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의 법화와 행리, 그 빛과 어둠의 이중주
이덕진
우리 나라 근·현대의 불교사상가 가운데서 경허 선사(鏡虛禪師, 1846∼1912)만큼 그 평가가 양극단적인 사상가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를 극찬하기를 한국 근대선의 첫 새벽을 연 사상가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이는 그를 힐난하기를, 단지 능숙한 변재(辯才)로 마설(魔說)을 뿌리고 다닐 뿐이니, 총림에서 배척하여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애증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수긍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경허를 근·현대 한국선의 효시로 보아야 하며, 지금에 와서도 한국 선이 여전히 ‘경허선’의 영향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은 경허가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가지 모습들, 수년을 하루같이 참선에 열중하는 철저한 수행자의 모습, 길에서 길로 떠도는 폭풍우 같은 삶, 제자를 지도하는 자상한 스승의 모습 등이 가지고 있는 표면적인 다중성 속에 숨어 있는 경허의 본래 모습을 탐색함을 통하여, 경허의 선사상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논문은 이 들어가는 말에 이어 2에서는 경허선사의 생평(生平)을 간략하게 짚어보면서, 그가 간화선의 수행을 통해서 깨치게 되는 과정을 음미하고, 그 깨침을 바탕으로 서산 이래 끊어진 한국 선의 법맥을 이으며, 이후 결사를 통하여 근·현대 한국 선불교를 중흥하게 됨을 논구해 보고자 한다. 연구자는 여기에서 경허의 결사운동, 정토관, 간화선 사상 등에 대한 정치한 논구는, 논의의 전개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고의로 담론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다. 그것은 이런 문제들이, 이 논문의 주된 관심부분이 아니기도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서 선학들이 이미 상당한 연구업적을 훌륭하게 축적해 놓아 졸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3은 이 논문의 주된 관심부분이다. 연구자는 경허의 선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남과 다른 특별함에 대한 선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생애 전체에 걸쳐서 중요한 시기마다 드러나는 노장적 사유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생래적인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인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경허 선사의 행리(行履)에 대한 세간의 입장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경허 선사에게 미친 노장사상의 영향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깊은 곳에서 경허를 부르는 소리인 그의 ‘내적인 충동’을 논구하려 한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디딤돌로 하여, 우리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일으키는 것 같은 그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4에서는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논의되어진 것들을 총체적으로 반성해볼 예정이다.
2. 경허 선사의 법화
경허는 출가 초기부터 선수행에 전념한 선사가 아니다. 그는 23세(1868) 이후 34세(1879)까지 10여 년 간 동학사에서 불교경학, 특히 《화엄경》을 강의하던 강백이었다. 그가 선사로서 삶의 방향을 돌리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은사였지만 지금은 환속하신 계허(桂虛) 스님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길에 천안의 한 마을에서 맞닥뜨리게 된 콜레라라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전염병 때문에 한 마을이 통째로 폐허가 되어 있고, 누구든지 걸리기만 하면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된 경허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죽음과 굶주림의 마을 그리고 거리들의 풍경을 통해서 경허는 눈부시게 보이는 세상이 사실 장례식의 기나긴 행렬에 지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한 호흡간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가르치던 경전상의 교리들이 목전에 드리워진 죽음이라는 그늘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회심하고 스승을 만나러 가는 것을 포기한다.
이후 그는 “금생에 차라리 어리석고 미련한 채 문자 공부를 하지 아니 하였을 것을, 조사의 도를 찾아 참구하고, 삼계를 뛰어넘는 공부를 하려는 데는 오히려 구애가 됨이라.”고 한탄하고, 그 길로 강사 생활을 그만두고 선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경허는 ‘나귀의 일이 가지 아니하였는데 말의 일이 당도하였도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가지고,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혀서 수마를 쫓으면서 필사적인 정진을 하나, 은산철벽에 부딪치는 것처럼 그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곳이 없다(到牛無鼻孔處)’는 말에 안목이 움직여서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활연히 현전에 열려져, 물건과 내가 함께 공하여 옛 사람의 곧 바로 크게 쉰 경지에 도달하여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하고, 꽉꽉 눌러 덮였던 것이 풀려 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깨친 것이다. 경허가 부르는 ‘깨침의 노래’ 가운데 일부를 들어보자.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네. 봄 산에 꽃이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를 아는 사람이 없음이여, 때가 말세더냐. 나의 운명이던가.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이랴 쯔즛’ 소를 부르고 말을 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서장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 내가 큰 법왕이 되었음이로다. ……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소리를 한다 하여 믿지 않고, 또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귀 뚫린 사람이 있어 자세히 믿어 의심이 없으면 문득 안심입명처를 얻으리라. …… 어찌하여 내게서 무생법을 배워 인천의 대장부가 되려 하지 않는가? ……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집일레. 6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오도가에서 보이듯이 경허는 깨치고 난 이후 의발(衣鉢)을 전해 받을 사람이 없다고 토로한다. 의발을 전해 받을 스승이 없음을, 다시 말해서 그의 깨침을 알아줄 선지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마대사가 중국 땅에 들어온 이래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도를 얻어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른 이가 한없이 많건마는 요즘에 이르러 그 도가 폐하여 전하지 않는다.”라는 경허의 언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 선의 법맥이 서산 이후 단절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경허의 한탄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깨침을 인가할 눈 밝은 선지식이 한 사람도 없는 불교계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경허는 또한 그가 부르는 깨침의 노래인 무생일곡가(無生一曲歌)를 아무도 몰라주는 것이 말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의 운명이기 때문인지를 한탄하면서 자기에게서 무생법을 배우면 인천의 대장부가 될 것임을 설파한다. ‘무생’은 ‘본래 천지의 만물은 생도 없고 멸도 없다’는 의미이다. 천지만물을 나타낸 대로 한정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나타나기 전까지의 본래 상태까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하늘이 가운데도 가장자리도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모습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생은 불성(佛性) 또는 공성(空性)과 같은 의미이다. 마치 뿔을 나무에 걸고 공중에 숨어 자취가 없는 영양처럼 불성은 형체도 안 보이고 말소리도 안 들린다.
