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사상을 둘러싼 중관, 유식 양 학파의 논쟁
남수영
동국대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역서로 <힌두이즘><용수의 공사상 연구>등이 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교리이며 대승경전 가운데서 가장 먼저 공사상을 고양했던 것은 《반야경》이다. 《반야경》은 공사상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였으며,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중론》과 《회쟁론》 등을 지어 《반야경》의 공사상을 정립함과 동시에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용수의 공사상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인데, 그 모두는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수 이후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교설이 되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중관·유식 양 학파인데, 그 두 학파는 모두 공사상을 최고의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유식학파의 논서들 가운데에서는 중관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하고, 반대로 중관학파의 논서들 가운데에서는 유식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발견된다. 이런 논쟁은 중관·유식 양 학파가 공사상을 최고 진리로 인정하면서도, 공사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관·유식 양 학파의 공사상은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르며, 그 양 학파의 논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본고에서는 그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관·유식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과 그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중관학파의 공사상
용수의 공사상은 《반야경》에서 설해지던 공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며, 《반야경》의 공사상은 초기불교에서 설해지던 공관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관이란 일체의 사물이 공이며,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는 관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불타는 《숫타니파타》에서 “목건련이여, 항상 마음을 가다듬어 아견(atta?udit.t.hi)을 버리고, 세간을 공(sun??ta?이라고 관하라. 이렇게 하면 죽음(maccu)을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세간을 관찰하는 자를 死王(maccura?a?은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반야경》은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공관을 발전시킨 것이며, 용수의 공사상은 바로 이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삼세의 일체법이 모두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존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공·가명·중도라고 주장하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였다. 용수는 《중론》과 《회쟁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인 것, 그것을 공성(s�?yata?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연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이며, 실로 그것이 중도이다.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실로 그것이 무자성인 것이다.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실로 공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용수는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의 다섯 개념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들이 상정했던 실유를 비판하고 공사상을 천명하였다. 용수는 연기·무자성 등의 다섯 개념을 모두 동의어로 사용하였지만, 그 다섯 개념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부른다. 또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가명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인 것이고, 그러므로 일체법은 비유비무의 중도라는 것이다. 용수는 일체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무자성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어떻게 자성(svabha?a)이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실로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사물은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일체의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인정하는 한 자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일체법은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또 용수는 《회쟁론》에서 일체법이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또한 나의 말도 연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인 것이기 때문에 공(s�?ya)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본래 ‘공(s�?ya)’이란 ‘결여한, 혹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용수는 위의 게송에서 공을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용수는 자신의 말 역시 여러 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수에게 공이란 연에 의해서 발생한 일체법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에서 무자성과 공은 논리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또 연에 의해서 발생한 사물이 가명이라는 것은 마차, 중생, 혹은 모래 더미의 예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바퀴 등 여러 부분에 의해서 마차라는 명칭이 시설되고, 5온에 의해서 중생이라는 명칭이 시설된다. 그러나 마차와 중생이라는 사물에 고정 불변의 단일한 실체가 없음은 모래 더미에 그 이름에 해당하는 고정 불변의 단일한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이유로 용수는 ‘연기인 것, 그것은 (연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이라고 말했다.
또 ‘가명이기 때문에 중도’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일체법은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한 명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실은 무자성인 것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며 자성으로서는 불생불멸이다. 이처럼 일체법은 자성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비유비무의 중도라는 것이다. 그것을 월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이 자성의 공성, 그것이 가명 (즉 연에 의한 명칭)이다. 실로 이 공성이야말로 가명이라고 확립된다. 바퀴 등 마차의 부분에 의해서 마차가 알려진다. 그 자신의 부분에 의한 명칭인 것, 그것은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이다.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이 공성이다. 실로 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이야말로 중도라고 확립된다. (왜냐하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의 존재성은 없으며,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에는 소멸이 없기 때문에, 비존재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의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은 중도라고 말해진다. 실로 이와 같이 공성과 가명과 중도는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용수의 공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의 연기 관계에 있으므로(緣起)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며(無自性), 공이란 그처럼 일체의 사물이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空). 이때 일체의 사물은 다만 연에 의해서 임시로 시설된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假名). 그러므로 세간에서 어떤 사물이 발생하고 소멸할 때, 정말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은 명칭일 뿐이다. 이처럼 일체의 사물은 다만 명칭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은 궁극적으로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中道) 것이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에서 일체의 사물은 연기이고, 연기이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은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용수에 따르면 일체법은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 아닌 어떤 법도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사물은 무자성·공·가명·중도인 것이기 때문에 실재인 사물은 인정되지 않는다.
