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인문학으로서 불교철학의 가능성과 전망
이도흠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의상만해 연구원 연학실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등 10여 권이 있으며, 논문으로 〈원효의 화쟁사상과 탈현대철학의 비교연구〉 등 40여 편이 있다.
1. 인문학의 위기 시대의 불교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물론 인문학을 저 멀리 고고한 성에 가둔 채 현학적으로 어렵게 가르치고 자기네들만 아는 코드로 말하고, 현실은 애써 피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인문학자들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예전엔 아무리 가난해도 글줄이나 읽으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서당의 훈장, 초등학교 선생은 단지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의 정신적 지주였다.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 군대는 거의 노비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촌로(村老)의 집에도 방 한 켠에 책들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그들은 우세한 무기로 땅은 점령해도 조선인의 마음은 차지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리라.
그러나 60년대에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어 서구적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한국인들은 토끼와 거북이식으로 경쟁에서 지면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서서히 가치관을 바꾸었다. IMF는 그마저 남아 있던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시장 원리와 정글의 법칙이 우리 사회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조금만 경쟁력이 떨어지면 나라가 망하고 개인은 아무리 유능하고 많은 공을 세웠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다고 국가와 언론, 자본, 학계가 공동전선을 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누가 한가하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책을 읽고 사색을 하겠는가?
정통 인문학 강좌는 이제 마지막 보루라 할 대학에서조차 학부제 바람에 밀려 거의 고사 위기에 놓였다. 학생들은 취업관련 강의나 토플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강좌나 취직에 도움이 되는 것에 몰려들고 인문학 관련 강좌는 속속 폐강을 맞고 있다. 불황이다, 경제위기다 해서 곧바로 경제 활성화와 수출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나 실천은 낭비요, 사치로 매도당한다.
이제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인문학적 사고와 실천이 거의 사멸될 위기에 놓였다. 사회 전체가 극단적으로 물질과 욕망을 추구하면서 부부끼리 맞교환하여 성행위를 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카드 빚에 쫓겨 살인을 행할 정도로 인간다운 삶에 바탕을 둔 도덕성과 가치관은 처절하게 붕괴하였다. 돈 몇 만원을 얻고자 하룻밤 사이에 다섯 명의 사람을 죽인 사건을 대하면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전락하였는가에 대하여 쉽게 실감할 수 있다. 국가와 자본은 본래 그렇다 치고, 이에 제동을 걸어야 할 종교와 학교조차 신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정책을 집행하고 조직을 운영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또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급격히 변동한 새로운 사회에 맞는 패러다임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 내지 정보화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는 과도기이다. 때문에 아직 유용한 점이 많지만, 마르크시즘· 실존주의 등 산업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제시된 인문학들은 새로운 사회의 인간을 설명하는 데 여러 가지로 한계를 지닌다.
새로운 맥락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와야만 인문학적 성찰과 대안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마르크시즘에서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현대성의 담론들은 탈현대사회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그리하여 그 이론들도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기를 고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데리다, 들뢰즈, 푸코 등의 철학과 선(禪)과 원효 철학이 통하고, 화엄철학이 정보화 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용이한 것에서 보듯 불교철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갖는다.
신자유주의의 공세 또한 인문학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란 이름으로 정의를 말살하였고 시장논리로 사회를 약육강식의 세계로 만들었으며, 규제철폐로 세계 차원에서는 제3세계, 한 나라의 차원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신자유주의가 중산층과 서민, 사회복지와 사회정의, 민주주의와 제3세계만 파괴한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보다 정의를, 시장보다 인간을, 방임보다 규제를 외치는 논리를 제일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서 그 시대 인간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경제 제일주의, 경쟁논리, 또는 목적적 합리성을 비판하는 인문학을 시장논리로 가치를 따져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가 미국뿐만 아니라 제3세계, 지배층뿐만 아니라 대중과 언론에게도 합당한 이념으로 수용되면서 인문학은 ‘쓸데없는’ 학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철학은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하기에 시장의 원리를 넘어서서 인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치관이 될 수 있으며 즉신성불(卽身成佛)의 논리로 사회적 약자들이 곧 부처임을 깨닫게 하는 길이다.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도 한 몫을 하였다. 텍스트는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노예제를 강화하고 노예들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착하고 주인에 무조건 순종적이고 육체는 이미 늙어버린 엉클 톰을 만들어 정형화하였다.