짐승의 발자국을 찾는 사냥개에게 영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허는 무생의 상태에서 세상을 본다. 그때 산빛은 문수보살의 눈이 되고, 물소리는 관음보살의 귀가 된다. 소를 부르는 아이나 말을 부르는 목동이 바로 보현보살이 되고, 장서장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 부처님이 된다. 죽음과 삶, 사람과 부처님, 큰 것과 작은 것은 무생의 눈으로 보면 만물일체가 되는 것이다. 경허가 무생일곡가를 몇 번이고 불러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바로 대중이, 불법의 진리를 모르고, 자기의 깨침의 경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인 것이다.
이후 그는 방장실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고, 심지어 그에게 교학을 가르쳤던 스승이던 만화(萬化) 강사가 들어와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화가 그의 행동을 힐난하는 것에 대해서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하다’는 등의, 당시의 대중이나 심지어 대강백이던 만화 강사마저도 이해할 수 없었던 대답을 한 것은, 사실 계산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가 깨달은 선의 정체를 만화를 포함한 대중들이 알아차릴 것인가에 대한 시험, 선의 법통이 단절된 것에 대한 한탄과 자기가 끊어진 선의 법맥을 이은 것을 누가 알아줄 것인지에 대한 시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바로 그 중단된 선의 법맥을 다시 이을 사람이라는 강한 암시가 그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의 선법을 보자.
참선이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네 일상 생활을 잘 반조하여 자신의 주인공을 확연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물의 잡된 것이나 생사에 이끌리지 않으면 홀로 뛰어나 분명하고 평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얽매일 것도 없고 해탈할 것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열반도 없다.
대저 이 현묘한 문을 참구하는 이는 항상 반조에 힘써 그것을 참구하고 마음이 생생하고 세밀하여 쉼없이 그것을 참구해야 한다. 이처럼 지극히 간절하게 하여 마음으로 참구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참구한다는 마음이 없어져 근본 생명에 이르게 되고 본지풍광이 저절로 갖추어져 모자람도 남음도 없게 된다.
경허에 의하면, 부처 되려면 우리는 자기의 몸에 있는 주인공인 마음을 찾아보아야 한다. 내 마음을 찾으려면 세상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하되, 보고 듣고 일체 일을 생각하는 놈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 모양이 있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인가, 큰가 작은가, 누른가 푸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의심을 내어 고양이가 쥐잡듯, 닭이 알을 안 듯, 늙은 쥐가 쌀 든 궤짝 쫓듯 하여 항상 마음을 한 군데 두어 궁구하여 잃어버리지 않고 의심하여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 말고 그저 있을 때라도 의심하여 지성으로 하여 가면 필경에 내 마음을 깨달을 때가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모기가 쇠소 등어리를 뚫는 것과 같이, 부리가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경허의 법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수행법은 간화선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가 깨침의 경지를 체득한 것은 서산 이후 그 법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한국불교의 특징인 간화선맥을 수백년 만에 재건한 것이 된다.
활연히 깨달음을 얻은 경허는 이후 주로 충청·경상 일대의 사찰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진작하게 되면,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명성이 차차 전국을 뒤덮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주지하다시피 1898년 이후 수년 동안 해인사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도량에서 정혜결사를 선도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허를 평가할 때 가장 주목하는 부분 중의 하나는, 경허가 수선결사를 통하여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시켰다는 것이다. 이때 경허의 수선결사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이능화(1869∼1945)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
오늘날 조선의 승계(僧界)를 보건대 혹은 계율로, 혹은 강수(講授)로, 혹은 선학으로, 혹은 사공(事功)으로, 혹은 이행(異行)으로써 각각 그 소장(所長)을 제멋대로 하여 이른바 선교양종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 30본산의 주지와 기타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선강제승(禪講諸僧)의 행리의 대략을 열거하고 그 종지를 조사하여 본 즉 경교(經敎)가 가장 많아서 염불이나 송경(誦經) 송주(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능화에 의하면 조선불교는 외형적으로는 선교양종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승려들의 대부분이 교종 승려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심지어 주문을 외는 불교는 성행하지만 참선하는 경우는 희귀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
제방(諸方)의 선교의 승려 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승려 7000인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 9는 모두 교종에 속하며,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실은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 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이라거나, 조선의 승려 중에 10 중 8, 9는 모두 교종에 속해 있다는 이능화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이라고 하는 불교의 암흑시기에도 진정으로 수행하기를 원하는 눈 푸른 납자들은 산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선사들이 통계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인용문을 통하여, 우리가 근대 선종의 쇠퇴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 초기에 고려시대 이래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여 선교양종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선종으로의 단일화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선적 수행의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염불 등과 혼합된 교종 불교가 횡행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뚜렷한 종지가 없이 선과 교 그리고 염불이 함께 행해지면서 그 정체성이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의 불교계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묻어 들어온 일본불교의 침투 때문에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이 전체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단의 자각과 승려들의 자질 향상을 위하여 시행된 것이 경허의 정혜결사이다. 경허가 결사를 주창하며 전국의 유명한 사찰에 선원을 복원하고 앞장서서 수행을 이끌면서부터, 신라 후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선풍이 마침내 재현되기 시작하며, 우리 불교가 36년의 강제점령 기간 동안 일본불교를 견디어 낼 힘을 내부적으로 축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암의 말을 들어보자.
기해년 가을에 옮겨 주석하시니, 영남 가야산 해인사였다. 때는 고종 광무 3년(1899)이라, 깊은 뜻을 밝히고자 신칙을 내리시니, 경을 인쇄하고, 또한 수선사를 세우시며, 학자들과 거처하시니, 대중의 전부가 화상을 추대하여 종주로 모셨다. 자리에 올라 거량(擧揚)하여 본분을 보이사 불조(佛祖)의 이심전심법(以心傳心法)을 명백히 잡아 떨쳐 수용하시니 살활(殺活)과 기틀이 가위 금강보검이요, 사자의 위엄이 온전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다 견처가 있게 하시며, 집착을 끊어 없애고, 속된 때를 말쑥이 씻어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는 듯 분명하게 지도하였다.