2) 유식학파의 공사상
한편 유식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고 무자성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체법이 공이고 가명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유식학파는 허망분별(=식)과 공성은 불공(不空)이며, 따라서 일체법이 모두 공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변분별론》 제1-1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망분별은 있다. 거기서 두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여기에 공성이 있고, 그 속에 또 그것이 존재한다.
여기서 허망분별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 그리고 두 가지란 소취와 능취를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허망분별이 분별해낸 결과인 대상, 중생, 자아, 의식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은 인식 대상이며, 뒤의 둘은 인식 주관이다. 세친의 주석에 따르면 자아란 제7말나식을 의미하며, 의식이란 제6의식을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그와 같은 인식 대상(=所取)과 인식 주관(=能取)이 모두 허망분별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게송의 전반부는 아뢰야식은 있고,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게송의 후반부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상호 포섭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둘이 아님을 의미한다. 세친은 《중변분별론》 제1-1송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어떤 장소에 없을 때, 후자(즉 어떤 장소)는 전자(즉 어떤 것)에 대해서 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실하게 관찰한다. 또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실재(sat)라고 여실하게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설해진) 공성의 특징이 (이 제1송에 의해서) 분명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친은 유식학파 공성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공성의 특징에 대한 올바른 이해란 A라는 장소에 B라는 사물이 없으면 A는 B에 대해서 공(s�?ya)이지만, A에 C라는 사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C는 실재(sat)라고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식학파의 독특한 사고이다.
허망분별과 공성이 실재라는 주장을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와 결부시켜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들의 인식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의 대립에 의해서 성립한다. 그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이 곧 소취와 능취이다. 이 두 가지는 허망분별에 의해서 분별된 결과물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이 능취와 소취는 모두 실재가 아니다. 이렇게 능취와 소취가 비실재임을 여실하게 관찰함으로써 허망분별의 결과인 능취와 소취는 더 이상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에도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즉 소취와 능취의 원인이었던 허망분별은 그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분별과 함께 거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공성)이다. 따라서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곧 상호 구분되지 않는 허망분별과 공성이다. 그 두 가지는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이다. 유식학파는 이런 사고에 근거해서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인정하면서도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라고 주장하면서 일체법이 공이라는 데에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중변분별론》 제1-2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일체는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말해진다. 실재이기 때문에, 비실재이기 때문에, 또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도이다.
세친은 위 게송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공도 아니다.’라는 것은 공성과 허망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불공도 아니다’라는 것은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란 유위, 즉 허망분별이라고 말해지는 것과 무위, 즉 공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말해진다’는 (것은) 설명된다(는 의미이다). ‘실재이기 때문에’란 허망분별이 (실재이기 때문이고), ‘비실재이기 때문에’란 (소취와 능취의) 두 가지가 (비실재이기 때문이고), ‘또 실재이기 때문에’란 허망분별에 공성이 (있기) 때문이고, 또 그 (공성)에 허망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도이다’란 일체가 일방적으로 공인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불공인 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여기서 말해진 것은 반야바라밀다 등에서 ‘이 일체는 공도 아니고, 또 불공도 아니다’라고 설해지는 것과 일치한다.
세친의 주석을 참고해서 《중변분별론》 제1-2송을 살펴보면, 우선 일체법이란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이다. 유식학파는 일체법 중에서 허망분별과 공성의 실유만을 인정한다. 그 중에서 허망분별은 유위법이고, 공성은 무위법이다. 그런데 일체법 중에서 공성과 허망분별이 불공으로서 실재하기 때문에 일체법은 공이 아니다. 또 일체법 중에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는 공으로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불공도 아니다. 그리고 다시 상호 포섭 관계에 있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실재한다. 따라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중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중변분별론》 제1-14송은 허망분별과 공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의 비존재와 그 비존재의 존재(abha?asyabha?a, 無의 有)가 공의 특징이다. (그것은) 존재(=有)도 아니고, 또 비존재(=無)도 아니다. 또 (그것은 허망분별과) 다른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고, 동일한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다.
여기서 보듯이 유식학파는 소취와 능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로 간주하고 있다. 소위 ‘비존재의 존재(abha?asyabha?a, 無의 有)’이다. 이처럼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로 간주하는 유식학파의 관점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그것은 위에서 보았던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를 고려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중변분별론》에서 중도는 소취와 능취의 ‘공(=非有)’, 그리고 허망분별과 공성의 ‘불공(=非無)’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법을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공인 소취와 능취는 비실재이고 불공인 허망분별과 공성은 실재이다.
