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문제의 본질적 과제
마성스님
최근 한국불교계에서 ‘기복신앙’ 문제가 표면 위로 부상했다. 지금껏 기복신앙은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로 지목돼 왔으나 공식적으로 거론하기를 꺼려 왔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최초로 《불교평론》 제7호(2001년 여름호)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즉 ‘기복불교를 말한다’라는 특집에서 네 명의 논자들이 각각 다른 제목으로 기복신앙의 문제점들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글들은 대체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기복신앙의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즉 ‘기복불교의 대안을 찾다’라는 주제로 개최된 불교포럼이 그것이다. 2001년 9월 19일 동산불교회관에서 개최된 이 불교포럼의 토론 마당에서 성태용 교수(건국대, 철학과)는 “기복불교, 제대로 하자”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어서 박영록 교수(충주대, 중문학)가 《불교평론》 제9호(2001년 겨울호)에 〈‘기복불교를 말한다’를 말한다〉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 뒤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글을 《불교와 문화》(2002년 1·2호)에 기고했다.
이후 교계의 반응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불교TV에서는 성태용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복불교를 무조건 비판하기보다 긍정적인 부분을 포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보도했다. 이러한 시점에서는 기복신앙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기로 결심했다. 기복신앙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논의된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교리적·경전적 근거에 의해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둘째는 기복신앙을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덕을 지을 수 있는 작복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기도 자체를 인과율에 어긋난다고 부정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를 권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기복신앙은 근기론(根機論)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기론은 붓다의 설법태도인 대기설법(對機說法)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근기론이란 말은 대승경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에서 보살을 아홉 등급(九品)의 상중하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런 것이 근기에 따른 분류의 사례인 것이다.
이러한 근기론에 입각하여 지금까지 논의된 기복신앙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살펴보면, 첫째의 주장은 상근기(上根機)를 위한 것이고, 둘째의 주장은 중근기(中根機)를 위한 것이며, 셋째의 주장은 하근기(下根機)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중·하의 분류는 개인별 주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논의된 주장의 내용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견해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의 논의를 어느 정도 회통(會通)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용어의 정의와 기도 문제
먼저 ‘기복불교(祈福佛敎)’란 용어부터 살펴보자. 기복(祈福)이란 사전적 의미로 “복을 빎. 즉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일(pray for a blessing)”이다. 이러한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른다. 즉 기복신앙은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미신적인 신앙”이다. 기복과 불교의 합성어인 ‘기복불교’란 “복을 비는 불교란 뜻으로 경전에는 없는 말이다.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아 참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오직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복만을 빌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복불교라 한다.”
이 단어가 비록 불교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할지라도 올바른 불교용어라고 할 수 없다. 불교라는 단어 앞에 별도의 형용사를 덧붙이는 것은 불교의 본질에 어긋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기복불교’라는 말 대신 ‘기복신앙’이라고 표기한다.
그리고 ‘공덕불교’, ‘치마불교’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까지 무심코 ‘상좌불교(Therava?a Buddhism)’ 혹은 ‘대승불교(Maha?a?a Buddhism)’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지만, 이것도 엄격한 의미에서 잘못된 용어다. 그래서 세심한 학자들은 ‘상좌 전통(Therava?a tradition)’ 혹은 ‘대승 전통(Maha?a?a tradition)’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두 개의 불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불교가 다른 전통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기복(祈福)은 ‘복을 비는 것’이고, 작복(作福)은 ‘복을 짓는 것’이다. 전혀 차원이 다른 말이다. 기복은 복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고, 작복은 복을 내부에서 찾는 것이다. 복을 외부에서 구하는 신앙형태는 타력적(他力的)이며 비불교적인 용어다. 반면 복을 내부에서 구하는 것은 자력적(自力的)이며 불교적인 용어다. 사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복이지 작복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기복의 대안이 곧 작복인 것이다.