1898년 경허는 동래 범어사의 조실로 초대받아 오랫동안 주석하던 호서지방을 떠난다. 그는 동래 범어사로 내려가 주석하였다가 이듬해인 1899년 가야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긴다. 해인사에서 경허는 고종의 칙명으로 추진되는 대장경 간행불사를 증명하고, 또한 그해 9월 수선사를 창설한다.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 창건기〉에서의 경허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와서는 정법 보기를 흙덩어리와 같이 하며, 불조의 혜명 계승하기를 아이 장난과 같이 여기고, 심지어는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며, 내지 아집과 권력을 위하여 못하는 짓이 없어 썩어 문드러지니, 슬프도다. 뒷사람이 비록 정법안장의 설법을 듣고자 한들 누구에게 듣겠는가. 이때에 수선사를 창건하는 것은 실로 불 가운데 연꽃이 솟음이로다.
위의 글에서 보듯이 경허는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수선사를 창립할 수밖에 없는 전말과 한국 선의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899년 가야산 해인사에서부터 결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11월에는 〈함께 정혜를 닦아 도솔천에 나며 성불하기 위한 결사문〉을 지어 정혜결사운동을 주창하니 대중들이 모두 추대하여 법주로 모신다.
이때부터 1903년까지 경허는 송광사를 비롯하여 화엄사·천은사·백장암·실상사·영원사·벽송사·쌍계사·태안사·송계암 등 호남 일대에 선원을 창설하기도 하고, 범어사·통도사·내원사·백운암·표충사 등 영남의 여러 사찰을 순력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기도 하며, 대승사·윤필암·동화사·파계사 등 경상북도에도 선원을 창설하기도 하는 등 결사의 이념을 홍포하기 위하여 전국을 두루 편력하면서 선을 실천하고 도반을 규합하면서 납자들의 안목을 열어준다.
경허의 전법 제자로는 경허의 세 달로 불리는 수월, 혜월, 만공 그리고 혜봉이 있다. 이 밖에도 한암, 침운, 남전, 제산 등이 스님의 법을 이었다. 한편 경허의 선풍은 한국불교의 근대사를 개척한 많은 인물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성월, 학명, 진하, 태수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선원의 조실로서 한국 선을 이끌었다. 이들 기라성 같은 종장들이 1920년, 30년대에 선학원 운동과 해방 이후 정화 운동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조계종단 형성의 단초를 마련했을 뿐더러 한국불교 청정가풍을 선양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권상로(1879∼1965)의 말을 들어 보자.
현재 전국 선원에서 주장자(?杖子)를 잡고 면벽(面壁)하는 이들은 모두 그 문풍을 승습(承襲)할 뿐 아니라 승니(僧尼)로 하여금 선의 면목을 알게 하고 일반으로 하여금 선법이 있는 줄을 알게 된 것은 전혀 선사의 힘이다. …… 우리 나라 선학을 말하는 데에는 선사를 중흥조로 존앙(尊仰)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권상로에 의하면 경허 선사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승려나 일반인들로 하여금 선이 있는 줄을 알게 한 최초의 유일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선법을 말하는 데에는 선사를 중흥조로 존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선불교는 종래에 보기 드문 융성을 보이고 있다. 1976년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서 조사한 ‘전국 선원 현황’에 의하면 전체 45개소의 선원과 비구 533명과 비구니 396명을 합해서 950명의 선승들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1982년에는 비구 602명과 비구니 950명 모두 950명의 선승들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집계되었고, 1999년의 ‘전국 선원 정진대중 명단’에 의하면 총림 5개소, 비구 선원 42개소, 비구니 선원 30개소, 전체 77개소의 선원과 총림의 148명, 비구 선원 714명, 비구니 선원 778명 모두 1,640명의 선승들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모든 융성의 출발점에 경허가 서 있는 것이다.
3. 경허 선사의 행리
‘한국의 달마’, ‘선의 혁명가’, ‘선종의 거장’, ‘한국 근세 선을 중흥시킨 대선장’, ‘당송시대 오가종풍의 종장의 반열’ 등, 경허에 대한 셀 수도 없는 칭송만큼이나,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게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능화의 말을 들어보자.
근세 선계(禪界)에 경허화상이란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 홍주의 천장암에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여 송광사, 선암사, 청암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및 풍악의 여러 사찰을 편력하면서 제법 선풍을 날렸다. …… 세인은 말하기를 경허화상은 변재가 있고, 그가 설한바 법은 비록 옛날의 조사라 할지라도 이를 넘어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이 음행(淫行)과 투도(偸盜)를 범하는 일조차 거리낌이 없었다. 세상의 선류(禪流)가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음주와 육식이 보리와 무관하고 행음(行淫)과 행도(行盜)도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창언(唱言)하고 이를 대승선이라 하여 수행이 없는 잘못을 엄폐가장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에 들어갔으니 이러한 폐풍은 실로 경허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총림은 이를 지목하여 마설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경허선사의 오처(悟處)와 견처(見處)를 감히 안다고 하지 못하겠으나 만약 불경과 선서로써 이를 논한다면 곧 그 옳지 않음이 드러난다. …… 이러한 말씀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경허의 이른바 대승선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총림에서 배척되어야 옳겠다.