이처럼 중관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고 따라서 일체법은 모두 공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식학파는 일체법 중에서 허망분별과 공성은 불공이며 실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이 발견된다.
1) 유식학파의 중관 공사상 비판
위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중관·유식 양 학파는 상이한 공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양 학파는 상호 비판하면서 논쟁하게 된다.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은 《유가사지론》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대승과 관련되어 있거나, 심오한 공성과 관련되어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을 밀의로서 듣고서, 그 말하는 바의 의미를 여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분별이 인도하는 대로 생각하여,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논하기를 “일체는 다만 명칭(prajn?pti)일 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그 명칭의 의지처인 실재하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일체는 명칭이 되고 모든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다만 명칭일 뿐이라는 것이 진실이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그에게는 진실과 명칭이라는 두 가지가 모두 훼손된다. 또한 명칭과 진실이 모두 훼손되기 때문에 (그들은) 극단적인 허무론자라고 알아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과 범행을 구족한 사람은 그와 같은 허무론자와 함께 말하지 말고 함께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며, 또한 그의 견해를 따르는 세상 사람들을 파괴한다.
여기서 ‘일체가 명칭(prajn?pti, 假名)일 뿐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파에 따르면 그와 같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밀의로서 설해진 심오한 공성에 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가명의 근거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명은 결코 시설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다만 가명일 뿐이라는 주장은 불합리한 주장이다.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주장은 진실과 가명을 모두 비존재로 간주하도록 하는 잘못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일체가 가명일 뿐이라는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진실과 가명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훼손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과 세간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허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무엇이 악취공인가? 이른바 어떤 사문, 바라문이 있어 공인 것에 근거해서 바라지 않고, 공인 것을 바라지 않을 때, 실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공인 것은 비실재(asat)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 것, 그것이 실재이기 때문에 공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일체가 비존재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겠는가? 또한 이로 말미암아 실로 그들의 공성은 입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한다.
또 무엇을 선취공이라고 하는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에 근거해서 그것을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은 여기에 진실로 있다고 여실하게 안다. 이것이 여실하고, 뒤바뀜 없이 공성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위의 인용문은 악취공과 선취공을 설명하고 있는데, 유식학파의 입장을 선취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들의 공사상은 공성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취공을 판단하는 논리적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이다. 즉 《유가사지론》에 따르면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하고,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실재라고 여실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선취공이다. 또 《유가사지론》은 그렇게 아는 것이야말로 ‘여실하고, 뒤바뀜 없이 공성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악취공이다. 유식학파의 입장에 따르면 가명은 실재하는 식과 공성을 근거로 해서 시설될 수 있다. 그러나 중관학파는 실재를 완전히 부정하며, 중관학파의 그와 같은 공사상은 공성을 설명할 수 없는 악취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중관학파에 대해서 만약 일체가 비존재(abha?a)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처럼 유식학파는 ‘남아 있는 것’을 실재로 간주하는 독특한 공사상을 근거로 해서 중관학파와는 다른 공사상을 정립하고, 그에 근거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중관학파의 유식 공사상 비판
유식학파는 중관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했지만, 중관학파에게 공은 유식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비실재나 비존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중관학파에게 공은 연에 의해 시설된 무자성인 사물의 ‘존재(=有)도 아니고 비존재(=無)도 아닌’ 실상을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설해진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유식학파의 비판은 오해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식학파의 발생 이후에 성립한 중기 및 후기 중관학파는 유식학파의 오해를 지적하고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천명하기 위해서, 유식학파를 포함하여 불교와 인도 철학의 실유론 학파들이 상정하는 모든 실유들에 대한 비판을 다시 한번 시도하게 된다. 여기서는 중기 중관학파인 청변의 《반야등론》을 중심으로 하여 공성의 실재성 비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유식학파에서 공성은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을 의미하며, 이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라고 주장한다. 유식학파는 그것을 ‘남아 있는 것의 실재’, 그리고 ‘비존재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청변은 유식학파의 공성, 즉 원성실성에 대해서 《반야등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無二(즉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가 ‘없음의 부정’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둘이 없다고 부정함으로써 작용을 완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존재의 과실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을 주요 성질로 하기 때문에, 승의로서 비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無二가) ‘아님의 부정’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정립을 주요 성질로 하기 때문에, 비존재와는 달리 비존재의 실체가 있는 것을 보임에 의해서 허락될 수 없다. 손감의 극단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청변은 중관·유식 양 학파의 공사상을 ‘없음의 부정’과 ‘아님의 부정’이라는 두 종류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없음의 부정’은 부정 그 자체를 본질로 하는 절대적 성질의 부정이며, ‘아님의 부정’은 부정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긍정하고자 하는 상대적 성질의 부정이다. 따라서 청변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없음의 부정’은 부정으로서 그 작용을 완료한다. 그러나 ‘아님의 부정’은 부정으로서 그 작용을 완료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긍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바로키타브라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없음의 부정’은 부정이 주요 성질이다. 예를 들면 ‘바라문은 없다’라고 부정함에 의해서 크샤트리야가 있음을 정립하지 않고, 다만 ‘바라문이 없다’는 부정만을 설하는 것과 같은 부정이다. ‘아님의 부정’은 정립이 주요 성질이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에 의해서 다만 ‘바라문이 아니다’라는 부정만을 설하지 않고, ‘크샤트리야이다’라고 정립하는 것과 같은 부정이다.
