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불학'의 몇 가지 문제점
서재영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불자들의 인식도 점차 바뀌고 있다. 기복불교가 한국불교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전국 사찰에 불교 교양대학이 설립되고 이곳으로 많은 불자들이 모이고 있는 현상이 이를 반증한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경전과 교리를 교육하는 사찰일수록 더 많은 불자들이 몰리는 현상은 불자들의 성향이 단순한 기복적 신앙에 안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학자들도 이제는 신행(信行)의 현장에서 신도 교육에 동참해야 하는 임무를 요청받고 있다. 이는 곧 강단에 머물러 있던 불교학이 신앙의 실천 현장으로 접목되어야 하는 환경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 불교학은 이 같은 요구에 곧바로 부응하기에는 다소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새롭게 변해 가는 환경에 적응해서 정법을 올바로 펼치기 위해서는 불교학이 신행과 수행을 담보해 낼 수 있는 내용으로 변모해야 한다.
이런 시점에 《불교평론》 2001년 겨울호에 실린 동국대 김성철 교수(이하 논자)의 ‘현대불교학의 과제와 해결방향’이란 제하의 문제제기는 시기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논자는 이 글에서 오늘날 불교학의 문제를 인문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 태도와 분과적 연구에 매몰된 연구 풍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각각의 연구 성과들을 하나의 신행체계로 엮어내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논자는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독교의 조직신학에 견줄 만한 ‘체계불학’의 확립을 제안한다.
본고는 논자의 이 같은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원칙적으로 지지를 보낸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족(蛇足)을 다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정교한 논리전개와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몇 가지 이견과 논점을 제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논의의 범위를 우리 나라의 불교학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서구에서도 인문학적 불교학이 신앙을 훼손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따라서 실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반화시키는 것은 모호함과 오해를 증폭시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2. 인문학적 방법론이 불교학의 위기를 초래했는가?
1) 인문학을 떠난 불교학은 존재하는가?
논자는 불교학의 문제를 서구 인문학의 영향으로 본다. 서구의 불교학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불교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방법론에 책임을 묻기에 앞서 먼저 정리하고 넘어갈 사안이 있다.
첫째, 인문학적 불교학이 도입되기 전에 불교학이라는 영역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한국불교는 이조시대의 탄압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사회적 담론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결과 불교학이라는 영역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불교학은 인문학적 방법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재가자(在家者)를 중심으로 한 불교학의 형성은 인문학적 연구 방법론과 함께 도입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방법론이 불교학에 위기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불교학’이라고 부르는 그 자체가 태생적으로 인문학적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학자들 스스로도 불교계에서 위상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인문학 분야에서 자신들의 학문적 위상을 찾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물론 불교학이 그 중심 활동무대인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둘째, 그 동안 진행됐던 불교학이 인문학적 방법론에 철저했던가에 대해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논자는 불교학자들이 신행(信行)의 현장에서 인문학적 연구 성과들을 주장함으로써 신앙적 혼란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방법론이 인문학이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인문학적 태도에 엄격하지 못한 데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불자들에게 혼란을 조성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며, 학문적 검증과 엄격성이 결여된 데서 비롯되는 문제로 보여진다. 적어도 인문학적 원칙만이라도 철저히 견지한다면 주관성과 모호함, 그리고 혼란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인문학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이 불교학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단죄하는 것은 보다 신중히 거론할 문제라고 본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전제를 스스로 반성하고 검토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문학적 방법론에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성급한 결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인문학과 불교학은 분리될 수 있는가?
논자는 인문학적 불교학이 불교의 신앙을 훼손하기 때문에 인문학적 불교학과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불학’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문학적 불교학은 ‘체계불학’을 위한 자료실의 역할만을 해야 하며 그 성과들이 불자 대중을 향해 무분별하게 설해져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논자의 이 같은 주장은 왠지 낯설지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교리를 뒤집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이 이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서구 사회는 인문학과 과학을 한 편으로 하는 이성적 전통과 기독교적 교리가 대립 충돌해 온 역사였다. 그리고 철학과 인문학이 빈곤할 때 초월적 구원을 믿는 종교가 번성했고, 인간의 이성적 주장은 신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오만한 진리가 선언되었으며 신의 이름으로 멀쩡한 인간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해졌다. 과학적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은 위험한 이단자로 내몰렸으며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은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다.