경허의 음주와 음행을 마다 않은 파격적인 행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역행(逆行)에 대한 일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해인사에서 광녀(狂女)와 함께 동침을 한 일, 생모에게 해탈을 위한 법문을 할 때 대중 앞에서 어머니 앞에 나체가 되어 보인 일, 만공과 같이 길을 갈 때 물동이를 이고 가던 동네 처녀의 입을 맞추어서 동네 청년들에게 쫓겨서 도망간 일, 송광사 불사 점안식에 초청받았을 때 술에 취해서 나타나서는 법상 위에 올라가서 바랑에서 술병과 돼지다리를 끄집어내어서 공양주에게 돼지다리를 삶고 술을 데워 오라고 시킨 일 등 음주 육식은 물론이고, 때로는 거짓말로 남을 골리기도, 때로는 술을 먹기 위해서 거짓 시주를 받기도 하며, 때로는 훔치기도 하고, 때로는 여자와 동침도 사양하지 않는 등 좋게 말해서 무애행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막행은 경허 생애를 일관하여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서 이능화는 경허의 대승선이라는 것은, 불경과 선서를 기준으로 볼 때, 옳지 않고 마설이기 때문에 총림에서 배척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전에 입적한 전조계종 전국수좌회 상임 공동의장이었던 휴암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이 세계에서 영원한 계(戒), 근원적인 계(戒), 본래적 계(戒)는 마음의 고요요 내적 적정이며 대무심(大無心)이며 대정(大定)이요 부동심(不動心)이며 불오염(不汚染)이며 생각 끊음이요 적정을 상하지 않음이며 연기를 음미하고 공의를 관함이다. 경허는 오입을 하고도 오입한 자국이 마음에 없다. 나는 여자 손목 한번 못 잡아 보고도 항상 파계다. 나는 억울하고 불공평하다고 아무리 호소하고 분개해도 그것은 도리어 업보중생의 자기 세계의 한계를 폭로함일 뿐 헛일이다.
휴암에 의하면, 계상(戒相)을 아무리 하늘처럼 받들어도 무심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도적인 자세로 대범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특별하게 지킬 기준도 없고 특별하게 마구 깨뜨릴 일도 없이 그저 인연따라 물 흐름처럼 무심하게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대자유, 대해탈의 내면적 인간상에는 더 가까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일체가 옳지 않음이 없는 진여의 세계에 ‘지킴’이니 ‘깨뜨림’이니 하는 것은 마른 똥막대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휴암은 깨친 자의 음행은 음행을 하고도 그 흔적이 없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경허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지에 이른 선사이기 때문에 그에게 계율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만만찮다. 송광사 승가대학 강주인 지운의 반론을 들어보자.
깨침 속에는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선정과 지혜가 나타난다. 경허가 깨달았다면 경허의 깨침의 경지 속에서도 선정력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어떻게 깨치고 난 뒤에도 음행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운에 의하면 휴암의 “내적 적정이며 대무심(大無心)이며 대정(大定)이요 부동심(不動心)”은 일체가 공할 때에 나타나는 삼매이다. 즉 중생이건 부처이건 모두 공하다. 이렇게 본다면 어떠한 죄를 저지르든지 그 죄의 흔적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게 된다. 그러나, 지운에 의하면, 만일 참으로 그러하다면 어느 누가 그 무슨 짓을 하든 그 행위가 공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지므로, 우리 사회는 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만일 참으로 깨친 이라면 “대무심(大無心)이며 대정(大定)이요 부동심(不動心)이며 불오염(不汚染)이며 생각 끊음이요 적정을 상하지 않음이며 연기를 음미하고 공의를 관함이다.”라고 말한 그대로 구경각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구경각의 경지는, 마치 화로 위에 눈이 떨어지는 순간 녹아버리듯이, 어떤 생각이라도 발붙일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행할 생각이 일어날 수가 없다. 수행의 목적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이 익을수록 음행이 사라져야 하는 것인데 수행을 마쳤다고 하는 무심도인이 여전히 이러한 행위를 자행하는 망념이 남아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도 풀리지 않는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경허의 제자인 한암은 〈선사경허화상행장〉에서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거니와 화상의 행리(行履)만을 보고 화상을 평론함은 옳지 못함이로다. 이는 다만 그 정법을 결택하여 법안을 갖추지 못함을 꾸짖을지어다. 그 행리만을 본받아 무애한 자와 또한 그 유위(有爲) 상견(相見)에만 집착(執着)하여 능히 마음 근원에 훤출히 사무치지 못한 자를 경책하노라.
한암에 의하면, 경허의 법화나 마음 그리고 안목을 배우는 것은 가당하나,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그의 행적의 걸림 없는 겉모습만을 따르고 믿는 것은 경허의 본래 의도가 아니다.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묘법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지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함은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행동을 자기 행위의 모범으로 삼지 않고 법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즉 경허의 경우 그의 법화나 사상이 중요하지 그의 기행은 중요하지 않다. 한암의 말대로 한국불교에 끼친 경허의 공적을 수긍하고 존경하는 입장에 서서 본다면 경허의 행리는 사실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의 법화가 아닌 행리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나친 궁금증은 경허를 구경거리로 삼는 속악한 대중심리의 모습을 보이는 면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허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들에 대해서 논구해왔다. 어떤 이는 그를 변재로 마설을 뿌리고 다니는 자이기 때문에 총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를 한국 근대선의 첫 새벽을 연 사상가라고 한다. 어떤 이는 그는 무심도인이므로 계율의 틀로서 그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비록 경허라 할지라도 계율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한다.
연구자는 이 문제를 약간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한 사상가가 있다. 그는 한국 선사상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극단적인 이중성을 보이고 있어서, 선할 때는 부처보다도 더 선하고 악독할 때는 맹호보다 더 악독하다. 대중들은 그의 불합리한 양극단적인 모습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네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해의 틀 속에 집어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부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경허만을 애써 보려 하고, 어떤 이는 맹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경허만을 애써 보려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합리로 재단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 선이나 악 어느 한쪽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삶 자체가 부조리하다면, 한 인간의 삶이 불합리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불합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허의 본래 모습은 부처와 맹호의 모습을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경허는 분명히 한국 근·현대선의 중흥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법화와 행리 모두가, 부정적인 의미이든 긍정적인 의미이든, 현대 한국 선에 녹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허는 치열하고 충동적이며 또한 파격적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치열함과 충동과 파격을 분장(粉牆)하고, 어떤 이들은 힐난(詰難)하며, 또 어떤 이들은 얼버무린다. 이러한 태도는 옳은 것일까. 그를 분장하거나 힐난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경허를 거짓으로 치장하여서 우리의 삶이 안전지대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려는 것일까.