노예제가 폐지되자 파워엘리트들은 다시 백인 여인을 겁탈하고 백인 어린이를 해치는 야비한 흑인을 만들었다. 이번 이라크 전에서도 미국은 ‘사악한 이슬람’,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조작해내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현실은 투명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공모에 따라 다시 만들어진다. 더구나 대중들이 하이트 맥주 광고를 보고 컴퓨터로 합성한 지하수를 실제 지하수보다 더 시원하고 신선하게 생각한 것처럼, 21세기 문화는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특성을 지닌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현실의 세계로 스며들며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시나브로 허물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우리는 가상과 현실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텍스트가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지 않고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인간의 구체적 현실은 조작되고 왜곡되고 있다. 반면에 불교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실재를 통찰하는 마음 공부이기에 우리는 불교를 통하여 재현의 위기를 넘어 실체에 이를 수 있다.
욕망의 과잉 또한 인간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섹스의 향락에 탐닉해 있는 남녀에게 사람답게 살라는 말이 통하겠는가? 사회가 급격히 변동하면서 전통의 가치관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은 세워지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져야만 자본 축적이 가능하기에 대중의 욕망을 소비욕구로 전환하기 위하여 광고, 영화, 드라마를 비롯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대중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인터넷과 위성통신 등 테크놀러지의 발달로 욕망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메커니즘은 세계화, 동시화의 단계에 있다.
반면에 개인을 억압하던 온갖 규제가 풀리면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와 윤리, 도덕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유로이 생활하고 실천을 행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개인들은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간적인 향락을 위하여 욕망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하여 남녀의 정절이 목숨과도 같았던 나라가 세계 2위의 포르노 사이트 개설국이 되고 스와핑이 행해지는 사회가 되었다.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욕망을 짓밟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욕망을 벗어나 진정한 해탈을 이루는 길이자 연기적 사고를 통하여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 나의 욕망을 최소화하는 윤리의 길을 연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인문학이 위기라는 것은 그 시대 인간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착한 사람이 더 고통 당하고 손해를 보며 돈 때문에 아내도 죽이는 한국 사회는 정녕 지옥과 다름없다. 그러나 미래에 더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어둡더라도 거기 별만 빛난다면 나그네의 여정은 행복과 의미로 충만하다. 인문학이 사망하여 군인과 관료, 법관과 언론인은 물론 학자와 예술가, 종교지도자마저 상업적 이익만을 좇는다면 그 썩어버린 연못에서는 아무 물고기도 살 수 없다. 그러기에 인문학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하늘에서 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불교철학은 21세기의 어두운 하늘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별일 수 있는가?1)1) 불교학이 ‘신앙으로서의 불교학’으로서 지식을 전달하는 체계를 넘어 불교신행자의 심성을 향상시키는 진정한 각학(覺學)이어야 한다는 김성철 교수의 논지(<현대불교학의 과제와 해결방향>, 《불교평론》, 2001년 겨울, 제3권 4호)에 대체로 동의한다. 여기서는 불교학 가운데서도 종교적인 면은 제외하고 21세기의 인문학으로 응용될 수 있는 불교철학에만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분법적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분법은 세계를 둘로 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둘로 가른 후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준다.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2) 2) Jacques Derrida, Positions, tr. Alan Bas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p.56∼57.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본질/현상, 진리/허위,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정신을 우월시하고 육체를 통제하면서 몸에 바탕을 둔 인간의 사유와 욕망 또한 억압하였다. 이성을 추구하고 비이성적인 것을 광기로 몰아 사회로부터 차단하면서 현대 사회는 합리성은 획득하였으나 이성이 도구화하면서 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주체가 자신의 의지와 지향성에 따라 대상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려 하면서 주체로서 인간은 자연을, 남성은 여성을, 서양은 동양을 마구 개발하고 착취하였다. 본질과 이데아를 추구하면서 현상, 그림자는 언제나 배격해야 할 허위였다.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확정된 진리에 이르렀고 불확정한 것은 허위로 간주하였다.
말은 ‘지금 여기서’ 행하는 것이기에 진리였고 글은 조작과 왜곡이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기획하고 지배하고 마구 변경을 가해도 되는 만물의 영장이다. 남성은 이성을 가지고 사유하고 여성은 육체의 환희를 좇는 자로 남성에 의해 길들여지고 지배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육체의 억압, 이성의 도구화,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 세계 체제(world system) 모순과 오리엔탈리즘, 가부장주의의 폭력 등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일으킨 근본 동인은 이분법적 사유이다.
