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인터뷰-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스님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성수
(불교신문 기자)
지난 11월 23일부터 올 2월 8일까지 매주 토요일 남원 실상사에서 진행된 ‘금강경 결제’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종단 사상 처음으로 ‘간경 결제(看經 結制)’라는 새로운 틀과 논강(論講)이라는 절집 고유의 공부방법으로 이루어진 ‘금강경 결제’는 소의경전 《금강경》에 대한 진지한 논강과 사부대중의 격의 없는 동참을 통해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숙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번 ‘금강경 결제’의 논주를 맡은 각묵 스님은 10여 년 간 인도와 미안먀 등지에서 공부하여 주로 산스끄리뜨, 빠알리, 쁘라끄리뜨를 연찬했으며, 지금은 ‘빠알리 삼장’의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사천 구룡사에 주석하고 있으며,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소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金剛經)》이다. 종헌에 “본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전등법어(傳燈法語)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조계종의 ‘핵심’이 바로 《금강경》에 있으며, 교단을 구성하는 사부대중은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교단 구성원들이 “소의경전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흔쾌히 “그렇다”라고 동의하기 힘든 것이 종단의 현실이다. 그동안 《금강경》을 수천만 독(讀)을 하고 주요 법회 때마다 《금강경》에 대한 설법과 강의가 있었지만 경전이 주는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 《금강경》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하지 않은 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던 것도 교단의 현주소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지난 11월 23일부터 올 2월 8일까지 매주 토요일 남원 실상사에서 진행된 ‘금강경 결제’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간경 결제(看經 結制)라는 새로운 틀과 논강(論講)이라는 절집 고유의 공부방법을 갖고 이루어진 ‘금강경 결제’는 소의경전 《금강경》을 다시 살피고, 이를 통해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숙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소의경전에 대한 대중들의 각성(覺醒)을 불러 일으켜 수행의 새로운 풍토를 조성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아무래도 깊이 있는 점검은 안 됐다”는 비판을 받은 ‘금강경 결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번 결제에서 논주(論主) 소임을 맡아 “《금강경》의 핵심은 산냐(相)의 척파인데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이를 잊고 있다”는 통렬한 할(喝)과 함께 논강을 주도적으로 이끈 각묵(覺默) 스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결제를 다시 돌아본다. 각묵 스님과의 인터뷰는 결제기간 동안 틈틈이 진행됐고, ‘금강경 결제’가 회향된 후 이메일(e-mail)을 주고 받아 보완했다.
- 지난 동안거 기간을 통해 진행된 ‘금강경 결제’가 원만하게 회향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번 ‘금강경 결제’는 선(禪) 수행 위주의 결제만을 생각해 온 불교집안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이번 결제를 이끈 논주 스님으로서 ‘금강경 결제’를 회향하게 된 소감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불교에서 처음 있은 간경결제이고 논주라는 소임을 맡아서 혹시 저 때문에 이 의미 있는 불사가 자칫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격려해주시고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셔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 다른 경전도 물론 중요하지만 《금강경》이 갖는 소중한 의미는, 한국불교의 정통종단인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단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소의경전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소의경전을 그동안 한국불교가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그리고 조계종의 구성원들이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의견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입니다. 그런 만큼 많이 독송되고 있는 책이며 불교서점에 가 봐도 꾸준히 가장 많이 출판되고 있는 책이 《금강경》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금강경》 인식은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금강경》은 보시를 강조한 경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시를 하되 무주상 보시를 하면 그 공덕은 무량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마라즙 본의 제일바라밀을 보시바라밀로 이해하여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바라밀을 설한 것이 《금강경》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원문을 잘 음미해보면 《금강경》은 보시바라밀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보시바라밀은 하나의 보기로 등장할 뿐입니다.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산냐(인식, 관념, 개념)를 열거하면서 그 중의 하나로 보시한다는 산냐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제에서도 강조했지만 구마라즙 스님이 옮긴 제일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냐에 함몰되지 말라는 이 《금강경》을 최고(parama)의 바라밀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것을 구마라즙이 제일바라밀로 옮겼고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의 처음인 보시바라밀이라고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현장 스님은 최상승바라밀(最上勝波羅蜜)로 옮기고 있습니다.