한편 기복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용어가 ‘기도(祈禱)’라는 말이다. 기도란 ‘빈다’는 뜻의 동의반복어(同義反復語)이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기도란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을 빌어서 불·보살의 가피(加被)를 구하는 것. 흔히는 재앙을 없애며, 질병이 낫기를 비는 등 현세에 대한 행복을 구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기도는 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의식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대목만 놓고 보면 불교에서는 기도가 허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빈다’는 의미의 ‘기도’라는 말은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기도’라는 말은 원래 불교적 용어가 아니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후대에 생긴 비불교적 용어임이 거의 확실하다. 기도는 어떤 절대자를 상정해야만 성립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신(神)이나 어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불교에서 절대자를 인정한다면 유신론(有神論)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맹목적·무속적·미신적 기도는 불교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도는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 기도와 똑같은 의미의 팔리어와 범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도라는 단어는 초기경전보다 후대의 문헌, 특히 밀교경전에서 많이 나타난다. 밀교에서는 기도법, 즉 ①식재법(息災法), ②증익법(增益法), ③경애법(敬愛法), ④조복법(調伏法), ⑤구소법(鉤召法) 등이 중요한 수행 의례로 실행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밀교 성립 이후 중국·한국·일본 등에서 기도라는 명칭의 법회가 봉행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여기서 그 사례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실행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발행된 불교사전에서는 기도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다. 즉 “기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부처님이나 신에게 적극적으로 빌어 그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기계적으로 구하는 것으로 현세이익적인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 등의 숭배 대상에 귀의하여 믿음을 가지고 참회하여 죄를 소멸하고 감사·보은·찬탄·숭앙 등을 위하여 부르는 비공리적(非公利的)인 기도 등이다.”
이러한 사전의 해석은 무엇을 근거로 작성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대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첫번째 기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두번째 기도는 허용되고 있다는 의미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서부터 기복신앙에 대한 교리적·신앙적 혼란이 생긴 것 같다. 첫번째의 기도가 불교에서 비판하는 기복적인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복을 빈다. 이것은 명백히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의 것은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신행방법들이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하나의 수행법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후자를 ‘기도’라는 말로 표현했기 때문에, 기도를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왜 나쁘냐고 반문한다. 특히 박영록 교수는 “이러한 ‘기도, 기복’이 광적인 경우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입시·사업·질병·득남 …’ 등등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를 인과율에 어긋난다고 해서 불제자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주장이다.”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만일 후자를 기도라고 하지 않고, 대승의 전통에서 실행되고 있는 개별적인 수행법, 즉 예배·찬탄·발원·참회·주력·칭명 등으로 표현한다면, 기복과 관련된 잡다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에서는 후자의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한 방법으로 동원되는 수행법까지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후자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조준호 박사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은 쓰이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비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있다. 그것은 화(禍)를 거두고 속죄나 복이 내리길 비는 타력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참된 성품(인간성)을 계발하기 위한 자기 연마의 일환으로, 내용에 있어 순수하게 내면적인 성찰과 자발적인 참회반성을 하는 종교적 행위까지 기도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참회기도나 참회정진기도가 그러한 말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예경 대상으로부터 현세 이익적인 차원의 보수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신앙행위를 말한다. 밀교의 수행법인 주문 또는 진언의 독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갖는 일반적인 기능인 양재초복(禳災招福)의 기복적 주술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선정 수행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독송될 때에 한에서는 종교적 구제론적 측면으로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무속적·미신적 기도와 대승불교의 각종 수행법들은 그 차원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예배·찬탄·발원·참회·주력·칭명 등은 기도가 아니라 수행법들이다. 기도라고 하면 기원하는 자와 기원을 들어주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불보살을 신이나 절대자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버린다. 따라서 ‘빈다’는 의미의 기도라는 말이 붙으면 이미 불교가 아닌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이 사라져야만 기복신앙도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개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도’라는 말 대신 ‘정진(精進)’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진이란 말 속에는 예배·찬탄·공양·참회·발원 등 대승불교의 신행 일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뜻이기 때문이다. 재래 불가에서는 불보살 명호를 칭념(稱念)하는 수행을 ‘정근(精勤)’이라고 부른다. ‘부지런히 정진한다’는 의미다. 정근은 수행의 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 정근을 ‘기도’라고 부르고,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기복신앙에 대한 혼란이 가중된 것이다. 이를테면 ‘입시기도’를 ‘입시정진’으로, ‘참회기도’를 ‘참회정진’으로, ‘정초기도’를 ‘정초발원’ 혹은 ‘정초정진’ 등으로 명칭을 바꾸면 상당히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외형적으로는 위의 두 가지 유형, 즉 기도와 수행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일 돌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을 신으로 이해하고 예배한다면 타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가 된다. 그러나 불상이라는 형상을 통해 자성불(自性佛)에 귀의한다면 올바른 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고(故) 이기영 박사도 “불교도의 예배는 불상 앞에서 행해졌지만 그 나무나 쇠붙이를 보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슴속의 일심(一心)에로의 환귀(還歸)를 위한 목욕행위(沐浴行爲)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깨끗하게 맑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좀더 부연 설명한다면, 기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똑같은 행위일지라도 거기에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는 무속적·미신적 기도로서 예배의 대상을 신이나 절대자로 이해하고, 그 절대자에 매달려 복을 달라고 비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정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비록 돌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에 예배하더라도 본래의 자기불(自己佛)에 돌아가는 행위이다.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선업(善業)을 닦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닦은 바 공덕을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회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무속적·미신적 기도까지 불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불교의 정체성은 찾을 길이 없다. 현실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교학적인 이해 없이 기도가 마치 중생들의 온갖 질병을 치료해 주는 만병통치약 혹은 모든 소망을 이루게 해주는 여의주(如意珠)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야말로 이 시대 불자가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잘못된 견해(邪見, miccha?it.t.hi)가 아닐 수 없다. 붓다는 영험·기적 등 신비주의적 미신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a?a sutta》에서 부처님은 이러한 견해는 축생명(畜生明, tiraccha?a-vijja?), 즉 비천한 기술(a low art) 혹은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이며, 그러한 견해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는 행위를 사명(邪命, miccha?iva) 즉 삿된 생활방식이라고 비판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동물의 지식’에 불과한 이러한 것들을 믿고 행해서는 안 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교행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바라문교에서 행해지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불교도라고 할 수 없다.
