 신수 선사의 시호로 황제가 승려에게 내린 최초의 시호다.
2) 이옹(676∼746)
학자 이선의 아들로 역시 한문 출신이다. 벼슬은 좌습유(左拾遺)로 출발했으나 모함을 당해 몇 차례 유배 생활을 했다. 그의 문재는 시선(詩仙) 이백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시성(詩聖) 두보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거침이 없어 중종 때 정보사가 중용했으나 보사의 미신 신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는 선불교의 반미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이옹은 북종 신수의 수제자인 보적(普寂) 선사의 유발 제자로 ‘제7대 조사’라 호칭되기도 했던 보적의 탑명 〈대조선사탑명(大照禪師塔銘)〉(《전당문》 권262)과 유명한 〈숭악사비(嵩岳寺碑)〉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3) 엄정지(673∼742)
한문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해 상서(尙書)·우승(右丞)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신수의 제자인 의복(義福) 선사의 재가 제자로 중서시랑(中書侍郞)의 자리에 있을 때 의복이 입적하자 상복을 입고 의복의 비명 〈대당고대지선사비명병서(大唐故大智禪師碑銘竝序)〉(《금석쇄편》 권81)를 지었다.
당시 한문 출신 신진 관료를 대표하는 앞의 세 사람은 하나같이 신수의 북종에 귀의한 불자들로 후일 북종과 견원지간의 사이가 된 혜능의 남종 거사들이 아니잖느냐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796년 혜능이 6조로 공인되기까지의 선불교에는 남종·북종의 구분이 없었고 서로 왕래하며 문도(問道)했다는 선종사를 정확히 알고 나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무측천은 한문 서족과 농민 출신 선승들을 우대하는 구체적 방편으로 법랍(法臘: 승려의 경력)과 시호·탑호 등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 같은 황실의 선종 우대는 백성의 사상적 통치 수단으로 활용된 정치적 측면도 없진 않지만 시대적 조류를 수렴하는 개혁적인 정책 쪽에 그 무게가 실려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당 초기에 진출한 한문 출신 관료들이 중당(中唐) 시기에는 재상·자사(지방 장관) 등에 오르면서 선종을 열렬히 지지하자 선불교의 흥성 시대가 개막됐다. 고관 지위에 오른 한문 출신 신진 관료들이 기존 문벌 귀족의 신분적 특권에 대항하는 자기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데 새로운 선종의 평등사상을 활용함으로써 혜능의 선불교는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중당(中唐)의 선불교는 이미 북종이 쇠퇴, 몰락하고 사실상 마조(709∼788)의 홍주선(洪州禪)을 주축으로 한 남종선 천하였다. 혜능선은 마조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됐고 마조선의 선사상이 중당·만당 이후의 선종 기본 사상으로 굳혀졌다. 중국 “고대 최초의 인간 평등사상”으로 평가받는 혜능선의 “모든 사람이 불성을 똑같이 가지고 있고,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다”는 인본주의적 평등사상은 마조선에 이르러 보다 구체화된다.
마조선은 자아의 주체의식을 고도로 확장시켜 일체의 외재적 가치와 제약을 부정하고 신주처럼 모셔온 경전과 논서(論書)를 마구 불태우거나 파기함은 물론 가불매조를 서슴지 않으면서 사상과 행동의 절대 자유를 요구했다. 이는 고대 중국 사상 중 가장 첨예하고 격렬한 반역정신이었다.
평상심이 바로 진리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압축된 마조선의 선사상은 개개인 심성(양심)의 가치와 개성의 독립을 통한 인간 평등을 지향한다. 이 같은 홍주선 사상은 “당시 신진 사대부의 사회적 신분 상승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한문 출신 신진 관료들의 정치사상을 종교 형식을 빌어 대변한 것이었다.
혜능선과 마조선이 새롭게 제시한 ‘부처’라는 불교 이상 인격은 즉심즉불(卽心卽佛), 범성일여(凡聖一如), 인불무이(人佛無異), 임운자연(任運自然), 자재해탈(自在解脫)을 통해 정신적 초월을 달성한 현실 속의 인간이었다. 이를 철학적인 어법으로 정리하면 ‘자가(自家) 생명의 긍정, 곧 주체적인 인생 실천’이다.
마조 당시의 선종은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관청의 령(令)이 안 먹히는 곳에선 선승들이 설법을 통해 민중을 설득함으로써 많은 선사들이 관리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또 혜능―마조로 이어진 돈오 남종선은 자력·평등·실천의 종교 및 사회 이념을 더욱 심화, 발전시켰다.
혜능선과 마조선의 민중성은 흔히 장강(양자강)을 경계로 구분하는 북인이 남인을 비하해 보는 중국의 오랜 전통에서 남인의 평등적 지위를 쟁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돈오 남종선은 이러한 민중의 열망을 모아 종교 형식으로 이론화했다. 5조 홍인은 6조 혜능의 참문을 받고 “너 같은 남방의 갈료 출신 야만인이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남인 출신의 혜능을 멸시했다. ‘갈료(�껴)’는 사람과 원숭이 중간쯤의 동물로 남인을 멸시해 칭하는 비속어다.
북위(北魏) 양현이 저술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라는 책에도 남방 영남인을 ‘맥만(貊蠻)’이라 풍자하고 있는데 당대(唐代)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졌던 것이다. ‘갈료’나 ‘맥만’은 다같이 남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혜능은 홍인의 인격적 비하에 대해 “불성에는 남북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항변했다. 남종선은 태동부터 영남이라는 남방에서 시작됐고 주요 활동 무대도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강남 지역이었다.
혜능의 선종은 본래 농민(평민)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따라서 문자적 독경이나 염송을 중시하지 않았다. 초기의 혜능선은 그래서 평민과 일반 서족 지주 계층의 지식 분자가 신봉의 중요 사회 세력이었다. 그러나 마조선 시대를 거쳐 임제선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5가7종의 분등선(分燈禪) 시기로 진입하면서 각종 어록을 간행하고, 문자 공부를 중시하고, 전법세계(傳法世系)를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농민과는 소원한 사대부선(士大夫禪)이 되고 말았다. 이 같은 농민선의 사대부화는 문인, 학사 계층과 결합해 특히 문화예술계에 또다른 영향력을 발휘했다.
홍주선 시대에 선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중요한 양대 사회변동은 안사(安史)의 난과 영정혁신(永貞革新)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빚어낸 비극인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755∼763)은 조정의 정치 권위에 일대 동요를 불러와 어떠한 사상과 권위도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혼란 상태를 야기했다.