즉 ‘없음의 부정’은 ‘바라문은 없다’고 말하듯이 바라문의 존재를 부정하는 곳에서 가 작용이 끝나는, 부정을 그 본질로 하는 부정이다. 그러나 ‘아님의 부정’은 ‘그는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으로써 ‘그는 비바라문, 예를 들면 크샤트리야, 혹은 바이샤이다’라고 하는 긍정을 목적으로 하는 부정인 것이다.
여기서 ‘없음의 부정’은 중관학파에 공사상에 해당하고, ‘아님의 부정’은 유식학파의 공사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관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곳에서 그 부정이 끝나지만, 유식학파는 능취 소취는 비존재이지만 그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空性)이 실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식학파는 능취와 소취를 비존재로서 부정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을 실재로서 긍정한다. 그런데 청변에 따르면 그와 같은 유식학파의 공사상은 비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손감(損減)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변은 그와 같은 유식학파의 사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예를 들면) 토끼뿔의 비존재는 ‘비존재의 존재(dngos po med pa, 無의 有)’가 아니다. 이와 같이 승의로서 비존재를 ‘비존재의 존재’와 동등한 것이라고 할 때는 斷見이 성립할 것이다.
토끼뿔이 존재하지 않을 때 토끼뿔의 부정은 부정 그 자체로서 끝나야 하지만, 거기서 토끼뿔의 비존재를 승의로서 실재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비존재를 실재화하는 것이 되어 극단적인 단견이 성립하게 된다. 즉 청변에 따르면 능취와 소취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거기서 종결되어야 하지만, 유식학파는 능취와 소취의 존재를 부정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을 승의로서 실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극단적인 단견이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불타가 깨달은 진리, 혹은 그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불교에는 여러 학파들이 있으며, 그 학파들은 모두 불타의 가르침을 최고의 진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 여러 학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대승 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중관·유식 양 학파이다. 그 두 학파는 모두 공사상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면서도, 자세한 부분에서는 공사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중관학파는 일체가 공이고 가명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체의 사물이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래 더미와 같이 ‘고정 불변의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식학파는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로 간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두 가지는 어떤 방식의 관법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실재 개념은 서로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즉 중관학파에게 실재란 ‘고정 불변의 존재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유식학파에게 실재란 관법을 통해서 여러 법을 제거했을 때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중관학파는 일체법의 실재를 부정하였지만, 유식학파는 허망분별과 공성의 실재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상이한 공사상을 둘러싸고 중관·유식 양 학파는 다음과 같이 상호 비판한다. 유식 학파에 따르면 명칭은 반드시 실재하는 사물이 있어야 시설될 수 있으며 공인 것은 비존재이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가 비존재(=空)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극단적인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중관학파는 능취와 소취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것으로서 끝나야 하며, 유식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거기서 다시 능취와 소취위 비존재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비존재를 실재화하는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극단적인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중관·유식 양 학파의 상호 비판은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의문으로서 남기고 있다. 첫 번째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은 일체가 명칭일 뿐이라면 과연 그 명칭은 실재하는 사물이 없이도 시설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두 번째 유식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중관학파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인 공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의문은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근거를 묻는 존재론적인 문제와 연결되며, 두 번째 의문은 유가행의 수행에서 얻어지는 각종 현상에 대한 해명을 묻는 인식론적인 문제와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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