분장하거나 힐난하는 대신에 오히려 경허의 치열한 삶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의 치열함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경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는 그의 깨침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곳에서 그의 파격이 가지고 있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통시적으로 보아야 할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어쩌면 그곳에서, 현대 한국 선의 정체성을, 그것이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경허를 깨치게 한 직접적인 동기는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作牛無鼻孔)’는 언명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장자》 ‘추수편’에 있다. 이 문제를 좀 천착해보기로 하자.
(하백은 다시)물었다. “무엇을 천이라 하고 무엇을 인이라고 합니까?” 북해약이 대답했다. “소와 말에게 4개의 발이 있는 것, 이것이 천이고. 말머리에 고삐를 달고 쇠코에 구멍을 뚫는 일, 이것이 인이다. 그래서 “인으로 천을 파멸시키지 말라. 고의로 천성을 망치지 말라. (본래의 자연스러운) 덕을 명성 때문에 희생시키지 말라.” 한다. 삼가며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참된 도로 돌아간다고 한다.
인용문은 황하의 신 하백(河伯)과 북해의 바다의 신인 약(若) 사이의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천(天)이란 자연을 의미하고 인(人)이란 인위를 의미한다. 즉 소와 말의 발이 4개인 것은 하늘, 즉 자연이고 쇠코에 구멍을 뚫는 것은 인위이다. 다시 말해서 북해약이 인위로 자연을 파멸시키지 말고 고의로 천성을 망치지 말라는 것은, 만물의 무차별 평등성의 입장인 제물(齊物)을 주장함에 다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쇠코를 구멍 내 뚫어 고삐를 만드는 일은 인위(人爲)로서 진리의 고삐를 잡는 일이 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천성인 자연을 구속하는 일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경허는 소년시절부터 유가와 도가의 서적을 상당히 읽어서 유가와 도가사상에 상당히 정통했으며, 실제로 그는 제자 한암에게 중노릇하기 싫어서 그만둘 때를 대비해서 《장자》를 천 번이나 읽었다고, 심정을 토로한 적도 있다. 즉 장자가 가지고 있는 시각은 경허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장자의 영향뿐 아니라, 노자의 사유체계와 경허의 사유체계가 가지고 있는 접점도 찾아볼 수 있다. 경허는 깨친 뒤 그의 스승인 만화 화상이 들어와서 보아도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고, 화상의 왜 일어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라고 하면서 누워 있었으며, 이때 만화가 아무 말 없이 나갔다는 일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다음을 보자.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라.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 일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아직도 억지 일을 꾸미면 세상을 다스리기엔 족하지 못하다.
인용문은 《도덕경》에서 나오는 글이다. 경허가 말한 무사(無事)의 경지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우리에게 설파하는 바와 다름이 없다. 노자는 도를 추구하는 길을 우리에게 말하면서 하루하루 없애라고 한다. 왜냐하면 도를 추구하면 날로 단순해지고 학을 추구하면 날로 늘어나 복잡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의 추구는 무위(無爲)에 이르는 공부이며 자기 안의 근본적 실체를 직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의 추구는 단지 자기 밖의 사물에 대한 단편적, 경험적 지식의 축적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세계로 나아가려면 지각 활동을 거쳐 얻은 지식인 학을 버려야 한다.
노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일상적인 의식을 없애지 않으면 진정한 도의 길에 접근할 수 없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가 보기에는 윤리도덕이나 교학은 일 없음의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일 있음을 쌓아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는 일 없음의 경지에 대하여 “종일 옷을 입어도 한 올의 실도 걸치지 아니하고, 종일 밥을 먹어도 한 낱 쌀을 씹은 것이 아니다.”고 한다.
우리는 옷을 입는다. 그리고 밥을 먹는다. 이때 만일 우리가 좋은 옷에 연연하고, 맛있는 밥을 구하면, 그것은 실을 걸치고 쌀을 씹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일 있음(有事)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을 입고 밥을 먹더라도, 애써 좋은 옷에 연연해 하지 않고, 애써 맛있는 밥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올의 실도 걸치지 아니 하고, 한 낱의 쌀도 씹지 않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일없음(無事)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노자의 눈으로 보자. 노자는 “성인은 병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병에 빠지지 않고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노자는 우리가 병을 병으로 아는 한, 병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설파한다. 경허는 옷과 밥을 재료로 이야기하고, 노자는 병을 재료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그 들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성인과 경허가 말하는 무사인(無事人)이 결국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성인과 무사인의 경지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는 “머리 숙이고 항상 조느니, 조는 일 말고는 무슨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조는 일 말고는 다시 일이 없어 머리를 숙인 채 항상 졸고만 있네.”라고 하는 것이다. 경허의 이러한 입장은 일상적인 앎에서 얻은 지식, 더 나아가서 학문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은 일 있음이지 일없음이 아니며, 이러한 의식을 완전히 씻어낼 때 진정한 의미의 진리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표방하는 도가의 세계와 경허가 이해한 깨침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통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경허로 하여금 깨침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계기에서 장자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깨친 직후 그의 스승과의 관계에 대한 일화에서 노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다음을 보자.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자르려 하면 근심이 되고,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으려 하면 걱정이 된다. 발우대는 자루를 붙일 필요 없고, 조리에는 새는 것이 마땅하도다.
인용문은 경허의 말이다. 인용문은 《장자》 ‘변무편’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 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짤라 주어도 아픔이 따른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자를 것이 아니며, 본래 짧은 것은 늘일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장자가 이 말을 한 까닭은 인의(仁義)라는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사람들의 본성을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을 속박할 뿐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상태가 바로 완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경허는 ‘나무는 삐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으며, 사람도 마음이 불량하지 말고 착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류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며, 불량하고 성실치 못한 사람도 그대로 착하고 성실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장자의 입장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조금 더 보자.