‘안사의 난’ 이후 지방 토호 세력화한 번진(潘鎭)의 할거와 환관들의 권력 농단 등은 조정의 기강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변방의 수비 병력을 지휘하는 절도사(節度使)를 ‘안사의 난’ 이후에는 내지에까지 확대, 배치하자 무인 중심의 번진 세력이 지방 토호화해 중앙정부의 령(令)을 우습게 여기면서 할거했다. 조정의 권위와 역량의 실추는 번진과 제휴한 한문 서족 출신 지식인들에게 관계 진출의 활로를 열어 주었다. 여기서 관계 진출을 열망하던 평민 출신 문인 사대부들은 이미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고 몰락한 전기 봉건사회 귀족 지주들을 대신한 후기 봉건사회 신지주 계급으로 등장했다.
지방 할거 군벌 및 토호들은 선사상 특유의 반권위적, 반전통적 성격을 자신들이 지향하는 신분 상승·지방 분권화 같은 의원(意願)과 결합시켜 이용했다. 선불교 또한 농민들까지 적극 호응하는 이 같은 군벌들의 열망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필요한 사상과 이론을 개발, 제공했다. 당 후반에 5가7종(五家七宗)의 분등선이 특히 강남·하북 지구 등과 같은 군벌 할거 지역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도 바로 번진과 선종의 결합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하북 일대를 무대로 했던 임제선(臨濟禪)이다.
이 과정에서 선의 평민적, 반체제적 색채는 더욱 진일보했다. 신라말 고려초 개산된 9산선문이 중앙으로부터 밀려난 지방 호족 세력들과 결합해 왕건의 고려 건국 혁명을 지지, 성공케 했던 것도 선불교의 이 같은 전통과 무관치 않다.
화주(和州) 자사 왕숙문(王叔文)이 주도한 정치개혁 운동인 영정혁신(805)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중당(中唐)의 일대 정치혁명이었다. 영정혁신에는 혜능―마조로 이어진 돈오 남종선과 깊은 관련을 가진 유종원(柳宗元)·유우석(劉禹錫) 등과 같은 한문 진사 출신 신진 관료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백거이(白居易)를 비롯한 많은 홍주선 문하의 문인들이 동조했다. ‘영정(永貞)’은 당 순종 원년 1년 동안만 사용했던 연호다.
영정혁신의 사상적 지표는 인간 평등과 신분적 계급 타파였다. 이는 거듭 말한 대로 돈오 남종선의 선사상과 일치하는 시대적 열망이었다. 유종원과 유우석은 한문 진사 출신의 관료이면서 동시에 ‘유유(柳劉)’로 호칭되던 당대의 걸출한 문인이다. 이들은 왕유(王維)의 혜능 대사 비문에 이어 제2, 제3의 혜능 조사 비문을 지은 홍주선의 신봉자였으며 많은 선시들을 남기기도 한 문장가였다.
중당의 시대적 풍조는 문학을 높이 숭상하며 이백·두보 등과 같은 시인을 공자·맹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인’으로 추앙했다. 단적으로 두보를 ‘시성(詩聖)’이라 호칭한 예에서 그 같은 풍조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시성이란 시단의 성인이라는 찬양인데 두보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은 엄청난 존경이며 추앙이다.
당시 문인들의 관념은 자신의 독립적 가치에 강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백의 경우처럼 호탕하고 스케일이 광대해 천금을 돌같이 던지고 천하를 주유하는 호기에 넘쳐 있었다. 이 같은 문인들의 호방함은 경제적 부(富)가 뒷받침하고 있는 당 중엽, 중국 5천년 문화의 최고 황금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디딤돌로 삼고 있었다. 당대 문인의 주류는 문장력과 정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관계 진출을 희망하는 서족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신분 계급과 정치 업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평가하지 않고 문재(文才)·도덕성 등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할 것을 강조했다.
이 같은 문인들의 관념은 혜능선의 허다한 관점 중에서도 일반에 종교 교의를 초월한 보편 사상으로 수용된 만민 평등의 심성론(心性論)과 특히 마조선의 ‘평상심시도’와의 결합을 통해 한층 고양됐다. 당시 선사상은 이론상 이들 신지식인의 지지를 받으면서 그들의 심리적인 자신감을 북돋우어 주었다. 이미 홍주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문인들과 선승들의 교류가 활발했고 많은 문인들이 선수행을 했다. 문인을 포함한 홍주선의 선종 학인들은 세상을 버리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사회생활 각 영역에서 광범한 활동을 전개하는 생활인이었다. 홍주선은 이와 같이 재가와 출가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거사불교(居士佛敎)를 통해 중생의 일상생활에 접근하자 선승들의 활약이 한층 고조되고 문인들의 습선(習禪) 풍조도 더욱 확대됐다.
안사의 난과 영정혁신은 한문 출신 문인 사대부들에게 관계 진출의 활로를 열어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란과 정치 혼란 등으로 유배되거나 실의에 빠진 진보적인 관료들과 높은 기개가 꺾인 채 허탈감을 되씹는 문인 사대부들을 양산하는 역설(逆說)을 낳았다. 돈오 남종선은 실의에 차 있는 이들에게 정신적 위안처 겸 도피처가 됐다. 내심적 체험을 중시하고 외재적 좌선이나 배불(拜佛)을 강요하지 않으며, 불상과 사탑 건립 등에 필요한 많은 금전적 보시와 공양을 부정하는 홍주선의 종교 행태는 신진 사대부들의 취향에 딱 맞았다.
이 시기의 신진 관료들과 문인 사대부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서로 겹치는 동일인이다. 즉 한문 출신 신진 관료가 곧 문인 사대부였다. 진보적인 이들 신지식인들은 시야를 넓혀 다방면의 정신적 탐색을 진행했고 돈오 남종선이 그 중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사상적 탐색의 선두 주자였다. 혜능선과 홍주선은 새로 제기된 심성 문제에 자유와 평등, 능력을 핵심 가치로 제시한 신답안을 내놓아 물질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신지식인들에게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했다.
신지식인들에게 팽배해 있던 자신의 독립 가치에 대한 강렬한 인식은 혜능선의 만민평등을 강조한 심성설인 불성평등론(佛性平等論) 및 마조선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선사상과 합류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돈오 남종선은 신지식인들의 사회사상을 흡수해 정립한 새로운 선사상을 통해 그들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자신감을 한층 고취시켰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던 신지식인들은 선불교를 사상적 버팀목으로 딛고 일어서서 자유와 평등을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인권사상을 더욱 공고히 다져나갔다. 여기서 한문 출신 문인 사대부들의 독립적 지위는 전에 없이 높아졌고 정치·사회 주류 세력으로 부상했다.