오히려 《금강경》은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몸을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겁 동안 보시해도 본 《금강경》에서 설한 ‘산냐의 척파’를 이해하는 것이 그 공덕은 온갖 산수 비유보다도 더 수승하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금강경》이 무주상보시를 근본으로 가르치는 경이란 말입니까? 보시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보시바라밀을 근본으로 강조하는 경은 결코 아닙니다.
- 앞서의 질문과 이어지는 내용인데, 스님께서는 결제기간 동안 한국불교의 강당에서 이뤄지는 《금강경》의 이해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셨는데요.
▲ 그렇습니다. 한국 강당의 강사스님들은 은근히 《금강경》은 상(相)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이지만 대승의 근본자리인 성(性)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도 강당에서는 화엄을 근본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승을 크게 나누면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밀교, 정토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교학은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으로 대표된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후대로 올수록 기신론, 원각, 법화, 화엄으로 대표되는 여래장계열의 가르침이 그 힘을 얻었고 그래서 우리 한국 강당도 화엄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원의 4학년 과정은 화엄 하나만을 가르치지요. 그러다보니 교학은 대부분 화엄을 제일로 취급하고 그 나머지는 아직 구경의 도리를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식은 아직 참대승이 아닌 권대승(權大乘)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물론 이런 배경에는 우리 교학이 아직까지도 천태의 5시의 교상판석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함은 똥치우고 보수 받는 경지고(제분정가아함시), 방등은 출입정도는 무난하게 하는 경지고(출입무만방등시), 반야는 보물이 어떤 것인지 정도 아는 경지고(영지각성반야시), …… 아직도 이런 교상판석을 신주단지 모시 듯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각묵 스님은 “《금강경》의 상은 단순히 체(體)나 성(性)에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상이 아니다”면서 “상은 산냐의 역어이고 산냐는 모든 관념, 이념, 이상, 경계를 말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체나 성을 세운다면 그것도 척파해야 할 산냐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불교신문〉에 종림 스님께서 ‘텍스트학’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불교가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한, 선이나 화엄의 입장에서 《금강경》을 볼 것이 아니라 《금강경》의 관점에서 선이나 화엄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 들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금강경》이 소의경전인 한 《금강경》 그 자체를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는 여래장이라는 화엄이나 기신, 법화의 잣대로 《금강경》을 보려는 의도를 먼저 극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묵 스님은 일관되게 한문으로 번역된 내용에만 집중하지 말고, 원어를 살펴보고 또 번역 당시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될 때 경전의 바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산스끄리뜨 원어와 구마라즙의 의역과 현장의 직역을 일대일로 대역하면서 해설을 시도한 것은 바로 《금강경》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라고 밝힌 각묵 스님은 “《금강경》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초기불교의 술어와 대부분 일치하고 있으며 특히 최초기 부처님 가르침으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숫따니빠따》 4장과 그 핵심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제 《금강경》을 《금강경》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해야할 시점에 와있다고 봅니다. 아니 《금강경》이 소의경전인 한 《금강경》을 통해서 화엄이나 법화나 다른 교학체계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 스님께서는 결제기간 내내 《금강경》의 핵심은 ‘상(相)을 척파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밝히셨는데, 다시 한번 ‘상의 척파’를 그렇게 강조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제가 상의 척파를 거듭해서 강조한 제일 큰 이유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한국 간화선의 병폐를 지적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념, 이념, 이상, 경계 등으로 옮길 수 있는 산냐의 척파는 어렵고 실감도 나지 않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에게는 이런 산냐의 척파는 중요합니다.