나의 즐기는 성품인즉 진세(塵世)로 한 가지 그 빛을 나투어 진흙에 사무쳐 그를 드러냄 또한 얼마나 꼬리를 끌고 다니기 기뻐하였던가. …… 장차 가야 할 길 먼 하늘에 드리우고 떨친 날개. 또한 느릅나무 가지를 향해 활개치기를 이 얼마나 하였던가. 서로 헤어짐 오히려 그리 어려울 것은 없으나, 저 부생들이 생각하는 바 뒷날 기약하기가 아득하기만 하구나.
인용문은 경허가 1900년 그의 제자 한암에게 이별하면서 준 〈법자 한암에게 주다〉라는 글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꼬리를 진흙 속에 얼마나 끌고 다니기 기뻐하였던가’라는 표현은, 초나라 임금이 나랏일을 맡아주기를 요청할 때 장자가 그 요청을 거절하면서, 죽어서 비단에 쌓여서 사당에 놓여지기보다는,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원했다는, 일화와 동일하다.
주지하듯이 이 글의 의미는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구속됨이 없이 자연에서 자유롭게 한 평생을 보내겠다는 장자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글이다. 또 ‘나의 즐기는 성품인즉 진세로 한 가지 그 빛을 나투어’라는 표현은 《도덕경》에 있는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라는 구절과 동일하다. 《도덕경》의 의미는 도(道)가 티끌 세상과 하나가 되려 한다는 의미이다.
즉 도는 세상과 따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세상의 본 모습 그대로가 바로 도라는 것이다. 또 글의 끝에 있는 시의 내용, 역시 《장자》 〈소요유편〉에 있는 내용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붕새는 한 번 날개를 퍼덕이면 9만리 장천을 나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현을 의미한다. 하지만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한껏 날아 보아야 겨우 느릅나무에 이를 뿐이다. 《장자》에서는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9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는 붕새를 비웃는 대목이 나온다. 조금 나는 것으로 많이 나는 것을 헤아릴 수 없지만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조금 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붕새가 구만리를 나는 것을 비웃는다.
여기서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자기의 주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통속적인 보통 인간의 모습이다. 즉 경허는 자기를 붕새로 그리고 세속사회를 변변찮은 곳으로 보는 듯하다. 그 속에서 보낸 긴 세월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비상하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며 세속사회에서 속아서 보낸 세월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 년 뒤에 할 일을 마치고 은둔자의 삶을 살게 될 자기의 모습을 미리 제자인 한암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차 가야 할 길 먼 하늘에 드리우고 떨친 날개. 또한 느릅나무 가지를 향해 활개치기를 이 얼마나 하였던가.”하고 노래하면서, ‘무사(無事)가 오히려 일이라고’ 하며 세상만사 망각하고 ‘인연을 따라 구속받음이 없이 넓은 세상을 자유자재로 빈배같이 떠돌 것을 꿈꾸며’, ‘세상과 청산이 어느 것이 옳은가. 봄 되면 사람 사는 어디든 꽃은 피는 것. 만약 누가 성우의 일 묻는다면, 석녀의 노래 속에 겁외가’라고 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허를 깨치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라는 언명이 《장자》의 용어라는 것, 그리고 그 직후 그의 스승이었던 만화에게 한 ‘무사(無事)’와 유사한 용례가 《도덕경》에 있다는 것, 또 그의 제자인 한암에게 한 전별의 서한에 있는 ‘꼬리를 진흙 속에 얼마나 끌고 다니기 기뻐하였던가’라는 표현도 《장자》가 그 출전이라는 것, 또 ‘나의 즐기는 성품인즉 진세로 한 가지 그 빛을 나투어’라는 어구는 바로 《도덕경》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표현이라는 것, 더 나아가서 그 마지막에 있는 ‘장차 가야 할 길 먼 하늘에 드리우고 떨친 날개. 또한 느릅나무 가지를 향해 활개치기를 이 얼마나 하였던가’라는 시구도 출전이 《장자》라는 것, 그뿐 아니라 경허가 설파한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자르려 하면 근심이 되고,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으려 하면 걱정이 된다. 발우대는 자루를 붙일 필요 없고, 조리에는 새는 것이 마땅하도다.”라는 말을 한 것도 《장자》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논구해왔다.
경허의 경우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마다에는 반드시 도가적 사유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허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견성 속에 숨어 있는 노장적 성격을 배제하고는 경허의 사유체계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경허 담론의 유기적 체계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바로 도가적 사유체계인 것이다. 경허 안에 녹아 있는 노자와 장자가 그로 하여금 결정적인 순간에 도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라는 한 실존(實存), 그리고 그가 이해한 견성에는 노자가 추구하는 인위를 초월하는 ‘자연’ 그리고 장자가 표방하는 구속을 뛰어넘는 ‘자유’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노장의 세계관과 혼융된 경허가 펼치는 깨침의 모습은 기존의 불교적 교리를 뛰어넘는 경향을 항상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경허의 말과 행동은 세속의 삶이나 기존의 틀에 연연하는 우리를 깜작 놀라게 하고, 때로는 외형적인 통쾌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반면에 선의 이름으로 일탈과 방자함을 조장할 위험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경허의 ‘파격’ 안에는 노장적 사유만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근원적인 것은 ‘저 깊은 곳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인 ‘내적인 충동’이다. 다음을 보자.
부처니 중생이니 내 알 바 아니고
해마다 의당 만취하여 광승(狂僧)을 작하거늘.
혹은 일없이 한가로이 바라보니
먼 산은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르르네.
인용시에서 보듯이 경허는 이중적이다. 때로는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분별을 버리고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미친 듯 보내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도인의 눈으로 일없이 한가로이 자연을 바라본다. 그때 먼 산은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빛과 어둠을,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선사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어 보이지 못하고 경허는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 보일 뿐이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격과 중생의 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평생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혹자는 부처의 격만 내세우고, 혹자는 중생의 격만을 내세우지만, 경허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처럼 정직한 채 하기보다는 힐난을 받더라도 차라리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지향한다.