이 같은 기독교의 배타적 신학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호소하는 학문과 초월적 세계를 설명하는 신학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신학은 보편적 인식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한 때 신학이 시녀로 거느리고 있던(신학의 자료실 구실을 하던) 인문학이나 과학에 의해 역으로 신의 죽음이 선언되고 천동설(天動說)과 같은 교리가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는 곧 종교적 진리라고 해서 인문학적 보편성으로부터 벗어나 폐쇄적이고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게 되면 결국은 보편적 인식체계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처럼 인문학적 연구와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중세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보편적 진실들을 하나씩 밝혀냈다. 그러나 이 같은 과학적 사실에 대해 기독교측은 그것이 기독교적이지 않으면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 단적인 예를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신문인 쾰른 신문의 논설이 잘 보여준다. 이 신문의 Hermes라는 논설자는 “과학적 탐구 성과로 발견된 사실들이 널리 인정받으려면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벗어나거나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적 교리와 대치되는 과학적 사실이 대중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도록 경찰력이 이를 막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같은 주장의 요지는 설사 과학적 탐구에 의해 밝혀진 보편적 진리일지라도 만약 그것이 기독교의 교리에 대치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이 보편적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교리와 상반되지 않아야 된다는 억측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독일에서의 종교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라고 단언했던 맑스의 반론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철학이 붙잡으려는 진리는 한 개인만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진리가 되어야 한다.”라고 반론한다. 그의 반론처럼 인문학적 연구는 보편적 사실을 추구한다. 어떤 종교나 신념 속에서만 진실이고 그 밖에서는 판단이 중지되어야 하는 그런 진실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만약 보편적 진실로 밝혀진 사실에 대해 논자의 주장처럼 그것이 불교의 신앙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결국 불교적 교리는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인정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영역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논리라면 불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는 불자가 될 때에만 참일 수 있다. 따라서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불교의 교리를 객관적 사실로 믿을 수 없게 되고 이는 곧 보편적 가치와 인식으로부터 불교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불교적 교리는 믿음이라는 최면을 빌리지 않고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은 얼핏 보기엔 불교를 옹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불교의 오류와 그릇된 모습을 옹호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불교적 가르침은 보편적 사실로부터 동떨어진 신비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자의 주장처럼 인문학적 연구성과들은 체계불학의 자료실 구실만을 하게 하고 신앙을 훼손할 만한 내용들은 모두 보류된다면 불교 역시 독단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이는 곧 인류의 보편적 가치체계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과학과 인문학적 인식으로부터 외면받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불교는 논자의 말처럼 일미(一味)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불교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문법과 언어와 사유로 재구성되고 설명되는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인문학적 방법론은 오늘날의 언어이며, 문법이며, 사유체계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고 했다. 만약 인문학적 지평에서 이룩된 성과들을 거부한다면 불교학은 현실적 인식에 뿌리내리지 못한 초월적 학문이 될 것이며, 나아가 불교가 현대적 언어와 개념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차단할 가능성이 높다.
3) 인문학적 진실은 신앙심을 훼손하는가?
논자는 천태교판(天台敎判)의 허구,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각종 경전의 위경설(僞經說) 등 인문학적 연구 성과들을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면 과거의 스님들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불교교리는 모두 가짜가 되지 않겠냐는 우려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그 어떤 인문학적 연구도 불교 자체를 가짜로 규정할 만한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논자가 예로 든 것들은 대개의 경우 불교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용되었던 특수성이나 개별성에 대한 부정에 가깝다. 따라서 그것이 불교를 부정한다거나 교리를 거짓으로 단정짓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불교의 본래 모습을 찾는 다양한 작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능엄경》과 《원각경》이 위경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그 경전이 인도에서 저술되지 않았다는 사실일 뿐이지 그 경전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이 거짓이란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경전이 저술될 수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불교의 교리를 거짓으로 만든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떠나서 지금 믿고 있는 것이 곧 정법(正法)이라는 억측을 낳게 된다.