반면에 불교는 중도의 논리를 편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이루어 하나로 아울러지면서 법성을 드러낼 수 있음은 중도 때문이다. 의상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生)하지만 생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생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곧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물지 않는다는 뜻은 바로 중도이다. 중도란 뜻은 생과 불생에 다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수(龍樹)는 “‘인연으로 생긴 법을 나는 공(空)이라 하고 또 가명(假名)이라 말한다. 또한 이는 중도(中道)의 뜻이다.’라 하였으니 바로 그 뜻이다. 중도의 뜻은 무분별(無分別)이란 뜻이다. 무분별한 법은 자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이 연(緣)을 따르니 또한 이도 머물지 않는다.”3)라고 말한다.3) 義湘, 《華嚴一乘法界圖》, 《韓國佛敎全書》 제2권, p.6中: “無自性故卽不自在者 卽生不生生 不生生者 卽是不住義 不住義者 卽是中道 道義者 卽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說爲是假名 亦是中道義 卽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故 隨緣無盡 亦是不住”
낮은 스스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공(空)하다. 밤이 있어서 낮이 있다. 밤을 견주면 낮이 드러나니 낮은 가명일 뿐이다. 절대의 낮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서양식으로 A or not-A로 사고하는 이들은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고의 틀로 볼 때, A and not-A, 낮인 동시에 밤은 모순이다. 그러나 진정한 낮은 12시에서 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서양인, 서양의 패러다임에 물든 우리들은 둘로 나누어 보지만 실제 세계는 A and not-A, 곧 퍼지이고 화쟁이다.
이원론적 사고는 이것은 진리요 저것은 허위라 구분한다. 그러나 절대 진리도, 절대 허위도 없다. 정도의 문제이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100% 진리라 하면 그것에 담긴 허위를 보지 못한다. 반대로 1%도 안 되는 허위를 근거로 전체를 진리가 아니라 하면 99%의 진리를 버리게 된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동조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 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이불순(順而不順)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방편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람을 무조건 선하다고 하면 그의 악을 보지 못하며 무조건 악하다고 하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선을 보지 못한다. 모든 이들이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모든 이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다룰 때 자비행은 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남아 있는 무명과 악을 보지 못한다면 이를 소멸시키고 그들 속에 잠재한 불성을 드러낼 수 없다.
언어와 진여 실체의 관계도 중도이다. 언어란 자성(自性)이 없이 한갓 가명에 지나지 않아 참 지혜와는 떨어져 있다.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환상이다. 진리의 본체란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필경공(畢竟空)에 대한 인식이 진리의 본체를 드러내는 바다.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렇다고 언어의 공성(空性)을 들어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것 또한 중도에서 벗어난다. 언어 저 밖에 진리가 있지만 인간이 진리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방편 또한 언어이다.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라 말을 방편으로 이용하면 된다. 곧 말을 빌어 말을 버리고 그 말속에 담긴 뜻만 살필 일(因言遣言)이다.
이처럼 20세기의 인문학은 이분법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세상 모든 것을 둘로 가르는 분별을 행하였고 한쪽에 우월권을 주어 다른 한쪽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야만을 범하였다. 부시 등 기독교 근본주의의 맹신도들이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나누어 자신과 다른 견해와 가치, 종교, 문화양식을 가진 이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오사마 빈 라덴이 이에 테러로 맞서는 것 모두 이분법의 극단이 낳은 비극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미국인에게도 이슬람스러운 것이 있고 이슬람에게도 미국적인 것이 있으며, 성경에 코란과 같은 취지의 말들이 넘쳐나고 코란엔 성경과 통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식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21세기의 인문학은 이분법이 야기한 모순과 비극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하기에 불교의 핵심 내용인 중도(中道)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인문학의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인문학은 언어기호를 통하여 세계, 궁극적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언어의 확정성, 고정성과 동일성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데리다는 언어기호와 진리가 차연(差延)이라고 말한다. 차연(diffe�ance)이란 이 철학자가 만든 단어이다. 불어에서 “diffe�er”란 동사의 뜻은 “차이가 나다”와 “연기가 되다”라는 뜻을 지니나 그 명사형인 “diffe�ence”는 “차이”의 뜻만 가지므로 ‘e’자를 ‘a’로 대치해서 “diffe�ance”란 낱말을 만들었다.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가지듯, 세계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차이의 체계일 뿐이다. 그리고 나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 신과 인간의 중개자’ 등으로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한다. 또 ‘나무’를 ‘쇠’와 대비시키면 이의 의미는 ‘자연, 부드러움’ 등의 뜻을 드러내는 것처럼 한 기호에는 배척하였던 다른 낱말의 의미가 흔적으로 남아 있어 서로 ‘대리보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기호의 의미, 텍스트의 의미, 궁극적 진리는 동일한 것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언어기호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차연(差延)이 드러난 것, 차연의 체계 속에 쓰여져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4)4) Jacques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tr. Alan Bas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xvi-xvii 참조하여 필자 재구.