필자도 종교에 있어서 기적이나 영험 등을 전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주력·참회정진 등을 통해서 놀라운 현상과 가피를 여러 차례 체험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수행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기도의 가피나 영험 등에 주로 의존한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영험을 추구하게 된다. 어떤 절에 가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몰리다가 또 다른 절에 영험이 있다면 그곳으로 몰린다. 그러다가 어떤 기도원에서 난치병을 치료했다면 또 그곳에 간다. 영험이나 기적을 쫓는 사람들은 이교도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불교에서는 이 점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기도는 불·보살의 가피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기도의 성취 원리는 자기의 정화를 통해 얻게 되는 자기발현(自己發顯) 혹은 자기계발(自己啓發)인 것이다. 다만 불보살의 칭명을 통해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무한한 능력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기도(정확하게는 정진이지만)는 자기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일심으로 정신을 통일함으로써 놀라운 능력(기적)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은 곧 지계(持戒)를 뜻한다. 그리고 일심으로 정신을 통일한다는 것은 곧 삼매(三昧) 혹은 선정(禪定)을 말한다. 이를 통해 불가사의한 능력 혹은 초월적 지혜(智慧)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정진) 역시 계·정·혜 삼학(三學)의 원리에 의해 성취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리적 이해 없는 무속적·미신적·맹목적인 기도는 불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수행법의 하나인 정근(精勤), 즉 칭명(稱名) 등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정화한다면 이는 불교적 교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본다.
3. 세속적 행복과 국가적 기복
다음은 기복신앙을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라 작복신앙으로 권장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 행복과 출세간적 행복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세속에서의 행복이 곧 불교의 행복과 부합되지 않느냐? 둘째는 개인적 차원의 기복이 아닌 국가적·종단적·공익적 차원의 법회도 기복신앙으로 볼 수 있느냐?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행해 온 각종 법회 등도 기복신앙인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성태용 교수는 “현실에서의 복락을 구하는 것은 불교의 근본 목적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 기복이라는 것이 현실에서의 괴로움을 벗어나 복락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를 터부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세이익과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둑카(dukkha, 苦)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잘못된 것이다. 붓다는 세속적인 행복은 물론 명상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매우 높은 정신적 상태까지 둑카에 포함된다고 했다. 붓다는 세속적인 행복 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yad aniccam. tam. dukkham.)이라고 했다. 이 현상계는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anicca?dukkha?viparin.a?a-dhamma?’는 것이 불교적 시각이다. 즉 세속적 행복은 고(苦)이고,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涅槃)이다. 고와 열반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붓다는 일생 동안 고와 고의 소멸(열반)에 대해 가르쳤다. 하지만 이러한 고는 기도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오히려 재가자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교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했다.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가 지혜의 완전한 갖춤(pan???ampanna, 慧具足)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법의 이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제(四諦)의 법문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지는 길이다’라고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제의 법문에 대한 확신에 기초해서 재가로 있으면서도 고의 원인인 욕망을 절제하고 욕망의 발동에 기초한 번뇌를 억누르며, 악을 그치고 선을 닦음(止惡修善)과 함께 끊임없이 자기의 마음을 맑혀 가는 것이 곧 재가자로서의 수행의 핵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붓다는 가정생활의 행복 자체를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붓다는 유루복(有漏福)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보다 높은 차원의 무루복(無漏福)으로 승화시킬 것을 암시하고 있다.