이 같은 시각은 불교 그 자체나 또는 정법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근거한 신앙보다는 다분히 현재의 교단과 대중적 신앙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지금 믿고 있는 것이 곧 정법이라는 현재 중심적 가치관을 심어줄 소지가 많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관점은 불교의 본래 모습, 즉 역사적 과정 속에서 왜곡되지 않은 정법의 모습을 규명하고 비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가로막을 소지도 내포하고 있다.
평자는 여기서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라는 《참선경어》의 구절을 상기하게 된다. 지금 현재 믿고 있는 것이 곧 정법(正法)이고 불법(佛法)이라는 태도는 자칫 잘못하면 역사적 왜곡마저 정법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만약 이 같은 현재 중심적 입장에 선다면 대승불교(大乘佛敎)나 선(禪)은 결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승이든 선이든 대개 그 정신은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침으로 회귀하자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대에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사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대승불교에서는 삼승(三乘)은 방편이라며 성문승(聲聞乘)들의 가르침을 ‘어리석은 법(愚法)’이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불교적 신앙이 훼손되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대승불교로 더욱 승화 발전되었다. 운문이 ‘석가를 한 몽둥이로 때려 죽여 개 먹이로 삼겠다’는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교의 신앙을 훼손하고 불교를 모독했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 정신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왜곡에 대한 경책이며 불교의 보다 궁극적인 모습을 추구하고자 하는 극약처방에 가까운 자세였다.
만약 당시에 그런 것들이 불교의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거부되었다면 불교는 왜곡되고 본질에서 벗어난 대중적 기복신앙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함부 경전 외에 다른 어떤 경전도 ‘경전’으로 인정될 수 없었을 것이며, 긴 역사적 변용 속에서 각 시대의 언어로 재구성되는 불사도 모두 불성모독이란 이름 하에 거부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문학적 연구를 통해 객관적으로 판명된 사실에 대해서 그것이 그 동안 지켜왔던 전통과 신앙에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성불가침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성과 인간의 지평에서 불교를 격리시키고, 불교를 시대의 흐름에 역류하는 방향으로 돌려세울 가능성이 높다.
불교의 교리는 논자도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어 주장했듯이 대단히 과학적이며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설사 불교를 연구하는 학문적 방법론이 인문학적 방법론이라고 할지라도 학자적 양심에 철저하다면 불교를 올바로 이해 못할 이유가 없다. 이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서구 중심적 우월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불교를 연구하다가 오히려 불교에 감화받았던 사례들이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오늘날 불교는 서구에서 학문의 단계를 지나 신행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구에서의 불교 전파는 포교 활동을 통해서라기보다 그들의 이성적 접근,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불교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수단이 바로 논자가 불교학의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단죄한 인문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오히려 우리의 현실보다 뛰어난 측면도 있다. 그들은 부적을 쓰거나 기복신앙에 몰입하는 신행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선(禪)을 수행하고 불교의 핵심으로 접근해 가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인문학적 접근이 문제였다면 그 인문학의 본고장인 서구에서 이해한 불교의 모습은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거부되고 그야말로 문제의 극치를 보여주어야 합당하다. 그러나 현재 나타나는 현실은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곧 인문학적 방법론이 불교를 왜곡하거나 불교학에 위기를 초래하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논자는 초창기 서구인들이 불교학을 하게 된 동기는 선교적, 정치적이었으며 그래서 인문학적 불교학은 불교를 폄하하는 버릇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동기와 학문적 원칙에 엄격하지 못했던 양식(良識)에서 비롯되는 문제이지 인문학적 방법 자체가 불교를 폄하하게 하거나, 선교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다라는 점이다.