홍주선 시기의 상당수 신지식인들은 조정의 진출을 외면하고 지방의 번진 막부로 진출, 자신들의 진로를 찾음으로써 그들의 개인 가치 의식에 현저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들은 신분적 품계와 정치적 업적으로 인생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지 않고 문장력과 도덕성 같은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다. 개인의 독립적 가치 존중은 정치적으로 지방 분권화를 뜻했다.
홍주선의 본신(本身)은 문화적 색채가 농후했다. 남종선의 삭발·유발 문인(門人)들 중에는 시인·화가 같은 문화인들이 허다했다. 홍주선의 백거이·배휴(裵休)·육긍(陸亘)을 비롯 하택신회 선사와 교분이 두터웠던 왕유, 석두선계의 이고(李╃) 등 관리 겸 문인인 재가 불자들과 시승 교연(皎然)·제기(齊己), 화승 관휴(貫休) 같은 선승들은 유명한 거물 문화인들이다. 목불상을 불태워 언 몸을 녹인 일화를 남긴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와 기행으로 일관한 선장(禪匠) 방온(龐蘊) 거사는 홍주선 시대의 선문 문인을 대표하는 신지식인이다. 당·송 8대가의 우두머리인 두보(杜甫)와 이백(李白)도 만년에는 선적(禪寂)에 침잠했고 선취가 물씬 풍기는 시정(詩情)을 담은 선시들을 쏟아냈다.
마조선의 선림에서는 선문(禪門)과 문인 사대부들간의 한계가 전혀 엄격하지 않은 밀접한 관계였다. 선종의 절 문턱은 원래가 평등 지향의 선사상을 따라 낮고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선문의 시승이나 화승들이 위진남북조 이래의 의학(義學) 사문들과는 달리 문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 조건들이 문인들의 선종 접근을 촉진시켰다. 앞에서 언급한 안사의 난과 영정혁신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문인 사대부들의 선림(禪林) 대량 진입으로 선문과 문인들이 다방면에서 연결돼 선불교의 문화 지평을 한층 제고시켰다. 중·만당의 수많은 게송과 어록은 이 같은 문화 지평의 제고에서 나온 특기할 만한 성과다. 홍주선 시대의 문인과 선문은 ‘상호 순환 왕복작용’으로 사회사상을 흡수하고 선리(禪理)를 배우면서 관계를 한층 심화시켰고 여러 형식의 빛나는 새로운 선문화를 형성했다. 이 같은 선문화는 선불교의 부단한 발전과 변화를 야기시켰고 오늘에까지 훌륭한 전통 문화의 하나로 계승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유의해야 할 점은 선종과 문인 사대부(한문 출신 신진 관료)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 ‘일방 통행’이 아니라 서로가 주고 받는 ‘쌍방향 통행’이었다는 사실이다. 흔히 모든 것을 선종의 일방적인 영향으로만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선사상을 깊이 천착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거나 선불교 편에 치우친 자만이다. 문인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회사상을 선림에 전해 그것을 종교 이론으로 가공케 했다.
선림은 그러한 사회사상을 종교 교의(敎義)로 다듬어 사대부들에게 역수출해 사회사상과 연계시키는 ‘상호 순환 왕복작용’ 속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남종선의 선사상 모두를 불교 내적인 자생(自生)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물론 문인 사대부들이 순수한 종교적 선리를 배워 인생철학으로 활용하거나 예술적 심미안(審美眼)을 넓히는 데 활용한 측면도 있긴 하지만 오히려 시대 사조라는 사회적 조건이 선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홍주선은 관료사회의 돈독한 신앙과 함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문인 사대부 출신으로 홍주선을 신앙했던 고위 관료로는 헌종조의 재상이며 백거이의 친한 친구였던 최군(崔群)과 선종조의 재상으로 마조의 재전(再傳) 제자이며 임제의 스승인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에게서 득법한 배휴(裵休), 역시 재상이었고 마조의 제자인 아호대의(鵝湖大義) 선사의 유발 상좌로 대의의 비문을 직접 지은 위처후(韋處厚)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마조의 비문을 지은 덕종조의 재상 권덕여(權德與)와 마조의 법사(法嗣)인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의 재가제자로 부용태육(芙蓉太毓) 선사의 비문을 지은 월주 자사 육긍, 강서 관찰사 이겸(李兼) 등도 홍주선의 돈독한 신봉자였다. 안사의 난 직후인 대종조에서 재상을 지낸 왕진(王縉)·원재(元載)·두홍점(杜鴻漸) 등도 돈오 남종선의 재가불자였다.
전형적인 한문 서족 출신 신진 관료였던 유종원(773∼819)과 홍주선의 관계를 통해 중당의 남종선 흥성 배경을 살펴보자. 그는 한유(韓愈)·이고 등과 더불어 당시 문단의 뜨거운 담론 과제였던 ‘고문 부흥운동’을 이끈 고문가(古文家)였고 시인이었으며, 동시에 정치가요 사상가였다. 유종원은 그의 처외조부가 된 강서 관찰사이며 홍주선 신봉자인 이겸의 근무지 호북성 무창(武昌)에서 출생했다. 13세 때 부친 유진(柳鎭)을 따라 마조선의 본거지인 홍주(洪州)로 이사했다. 그의 부친은 마조의 속가제자인 권덕여와 친구였고 마조선을 공부했다. 따라서 유종원이 최초로 접촉한 불교는 홍주종이었다.
선불교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그는 21세에 진사에 급제해 관계에 진출했다. 그는 홍주선의 독실한 신자였지만 선종에 대해 냉철한 비판과 분석을 서슴지 않는 이성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 같은 그의 선종에 대한 시각은 그의 진보적 정치 성향 및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사상가로서 유가(儒家)·묵가(墨家)·도가(道家)·법가(法家) 등을 두루 섭렵해 폭넓은 지식을 소유한 그는 어느 한쪽의 사상에 집착하지 않았고 모든 사상적 판단의 기준을 ‘세상에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느냐(有益世用)’에 두었다. 선종에 호의적이면서도 일개 불교 종파에만 집착하지 않는 그의 입장과 천태종 승려 중선(重巽)과의 한때 교우 관계 등으로 불교사는 그를 천태종 법계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전면적 분석을 해보면 계율을 무시한 선림의 문란한 ‘기방선원(妓房禪院)’ 등에 대한 첨예한 비평을 서슴지 않았지만 반천명(反天命), 반미신적이고 선불교에 가장 접근해 있었다.