“나는 원효를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왜 하필 원효일까? 이 문장에서 ‘원효’의 가치는 ‘의상’, ‘지눌’, ‘의천’ 등 이 문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되살려 비교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렇듯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기호의 구조는 영원히 부재(不在)한 타자(他者)의 흔적에 의해서 결정되며 의미는 현전(現前)과 부재(不在)와의 끊임없는 교차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차연이고 언어기호의 진정한 속성 또한 이럴진대 사람들은 언어기호에 고정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차연의 개념은 불교의 선(禪)과 통한다.
교(敎)가 부처님 말씀이라면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기에 교는 언어적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고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이를 초월한 체험으로 부처의 마음에 이르고자 한다. 교가 이것과 저것, 알고 모름의 분별을 따져 이치를 헤아린다면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한다. 교가 경전을 읽고 설법을 하여 부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선은 언어를 넘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자 한다.
진여 실체는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기에 진여 실체인 것이다. 헤아릴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여 실체가 아니다.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참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답은 언어도단을 선언하고 선정(禪定)을 통해 즉각적으로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기호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고 해서 선정으로만 이에 이르려고 한다면, 수많은 언어기호로 이루어진 불경은 무엇이고 언어기호의 고정성과 동일성에 구속되어 있는 중생은 어찌 구제받을 것인가?
“그리 글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역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이야말로 곧 문자의 모습이다. 또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는데 ‘불립(不立)’ 양 글자 역시 문자이다.”5)라고 지적한 사람은 《단경(壇經)》을 지은 혜능(惠能)이다. 비트겐슈타인도 “지붕(세계의 실체)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6)고 했다.5) 惠能, 《六祖壇經》(興聖寺本), 〈敎示十僧傳法門〉: “旣云不用文字 人亦不合語言 只此語言 便是文字之相 又直道不立文字 卽此不立兩字 亦是文字” 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 D.F. Pears & B.F. McGuinness(London: outeledge & Kegan Paul, 1961), p.151.
장자(莊子)도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7)7) “得魚而忘?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금강경(金剛經)》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을 보면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는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늘 말씀하셨다.”8)8)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여러 철인과 성인들이 궁극적 진리가 언어 저 너머(지붕, 언덕 저 편, 물고기)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이를 전달하는 것은 언어(사다리, 뗏목, 통발)밖에 없음을, 대신 언어로 궁극적 진리를 지시한 다음에는 언어를 버리고 세계의 실체를 대할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원효는 이 점에 천착하고 선령언구(先領言句) 후령의리(後領義理)를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문어(文語)와 의어(義語)를 회통(會通)하라고 한다. 문어로는 세계의 실체를 왜곡하지만 화두와 선시와 같은 의어를 통해서 실체의 한 자락을 드러낼 수는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방편으로 이용만 하되 언어를 넘어선다는 것은 견성하여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 언어가 만들어 준 상(相)으로 경험하는 세계의 실체, 성(性)을 바로 깨우치는 것이다. 체(體)는 그대로는 알 수 없고 용(用)을 통하여 상(相)으로 드러나기에 상을 해체하고 용을 따라 체를 곧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은 체가 알고 보면 상이기에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끊임없이 화두를, 깨달음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리다의 해체이론과 선은 이성중심주의와 언어, 텍스트의 고정성과 확정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진리·실체·본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면서도 정작은 자신은 비어 있어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름으로는 이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음과도 통한다. 하지만 화쟁(和諍)의 사유는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원효는 해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령언구 후령의리’의 방편을 통하여 언어기호를 통하여 궁극적 실체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지금 한국 전체가 바람난 사회라 할 정도로 욕망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여대생이 학비를, 주부가 과외비를 번다는 명목으로 유흥업소에 출입하며 몸을 팔고, 조신한 주부가 연하의 애인과 불륜을 행하고, 50대 중늙은이가 10대 소녀와 원조교제를 하고 심지어 스와핑을 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민생은 외면한 채 권력의 정점만을 향해 수백 억을 차떼기하고 매도와 공갈과 협박을 일삼으며 온갖 부조리를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하고 있다.