이런 논리라면 인문학적 방법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면 기독교는 무지 좋은 종교라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기독교적 권위에 맞서 확립된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곧 우월한 종교라고 귀결되지는 않는다. 이는 곧 인문학적 방법론이 반불교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3. ‘체계불학’의 몇 가지 문제점
1) 조직신학은 체계불학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논자는 기독교에서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조직신학’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합리성, 비과학성으로 인해 기독교 문화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신앙체계이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같은 불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인문학적 방법에 의한 불교 연구는 불교학의 들러리로 머물러야 하며, 그 핵심에는 신앙적 연구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신앙적 연구를 중심 테마로 하는 불교학을 ‘체계불학’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평자는 모든 불교학의 성과들을 하나의 신앙적 테마로 집약해서 연구되어져야 한다는 논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불교학은 그 중심 활동무대인 불교의 지평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체계불학의 내용이 인문학적 연구성과들을 들러리로 내세우고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학문이어야 하는가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신학은 앞서 밝혔듯이 과학적 탐구에 의해 밝혀진 보편적 진실들을 거부하다가 급기야 그 중심부 사회에서조차도 외면받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이 인문학에 맞서 신학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신앙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체계불학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 보편적 가치관과 대치되는 종교 그 자체만의 진리선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조직신학에 대한 벤치마킹을 통한 체계불학의 모델링은 우려를 낳게 한다. 그것은 곧 보편적 이성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편가르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거짓으로 낙인 찍는 대립적 구도를 몰고 올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리고 조직신학처럼 체계불학을 만들자는 것은 또 다른 서구의 모방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문학적 불교학이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인문학적 방법론을 극복하기 위한 체계불학이 조직신학에서 모티브를 찾는다면 이는 또 다른 문제의 출발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게 되면 불교학이 보편적 사실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맹목적 신앙이나, 타력적 구원관, 신비적 영험 등에 대해 이성적 간섭을 받지 않고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울타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만약 불교학이 이 같은 흐름을 탄다면 자칫 불교의 발전보다는 오히려 비불교적인 내용들을 정법으로 호도하는 명분을 줄 소지가 더 많다. 뿐만 아니라 신비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의 학문을 살찌우는 온상이 될 위험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체계불학이 신앙과 종교적 독자성을 강조한 나머지 보편적 가치의식과 진리로부터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인문학적 방법론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이성의 보편적 영역으로부터 불교학이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깨달음에 대한 체험은 학문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물론 이성적 판단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불교적 가치관과 교리는 결코 인문학적 보편성과 대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본다.
2) 재가불학과 출가불학은 달라야 하는가?
논자는 재가(在家) 불학과 출가(出家) 불학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학의 효용을 높이기 위해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맞는 내용을 연구하는 것과 전문적으로 수행에만 몰입하는 스님들을 위한 연구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재가자들은 기도와 염불하는 사람들이며 출가자는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기능론적 구분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다. 다시 말해 출가자는 전문적으로 수행만 하고 재가자는 출가자의 수행을 뒷바라지하며 복전(福田)을 닦는 집단이라는 분별적 인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구분은 불교의 응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능한 것이지 본질적 측면을 연구하는 체계불학에서 견지할 관점은 아니라고 본다.
불교의 핵심은 고해(苦海)로부터 해탈하는 데 있다. 심지어 《법화경》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불난 집(火宅)’에 비유하고 하루 속히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중생이 그 무명(無明)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해탈의 방법에는 재가자가 접근하는 해탈이 다르고 출가자가 접근하는 해탈이 다르게 제시되지 않는다. 출가자는 참선 수행해서 깨닫고 재가자는 기도하고 염불해서 깨닫는 것도 물론 아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사람의 근기(根機)에 따른 구분은 있을 수 있다. 근기가 낮은 출가자도 있을 수 있고 근기가 높은 재가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분은 출가와 재가라는 겉모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비록 근기에 따른 다양한 모습은 있을지라도 그 지향점은 하나이기 때문이며, 법(法)에는 출가와 재가라는 분별적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재가자들에게 어떻게 포교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응용불교학에 속한다. 이는 논자가 체계불학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인문학적 불교학에 해당한다. 즉 재가자와 출가자를 기능적으로 구분짓고 그에 따른 신행체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응용불교학의 영역이지 불교의 본질적 수행을 탐구하는 체계불학의 영역은 아니라고 본다. 체계불학의 위상은 논자도 규정했듯이 신앙적 측면, 즉 불교의 궁극적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계불학에서 추구하는 지향점은 가장 궁극적 불교 사상에 대해 연구되어야 하며 불교의 가장 핵심을 제시하는 학문이 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3) 신행은 단계적 절차를 통해 진행되어야 하는가?