붓다는 증지부 경전에서 네 가지 종류의 행복, 즉 ①이익락(利益樂, atthi-sukha), ②수용락(受用樂, bhoga-sukha), ③무채락(無債樂, anan.a), ④무과락(無過樂, anavajja-sukha)를 언급했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는 경제적·물질적 행복인데, 이것은 과오 없는 훌륭한 생활에서 얻어지는 정신적 행복의 16분의 1의 가치도 안 된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루복은 무루복의 가치와 비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보시(布施)·지계(持戒)·생천(生天) 등 삼론(三論)을 실천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이 삼론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님도 지적하고 있다. 삼론은 차제설법(次第說法)이다. 이것이 붓다의 설법태도인 대기설법의 원리인 것이다.
다음은 개인적 차원의 기복이 아닌 국가적·종단적·공익적 차원의 법회도 기복신앙으로 볼 수 있느냐?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행해 온 각종 법회 등도 기복신앙인가? 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불교TV에서는 개인적인 기복이 아닌 공익적인 기복 혹은 종단적인 차원의 대법회 등은 비록 기복적인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관례로 인정하자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그것이 개인적 기도이든 국가적 행사이든 어떤 절대자에게 복을 기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모든 의례와 행사들도 기복신앙의 범주에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한국불교에는 여러 가지 비불교적인 요소들이 습합되었다. 특히 무속적인 기복행위가 많이 들어와 있다. 황인규의 〈기복불교 왜 생겼나〉라는 논문은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전대(前代)의 무지(無知) 혹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시행되었던 것을 하나의 관례로 인정하자는 것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허남결(許南結)은 “이제 우리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른 불교사상의 특수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아울러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호국불교라는 미명 아래 우리 불교가 얼마나 민중들의 바람을 외면해 왔던가? 불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쇠퇴의 길로 갔었던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 잘못된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논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역사, 잘못된 관행을 하나하나 시정해 나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개인은 물론 국가적·종단적·공익적 차원의 기복신앙도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신앙형태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팔관회(八關會)는 본래의 취지와 정반대로 시행되었던 대표적인 예다. 주지하다시피 팔관회는 재가자가 포살일에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법회다. 팔재계는 오계에 ①오후에는 식사를 삼가는 것, ②춤과 노래와 연극 구경 등을 삼가고, 향료와 화만(華?) 등의 장식을 피하는 것, ③고상(高床)이나 대좌(大座)에 눕거나 앉는 것을 삼가는 것 등 세 가지를 더한 것이다. 재가자가 하루 낮 하루 밤(一日一夜)이라도 이러한 계율을 지키며, 정진하겠다는 것이 팔관회의 본래 취지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정반대로 가무와 음주 방탕 등 국민적 축제 놀이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그대로 따르자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관례이기 때문에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붓다의 정신에 위배된다. 붓다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깔라마경(Ka?a?a-sutta)》에서 깔라마들에게 “보고나 전통, 소문이나, 종교적 성전의 권위, 논리나 추론, 겉모양의 고려, 사변적 견해에 대한 기쁨, 외관상의 가능성, ‘이것이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관념 등에 이끌리지 말라. 다만 스스로 어떤 일들이 불선(不善, akusala)이며, 잘못되고, 나쁜 것임을 알았을 때는 그것을 과감히 버려라. 그리고 스스로 어떤 일들이 선(善, kusala)하고, 좋은 것임을 알았을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라.”고 했다.
붓다는 나아가서, 《비맘사카경(Vl?am.saka sutta, 思察經)》에서 제자는 붓다 자신조차 시험해 보아야만 그가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아무리 자신의 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한편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스승의 역할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맹목적인 기도와 수행적인 정진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복을 작복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밖에 있어야만 밧줄을 던지든 다른 부유물을 던져 구해 낼 수 있다.
방편법은 이미 강을 건너간 자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자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방편법을 잘못 쓰면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인다. 살인검(殺人劍)과 활인검(活人劍)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붓다는 맹목적인 기복을 통해서는 진정한 행복, 즉 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잘못 시행되고 있는 제도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시행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육방예경(六方禮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교수시가라월경(敎授尸迦羅越經, Siga?ova?a sutta)》의 교훈이다. 시갈라(Siga?a)라는 청년이 그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매일 아침 여섯 방향을 향해 예배했다. 이것을 본 붓다는 그 청년에게 예배를 그만두도록 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참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올바른 신행으로 유도했다. 즉 맹목적인 기복을 작복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4. 기복에서 작복으로
기복신앙이 불교가 아니라는 입장은 그 경전적 근거를 주로 초기불교에 두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초기불교는 당시 널리 성행되고 있던 각종의 기복행위 등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믿음(信)이 아닌 지혜의 도(종교)로 출발했다. 초기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중요시하고 있다.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보고·알고·이해함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초기불교에는 처음부터 기복신앙이 발붙일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초기의 붓다 가르침에 근거하는 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상근기인(上根機人)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큰 장벽인 것이다. 붓다께서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법을 망설였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붓다 가르침의 핵심을 정확히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불자들은 많지 않다. 이런 주장들을 펼치는 사람들이 비난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유사 이래 오늘날까지 인간사회에서 기복적인 현상은 있어 왔다. 세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기복적인 신앙형태는 존재한다.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기복적인 요소는 현존한다. 아마 이러한 기복적인 현상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먼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무지, 즉 무명(無明)이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모든 유정(有情)들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증득할 때까지 기복신앙의 형태는 존속될 것이라고 본다.