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 라캉에 따르면 이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핍에서 비롯된다. 18개월 이전의 아기는 상상계(imaginary stage)에 머문다. 그는 이미지에 속박된다. 젖을 빨면서 어머니와 자기가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외계, 주체와 객체간에 뚜렷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18개월이 지나면서 아기는 거울의 단계(mirror stage)로 진입한다. 아기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어머니와 다른 몸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한다.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이는 조각난 몸의 고뇌에서 하나의 전체성으로 자신을 통일시킨다. 어머니의 한 조각으로 알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일관되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총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아기는 거울 속의 자기를 보면서 내면세계와 주위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주체는 내면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아기는 곧 ‘아버지의 이름(the-name-of-the-father)’을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하는 상징의 단계(symbolic stage)로 진입한다.
언어와 상징을 수용하여 이제 말을 시작한다.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어머니로부터 벗어난다. 인간은 어머니와 하나가 되려는 욕망을 억압하고 언어기호와 이에 담겨 있는 도덕, 윤리를 수용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화자 개인을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상징체계이므로 무의식은 자아로부터 독립된 질서와 체계를 갖는 큰 타자의 담론이다.
그러기에 무의식은 큰 타자(아버지의 이름, 법, 기표)의 담론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주체의 다른 모습이다. 라캉은 이를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9)라고 한마디로 압축하여 주체 중심의 사유에 머물던 현대 철학자들에게 외친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에 기반을 두고 발전시켜 온 서구의 현대 철학은 전복된다. 9)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ans. A. Sheridan (Harmondsworth: Penguin, 1977), pp.128∼129.
라캉의 욕망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욕망은 신기루란 것이다. 욕망의 근본 원인은 어머니로부터 갈라져 나온 결핍에서 출발하는데 누구도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이들이 욕망의 달성을 향하여 질주하지만 그에 이르는 순간 자신이 추구한 것이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모두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질주하지만, 갈 때는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달해 보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리 고대하고 갈망하던 이와 살을 섞고 나서야 그 여인이 한갓 비계덩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스토커처럼, 그에 이르고서야 자신이 그토록 추구한 대상이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상징과 도덕이 있는 곳에 욕구불만은 숙명적이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음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욕망이 자기를 소멸시키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어머니를 잃은 결핍에서 출발한다. 이 부족함을 메우기 위하여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 뒤의 권력과 사랑, 인정을 갈구한다. 타자들을, 타자들의 성과 권력과 명예를 소유하여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타자로 자아를 채우는 것이다. 욕망할수록 나는 나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욕망의 아이러니이다.
라캉의 욕망이론은 불법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라캉의 욕망이론은 욕망이 신기루, 허상임을 밝혀준다. 욕망을 향하여 질주하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타인을 살해하면서까지 추구하는 대상이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린다. 어느 누구라도 욕망을 달성할 수 없음만 알아도 그리 맹목적으로, 남들에게 해를 가하면서까지 욕망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바로 불타는 욕망, 갈애(渴愛)에 있다고 한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을 통찰한 붓다의 말씀이다.
그러니 모든 고통을 없애려면 욕망부터 버려야 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우리가 마주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려는 집착으로부터, 이 집착 때문에 빚어지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라캉은 불교에서 시사를 받아, 욕망은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욕망할수록 나에게서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나를 키우고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욕망은 아집에서 빚어진 것이다. 욕망은 타자의 더 큰 집, 더 많은 연봉, 더 높은 자리, 더 강한 권력, 더 황홀한 향락을 나, 혹은 나를 확대한 가족을 위하여 맹목으로 추구한다. 그러니 욕망할수록 나는 나에게서 멀어져 타자가 된다.
