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강물이 흐르게 하여야 한다
조성택(본지 주간)
일반적으로 ‘불교’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역사적 전개로서, 즉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가 구체적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됨으로써 성립된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불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초기불교·부파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밀교·선불교 등으로 부르는 다양한 불교사상들은 모두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를 시간과 장소에 맞춰 적절히 구현코자 한 노력들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은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부정 혹은 재해석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새로운 경전의 편찬이라고 하는 다소 급진적 경향을 띠기까지 하였다.
새로운 교단의 등장은, 기존 교단에 대한 불신감에서 출발해 석가모니 붓다 본래의 메시지로 돌아가고자 한 노력들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가르침이라 할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는 하나의 의미로서만 존재할 뿐 텍스트에 명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승의 창시자들은 당시 각 부파가 전승하고 있던 경전들을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하여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 나름의 새로운 경전 편찬을 통해 붓다 본래의 메시지를 전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심지어 중국에서 발생한 선불교는 아예 붓다의 진정한 메시지는 경전에서 찾을 수 없다고까지 선언하였다(敎外別傳).
이렇듯 불교의 역사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었다. 전통에 안주함 없이 늘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고, 변화하는 종교적 환경에 주체적으로 적응함으로써 붓다 본래의 메시지를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현해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불교 역시 급변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롭게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은, 많은 불교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부정할 수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상황에 대해 현대사를 통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집단적 위기감을 공유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위기감의 근원은 지금의 한국불교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불신과 새로운 종교적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빠지게 된 무기력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불교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무기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징후들을 살펴보자.
최근 몇 년간 한국불교가 최고의 수행법으로 여겨온 간화선(看話禪)의 종교적 권위가 흔들리고 “간화의 수행법은 외도의 수행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소리마저 들리고 있음에도, 한국불교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에서는 그 어떠한 공식적 언급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비록 종단 차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눈밝은 선지식의 호통 소리 정도는 벌써 있었어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이는 다양함을 허용하는 불교라는 종교 특유의 관용적 태도에서 기인하는가, 아니면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방편바라밀의 실천인가? 그도 아니면 침묵을 통한 소극적 동의의 표현이란 말인가?
게다가 계율의 문제는 또한 어떠한가? 부처님의 금구(金口)로 제정된 계율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율사들의 주장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의 길에서 계율은 다만 방편일 뿐”이라는 선가 특유의 반율법주의(anti-nominalism)적 경향도 존재한다. 또 일부는 계율이 시대와 맞지 않음을 느끼면서도 출문(出門)의 두려움과 비난 때문에 침묵하는 경우도 더러 보게 된다. 무엇보다 불교의 근본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살도라 할 사회적 실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양자가 단지 시간적 선후의 문제일 뿐인지에 대한 합의조차도 요원한 상태이다.
심지어 그러한 합의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면 거의 절망에 가까운 비애를 느끼게 된다. 또한 기복불교나 주술행위와 같이 재가자들이 잘못된 신행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를 바로잡아 주기는커녕 불사나 방편이란 미명하에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하니, 이는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상황은 결국 불교인들이 한국불교에 등을 돌리고 수입불교라 할 수 있는 미국불교나 유럽불교, 혹은 남방불교에 관심을 쏟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불교 관련 서적들은 온통 이들 수입불교와 관련된 것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틱 낫한이나 달라이라마의 번역서들은 출판되는 대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이 자체는 결코 부정적인 현상이 아니지만, 한국불교가 그들의 지적·정신적 욕구에 아무 것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수입불교를 새로운 방향의 모색에 하나의 지침으로는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 자체를 새로운 변화의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는 21세기 새로운 한국불교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과연 무엇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여, 우리 자신의 길을 주체적으로 찾아야만 한다.
먼저 확실히 할 일은 간화선만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는 최고의 수행법이란 고집과 선불교만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신화를 폐기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12세기 당시 중국의 고유한 종교적·사회적 환경에서 등장한 간화선 수행법과 ‘궁극적 깨달음’만을 수행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출가 중심의 선불교가 현대의 새로운 종교적 환경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현대 한국사회의 변화된 종교적 환경은 더 이상 그러한 종교적 편협함을 허용치 않는다.
과거에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란 출가자들만의 고유한 영역이었고, 경전 역시 마치 ‘비전(秘傳)’의 비밀문서인 양 출가자들만의 전문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재가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경전의 가르침을 전해 들을 수 있었고, 보시 등의 공덕을 쌓으며 윤리적으로 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던 수행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불교인들이 가진 욕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개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경전을 읽고 있으며 나름대로 실천적 수행을 하고자 노력한다. 더구나 대승경전뿐만 아니라 불교의 역사에 나타난 거의 모든 전통들이 번역을 통해 물밀듯이 소개되고 있다. 출가자가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던 종교적 권위도, 대승경전의 배타적 권위도 더 이상 인정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지금의 새로운 종교적 환경이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은 지금도 역시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하나만이 아니며, 손가락이라고 해서 모두 달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달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하는 손가락은 잘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달을 가장 잘 가리킬 수 있는 손가락을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하며,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인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기존의 고인 물을 빼내고 새로운 물줄기를 대고자 하는 많은 실천과 실험들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 모든 노력과 시도들은 결국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를 ‘지금 여기에’ 다시 구현해보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천 오백 년 불교사에서 볼 때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 불교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한 것도 이러한 끊임없는 물갈이 작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초기불교를 다시금 살펴보고자 함도 이러한 노력과 실험의 일환이다. 대승불교가 갈아 엎고자 했던 그 소승의 불교로 돌아가자고 함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번 《불교평론》 제14호 특집을 통해 우리가 돌아보고자 하는 초기불교는, 어떤 특정한 시대의 불교를 그대로 전범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를 비추어줄 거울과 같은 불교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
2003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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