영정혁신에 가담했다가 영주(永州)로 유배당했을 때는 용흥사·법화사 등에 거주했고 형주(荊州)로 옮겨서는 남종선 선승인 문약(文約)과 몇 년 동안을 동거했다. 당시 선문의 많은 시승(詩僧)들은 영정혁신에 참가했다가 귀양간 진보적인 한문 출신 신진 관료들의 유배지인 남방을 자주 왕래하며 특히 유종원과 유우석을 많이 찾았다.
유종원은 815년 영주 유배에서 풀려나 유주 자사로 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당시 그는 영남 절도사 마총(馬悤)의 주청으로 6조 혜능을 추모하는 대감(大鑑) 선사라는 시호와 영조탑(靈照塔)이라는 탑호가 내려지자 시호 기념 비문을 지었다. 유·불 조화적 관점을 강조한 그의 〈대감선사비〉의 비문은 후일 송대의 대문호이며 선종 거사였던 소동파(蘇東坡)로부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선종 비판의 세 가지 관점은, ① 남종·북종, 공(空)·유(有)의 문제 등을 둘러싼 무원칙한 종파 분쟁, ② 본체와 작용의 관계에서 극단적으로 치닫는 무심(無心)·무작(無作)의 허무주의, ③ 계율을 무시한 풍기문란 등이었다.
유종원이 혜능의 선불교를 긍정한 두 가지 핵심은, 첫째는 생명의 본질은 적정(寂靜)이라고 설파한 성인적인 가르침, 둘째는 외재적 ‘절대성’을 부정한 자성 귀의적인 일원론적 우주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불의 범위를 넘어선 그의 독창적인 유물론인 ‘원기일원론(元氣一元論)’은 선사상의 적극적인 심성론과 유가의 성선설(性善說)을 결합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특수 사상으로 그 방면에선 그를 넘어서는 당대(唐代)의 인물이 없다. 그의 사상적 하이라이트는 선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과 유가의 성선설을 통일시키려 한 점이다.
우리는 유종원이라는 한 신진 사대부를 통해 당시 신지식인들이 견지했던 유·불 통합의 열망과 돈오 남종선의 사상적 수용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인권사상에 한껏 고양돼 있던 당시 신지식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할 사상적 탐색에 몰두했고 선문과 힘을 합해 그 탐색의 수평을 더욱 넓혀갔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열망을 간파한 혜능의 돈오 남종선은 이미 《단경》을 통해 전통적인 유가사상과 노장사상, 현학(玄學)사상 등을 흡수하면서 민중들의 소망에 부응했고 홍주선 시기에 이르러서는 백장청규(百丈淸規)·선문답 등을 통해 이를 보다 구체화했다.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선사상은 대부분의 사회사상들처럼 시대 사조의 절대적 영향을 받아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
유종원과 동시대인인 유우석(772∼842)도 중당 문단의 중요 인물이다. 그는 유종원의 절친한 친구로서 영정혁신에 같이 참여하는 등 정계에서 진퇴를 같이 했고 고문 부흥운동의 영수였던 한유 등과도 우의가 두터웠다. 유종원이 6조 혜능의 비문을 지은 3년 후 도림(道琳) 스님이 조계(曹溪)로부터 찾아와 제3의 혜능 비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자 기꺼이 수락, 〈대감선사비〉 비문을 찬했다. 그는 비문에서 “학인들의 자성을 일깨워 칠흑 같은 미혹 속에서 북두성을 바라보게 했다(能使學者 還其天識 如黑而迷 仰見斗極)”고 6조를 높이 찬양했다. 유우석은 남·북 2종의 선종 종지를 두루 섭렵해 회통해 있었으며 강서성 양기산(楊岐山) 승광(乘廣) 선사와 강소성 우두산 우두법융(牛頭法融) 선사의 신탑기 비문을 짓기도 했다.
백거이(772∼846)는 향산(香山) 거사라는 법명 겸 아호를 스스로 가졌고 마조의 제자 흥선유관(興善惟寬) 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은 홍주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말년에 관직을 은퇴해서는 아예 낙양 향산사에서 살다가 입멸 후에는 절 경내에 묻히기도 했다. 지금도 백거이의 묘원인 백원(白園)이 낙양 향산에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영정혁신에서 선림의 지지를 받는 진보적인 왕숙문의 혁신파가 일시 집권하자 〈위인상재상서(爲人上宰相書)〉라는 시를 써 지지했고, 혁명이 실패로 끝났을 때도 동정의 시를 썼다. 그는 겉의 의관은 유생이지만 내심은 불자인 전형적인 ‘외복유풍 내종범행(外服儒風 內宗梵行)’의 재가불자였다. 왕유도 한 세대 앞서 백거이와 같은 선종 불제자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백거이가 홍주선의 선지(禪旨)를 따른 ‘일체개진(一切皆眞)’인데 반해 그는 북종선풍의 ‘일체개망(一切皆妄)’적 입장이었다.
이밖에 이익(李益)·옹도(雍陶)·이상은(李商隱) 등도 홍주선의 선승들과 호형호제 하며 빈번히 왕래한 시인들이다. 혜능의 농민선은 마조의 홍주선에 이르러 문인 사대부선화되면서 문화예술 분야에까지 폭넓게 구체화돼 나타났다. 가령 인위적인 수행을 거부하고 사물의 본신적(本身的) 운행을 따르는 임운자연(任運自然)을 진정한 수행생활로 제시한 마조선의 ‘무수지수(無修之修)’는 회화에서 ‘무법의 화법(無法之法)’으로 구체화됐다. 화승 관휴(832∼912)의 〈나한도〉 그림은 근엄하기만 했던 나한을 ‘괴물’로 그려내는 무법적이고 무례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관휴가 ‘무법의 화법’을 통해 그려낸 선화(禪畵) 〈나한도〉는 종교의 노예적 지위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심령 예술작품이었다. 진정한 해방이란 기존의 전통과 권위·체제에 묶여 있는 노예의 지위를 무시하고 탈출하는 ‘무법’이다. 선화의 기원이 된 왕유의 《원인와설도(猿人臥雪圖)》 중의 〈설중파초(雪中芭蕉)〉 그림도 여름 식물인 파초를 한 겨울 설경 속에다 그려내 선종이 추구하는 ‘파격’의 해방 사상을 화의(畵意)를 통해 표출했다. 송(宋) 마원(馬遠)의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로 대표되는 선화의 ‘여백’이 보여 주는 그림의 백지 공간은 단순한 공백(空白)이나 무(無)가 아니라 무한 자유를 본질로 하는 ‘생명의 유동처(流動處)’라는 선적인 의미를 갖는다. 선화에서 비롯한 이 같은 ‘여백의 미’는 동양화 일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굳혀져 오늘에까지 널리 회자되면서 계승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측천무후는 과거제도 등을 통해 보잘 것 없는 한문(寒門) 서족 지주 출신의 신지식인들을 대거 수용함으로써 당 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기반을 가진 당나라의 통일과 번영은 세계 봉건 문화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당나라의 번영은 신·구 세력과 대·소 지주 및 각계 각층의 일치된 통치 권력에 대한 지지가 그 밑받침이었다. 이 같은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는 한문 출신 신진 관료와 민중이 갈망하는 해방 사상을 이론화해 묶어낸 돈오 남종선의 선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사회 사조가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인 선사상은 결과적으로는 사상 통치의 중요 방편으로 이용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갖가지 화려한 성과와 족적을 남겼다.