더불어 라캉은 인정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모두 욕망을 지향하는데 왜 세상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는가? 무의식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들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또한 강하다.(불교로 치면 선의 욕망, chanda에 해당할 것이다)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타인을 위하여 양보해야 한다. 진정 깨달은 자는 욕망을 완전히 버리고 해탈을 이룬다. 이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속인이 취할 바는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점함을 인식하고 타인을 위하여 나의 욕망을 유보하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기에 욕망의 이론은 연기론과 만나며 자비행(慈悲行)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평을 펼친다.
우리는 오랜 동안 실체론적 읽기를 해 왔다. 한 편의 시건, 소설이건 그 작품 속에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작가의 의도를 좇아 읽으려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가 한 편의 작품을 읽는 방식은 작가에 대한 자료를 모아 이를 종합한 다음 작가의 의도를 유추하여 작가가 창작하면서 작품에 담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읽기 방식은 ‘해석의 열림’을 부정하고 닫힌 읽기를 강요한다. 작가의 의도는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자신이 의도한 모든 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없으며, 적극적인 독자일수록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서 ‘기대의 지평’을 무너뜨리고 작품을 해독한다.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를 떠나 의미를 드러낸다. 더구나 예술 작품은 의도하지 않을수록 예술성을 획득하며, 작품의 기원·발생은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연기의 사유로 보면 작가가 독자이고 독자가 곧 작가이다. 단 한 편의 작품도 읽지 않은 채 작품을 쓰는 작가는 없다. 작가 또한 작품의 창조자이기 전에 작품의 독자이다. 작가는 자신이 읽은 작품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한다.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읽은 다른 작가, 다른 작품을 모방하거나 변형을 가하거나 부정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한다.
때로는 문장을 그대로 흉내내기도 하고 인물을 따오기도 하며 구성이나 플롯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지와 상징, 내적 구조 등이 작가의 전의식(前意識)이나 무의식(無意識)을 통해 스며들기도 한다. 더불어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 이미 독자가 그의 머리 속에 들어와 있다. 작가는 독자의 취향, 코드, 읽기 수준, 이데올로기 등에 맞추어 작품을 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다른 텍스트와 섞이고 관계를 갖는다.
독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상정하고 그와 대화하는 가운데 작품을 읽는다. 그러기에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를 떠나 의미를 드러낸다. 연주되지 않은 악보는 공책에 불과한 것처럼 독자를 만나 실현되지 않은 작품은 텍스트가 아니라 종이책에 불과하다. 작가가 행한 것은 텍스트에 인쇄된 검은 활자 글씨에 불과하며 글자 사이의 여백을 메우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수동적으로 텍스트를 읽기도 하지만 진정한 주체로 되려고 할 경우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텍스트를 다시 구성하고 다시 쓴다. 활자의 간극을 메우고 연관관계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문학은 독백적으로 텍스트의 초시간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기념물이 아니라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복합체인 것이다.”10) 텍스트는 독자였던 작가를 통하여 또 작가와 공동의 제작자였던 독자를 통하여 짜지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든, 교회나 국가든, 개인적·무의식적·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구조의 영향력이 스며든다. 때문에 “텍스트는 독자의 지식이 깊어짐에 따라, 여러 독자가 간섭함에 따라, 독자가 접하였던 텍스트에 따라 끊임없이 변전하는 상태, (텍스처를 짜내는) 영원한 텍스처이다.”11)10) H. R. Jauss, Toward an Aesthetic Reception(Brighton: Harvester Press, 1982), p.21. 11) Julia Kristeva,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NewYork: Columbia
이렇게 작가 안에 이미 독자가 들어와 있고 독자 또한 읽기를 통하여 텍스트를 다시 쓰니 작가와 독자는 둘이 아니다. 반면에 작가는 텍스트를 쓰는 자이고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자이니 둘은 하나도 아니다. 이처럼 텍스트를 통하여 작가와 수용자는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작가와 독자가 연기의 관계이기에 텍스트에는 수많은 다른 텍스트가 겹쳐 있다.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은 텍스트를 내적으로 의미를 갖는 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따라 드러나고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되는 것으로 보는 것, 역사적인 것, 내재적 시간이 아니라 이질적인 일시성에 의하여 꼴을 짓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텍스트는 현전의 구조가 아니라 타자의 흔적과 모사이며, 다른 텍스트 구조의 반복과 변형에 의하여 꼴을 짓는 것이다.”12)12) John Frow, “Intertextuality and ontology,” Michael Worton and Judith Still(eds.), Intertextuality-Theory and Practices(Manchester and New Yor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0), pp.45∼46.