논자는 체계불학에서 신행의 단계적 절차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앞 단계의 수행을 통해 심성(心性)이 체화(體化)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 단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조계종의 핵심적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선(禪) 수행은 모든 단계를 거친 다음 맨 나중에 제시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주장은 어찌 보면 합리적인 것 같지만 논쟁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볼 때 선적 전통과 상반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적어도 수행의 문제에 있어 단계는 시간과 과정의 절차가 아니라 인식의 절차 즉 근기(根機)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앞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준비가 된 사람은 참선 수행에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 선을 표방하는 우리 불교의 전통적인 입장이다. 왜냐하면 수행과 깨달음이란 교학적 내용을 이해하고 단계적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범주를 벗어난 자성(自性)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계적 절차를 설정하는 차제론(次第論)은 늘 그 과정을 이수하면 깨달음으로 통한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다시 말해 본질적 내용보다 그 형식적 과정과 단계에 대한 권위와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제론은 논리적 인과관계를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 세련된 단계를 설정하고 형식적 절차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 대한 순종과 복종이 올바른 신행과 수행으로 포장된다. 이는 곧 수행자들에게 지말적 절차와 과정에 국집하게 하고 본질적 문제와 대좌(對坐)하는 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논자의 주장처럼 차제에 따라 단계를 거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음 단계를 허용치 않고 참선을 금한다면 일반 불자들의 경우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참선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참선이라는 인식은 누구든지 참선과 수행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여러 단계로 설정된 차제는 늘 ‘나는 아직 참선할 단계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낳게 할 것이다. 이는 곧 불자들에게 수행 그 자체를 요원한 것으로 인식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요원한 것은 깨달음이지 앉는 것 자체, 수행 자체가 아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평생에 단 한 번 주어지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선사들은 본질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룻밤에도 진리를 깨닫는 일숙각(一宿覺)이 탄생하는 것이다. 선사들은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고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으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어떤 제자가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는 내용을 경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형식적 절차와 종교적 의례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복잡한 차제를 거친 다음에 깨달을 수 있다라고 가르치셨다면 한 번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초발심(初發心)은 가장 순수하고 종교적 심성이 고양된 상태이다. 이 때 본질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점차(漸次)를 이야기하고 단계를 이야기하고 예절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신심이 다 식어 없어질 때까지 수행의 문제를 보류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비록 선 수행이 제시되어도 이미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처럼 되고 만다. 수많은 불자들이 한 번도 앉아보지 않고도 수행이라는 말에 무감각한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불교는 믿음체계이기에 앞선 수행체계이다. 그래서 차제와 단계를 거치느라 본질적 수행이 보류되는 일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상황을 바라보면 이상과 같은 우려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즉 말세의 하근기 중생이라는 비탄적 자기인식의 수렁에서 기복과 타력구원만을 빌고 있는 불자들의 마음속에는 ‘우리는 아직 수행할 단계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선사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지금 가부좌를 틀고 앉으라는 것이다.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고 그 길은 수행에 있기 때문이다. 단계적 절차와 방편적 서설(序說) 속에는 오히려 불교가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4) 적자생존의 방식이 교학적 내용의 진실성을 판단하는가?
논자는 체계불학의 연구 성과들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 의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체계불학만이 보편적인 불교 신행법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체계불학의 연구 성과가 이렇게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 채택된다면 이것은 예기치 않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논자도 정의하다시피 체계불학은 신앙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불교적 수행체계와 신앙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학자에 따른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올바른 정법만이 발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학문적으로 엄격히 검증되지 않은 학설이 대중과 교단의 구미에 맞게 채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만약 다양한 견해가 주장되고 이것이 신행의 현장에서 적자생존의 방식으로 채택된다면 결국 타력적 구원과 기복적 내용을 담은 학설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지녔고 왕성하게 기형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자생존론은 학문적 진실이 신앙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현실적 신앙과 교단적 이해, 즉 학문외적 요소가 불교학을 규정하는 상황을 만들 소지가 높다. 만약 불교학이 진실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판단, 교단의 이해요구에 따라 채택된다면 불교학이건 인문학이건 집단의 융성이나 이익을 명분으로 진실은 왜곡되고 말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의 진실성에 의해 판명되어야지 그것이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 채택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체계불학이든 인문불학이든 진실은 사실 자체로써 판단되어야 하며 상황과 필요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불교 학설의 채택 여부를 신행의 현장으로 돌리는 것은 정법을 올바로 연구하고 판별해야 하는 학자 본연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4. 불교학의 위기가 학자만의 문제인가?