다음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정립된 돈오 남종선의 해방사상과 관련한 선림 내의 구체적 실천 사례인 가불매조와 거사불교(재가불교)를 살펴 보겠다.
부처와 경전을 ‘마른 똥막대기’ ‘귀신 장부’라고 꾸짖고 매도하는 선승들의 가불매조(呵佛罵祖)는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사상 회복운동이며 인불 평등사상을 구현키 위한 절규였다.
혜능의 선종과 한문 출신 신지식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다. 불성 평등사상으로 대표된 시대적 사조가 갈망하는 인간 존엄성 회복운동의 실천 구조는 인성(人性)의 해방이다. 여기서 해탈과 열반이라는 도인의 선경(禪境)은 새로운 불교 ‘이상 인격’으로 구체화됐다. 혜능선의 해탈론이 제시하는 이상적 인격의 핵심 내용은 절대 자유와 무한 초월이다.
인격이란 현실 속의 인간이 가지는 역동적인 생명력이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은 시종 자신의 자아, 곧 자성(自性)이 그 열쇠를 쥐고 있으며 평상의 일상 생활이라는 ‘현실’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현실 속의 인간 중심이다. ‘지금, 여기’라는 당하(當下)의 현실을 딛고 서서 살아가는 이상적 인격자는 만물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고 형형색색을 자랑하는 만물의 자아 존재 가운데로 뛰어들어 거기서 곧바로 우주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는 중국 전통 사상을 흡수해 이른바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냈다.
“행주좌와가 모두 불도(行住坐臥無非道)”이고 “푸른 대나무가 바로 부처의 법신이며 울긋 불긋한 꽃들 모두가 반야 지혜다(靑靑翠竹盡是法身 郁郁黃花無非般若)”라는 선승들의 가르침은 일체현성(一切現成)의 개체가 가지고 있는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선사상이다. 이는 곧 개인의 가치와 개성의 존중이기도 하다.
도덕적·심미적 함의와 모든 역사적 의미까지를 포함하는 인격의 문제는 언제나 객관적 대상화가 되지 않는 자신의 내면적 문제로 귀결된다. 혜능선의 수행과 깨달음도 전적으로 이처럼 자신의 내적 자아에 귀결돼 있다. 혜능의 불성론에서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인간성이 곧 불성이며 ‘자성’이다. 여기서는 보통 사람이 자신의 청정한 본성, 즉 자유롭고 정의롭고 도덕적인 자아를 깨닫게 되면 중생이 곧 부처가 된다. 인간 존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문화 환경의 조성을 위한 대표적 사상적 이론인 혜능선은 평등 사상을 그 기반으로 제시했다.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는 선승들의 가불매조는 중생과 부처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평등 사상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또 거사불교의 강조는 재가와 출가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평등 사상의 종교적 실천이었다. 인성의 철저한 해방을 위한 가르침인 가불매조를 그 표피적인 언설만 보고 패륜적이라고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가불매조는 이상적인 불교 인격에 도달키 위한 방편의 하나였고 신성한 개인의 독립적 가치인 자아를 일깨우는 간절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우선 혜능선의 선승들이 토해낸 과격한 가불매조의 사례를 살펴보자.
나는 우리 조상들과는 달리 생각한다. 부처도 조사도 없고 달마는 냄새 나는 야만인에 불과하다. 석가모니는 별볼 일 없는 마른 똥막대기고 문수·보현보살은 변소나 치는 사나이다. 등각(等覺)이니 묘각이니 하는 오묘한 깨달음이라는 것도 족쇄를 벗어난 평범한 인간성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어 놓은 나무 말뚝에 불과하다. 팔만대장경(12분교 교학)은 귀신의 장부에 지나지 않으며 종기의 고름을 닦아내는 데나 쓰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덕산선감(德山宣鑑) 선사(782∼865)의 상당 법어다. 얼핏 보면 부처를 비웃고 조사를 욕한 패륜적 발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곧 부처인 자심불(自心佛)의 입장에서 보면 이처럼 부처님께 효도한 법문이 없고 조사를 찬양한 발언도 없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부처와 달마·보살·조사를 결코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우상화된 부처는 아무 가치도 없는 ‘마른 똥막대기’에 불과하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부처를 버리고 석가모니를 우상화 해 외재적인 부처에 의지하고 매달리는 사람 역시 또한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다. 이 도리를 깨우쳐 준 덕산의 법문은 그래서 선림의 명법문이고 오늘에까지 학인들이 참구하는 화두(話頭)가 됐다.