연기의 사유는 상호텍스트성 이론과 통한다. 하나의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는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다(不一).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연관을 맺고 이것과 관계 속에서 의미를 드러내니 둘도 아니다(不二). 하나의 텍스트는 홀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른 텍스트와 관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에서 드러난 차이일 뿐, 그것을 실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는 것 또한 아니다.
서양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다. 서양이 2천여 년 이상 실체론적 사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화엄 연기론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한 단계 더 비약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 또한 서양의 사고에 주입되어 불경마저 실체론적 읽기를 하고 있다. 의상과 원효의 연기 이론은 불경을 연기의 패러다임으로 읽는, 진정한 상호텍스트성 읽기의 지평을 열 것이다.
바야흐로 사이버 시대다. 사이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누구든 왕이 되어 가상의 공간에 왕국을 만들어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할 수 있다. 얼굴은 누구, 다리는 누구 식으로 최고의 미인을 합성하고 성격을 부여하여 잠자리를 가질 수도, 함께 세계일주를 떠날 수도 있다.
하이트 맥주 광고의 성공은 사이버 문화의 성격과 위력을 잘 보여준다. 그 광고가 나오기 전까지 맥주 집에 가서 크라운 맥주를 만나는 일은 열 번 가서 한 번 볼까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두산의 오비 맥주가 맥주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광고 하나로 역전되었다.
광고의 무엇이 그런 힘을 발휘하였을까? 하이트 맥주의 광고를 보면 지하수가 콸콸 솟아오르면서 하이트 맥주병이 따라서 오른다. 그러면서 “맥주를 끓여 드시겠습니까? 지하 150미터 암반수로 빚은 맥주, 하이트”라는 카피가 따른다. 이 광고는 대성공을 거두어 두산그룹 자체를 부도위기에 몰 정도로 맥주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그 광고 속의 지하수는 실제 지하수가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한 가짜 지하수이다. 맑고, 차고, 시원하며, 푸른 지하수의 긍정적 특성을 모두 가진 지하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이미지를 모아 가짜 지하수를 합성한 것이다. 이처럼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고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커다란 힘을 가지고 현실을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이버 세계만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현실과 환상을 전도시킨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시대에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자체가 더 이상 우리에게 신기한 기기는 아니다. 텔레비전은 이제 자연스러이 우리의 안방이나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이미지 또한 자연의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현실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가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진실보다 텔레비전의 진실이 더 진실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세계의 어린이는 미국 사회를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안다. 이는 실제 그런 것보다 미국의 드라마가 폭력 장면을 자주 방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린이는 길가에서 젊은 흑인을 만나면 피한다. 젊은 흑인들이 범죄 드라마에서 범죄자로 자주 등장하기에 으레 젊은 흑인들은 범죄자인 것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한국의 젊은 주부가 대개 애인 하나쯤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대다수 젊은 주부들은 건전하나, “불륜 없이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의 텔레비전의 드라마에서 미시족이 불륜을 맺는 것을 드라마의 주요한 소재로 삼기에 그렇게들 착각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중들이 텔레비전 속의 환상을 실제의 삶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드라마에 나타난 사랑을 흉내내어 사랑하고 드라마나 상업광고에 언뜻 비친 일상생활을 자기의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다. 주인공의 ‘폼을 잡으며’ 커피를 마시고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오늘 처음 만난 연인에게 달려들어 광고의 한 장면처럼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이런 예는 모두 영상을 절대화하고 픽션을 사실로 착각한 데서 빚어진 오류들이다. 이렇듯 텔레비전이 현실과 환상을 대치하고 더 나아가 그 환상으로 현실을 바꾸어버리기에 학자들은 “텔레비전은 인간의 고안물이다.”라는 평범한 말을 되뇌는 것이다.
사이버, 혹은 대중문화가 만든 이미지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가상이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점이다. 사이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이버’란 말 그대로 현실이 아니다. 가상이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다. 오늘 사이버 공간에서 한반도를 수백 차례 통일시켜도 내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은 님의 영상에서부터 목소리와 잠버릇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료를 입력하여 살려놓아도 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에 어떤 환상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환상이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지와 시뮬라시옹을 현실로 착각하는 한 우리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으며 주체는 없고 조작당하는 대상만 있다.