1) 과대 평가된 불교학의 위상
지금까지 논자의 글에 대해 비교적 각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무엇이 우리 불교학이 당면한 일차적 문제인지에 대한 평자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논자는 불교학이 인문학적 방법론으로 연구된 내용을 불교계에 발표함으로써 불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과연 한국 불교학계의 위상이 그런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밝혔듯이 불교학계는 일선 사찰에서 진행되는 신도교육에 일정정도의 역할분담을 요청받고 있지만 그 내용과 위상에 대해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불교학자 가운데 자신의 학문적 연구 성과를 신도들에게 자신 있게 펼칠 만큼 신앙적 자신감에 찬 학자가 얼마나 되는가라는 반문이기도 하다.
대개의 경우 학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대해 신도에게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교학적 내용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불러준 사찰의 권위와 이해에 더욱 민감하다. 그래서 불법에 대한 신도들의 인식을 끌어올리기보다 스스로를 낮춰서 기복적 영험담과 전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쪽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아카데미즘을 지향해서 내용은 고급스럽고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신행의 현장에서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연결 고리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둘 중 어느 경우든 불교는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라거나 또는 스스로 수행해서 스스로 구제하는 자성자도(自性自度)의 종교라는 불교의 핵심적 내용과는 늘 그 초점이 빗겨나 있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연구 성과는 그것이 인문학적 방법에서 나왔든 신앙적 측면에서 나왔든 상관없이 한 편의 논문으로 끝나고 기껏해야 대학 강단에서 신앙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학생들을 향해 강의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이는 곧 불교 신행의 정통성과 정법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야 할 불교학계의 학문적 연구 성과들이 실제 종교 활동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향력 있는 불교학자가 불교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펴서 수많은 신도들이 신앙적 갈등을 겪는다는 현실인식은 불교학계의 현실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학자의 위상이 수많은 불자들을 혼돈으로 몰아넣을 만큼 신행의 중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문제의 핵심은 교학과 신행의 괴리에 있다
평자는 현재 한국불교학의 일차적인 문제점은 불교학과 신행과의 괴리, 이론과 실천의 불일치라고 생각한다. 불교학은 불교라는 살아 있는 종교를 연구 대상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방향은 대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학문적 연구 성과들이 일선 포교 현장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 신앙을 지도하는 스님들은 불교학의 흐름이나 새로운 연구 성과에 관심이 별로 없다. 그렇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신행이 교리와 경전적 가르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개의 경우 신앙과 수행을 결정하는 것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오랜 관습과 의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교학적 내용과 불자들의 신앙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어쩌다 법회에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더라도 그것은 일회적 내용일 뿐 곧바로 전통에 기반한 의례 중심의 신행에 묻혀버리고 만다. 이는 곧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와 강의에는 신앙을 지도하고 수행의 방향을 설정하는 그 어떤 종교적 권위도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스님들의 인식 속에서도 그렇고, 종단적 위상에서도 그렇고 신도들의 관념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한국불교학의 이 같은 위상은 불교학의 문제가 단순히 인문학적 방법으로 불교학을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방법론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불교학 자체가 불교라는 신앙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지나치게 미미하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불교학과 신행이 서로 소원해 졌을까? 인문학적 방법으로 불교학이 연구되기 때문에 그럴까? 평자는 그 원인을 불교의 신행이 애초부터 외부에 의한 학문적 연구에 의해 확립된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찾고 싶다.
