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不一)이라야 불이(不二)가 산다.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키워드 중의 하나는 불이(不二)라는 말이다. 불이란 ‘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무명이 다르지 않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고,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불이의 세계관이다. 초월적 열반관(涅槃觀)을 부정하고, 저 너머의 구원이 아닌 지금 여기 서 있는 자리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아(無我)가 단순한 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고 자비라는 실천 윤리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관이 있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승의 정신이란 바로 불이적 세계관의 실천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불교인들이 자신의 성찰과 세상을 바라보는 입각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거기에는 불이의 철학, 불이의 세계관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크고 작은 불교 단체나 모임의 이름에도 “불이(不二)”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둘이 아니며” “다르지 않다”는 불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한국의 불교계에 보편적 일상화가 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 한국 불교의 난맥상의 한 원인은 바로 이 불이라는 개념의 오용, 남용에 있다.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라는 말을 할 때에는 “같지 않다”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무명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당연히 그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구별되는 나의 ‘중생성’(不一)이 철저히 인식될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이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의 많은 불자들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다르며, 성(聖)과 속(俗)이 다르다는 ‘불일(不一)’의 정신이다. ‘번뇌 즉 보리’라는 것 또한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 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인데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의 번뇌를 그대로 발산하면서 불이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사기요 자기기만이다.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하는 것이요, 그 착각의 근저에는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현대 한국 불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출가자들의 비윤리적 파계 행위도 이러한 착각 혹은 의식적 호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불교 전통에서는 7세기 원효와 근대 한국 불교의 경허 등이 보여주는 파계 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 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를 도리어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한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불교적 깨달음의 본질적 문제, 이를테면 마음의 자유는 행위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왈가왈부할 순 없지만, 중요한 것은 원효나 경허의 경우를 자신의 행위의 방종이나 정신적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선의 정신에서 모방은 곧 정신적 죽음이 아니던가? 계율을 방편이고, 비유하여 뗏목이라고 하지만 뗏목을 버리는 것은 강을 건넌 다음이다. 뗏목을 버려야 한다고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버린다면 허우적거리다 익사하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또한 진정한 무상계(無相戒)란 형식적 율법주의의 폐기이지 마음의 청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불일(不一)은 다(多)의 세계로서 구별의 세계요, 언어와 이성의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이다. 한편 불이(不二)의 세계는 일(一)의 세계로서 차별과 언어 이전의 세계요, 이성 너머의 세계이다. 따라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 이전, 이성과 이성 너머를 다 긍정하며 포괄하고자 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불교가 종교이면서 철학이요,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그 근거가 바로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가 그 다른 어떤 종교보다 현대 사회에 더 적절한 가르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어와 이성의 세계인 불일(不一)을 전제한 불이(不二)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일(不一)이 전제되지 않는 불이(不二)의 세계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고 정신적 전체주의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성(理性)과 언어의 사용을 부정하고,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폭력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라고 하는 것은 서양 중세의 역사 속에서 흔히 보아온 바다. 불교의 경우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수행의 엄격성과 필요성이 없어지게 될 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 대한 이성적 판단의 중요함이 없어지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현대 한국 불교에서 본다.
선가(禪家)의 어록(語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불이(不二)의 세계이지만, 그 깨달음의 세계 이전의 치열한 불일(不一)의 세계가 전제되어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선지식들은 중생과 부처가 본래 하나라는 확신이 철저했던 만큼 부처가 못 되는 자신의 현실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 철저한 현실 인식의 기반 위에 철저한 자기 부정과 엄격한 수행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깨달음은 “다반사(茶飯事)”요, “아침에 세수하다 코 만지기”라는 불이적 표현의 레토릭에 속아 부처와 우리가 다르다는 불일(不一)의 현실을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이의 오용과 남용의 폐해는 비단 수행의 나태함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짜와 가짜, 이를테면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 혹은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부처님과 무당집의 귀신이 구별이 되지 않고, 만행(萬行)이 만행(漫行)과 구별되지 않고, 멍청함(昏沈)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착각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불교의 한 모습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한국 불교의 난맥상은 비단 이러한 몇몇 ‘특별한 경우’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입시철이 되면 모든 절에서 합격 기도를 하고 수험 당일에는 대규모 기도회를 열어 시루떡을 갖다 놓고 내 아들 내 딸을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한다. 수험생 부모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방편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정 한국 불교가 중생에게 방편을 베푼다면 우리의 아들딸들이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입시 경쟁에서 이기는 일만이 아님을 깨우쳐 주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불교가 여타 종교와 다르고 부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부처님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 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감 놓고 배 놓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속과 인간의 일이 움직이는 이치가 어떤 절대자의 권능과 도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불교의 출발점이 아닌가?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선가(禪家)의 레토릭은 자신 외에 어떠한 절대적, 초월적 권위도 부정하는 철저한 “인간주의”의 선언이 아니었던가? 현대 한국의 불교인들은 절대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자의 처분과 권능을 기다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흔히 비판하지만, 그러면서 닮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류를 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외재적 신을 내면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불교였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게 달려 있지 어떤 다른 ‘힘’의 작용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준 것이다. 고전적 힌두이즘이라 할 브라흐마니즘의 제식주의와 다신교적 인격신의 전통을 부정하고, 행위의 도덕적 인과율과 연기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것이 바로 불교였으며, 또한 서양 근대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의 발견이란 것도 바로 불교의 인간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한 사르트르나 모두 절대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불교의 인간주의에서 영향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의 발견이 곧 그들에게는 헤브라이즘적 신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신을 표방하지 않는 불교의 인간주의에서 서양인들은 곧 인간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기독교 신학이 불교에서 많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받고 있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서양인들의 불교관이 일정하게 제한된 관점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을 서양 전통의 이성과 동일시함으로써 마음을 인간 이성 내의 영역으로 국한시켜 버린 느낌이 있다. 하지만 불교 전통에서의 마음이란 인간 이성을 포함하되 이성 너머의 것 또한 포함하고 있다. 이렇듯 근대 서양에서의 불교 이해가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근대정신을 이루는 한 축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동양이 서양의 근대정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불교로부터의 가르침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불교가 20세기 초의 근대화를 뒷받침하는 동력이 될 수 없었던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역사적 상황이 있다. 하지만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지금에도 한국 불교가 여전히 전통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데에는 우리 불교인들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외에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현대 한국 불교의 난맥상의 한 이유가 바로 불일(不一)이 전제되지 않은 불이(不二)라는 개념의 오용과 남용에 있다고 본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않고,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을 구별치 않고, 나아가 아무거나 방편이라 한다든지 엄격한 수행의 중요성을 우습게 여기는 그 태도의 이면에는 불이(不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색즉시공”의 진정한 의미는 다음에 잇따르는 “공즉시색”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삶이 무의미한 것으로 무화(無化)되지 않는 것은, 현실적 삶이 공(空)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색즉시공) 공(空) 또한 구체적 삶을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것(공즉시색)이 바로 지혜의 완성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불일(不一)이 전제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불일(不一)이라는 현실태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자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진지한 불자라면 누구나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계율을 지키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문제 삼고자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불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경험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해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다. 불교 교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에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적”인 해결인가를 잘 모르겠다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말한다.
“모르겠다”라는 정직함이 해결의 시작이다. 불일(不一)이라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자각이 없는 불이(不二)는 공화(空華)와 같은 환영(幻影)일 뿐이기 때문이다. ■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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