(각묵 스님은 “부처님께서 깔라마와 라마뿟따 두 스승의 문하에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라는 당대 선정 수행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증득하시고 이를 버리신 이유는 이 둘은 산냐에 걸려 있기 때문에 이욕 지멸 깨달음 해탈이 아니라고 자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스님은 이 부분은 중부 26경과 중부 36경을 참조하면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부처님의 입각처를 놓쳐 버리고 한국 간화선은 성, 불성, 여래장, 심지어 참나, 대아, 주인공, 내부처, 본래면목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아뜨만(자아=진아)이라는 대상을 세우고 그것과 하나 되는 수행으로 전락해가고 있다고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 같은 경향이 ‘한국불교 전반에서 가장 심각한 타락’이라고 질타한 각묵 스님은 “수행자가 수행의 본질을 오염시키는 것은 그 어떤 타락보다 심각한 것”이라면서 ‘진아여여’ ‘나는 누구인가’ 등 라마나(Ramana)가 주장한 힌두의 수행법을 ‘이뭐꼬’ 화두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이런 책들을 최고의 수행지침서로 이미 제방에서 읽고 있으며 강원에서까지 읽고 간화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 중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 힌두적 발상과 서양의 상업주의가 결탁된 아봐타(Avatar) 수행에 스님들과 불자들이 뛰어드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거듭 제기하지만 아뜨만-브라만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것에 몰입하여 그것과 합일하려는 힌두적 발상과 모든 전제를 부정하고 부정한다는 것까지도 부정하는 간화선의 직관은 전혀 다른 수행법입니다.
(각묵 스님은 “성스러운 부처님 제자가 되어 최상승이라는 간화선을 하면서 소승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외도선을 찬양하고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면 어느 불조(佛祖)인들 통탄하지 않겠는가”라면서 “한국에서 간화선이 피폐해가고 남방 소승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뿌리내려간다고 걱정하기 전에 소승도 아닌 외도선을 찬양하고 있는 제방의 풍토부터 통탄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경책을 아끼지 않았다.)
- ‘간화선의 위기’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 물론 모든 전제를 부정하는 화두 수행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합리성을 존중하는 현대에 와서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고 그래서 간화선 위기론이 지금 대두되고 있기도 합니다. 간화선을 제대로 하려면 부처님의 무아의 선언, 저 아상을 근본으로 한 산냐의 척파에 뼈저리게 사무쳐야합니다. 무아에 대해서 처절하게 사유하고 고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뼈를 깎는 자기점검이 없기 때문에 간화선은 간화선이 아니고 힌두 아류로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속의 부귀영화 따위는 뒤 닦은 휴지 버리듯 버리고 출가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이처럼 사무치지 못한다면 이미 화두하고는 십만 팔천 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는 산냐의 척파를 소리높인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산냐 척파라는 《금강경》의 근본 메시지를 애써 무시하고 반야의 실천이니 무주상보시니 하는 쪽으로 《금강경》을 이해하거나 화엄의 성의 관점에서 《금강경》을 이해하려 들면 수행지침서로서의 《금강경》의 근본 입각처를 놓쳐버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한국불교는 그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 스님께서 주장하신 ‘상을 척파하는 게 《금강경》의 가르침’이라는 견해에 대해 동화사 강주 해월 스님은 줄곧 ‘반야바라밀이 《금강경》 가르침’이라고 반론을 폈는데, 이 같은 지적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저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금강경 결제’에서 ‘반야바라밀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별 뾰족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대중들도 인정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반야바라밀을 정확하게 정의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선종영가집》에서는 반야를 아공(我空), 법공(法空), 공공(空空)으로 정의하고 있고 다른 대승경론에서도 아공, 법공, 구공(俱空)으로 정의합니다. 이것을 초기 가르침의 말로 표현하면 무아를 철견하는 것이 반야입니다. 남방에서도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아는 것을 반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상으로 대표되는 산냐를 척파하는 것이야말로 반야 그 자체 아닙니까.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옮겨지는 《금강경》의 핵심이 산냐 척파가 되는 것입니다.
(각묵 스님은 “이념, 이상, 관념, 개념으로 옮겨지는 산냐를 척파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반야바라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반야의 실천을 설한 것이 《금강경》이라고 주장하신 분도 있는데 산냐의 척파 말고 또 무슨 반야의 실천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계속되는 각묵 스님의 이야기다.)