붓다께서는 갠지스 강가에 가서 목욕한다고 해서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도 갠지스 강가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목욕을 통해 죄업을 씻겠다고 몰려오고 있다. 이처럼 뿌리깊은 민간신앙은 어느 누가 주장한다고 해서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스리랑카에서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9∼1997) 스님이 청년시절 스리랑카의 보리수 신앙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스님의 주장은 보리수 나무에 꽃과 향, 음식 등을 공양 올리고, 개인적인 소망을 기원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보리수 신앙은 고대의 나무 신, 즉 목신(木神) 숭배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원전 3세기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래되기 이전까지 민간신앙으로 널리 유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민간신앙을 불교로 흡수하기 위해 상가미타(San?hamitta? 아소카 대왕의 딸) 비구니로 하여금 붓다가야의 보리수 나무를 이식해 오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원래의 나무숭배 신앙을 보리수 신앙으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의 나무가 스리랑카의 고도(古都) 아누라다푸라의 대보리수사(大菩提樹寺)에 지금도 살아 있다. 현재는 스리랑카 대부분의 사원에 보리수가 있고, 그 나무에 예배 공양하고 있다. 붓다께서 그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나무가 복을 주거나 깨닫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나무가 질병을 낫게 해주고 온갖 개인의 희망사항을 이루어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러한 보리수 신앙은 불교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보리수에 예배 공양하는 것은 미신이며, 잘못된 신앙이므로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한 젊은 스님이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심한 반발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반 민중들과 교단의 거센 반발에 그는 혼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스리랑카를 떠나 프랑스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후 17년간 스리랑카로 돌아오지 않고 불교학을 깊이 연구하여 세계적인 불교학자가 되었다. 지금도 스리랑카에서 보리수 신앙, 즉 보디 푸자(Bodhi Pu?a, 보리수 공양)는 중요한 불교의례로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뿌리 깊은 민간신앙 혹은 기복신앙은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근기와 하근기의 불자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지적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신앙을 되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복신앙과 관련하여 ‘기도’라는 용어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기도와 수행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맹목적인 기도와 자기 정화를 위한 수행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 훌륭한 스승은 하근기의 중생을 중근기와 상근기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복을 작복으로 승화시켜야 하지만 작복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동일시하는 것은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개인적 기도이든 국가적 행사이든 어떤 절대자에게 기원하는 것이라면 극복되어야 할 기복신앙이다.
앞에서 언급한 근기론을 현재의 한국불자들의 개인적인 기복신앙에 대입시켜 보면, 맹목적인 기복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하근기에 해당되고, 일부의 기복적인 신앙과 작복신앙이 혼합되어 있는 사람은 중근기에 해당되고, 일체의 기복신앙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려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은 상근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기론에 따르면,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높으면 높을수록 정법의 수행으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 그 반대일 경우에는 기복적인 신앙으로 기울 경향이 짙다. 기복이 성행하면 불교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기복신앙으로는 불교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기복신앙의 극복만이 한국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한국에 상근기의 불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불교의 기반은 튼튼할 것이다. 반면 저급한 낮은 수준의 기복신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불교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위해 기복을 부추기거나 묵인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멸을 방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교 지성인들은 앞장서서 기복신앙 극복을 위해 잘못된 부분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지적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잘못된 신앙들을 수정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지성인들이 기복을 부추기고, 역사적 변천을 통해 한국불교에 습합된 기복적인 요소까지 전통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도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붓다는 비록 자신의 가르침일지라도 시험해보고 받아들이라고 했다. 법(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사실 우리 주변에는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것이 불교 신앙의 전부인 양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외면하는 것만이 최선이냐?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들을 감싸안아서 기복에서 작복으로, 다시 작복에서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 불교를 먼저 공부한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복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낮은 근기의 사람들을 높은 근기의 불교도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기복신앙과 관련하여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단 한 번의 논의로 결론이 도출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의견들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논의 과정을 통해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깊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고민은 전체적인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행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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