덕산과 같은 시기를 살고 간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는 덕산의 가불매조보다 더 강렬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부르짖었다.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단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는 데 세상의 속임수에 말려 들지 않는 것이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들을 모두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떤 경계에도 투탈자재(透脫自在)하며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불혹을 꿰뚫어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혜능선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임제가 외친 가불매조의 사자후다. 부처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개체적 자아의 가치를 발견, 자가성불(自家成佛)로 이끌기 위한 친절한 가르침이며 훌륭한 방편 법문이다. ‘부처를 만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안에 객관화한 부처를 모셔 놓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해탈은 영원히 불가능한 몽환으로 끝나고 만다. 임제가 말하는 ‘살인’은 육체적인 살인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곧 망념을 죽여 없애는 것을 상징한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일곱 발자국을 걷더니 사방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하늘 위 하늘 아래서 나 홀로 존귀한 존재다’라고 했다. 내가 그때 보았더라면 그를 한 방에 쳐 죽여 개밥으로나 주어 천하태평을 도모하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험준한 가풍으로 유명한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864∼949)의 독설적인 가불매조다. 이쯤 되면 패륜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운문은 누구보다도 부처님께 더 큰 효도를 한 불제자다. 운문은 부처에 대한 집착이 이미 자리잡고 있는 마음속 망념의 제거보다도 한 발 앞서 그러한 집착을 갖게 한 부처 자체를 없애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세 사람 모두가 지향하는 궁극점은 외재적인 권위(부처·황제·귀족·전통 등)에 대한 숭배와 집착·맹종을 거부하고 주체적인 자신의 자아(自心佛)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부처·조사·나한은 이상이며 권위다. 부모와 친척은 사회 윤리의 근본이다. 선종은 이런 것들조차도 ‘절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은 이러한 이상과 권위를 부정하고 능동적인 자신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덕산·임제·운문의 법문은 혜능선이 거듭 강조하는 반권위, 반우상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톡톡 튀는 가불매조의 상징이다. 부처와 부모·친척은 망념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지 결코 외형적인 표현처럼 죽이고 욕하라는 패륜을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니다. 선법문은 언설의 뒤에 있는 의상(意象)을 읽어내야지 축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단하천연 선사(739∼824)는 언설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가불매조를 보여주었다.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낙양 혜림사에 들어가 대웅전 안의 목불상을 들어내다 불을 피워 몸을 녹이는 풍광(風狂)의 가불매조를 서슴지 않았다. 단하의 퍼포먼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는 유명한 화두로 남아 오늘에까지 많은 선승들이 상량(商量)하고 참구한다. 그는 혜림사 주지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무슨 짓이냐”고 꾸짖자 “부처의 사리를 찾고자 하는 소불이다”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주지가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냐”고 힐난했다. 단하는 이때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부처라면 불이나 피워 언 몸을 녹이는 게 마땅하다”고 일갈했다.
단하는 소불을 통해 중생과 부처가 같다는 평등사상을 실천해 보이면서 외재적인 권위로 군림해 있는 부처를 일상에서 보는 평상인(목불을 불태워 몸을 녹이는 단하 자신)으로 대체시켰던 것이다. 혜능의 ‘귀의자심불(歸依自心佛)’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킨 가불매조는 별의별 표현을 빌어 되풀이 강조됐고 선법문의 핵심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가불매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① 석가모니의 절대적 권위 부정 ② 불교 경전의 신성한 지위 배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국 불교의 출가승들은 동진의 도안(道安) 스님 이래로 성씨를 석(釋: 석가모니의 첫글자)씨로 바꾸고 신성한 권위와 지위를 누려왔다. 현재도 중국 스님들은 성씨로 전부 ‘석’씨를 사용한다. 그래서 중국 스님들 명함을 받아보면 성씨가 하나같이 ‘석’씨이거나 또는 모두 성이 같기 때문에 생략하고 법명만 표시하고 있다. 출가를 영어로는 ‘위대한 포기(Great Give-up)’라고 번역하는데 출신의 근원을 상징하는 출생시 타고난 성씨까지 버리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포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속성(俗姓)을 버리고 석씨 성을 새로 얻어 신성한 지위를 누려온 승려들의 권위는 혜능선의 출현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중생과 부처가 같다는 혜능의 인불 평등사상은 승려는 물론 석가모니의 권위까지도 여지없이 부정하기 시작했다. 우상적인 부처를 타파하고 마음 밖의 부처를 마음 안의 부처로 바꾸어 인격화시킨 혜능선이 가불매조를 서슴지 않는 것은 이 같은 평등사상으로부터 오는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가불매조를 통한 부처의 권위 부정에는 불성 평등사상에 바탕한 인간 존엄성 회복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민족적 자존심도 내포돼 있었다. 즉 성불은 인도인만의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가능하다는 민족적 자부심이다. 어쨌든 가불매조는 혜능선의 강력한 실천강령인 반권위, 반우상을 불교 내부에서 체현해 보인 한 단면이었다.
돈오 남종선은 불교 경전의 권위에 도전, 문화 수준이 낮은 혜능의 설법집에 《단경(壇經)》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존의 경전과 대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혜능 이후 선불교의 많은 종장(宗匠)들은 우상화돼 있는 경전의 권위와 전통도 부처를 매도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했다. 그래서 그들은 경전을 ‘귀신 장부’ ‘독약’ ‘당나귀를 매는 말뚝’ ‘고름이나 닦는 종이’라고 폄하했다. 이는 경전의 전문 학습과 연구에 얽매인 속박 및 문자 장애를 벗어나려는 외침이었다. 선문에 흘러넘친 가불매조의 수원지는 혜능의 선사상이다.
경전은 너 자신 속의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부처에게도 의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본성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
곽붕(郭朋), 《단경교석(壇經校釋)》
가불매조를 유발시킨 시원구다. 오직 자심불만을 인정하는 혜능의 설법집인 《단경》의 이 구절은 단하·덕산·임제·운문 등의 유명한 가불매조와 독설을 불러왔다. 혜능은 《단경》의 이 구절 외에도 ‘무상참회(無相懺悔)’ ‘자성참(自性懺)’ ‘귀의자성불’이라는 법문을 통해 내심에서 자기 평상시의 행동을 늘 심각하게 반성, 일체의 악행이 자신의 망념과 잡심(雜心)에서 비롯함을 인식하고 마치 맑은 하늘을 가리우고 있는 구름과 같은 망념을 자신의 본연 청정심으로부터 제거해 악행을 영원히 단절하라고 설파했다. 한마디로 말해 선의 도덕화이며 인격화다.
자성(自性)은 깨달음이라는 이상적 인격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이며 속성이다. 각성(覺性)이 그 본질인 자성은 각자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천부적으로 아무리 써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충분히 갖추어 가지고 있다. 이를 정치 사회적 용어로 번안하면 ‘천부인권설’이다.
혜능은 쉬운 말로 바꾸면 ‘개인의 심성’이 되는 이 자성을 해방 사상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단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글자 및 단어는 ‘자(自)’자와 ‘자성’이다.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이 불성(자성)을 충분히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인식 아래 자기와 부처가 무차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는 정신적 초월을 달성한 현실 속의 역사적 인간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곧 자기 생명의 긍정이며 주체적 인생의 실천이다. 말을 바꾸면 불성의 인격화다.