▲ 만일 반야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면 이처럼 반야를 따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척파되어야 할 산냐 중의 산냐 아니겠습니까? 증도가는 ‘환여피익이투화(換如避溺而投火)’, 즉 ‘물에 빠지는 것을 피해 불로 뛰어든다’라고 했습니다. 물에서 나오면 그만이지 다시 불로 뛰어들면 죽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산냐를 척파하면 되었지 따로 반야를 설정한다면 물을 피해 불로 뛰어드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산냐의 척파가 바로 반야의 실천입니다. 이 이외에 무슨 반야의 실천이 따로 있습니까? 따로 있다면 제게 제발 좀 가르쳐주세요. 겸허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처럼 산냐의 척파를 반야의 실천이라 한다면 이 둘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반야라는 것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발상을 깔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금강경》의 핵심을 호도할 수 있는 표현이라 여겨져서 두렵습니다.
- 스님께서 결제기간 동안 밝히신 입장에 대해 교계 일부에서는 ‘남방불교 중심적’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 같은 비판은 ‘초기불교 = 남방불교’라는 인식과 함께 곧 ‘반(反)대승불교’ 또는 ‘반한국불교’, ‘반간화선’이라는 생각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 한마디로 우스운 발상들입니다. 저는 《금강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고 자부합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원문이나 원문을 직역한 것을 그대로 읽어보십시오. 산냐의 척파(척파라는 단어가 거슬린다면 산냐의 극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가 《금강경》의 메시지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정말 기회가 주어진다면 뜻있는 여러분들과 아무런 선입견 없이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문을 한글로 일대일 대역하면서 같이 읽고 토론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주해한 《금강경 역해》는 바로 이런 시도였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더 돕기 위해서 의역 위주의 구마라즙 역과 직역 위주의 현장 역을 같이 일대일 대역에 포함시켰습니다. 너무 상세하다보니 읽는 데 무리가 있었기는 했지만……. 아무튼 산스끄리뜨는 한글과 문맥이 같으므로 책으로 보는 것보다는 같이 읽으며 토론해보면 《금강경》 범어원전의 뜻은 아주 명료하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 그렇다면 ‘남방불교’에 대한 스님 입장을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 제가 《금강경》 이외의 다른 가르침과 비교한 것이 있다면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무아와 산냐의 척파는 초기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苦口?О)히 설하신 가르침입니다. 불자들이 부처님 원음을 최종 판단 근거로 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런 최종판단 근거를 남방불교니 소승불교니 하면서 거부하는 것은 우치한 발상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압니다. 부처님 원음은 빠알리 경장과 한역 아함부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단지 한역 아함으로는 한문에 가려서 부처님 원음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제 때도 반농담으로 밝혔지만 저는 우리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이 최초기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귀중한 경이라는 것을 밝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 중노릇의 밥값은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게 종정스님의 표창장은 주지 못할망정 반대승, 반한국불교라는 산냐를 붙인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물론 제가 일부 남방불교의 가르침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법을 직관에만 의지해서 파악하려는 대승불교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분석적인 초기와 남방의 태도를 소개하려 하였지만 이것마저도 소승으로 대승을 폄하하려 한다는 등의 전혀 다른 저항(?)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금강경》을 이해하는 데 혼란만 준 것 같아서 뒤로 가면서는 이런 관점은 피했습니다. 결제를 마치고 보니 좀더 강하게 분석적 시각을 강조하지 못한 게 오히려 아쉽습니다.