그는 평생 마음을 텅 비워서 깨끗하고 순일하게 하는 공부를 했지만, 마음은 경계와 자주 부딪혀서 섶나무에 불이 타는 것같이 그를 아주 자주 배반한다. 그리고 그 점이 그를 자주 슬프게 한다. 다음을 보자.
허공의 별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을 다 집어삼키고
다시 집어삼킬 물건이 없어서
사방으로 굶주리며 헤매니
이 무슨 도리인가?
경허의 고독이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다. 무엇이 경허를 허공의 별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유정과 무정을 다 집어삼키고, 다시 집어삼킬 물건이 없어서, 사방으로 굶주리며 헤매는, 천애의 고독 속을 헤매게 했을까. 그의 천형과도 같은 갈증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래의 시에서처럼 경허는 천형과도 같은 갈증 속에서 깊은 고독을 느끼며 아주 자주 쓸쓸하다.
털을 쓰고 뿔이 난 소가 되어
등 탑 앞에서 말이 쓸쓸하다.
조사의 지금 몸 밖으로
긴 세월 저잣거리로 떠돌아다닌다네.
경허는 털을 쓰고 뿔이 난 소가 되어 등불 앞에서 쓸쓸히 읊조린다. 조사의 본래 면목을 잃어버리고 긴 세월 거리를 헤맨다. 아주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서 마음의 문을 열면, 경허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슬픔의 파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붕새처럼 나래를 펴기에는 이미 벌써 반쯤이나 재가 된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는, 술이 빛을 발하고 여자 또한 그러하며, 탐진 번뇌로 세월을 보내며, 부처니 중생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고 외치며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미친 듯 보내기를 작정하면서, 술 파는 늙은이와 장사치 노인들이 늘어서 있는 곳에 자취를 감추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래도 남아 있는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그를 덮는 슬픔이 우리에게도 느껴지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언젠가 진진응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경허가 솔직하게 대답한 적이 있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대강사로 당대를 주름잡던 진진응 스님이 하루는 경허선사에게 좋은 안주와 곡차를 올리면서 “스님께선 왜 이런 것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경허선사는 즉석에서 답송하였다.
돈오하여 이치를 깨달음은 부처님과 동일하나 다생으로 익혀온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폭풍은 잠잠하나 아직 파도는 남아 솟구치듯 이치는 분명해도 제 버릇 그대로일세.
경허의 대답은 솔직하다. 자기를 미화시키지도 않으며 자기의 행동이 막힘 없는 자유인의 모습이며, 이류중행이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근기가 낮다는 등의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이론적으로는 깨쳤지만 실제로는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기의 습기를 그대로 밝히고 있다.
그는 슬펐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깨침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남아 있는 악습이 여전히 맹호와 같이 독하고 악해서, 그 악독한 기운이 하늘을 뚫고 나는 것을, 깊은 곳에서 자기를 부르는 그 마음을 자기도 어쩔 수 없음을…… 그래서 때로는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내 집임을 깨닫고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 도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음주 음행을 마다 않는 맹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그 이중의 모습이 부딪혀서 내는 갈등의 끝없는 반복에 피로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정직함과 생래적인 충동과 도가적 사유가 시키는 대로 은둔의 장소를 따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다는 것 얕은 소견 이름만 높아
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기만 하구나.
모를 일이여, 어느 곳에 가히 몸을 감출꼬.
어촌이나 술좌석이 어찌 처소가 없으리오만은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더욱 새로워질까?
다만 그를 두려워하노라.
경허는 단지 어촌과 주막집을 방랑하며 그윽한 냇물과 깊은 숲을 찾아 쉬면서 마음 놓고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더욱 새로워질까 그것이 두려워서, 아무도 모르는 저 북방의 세계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승복을 벗어버린 채 은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생래적 충동이 시키는 대로 자연과 자유가 있는 세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4. 빛과 어둠의 이중주
경허는 법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서산 이래 단절되다시피 한 한국불교 간화선의 법맥을 이었다는 것만을 가지고도, 기라성 같은 한국 근·현대 선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빛나는 인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기에다가 그는 1899년이래 약 5년 동안 정혜결사를 통하여 정체성이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의 불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는다. 경허가 수선결사를 주창하면서부터 신라 후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선풍이 마침내 재현되기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이후 현대 한국 선을 이끈 인물들은, 대개가 경허의 전법제자이거나, 아니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1920년, 30년대에 선학원 운동과 해방 이후 정화운동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조계종단 형성의 단초를 마련했을 뿐더러, 한국불교 청정가풍을 선양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간화선 전통을 가진 선불교가 지금 우리 나라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현대의 한국 간화선법을 말하는 데에는 경허 선사를 중흥조로 존앙하지 않을 수 없다.
경허는 행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불교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적 인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그는 한창 공부하기 좋은 소년시절에 노장의 서적들을 섭렵했다. 연구자는 이러한 독서경험이 경허의 생래적 자유분방함과 만나면서,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경허’라는 불세출의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원래 도가에서 꿈꾸는 무사인(無事人)은 세속적인 의미의 삶의 법칙 따위를 인위(人爲)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는 “무위(無爲)의 일을 하고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행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요청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개인을 제약하고 간섭하는 어떠한 제도나 도덕에 대해서 없으면 없을수록 더 좋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굳이 구별하자면 노자는 도(자연)를 생성변화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귀착점으로 생각한다면,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변화 그 자체로 파악한다. 그래서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기기를 즐긴다. 그래서 노자가 자연을 주로 한다면, 장자는 자유를 주로 한다.
경허에게서는 노자와 장자의 흔적이 고루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장자적 성격이 조금 더 강하다. 이것은 아마 그의 생래적 본성이 장자와 더 잘 계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경허는 한편으로는 산수를 즐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가 생각하기에, 자유로운 세간의 저잣거리를 꿈꾼다.