부처의 경지란 자신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시공(時空)의 유한성을 초월, 무한의 정신 세계에 도달한 상태다. 부처와 속인을 결정하는 요인은 깨침과 깨치지 못함일 뿐이다. 그러나 깨칠 수 있는 능력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혜능선이 강조하는 ‘해탈’은 일상생활 중에서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불도(佛道) 아님이 없는 평상의 일상생활 속에서 인성(人性)의 해방을 획득한 사람이 바로 조사·도인이고, 부처다.
이같은 혜능의 새로운 불교 이상 인격은 유교의 성인과 노장의 진인(眞人)을 합친 “세간을 버리지 않으면서 세간을 떠나는(出世不離入世)” 자유인으로 구체화된다. 혜능이 제시한 이상 인격은 직관적 탐색을 통해 자성 해탈하는 심성학적 형이상(形而上)의 영역에서 절대 자유와 무한 초월의 인격 본체를 건립한다.
혜능의 선학은 우주의 본원적 질서와 자연의 객관 법칙을 깊이 탐구해 인간의 본성과 영원불변의 진여(眞如) 불성이 일치하고 있음을 논증한다. 진여 본성은 우주 자연에 대한 해설로서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숨쉬는 인격이다. 이와 같이 부처의 인격화를 탐색해 건립한 혜능의 선학 이론은 신진 관료와 민중들에게 인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상적 경계(境界)를 제시함으로써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했다.
혜능선의 ‘자성’은 바로 인권 평등사상이라는 시대 사조의 불교적 용어였던 것이다. 또 혜능의 부처는 모든 정치, 사회,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현실 속의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민중의 사회적 염원을 불교적으로 정리한 것이 혜능의 선학 사상이다. 유의할 대목은 혜능선의 평등사상을 무조건적인 평등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혜능선의 평등은 본체적인 측면에서 절대평등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는 것(雲在天水在甁)”처럼 절대차별이다. 가불매조에 담긴 평등사상도 이처럼 절대평등이 곧 절대차별이 되는 개체적 존재 가치의 절대성을 인정한 체용일여(體用一如)의 선리를 떠나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상계의 차별은 엄연히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게 혜능선의 평등이다.
혜능선 자체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벗어나 있지 않았다. 혜능선의 승려들은 많은 학식도 없었고 심지어는 그 지도자인 혜능 자신이 일자무식의 나뭇꾼 출신이었다. 그들의 출신 성분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운 일반 평민가정 태생이었다. 그들은 귀족 승려들처럼 거대한 장원도 소유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친 수행과 대량의 보시나, 실타래 같은 번잡한 종교 의식, 지리한 경전 암송 등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혁신 운동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주관적 유심주의(唯心主義)”를 쉽고 간략하게 논증해 번쇄한 경전의 인용이 필요없는 각 개인의 주관적 신앙과 양심을 통해 해탈케 하는 것이었다. 혜능선의 선학(禪學)과 신앙은 민중의 심태(心態) 바로 그것이었다. 시대적 열망이 생산해낸 혜능의 선학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부닥친 당시 불교의 위기는 물론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극복해 찬란한 당 중엽 후기 봉건 문화의 꽃을 피우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만약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가능하다. 부디 출가해 절에만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 (중략)
세간에서 불도를 닦는 수행을 해도 어느 것 하나 그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 항상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알아 반성하면 그대로 도와 딱 들어맞는 것이다. (중략)
불법은 원래가 세속 속에 있나니 세속 속에 있으면서 세속을 떠나야(초월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간을 떠나 밖으로 나가 출세간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곽붕(郭朋), 《단경교석(壇經校釋)》
혜능의 선불교는 외재적인 출가와 수행이나 형식적인 좌선 수행을 부정하고 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수도, 성불하는 재가불교(거사불교)·생활불교를 제창했다. 그의 재가 수행 제창은 “불교의 정치성과 경제성에 대한 비판이며 그 개혁의 구체적 대안(代安) 제시”였다. 또 재가와 출가의 구분을 없앤 거사불교는 불성 평등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평등 사상의 구체적 실천이었으며 불교의 중국화이기도 했다.
정치 권력과 밀착한 출가 승려들의 귀족화와 호사를 누리는 막강한 사원의 장원 경제는 출세간주의 수행이 빚어낸 폐단이었으며 일반 민중들로부터 불교를 소외시키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또 출세간주의는 유가의 전통적인 입세주의(入世主義) 인생관이 지배하는 중국인들의 심성에 마찰을 일으켰다. 재가불교는 이러한 마찰을 해소하고 출가주의 수행으로 야기되는 국가 생산 노동력의 감소를 둘러싼 정부와 불교의 갈등을 해결하는 효과를 발휘하면서 평민 계층은 물론 사대부 계층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호구지책에 쫓겨 별도의 수행시간을 낼 수 없는 평민들과 세속의 물질적 향락을 버리기 아쉬워하는 사대부들은 혜능선이 주창하는 생활불교에 큰 매력을 느꼈다. 혜능선의 유별난 재가불교 강조는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불교의 타협적인 산물이다.
거듭 밝힌 바와 같이 혜능은 부처를 ‘자심(自心)’으로 대치시켜 일체의 외재적 수행 형식을 부정하고 오직 자식본심(自識本心)만을 긍정, 행주좌와(行住坐臥)로 대표되는 일상생활 중에서의 성불을 유도했다. 혜능선의 혁명적인 선학이 제시한 수행론의 핵심은 돈오성불(頓悟成佛)이다. ‘돈오’란 사변이나 논증이 아니라 개체적인 직각(直覺) 체험을 통한 찰나간 발상의 전환을 말한다. 진정한 직관(直觀) 체험은 현실 생활 중에서 획득할 수 있다는 게 재가불교의 수행 논리 구조다. 즉 일상의 경험 속에서도 얼마든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계기와 도의 근원인 우주 자연의 섭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오는 감성을 통해 초월을 획득하는 해탈법이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 발견은 일상 생활 중의 체험에서 때때로 발동되는 무의식적인 감성의 통로가 그 첩경이다. 즉 돈오라는 ‘초월’은 일상의 감성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홍주선의 즉심즉불(卽心卽佛) 사상이 제시하는 세간을 떠나지 않는 해탈, 즉 재가불교다.
혜능의 재가불교는 말을 바꾸면 ‘인간 불교’다. 여기서는 일상생활이라는 인간의 삶이 바로 수행이며 일반 백성의 가택이 곧 사찰이며 선방이 된다. ‘부처의 불교’와 인간 불교, 재가와 출가,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을 하나로 통일시켜 버린 혜능의 진심 일원론적 관점은 “만법은 모두 다 자성 가운데 있다(萬法盡是自性)”는 유심론으로 요약돼 있다.