대승불교는 아비담마를 토대로 하여 핀 꽃입니다. 그런데도 법의 분석을 근본 목적으로 하는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서 어떻게 대승을 바로 이해한단 말입니까? 특히 유식은 아비담마를 그대로 대승교학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대승’ ‘대승’하는 것은 아비담마를 나름대로 접해본 제 입장에서 보기에는 가소가소(可笑可笑)입니다. 그리고 저는 간화선이야말로 무전제의 수행이고 무전제는 바로 무아라는 초기불교의 근본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그래서 최상승 수행이라 자부할 만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간화선이 대아(大我)·진아(眞我) 등을 내세워 그것에 몰입하려는 힌두교적 발상의 외도선이 되어가는 것을 어찌 비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간화선이 ‘나는 누구인가’ 또는 ‘진아여여’식의 외도선화 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반간화선적인 태도입니까? 그런 수준으로 제 말을 이해한 사람들이 참으로 불교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불성과 여래장·자성으로 대표되는 대승의 성(性)이란 개념을 비판한다고 해서 저더러 일본 비판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둥, 대승비불설을 말한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데 이런 이름 붙이기야말로 산냐 중의 산냐 아닙니까? 이런 짓을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저를 두고 오히려 이런 여러 이름을 붙여 저를 규정하려는 시도들을 보고 참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만 해야겠습니다. 또 무슨 라벨을 붙일지 모르지요. 아나키스트라고 하지 않을지 겁나네요.
- 앞선 질문과 연결되는 내용인데요, 그러면 스님께서는 간화선 수행체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며, 개선해야 될 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지난 결제 때 스님께서는 간화선 수행체계는 수승하지만, 현재 한국불교에서 행하고 있는 간화선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밝히셨는데 이것과 연결해서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미 앞에서 간화선이 힌두화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간화선은 무전제의 수행이고 무전제야말로 무아와 직결됩니다. 무아는 불교의 근본 중의 근본입니다. 이런 무전제의 수행을 진아, 대아, 아뜨만식의 그 무엇을 세우는 수행과 동일시한다면 이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힌두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아에 사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아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사제·팔정도·12연기·삼법인·37조도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먼저하고 이런 근본 가르침이 내 중노릇과 내 수행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먼저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다음에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의정(疑情)을 일으킬 수 없다고 봅니다.
- ‘금강경 결제’기간 동안 한국불교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심도 있는 논의는 부족했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의 ‘현실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 현실문제에 관한 한 저는 조심스런 접근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고 그러므로 현실문제의 해법도 각자가 파악한 현실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역시 엄청나게 다양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금강결 결제’에 논주로 동참한 저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과연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하는 점이 더 큰 현실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범어원전과 구마라즙과 현장의 번역을 비교하여 우리의 《금강경》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현실문제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구해석에만 빠진 고담준론쯤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현실이 무엇인가를 두고도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을 노출합니다.
(이번 ‘금강경 결제’에서는 교단이 직면한 ‘현실문제’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이 제기됐다. 기복불교에 대한 통렬한 지적, 소유문제에 대한 재인식, 천도재 봉행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일었다. 이들은 모두 민감한 주제이며, 토론시간의 제약 때문에 깊이 있게 진행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일단 ‘문제 제기’에는 성공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각묵 스님 역시 논강(論講) 기간 동안 한국불교가 직면한 구체적인 현실문제에 공감을 표시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 스님께서는 불교 입장에서 ‘현실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고, 이를 구체화시켜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파악하신 현실문제는 바로 고(苦, dukkha)입니다. 사실 고로 대표되는 이런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의약 등등의 분야가 갈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진국형의 정부가 추구하는 이런 고통의 해결이라는 현실문제의 해법은 한마디로 복지국가로 표현된다고 봅니다. 미국, 유럽 등의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 가보면 복지야말로 선진국가의 근본이념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종교계에서 담당했던 이런 복지의 이념을 이제는 정부가 담당하려 하고 있고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건강(의료)·교육·환경·노동조건 개선·노후문제 등은 선진국일수록 정부 주도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형이 될수록 이런 주제들은 정부와 민간단체의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불교는 불교가 담당할 영역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진국의 국민들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인 삶의 질의 문제, 바로 자기개발의 문제라고 봅니다. 자기 개발이야말로 수행(bha?ana?)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불교는 수행이라는 이 하나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면 현실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라고 감히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일례로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고 개인 중심화되면서 어린이·학생·대학생·청년법회가 거의 전멸하다시피할 정도로 지리멸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교회나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그렇게 부르짖었던 포교 문제만 해도 이제는 도심포교보다는 자연환경을 잘 보존한 산중 사찰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욱더 심화될 것이라 봅니다. 주5일 근무제가 정착이 되면 더욱더 산중사찰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며 불교가 고유의 영역인 자기 개발이라는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불교의 대중화 문제는 달려 있다고 봅니다.