연구자는 그의 수많은 만행 그리고 만년의 환속과 북방으로의 은둔을 자유를 꿈꾸고 정형화된 구속을 싫어하는 장자적 특징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생래적 성격과 노장의 영향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의 선수행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경허의 파격은,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의 파격은 수백 년간 식물인간으로 있던 간화선을 19세기말 20세기초의 한국에 다시 불러 내왔으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깊은 곳에 있는 빛과 어둠까지도 끄집어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의 파격은 그에게는 영광이기도 하고 멍에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때로는 눈이 부신 광휘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폭풍우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면 한국 간화선은 재건되기는커녕 영원히 식물인간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파격이 가지고 있는 반골기질이 아니었다면, 구한말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당하여서, 어떻게 정혜결사는 가능했겠는가. 5년간의 결사운동을 통해서 한국불교의 방향을 바로잡아 준 그 강력한 동력은 그의 혁명가적인 기질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경허가 당시 불교계의 흐름이나 관행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판을 깨버리면서, 새롭게 간화선맥의 재건과 정혜결사를 대안으로 제시했듯이, 우리에게는 부수어 버릴 불교계의 흐름이나 관행은 없는가.
그 부수어 버린 곳 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할 21세기의 불교적 시대정신은 없는가. 경허가 기존의 판을 깬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요구되는데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경허는 우리 앞에서 빛나고 위대하며, 우리는 경허 앞에서 초라하고 범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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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파격은 눈이 부시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도 수반한다. 흔히 우리는 경허가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입전수수란 선사가 살아가는 최고의 이상적 모습이다. 그것은 삶의 현실에 직접 들어가서 중생들을 환경과 근기에 맞추어 제도하여 성불하게 하는 삶을 말한다. 연구자는 경허의 삶이 입전수수의 삶인지를 알아차릴 안목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후대의 몇몇 선객들이 경허를 모방하여 막행을 하는 것이 입전수수의 삶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암은, 후세인들에 경책하기를,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그의 행적의 걸림 없는 겉모습만을 따르고 믿는 것은 경허의 본래 의도가 아니라고 한다.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행동을 자기 행위의 모범으로 삼지 않고 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한암의 간곡한 충고는 지금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 행리 때문에 법화를 못보는 것이나, 행리만을 따르면서 법화를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 눈 뜬 장님의 행동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허의 위대한 점은, 법화와 행리를 통해서 우리를 고민하고 반성하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그의 어떻게 보면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통해서, 몇 가지 풀기 어려운, 그러나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를 남기고 갔다는 것이다.
경허가 남긴 첫번째 숙제는,‘욕망의 문제’이다. 경허의 38가지 일화는 모두 욕망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욕망을 감춘 적이 없다. 세간의 힐난을 받는 경우에도 그는 늘 당당하게 욕망의 바다에서 유영했다. 우리는 경허의 욕망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좀더 넓혀서 (선)불교는 욕망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욕망은 어떻게 본다면 하나인 ‘생의(生意)’이다. 즉 인간의 발랄한 행동과 창조적 충동을 우리는 욕망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종교나 윤리는 사람의 욕망을 크게 성취하도록 마련된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막기 위해 있는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현대처럼 욕망이 널리 긍정되고 욕망이 널리 조장되어지던 시대는 역사상 그 어느 때에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옳은가? 옳지 않은가?
불교적 깨달음의 궁극은 종종 ‘무주상(無住相)’으로 표명된다. 이때 ‘상에 머무름이 없다고 함’은 욕망을 취하면서 욕망에 머무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욕망이라는 것 자체를 없앰인가. 욕망 없는 인생은 이상향인가, 아니면 회색빛 재에 불과한 곳인가. 깨달음의 완성은 욕망을 활발발하게 살리는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절멸시키는 것인가. 참으로 난감한 문제, 그러나 반드시 정리하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선)불교는, 경허가 툭 던지고 간,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욕망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정색을 하고, 진지하고 거짓 없이, 대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허가 남긴 두번째 숙제는,‘(한국) 간화선법과 노장사상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선불교를 불교의 노장식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많다. 아서라이트는 선불교가 “직관의 강조, 언어에 대한 불신, 비유와 은유의 사용, 역설적인 표현, 자연과 인생의 일체를 강조하는 것들은 도가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 오경웅은 “선이란 도가사상의 최고 발전 형태가 이와 비슷한 불교의 통찰, 그리고 불교의 힘찬 충동이 구세의 정열과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불교를 아버지라고 한다면 도가사상은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고 한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불교적 세계관과 도가적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점이 다르다. 불교는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 궁극적 목적이다. 선불교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선수행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하며, 중생 제도의 실천행에 선수행의 참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가는 은둔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흐르는 탁류가 도도하여 누구도 이를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상을 구제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거친 세상을 피해서 어떻게 무사히 은둔할까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이다. 즉 도가가 ‘소극적 피세주의’를 주장한다면, 대승불교도인 선사들은 원론적으로 ‘적극적 보살행’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적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아 그 결과로 노장적 특징을 내재한 경허의 간화선이 현재 한국 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이 문제는 현재 우리의 선법이, 다시 말해서 한국 선의 지나친 도가적 경향, 도시불교가 아닌 산중불교에 대한 지나친 경도 등이, 불교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해보게 하는 계기를 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스스로 납득할 만한 대답을 가지게 될 때, 우리 나라의 간화선법은 한 걸음 더 진전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유기체다. 유기체는 살아 있는 것을 일컫는 언명이다. 합리니 분석이니 논증이니 하는 것은 죽은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지 살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아니다. 경허는 한때 살아 있었고 지금은 살아 있지 않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경허의 생생한 몸짓과 육성을 통해서 그를 알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알아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죽은 경허의 어록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어록을 통하여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한때는 찬란한 빛으로 살아 있었던 경허를 되살리고자 했다.
그렇지만 생명의 파악이라고 하는 것이 오로지 생명 자체의 직접적·내면적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면, 어록을 통해 그를 분석하고 논증하는 것은, 살아 있었던 것에 대해 죽은 것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사실 올바른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는 경허의 곁가지만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경허의 표현을 역설적으로 빌린다면 ‘종일 경허를 논했지만 단 한 순간도 경허를 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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