역사적으로 신행과 수행의 방향을 설정했던 것은 출가자와 따로 있는 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스님들이었다. 불교사에서 재가자가 어떤 연구 결과를 도출하면 그것을 신앙의 문제에 적용해 왔던 적은 없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이 비록 정법에 근거한 연구 결과를 내놓아도 그것이 불교 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천되지 않는 이유이다. 즉 학자들에 의한 학문적 연구 성과를 불교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이는 불교 자체가 스님과 학자라는 두 개의 차별적 벽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도입되기 시작한 학자그룹의 형성은 곧 바로 연구자와 실천자라는 새로운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같은 벽은 단순히 학문적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학이 인문학적 방법으로 진행되든 또는 기독교의 조직신학에 견줄 만한 체계불학이 성립되든 이 두 그룹 간에 엄존하는 벽은 그대로 존재한다. 출가자는 ‘불교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은근히 학자들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학자들은 자신들이 불교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아는 것 같은 지적 우월감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따라서 학문적 연구와 실천이라는 표면적 껍데기를 한 꺼풀만 벗기면 그곳에는 사람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신앙의 실천적 영역을 담보하는 스님과 학문적 연구를 담당하는 학자라는 집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그룹의 차별성이 곧 바로 불교학과 신앙이 괴리되는 현상의 본질에 더 가깝다.
이 같은 관계의 문제는 단순히 학문적 방법론이 바뀐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관계에서는 오히려 체계불학이 확립되어서 신앙의 실천적 부분까지 학자들이 제시한다면 오히려 외견상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이는 불교학과 신행과의 관계는 오히려 소원해질 것이다. 학자가 출가자의 영역을 파고드는 것을 출가자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체계불학이라는 분야가 성공을 거두려면 이상과 같은 이론과 실천의 괴리, 더 구체적으로 출가자와 학자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학문적 연구자와 종교적 지도자로 양분된 이 벽은 인위적으로 통합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즉 종단적 차원에서 스님들과 학자들의 역할을 조정하는 기구의 설립을 통해 불교학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그 성과를 수용해야 한다.
즉 종단적 차원에서 어떤 방향성을 갖고 학자들에게 연구를 의뢰하고 연구 성과가 나오면 공동으로 검증절차를 거쳐 학자 개인 자격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종단 기구를 통해 일선 신행의 현장으로 보급되어야 한다. 이 같은 인위적 조정 없이 현행과 같이 서로 각자가 자기의 길을 가는 상황에서는 학자의 학문적 연구 태도가 바뀐다고 해서 불교학의 위기가 해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5. 끝맺음 글
이상에서 살펴본 평자 나름대로의 사족에도 불구하고 논자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다만 그 같은 논의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되짚어 봐야 할 부분을 검토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논자의 주장처럼 이제 정말 인문학적 관심에서 벗어나 불교의 신앙적 측면, 수행적 측면을 연구하는 학문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미 불자들의 요구 수준이 전통과 관습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질 높은 신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본질적으로 불교학이 올바로 서야 신행의 방향이 올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정법과 만나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곧바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과정에서 왜곡된 불교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을 만나야 한다. 늘 ‘하근기(下根機) 중생이다’, ‘말세’라는 비탄 속에 복을 비는 데에만 매달려서는 불교의 미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학자들의 역할이 당연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학문의 연구 주제가 불교의 핵심 사안이어야 한다는 것도 자명한 이치다.
단 이런 부분들이 공염불이 아니기 위해서는 종단적 인식의 전환과 함께 제도적 장치도 함께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학자들만 적용되지도 않을 신앙 관련 부분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분리된 이론과 실천의 부분을 종단적 차원에서 통합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래야 불교학이 강단 학문에 머물지 않고 불교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학문으로 우뚝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평자는 “논쟁은 잘해야 칭찬을 받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이익도 없다.”라는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에 따라 논쟁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조리 있게 논지를 펼 줄도 모르며 천학비재(淺學菲才)의 재능으로 논자의 옥고에 평론을 쓴다는 것도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같은 글을 쓰게 된 것은 논자의 주장을 일회성 문제 제기로 끝내지 않고 보다 논의를 활성화시켜 보고자 하는 《불교평론》의 의도가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일차적 동기는 불교와 불교학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논자의 의도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 같은 대열에 함께 동참하기 위함이다.
끝으로 평자의 짧은 생각과 부족한 글이 논자의 옥고를 단장취의(斷章取義)해서 불교학에 대한 충정어린 의도를 훼손하지 않기 바라며 이 같은 논의가 보다 활성화되어 불교학 발전에 공헌하기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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