저는 불교가 자기의 고유 영역인 수행의 문제에 투철해지는 것이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더 불교적이면서도 현대인들에게 더 의미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자기 개발과 자기 제어의 수행을 통해서 인간의 탐진치가 어느 정도 다스려져야 건강문제, 교육문제, 환경문제, 노동문제 등도 궁극에서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간경 결제’ 프로그램이라든지 다양한 논강 프로그램이라든지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서 현대인들의 가슴을 살찌게 해주고 향상의 길을 착실하게 걸을 수 있게 인도해 주는 것이 다른 어떤 현실문제보다 불교다운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해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다른 결제 때와는 달리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동참한 가운데 열린 이번 ‘금강경 결제’는 스님과 재가불자들의 ‘차별 또는 분별’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교단상황을 고려할 때 파격적이라고 봅니다. 향후 이 같은 형태의 논강이 계속 이뤄져야 할지 여부에 대해 스님 생각을 중심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문제 제기와 발제를 담당하는 논주가 있고 그 문제 제기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논객 그룹이 있어서 이들 간에 심도 깊은 논의와 설전이 오고가며, 다시 이것을 두고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갖는 논강 방식은 잘만 된다면 아주 이상적인 공부 방식이라 봅니다. 특히 재가, 출가의 구분을 두지 않고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논강은 열린 사회에 걸맞는 아주 좋은 결제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런 열린 논강, 열린 결제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공부 방식은 문제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실 어떤 회합이든 항상 논란거리로 따라다니는 두 명제는 대중성과 전문성 아닙니까? 대중성과 전문성, 둘 다 확보할 수 있다면 그 모임은 가장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양한 관심과 불교에 대한 각자 다른 이해 정도를 가진 1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출가자·재가자가 함께 모여서 대중성과 전문성을 다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논주와 논객 스님들 간의 토론은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추었고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이크가 대중석으로 넘어갔을 때는 전혀 주제와 상관 없는 발언을 하는 분들이 많았고, 전혀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발언을 위한 발언을 한 분들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 앞선 질문과 연결되어 이 같은 결제를 진행하는 데 있어 유념해야 될 사안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앞으로 다른 경들을 주제로 한 결제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정착이 되어가겠지만 아무래도 논강은 논주와 논객 스님들 사이에서만 제대로 이루어지고 대중은 경청하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논주와 주요 논객은 고정시켜 두고 매 논강 때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을 그 날의 주제에 맞게 몇 분 더 모셔서 그분들의 의견도 많이 들어보는 방식도 좋을 듯하고 논객으로 스님들 외에도 재가불자들을 몇 분 더 모시는 방법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결제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성숙한 자세가 요청되겠지요. 어떤 방식이든 여러 형태의 결제를 여러 곳에서 시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다양한 시도가 한국불교의 새로운 활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스님께서 지난 2001년 펴낸 《금강경 역해》가 이번 결제의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그 책을 펴내신 뜻 역시 ‘금강경 결제’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금강경 역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 제가 《금강경 역해》를 쓰게 된 이유는 두 가지로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금강경》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우리는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기나 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첫째, 《금강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범어원전과 구마라즙과 현장의 번역을 비교하는 방법을 취하였고,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런 방법론을 택하면서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금강경》은 부처님의 원음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음을 알았고 구마라즙 스님의 축약적이면서도 유려한 번역을 대하면서 그분의 천재성과 그 번역의 위대함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현장 스님의 정확한 직역을 대하면서 왜 현장 스님이 중국역경사의 자존심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는가 하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을 구마라즙의 안목에만 갇혀서 특히 한문의 뜻만으로 이해하게 되면 《금강경》의 본래 메시지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절감했습니다.