혜능선의 선승들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饑來喫飯 困時卽眠)” 생활 속 수행을 통한 해탈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심’의 현실 생활을 선도(禪道)의 정도로 제시한 탁견이다. 여기서 고행의 두타행(頭陀行)이나 좌선 같은 수행법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인간주의적인 수행으로 대체됐다.
임제종 양기파의 천여유칙(天如惟則) 선사는 법문에서 “불법에는 원래 현묘함이란 게 없다. 눈은 옆으로 달려 있고 코는 수직으로 붙어 있다(眼橫鼻直)”고 설파했다. ‘안횡비직’은 돈오성불의 관건이 논리나 추론·분석 같은 사유계도(思惟計度)에 있지 않고 면전에 나타나 있는 자연 원진적(原眞的)인 모습들을 살피는 데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유칙의 법문은 “불법은 원래가 세간에 있다(法元在世間)”는 재가불교를 풀이한 설명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임운수연(任運隨緣)의 수행법과 ‘안횡비직’의 현전(現前) 통찰은 “본바탕을 따라 궁극에 부합하는(率性適竟) 공자의 정신 세계를 형상화시켜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진리인 선가의 ‘일용경(日用境: Everydayness)’은 혜능선만의 특이한 미학이기도 하다. 미학에서는 깨달음을 하나의 심미적 체험으로 풀이한다. 혜능선은 일용사는 물론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장, 노동까지도 즐겁고 간절한 수행으로 받아들인다. 〈백장청규(百丈淸規)〉의 보청법(普請法)이 바로 이 같은 혜능선의 미학을 완성시킨 세계 종교사에 유례가 없는 미학이다.
한국의 선종(조계종)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임제종 양기파의 원오극근(?悟克勤) 선사와 간화선의 창시자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도 모두 세간과 출세간의 회통(會通)을 강조했다. 원오는 “불법이란 곧 세간법이며 세간법이 곧 불법”이라고 설파했고 종고는 세간을 수용한 해탈관으로 유가의 입세·제세(濟世) 정신을 함축한 선학과 사대부 거사불교의 결합을 성공시켰다.
논쟁의 불길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는 종고의 간화선(看話禪)과 굉지정각 선사의 묵조선(默照禪) 대립도 그 이면의 배경을 들여다 보면 사대부 거사들을 서로 쟁취하려는 투쟁이었다. 따라서 간화·묵조선의 대립은 “선학 자체의 의미보다는 정치, 사회적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회통은 바로 유가, 불가의 통일을 의미한다. 유석(儒釋) 통일을 강력히 추진했던 인물로는 송대의 재상 거사로 종고의 선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장상영(張商英)과 명교설숭(明敎契嵩) 선사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혜능의 《단경》은 경전 형식을 빌어 세간과 출세간의 철리상 일치를 논증하고 있다. 현실 생활과 불교 이상의 통일을 뜻하는 이 같은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선리(禪理)는 중국 사상과 문화에 깊숙히 파고들어 인도 불교의 범위를 넘어선 중국화한 새로운 동아시아 대승불교 이념을 제시했다. 혜능선의 재가수행은 전통 문화 속의 수양(修養)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자》의 심재(心齋)·좌망(坐忘)·조철(朝徹)·성태장양(聖胎長養)·진인(眞人) 등과 유가의 예악제도 등이 재가 수행의 구체적 배경이다. 재가불교 주창의 원조는 혜능에 앞서 재가 수행 중심의 불교를 강력히 제기했던 북주(北周)의 위원숭(衛元嵩) 스님이다.
왕유의 〈육조능선사비명(六祖能禪師碑銘)〉(《全唐文》 권327)은 일상의 행주좌와가 곧 수행이라는 혜능의 선법(禪法)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혜능은 부처를 자심 속으로 옮겨 외재적인 수행 형식을 부정하고 오직 자식본심(自識本心)만을 긍정함으로써 행주좌와와 세간의 일용사 중에서도 성불이 가능하다고 했다.”
혜능이 제창한 일상생활을 이끄는 ‘올곧은 마음(直心)과 자성’은 후일 마조의 홍주선에서는 ‘평상심(平常心)’으로 바뀌었고 임제에 이르러는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형상화되고 구체화됐다. 직심과 평상심은 서구적인 용어에 대응시키자면 ‘양심’과 비슷한 개념을 가진 선학 용어다. 언제나 올바른 마음과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참된 수행이라는 혜능의 재가 수행 선법은 이른바 ‘수행이 없는 수행(無修之修)’이다. 이는 혜능에 앞선 동진 승조(僧肇) 스님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 입각한 선법이며 노장의 무위법(無爲法)과도 같은 맥락이다.
선방의 참선 수행과 범부의 일용 평상사(平常事)가 대등한 등식 관계를 갖는 수행법은 이른바 두두물물이 부처 아님이 없는 ‘촉류시도(觸類是道)· 촉목보리(觸目菩提)· 일체현성(一切現成)’이라는 선리를 쏟아냈다. 모두가 승조 스님이 설파했던 ‘촉사이진(觸事而眞)’과 같은 문법의 선리다. 혜능의 자성론은 만물을 자성이라는 보자기 안으로 다 거두어들였다가 다시 자성을 만물 가운데로 되돌려 보내는 변증법이다. 후기 선종의 ‘촉목보리’는 혜능의 자성론이 한층 구체화된 논리적 발전이다.
소위 ‘불이법(不二法)’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리는 혜능의 선법은 정치사회적 평등사상을 종교 형식의 논리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혜능선은 불성론을 인성화(人性化)하고 세속화시켜 장엄하기만 했던 성불 경계의 절대 초월성을 세속 안으로 끌어내려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상사와 융합시킴으로써 세속 사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평등사상의 실천을 보여주었다.
재가 수행법은 가장 인성에 부합하는 인간주의적인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혜능의 후계자들은 불교의 초월성을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자질구레한 일상사에까지 연결시켜 세간과 출세간의 엄격한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고취했고 불교 내적으로는 재가 수행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혜능선이 인도 불교의 전통인 출가 수행을 굳이 요구하지 않은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당시 시대 사조가 요구하는 자유사상의 구체적 실현이었다. 혜능의 선법은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철저히 당시의 민중과 신지식인들이 갈망하는 시대적 사조인 정치사회적 평등과 자유에 연결돼 있었다. 다만 종교적 형식과 논리로 설파한 점이 세속 정치사상이나 사회사상과 다를 뿐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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