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는 과연 팜므파탈인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신정아 씨를 몇몇 사람들이 `한국의 팜므파탈`이라고 표현하는 걸 봤다.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격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는 프랑스어는 `치명적 여인`이나 `운명적 여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보통 팜므파탈을 `악녀(惡女)` 정도 뜻으로 이해하는데 팜므파탈과 악녀는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팜므파탈이라는 말 속에는 많은 은유가 숨겨져 있다.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자기 삶을 비극적으로 끝낸 여인이 팜므파탈이다. 그래서 팜므파탈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의 좋은 소재로 활용되거나 하나의 전설로 남는다.
동양 여인으로 팜므파탈이라는 낙점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전설적인 적군파 간부 시게노부 후시코다. 벤구리온공항 테러사건, 일본항공 납치사건, 쿠알라룸푸르 미국 영사관 점거사건 등 굵직한 테러사건 때마다 검은 긴머리를 휘날리며 외신에 등장했던 그녀는 70년대를 상징하는 팜므파탈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녀를 미화하자는 게 아니라 그녀의 악행 이면에는 나름대로 치명적인 운명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전후 도쿄 달동네에서 태어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장공장에서 여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첫 직장이 그녀에게 안겨 준 건 고졸 여사원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뿐이었다. 그녀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세상에 저항하는 투사가 된다. 일본 학생운동이 실패하자 그녀는 팔레스타인해방운동에 참가하게 되고 기관총과 폭탄만이 세상의 차별을 없앨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렇게 그녀는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반열에 올랐다. 시게노부는 결국 2000년 11월 일본에 잠입하다 체포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다른 팜므파탈들도 모두 치명적인 운명에 내몰린 여인들이다.
마릴린 먼로도 팜므파탈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머리가 텅 빈 섹스 머신` 정도로 치부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그녀는 "할리우드는 키스 한 번에 1000달러를 지불하지만, 영혼은 50센트인 곳"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의식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전 미국을 휩쓸 때 당당히 매카시즘에 저항한 배우였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급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했으며, 가부장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을 비판한 의식 있는 여배우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오로지 그녀의 몸에만 광분했고 결국 수많은 의혹을 남긴 채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만약 예쁘지 않았다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 주인공 에바 페론도 팜므파탈로 불린다. 보수주의자들이 악마라고 폄하한 그녀는 세상과 싸운 여인이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타고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농장주 자식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후 고향을 떠나 나이트클럽 댄서, 싸구려 코미디 배우 등을 전전하다 쿠데타 주역이었던 후안 페론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후안 페론이 집권하면서 영부인이 된다. 영부인이었던 시절 내내 반대파들에게 창녀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빈민구호에 앞장섰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준 진보적 정치가였다.
적어도 이쯤 되는 여인들에게 호사가들은 팜므파탈이라는 호칭을 붙여준다.
다시 신정아 씨 이야기로 돌아가자.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남성 중심의 학력사회에 도전한 팜므파탈로 묘사하는 건 옳지 않다. 아직 더 많은 조사가 이루어져야겠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유명대학 졸업증명서나 위조한 여인을 팜므파탈로 부른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위에서 거론한 여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정직했고, 결과가 옳았든 옳지 않았든 세상에 맞서 정면으로 승부를 했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고 해서, 미모를 지녔다고 해서 팜므파탈이라는 용어를 남발하는 건 아무래도 지나치다.
출처 매일경제 [문화부 = 허연 차장 praha@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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