둘째, 우리는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더욱 더 심각해진다고 봅니다. 저는 《금강경 역해》를 통해서 한국불교는 산냐의 척파와 무아라는 《금강경》의 메시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힌두화되어서 수행하고 전법을 하고 있구나 하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무아나 산냐의 척파 대신에 오히려 모두 자아=진아=불성=여래장=자성청정심을 내세우면서 아뜨만(진아)을 설하는 전도사로 전락해버렸고 진아와 불성을 깨치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점을 반성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에서 공부할 때 인도 바라문 선생님들로부터 영원한 생명자리인 아뜨만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이제 한국에 돌아오니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인도 힌두교도들과 꼭 같은 방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설하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실망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으로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무엇인지 같이 고뇌해보자는 입장에서 《금강경 역해》를 출간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이번 ‘금강경 결제’에도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 교단 안팎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된 ‘금강경 결제’를 회향하면서 미처 하지 못한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 아쉬운 점이라면 제가 산냐 척파를 소리 높이기는 했지만 《금강경》의 원래 의미를 제대로 대중들께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불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치고 《금강경》 독송을 하지 않은 사람 없고, 《금강경》에 관한 책을 한 권 이상 읽어보지 않은 사람 없고, 특히 스님들은 《금강경》에 관한 나름대로의 일가견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런 만큼 《금강경》에 대한 고정관념이 깊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남이 제시하는 《금강경》에 대한 다른 시각은 관심거리는 되지만 자신의 시각을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물론 저의 관점만이 옳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적어도 원전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떤 고정관념도 떨쳐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금강경》의 본래 의미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 함께 원전을 있는 그대로 읽고 열린 마음으로 토론해 보고 싶습니다.
-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이 기회에 저는 조계종의 교육문제에 대해서 한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조계종의 현재 강원 교과과정은 조선시대에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근본 정신으로 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1학년 때 배우는 《치문(緇門)》은 내용은 평범하지만 한문이 아주 어렵습니다. 조계종의 이념서적(?)이라 할 수 있는 《사집(四集)》은 2학년에서 가르칩니다.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3학년 과정에서 그것도 《기신론》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적당히 가르치고 맙니다. 4학년 과정에서는 화엄 하나만을 가르치는데 화엄은 선종을 모토로 하는 조계종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경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400∼500년 전에 10년 공부를 염두에 두고 편찬된 교과과정을 현대에까지 적용시킨다는 것은 전통 답습 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문 습득에 치중된 듯한 강원교육을 현대에 그대로 답습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저는 강원교육을 과감히 2∼2년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2년의 기본과정과 2년의 전문과정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봅니다. 기본 2년 과정에서는 불교의 기본교리인 사제·팔정도·12연기·37조도품 등과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과 조계종의 이념서적인 《사집》과 《석문의범》과 불교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후 나머지 2년 과정은 전문강원을 육성해서 기초선원, 화엄강원, 사교강원, 반야중관강원, 유식유가강원, 초기불전강원, 범어원전강원 등을 각기 다른 사찰에서 각각 개설하고 학인 스님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 해당 강원으로 옮겨가서 집중적으로 배우는 방식을 택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4년 과정을 마치고 비구계 받은 후에 다시 더 고급과정을 공부하는 학림으로 가거나 선방에 가는 방법으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기초선원 과정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과감히 폐지하고, 기초선원에 가려고 해도 적어도 2년의 기본과정은 마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전문가 시대입니다. 절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 스님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령별로 예를 들어서, 유식하면 60대 세대에는 누구, 50대에는 누구, 40대에는 누구 하는 식으로 쟁쟁한 대가들이 세대별로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사찰 운영을 재가자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봅니다. 조계종 승려는 기껏 12,000명 정도인데 공찰 3,000개 사설암자나 조계종 스님들이 주석하시는 선학원 등의 절까지 합하면 5,000개는 됩니다. 매철 2,000여 스님은 선방에서 정진하고 강원 학인 스님들도 1,000여 명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한 절에 평균 1.5명도 안되는 스님들이 거주하면서 사찰운영, 포교, 집전 등을 다 해야 합니다. 스님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입니다. 스님들은 평화롭게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서 참선이든 교학이든 침잠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신부님들이나 목사님들이 스님들보다 더 불교학에 능통하고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농담 같은 진담이 흘러 다니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스님들은 사찰운영의 큰 짐을 재가자들에게 맡기고 불교 수행이나 교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한가하고 여유롭게 그러면서도 치열하게 수행하고, 그 수행의 힘으로 세상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현실을 모르는 허공에 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께는 ‘과연 우리는 사원지기하려고 출가했는가’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몇몇 의식 있는 스님들과 이런 문제를 두고 의견을 나누어 봤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의 말씀이 근본취지는 이해하지만 아직 재가자의 의식 수준이 절을 맡길 만큼 고귀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과연 사심 없이 순수 열정으로 사찰운영을 할 의식 있는 재가자들이 몇이나 되겠냐고 반문하십니다.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의 이런 걱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 논주로 참여하시면서 어려운 점이 많았으리라 봅니다. 힘드신 점과 향후 이번과 같은 결제를 진행하는 데 있어 시정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 가장 힘들었던 점은 매주 원고지 50매가 넘는 발제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토요일이 어찌 그리 빨리 오는지 진땀이 났습니다. 향후 결제는 두 가지 종류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지금처럼 대중성이 있는 경전이나 주제를 가지고 논주와 논객과 대중이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열린 논강 형식의 결제이고, 다른 하나는 좀더 전문적인 주제를 가진 경론을 택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 스님을 모시고 집중적으로 강의를 듣고 질의응답식으로 진행하는 전문 논강 형식의 결제입니다. 사실 우리 불교 특히 스님네들께 필요한 것은 각 분야의 전문적인 교학입니다. 아비담마, 구사론, 중론, 유식 등 전문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요하는 중요한 경론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경론들은 관심 있는 분들이 함께 모여서 그 분야의 전문가 스님을 모시고 심도 있게 공부하고 토론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번 ‘금강경 결제’를 계기로 각 본사마다 이런 ‘간경 결제’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고 합니다. 특히 대도시에 있는 본사에서는 더욱 큰 관심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열린 논강식의 ‘간경 결제’가 좋을 듯하고, 산속에 위치한 절에서는 ‘전문 논강’ 형식이 좋을 듯합니다. 아무튼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의 ‘간경 결제’가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종단 사상 처음으로 ‘간경 결제’의 형식을 통해 진행된 이번 결제를 바라보는 교단 안팎의 시선은 엇갈린다. 소의경전에 대한 진지한 논강과 사부대중의 격의 없는 동참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맞은 한국불교의 대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받는다. 또 경전을 ‘책’에 머물게 하지 않고, 교단과 사회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에 불교적인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매번 100여 명이 넘는 많은 대중들의 동참으로 인해 오히려 ‘원활한 토론’이 힘들었다는 방법상의 문제와 함께 주최측의 ‘의도대로’ 결제가 진행되어 보다 내용 있는 논강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번 ‘금강경 결제’가 교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음은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 특히 소의경전 《금강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수행의 자리를 점검하고자 했던 취지는 앞으로 교단 내에 더욱 확산돼야 할 것이다.)
- 그동안 결제를 진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번 ‘금강경 결제’는 실상사 주지이신 도법 스님께서 주창하신 것입니다. 도법 스님의 불법에 대한 순수 열정에 감동받아서 저 자신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선뜻 논주 소임을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금강경 결제’가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모두 도법 스님의 공덕입니다. 지면을 빌어서 언제나 한국불교를 걱정하시는 도법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간경 결제’를 주관하시고 논객으로 참여해 주신 재연 스님, 해강 스님, 성륜 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멀리 대구에서 빠짐없이 논객으로 참여하는 열정을 보여주신 동화사 강주 해월 스님, 역시 논객으로 참여해주신 운문사 강사 일진 스님,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혜원 스님, 사회를 맡아주신 현응 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항상 묵묵히 뒤치닥꺼리를 해주신 실상사 대중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크나큰 관심과 열정으로 매 논강에 참여해주신 사부대중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혹시 결제 도중 제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자비로서 섭수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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