그러나 현실은 진정한 현실인가? 우리는 흔히 현실을 가상이나 꿈, 이상, 의식 등과 대립시켜 바라본다. 현실은 과연 가상이나 꿈, 이상, 의식 등과 대립되는 의미일까?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13)라고 말한다.13)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서울: 민음사, 1992), 40
흑인을 강도로 그린 미국 드라마를 보고 미국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여 흑인이 강도로 변할 때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무너진다. 텔레비전에 묘사된 미국식 사랑을 받아들여 한국의 젊은이가 미국식으로 사랑을 한다면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가상일까? 이 모든 것이 허상인 줄 인식하는 데서 우리는 온전할 수 있다.
눈이 내려 하얗게 덮힌 저 산과 나무는 과연 존재하는 실체일까? 들이나 하늘이 없다면 산도 없으며 풀이 없다면 나무도 없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하듯, 실제의 세계는 카오스이고 무한대이나 인간이 임의로 범주를 나누어 들과 산과 나무로 나누어 불러주는 것일 뿐이다. 내가 거리에서 군사 독재자를 향해 돌을 던졌을 때,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다발을 한 아름 안기며 세레나데를 불렀을 때, 현실은 찰나의 순간뿐, 현실은 곧 사라져버리고 ‘저항’과 ‘사랑’이라는 해석만 남는다. 아니, 내가 그 현실을 텍스트로 묘사할 때마다 현실은 비로소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현실 또한 허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면이 거울인 방에 촛불을 가져다 놓으면 무한대의 촛불이 만들어진다. 모든 거울들이 거울 속의 촛불들을 무한히 반사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을 반사하기에 거울이고 동시에 다른 무엇에 의해 반사되기에 상(像)이다. 우주에 있는 일체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포섭하고 있기에 서로 반사경인 동시에 영상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은―적어도 어떤 방식으로는―다른 모든 사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반영해내며, 어떤 특정 사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라기보다는 대상의 상이나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성에 대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때 깨달음에 이른다.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필경공(畢竟空)의 인식이 깨달음의 바탕이다.
화엄철학은 사이버 세계와 뉴미디어를 설명하는 데 적합한 사상이다. 다시 말해 화엄철학은 사이버 세계와 뉴미디어를 설명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촛불이 무한대로 비추는 방안에 수정공을 가져다 놓으면 그 수정공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비춰진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가 한 티끌 속에 있는 한 원자에 압축되어 있고 우주의 구조와 원자의 구조가 상동성을 갖기에, 천체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연구하여 우주의 비밀을 해명하려 한다. 전자가속기 등을 통해 원자 안의 작은 미립자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면 우주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고 허블 망원경 등을 통해 우주의 비밀이 밝혀지면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도 한 걸음 진전된다. 하나의 세포를 채취해 배양하면 한 사람의 복제인간이 만들어지듯, 세포가 인간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모든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이다. 망망한 우주가 곧 하나의 원자이고 하나의 원자가 곧 망망한 우주이다. 의상의 말대로 하나 중에 일체가 있고 일체 중에 하나가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는 일체와 관련지을 때 하나이다. 하나에 열이 있고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하나에 일체가 담겨 있으니 하나가 전체이다. 국화꽃 한 송이에서 무상(無常)을 읽고 연기의 법을 깨닫듯 하나에서 전체를 보니 하나가 곧 전체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무한한 조화가 연기 아닌 것이 없으니 전체가 곧 하나이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인다라망의 구슬 속에 담겨 있으니 일체가 하나이다.
화엄의 사유로 보면 사이버 공간은 분별심을 떠나 퍼지의 사유를 하려 한다. 이곳에서 나는 타인인 동시에 나이며, 독자인 동시에 작가이고 작가인 동시에 독자이다. 이곳에서는 나와 남, 동일자와 타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무수한 네트워킹 속에서 모든 것을 둘로 가르던 이분법은 자연스러이 사라진다. 내가 타인 속의 나와 대화를 하고 타인이 내 속의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곳이다.
내가 인터넷상에 올라와 있는 판타지 소설을 내려 받아 읽은 후 줄거리를 조금 바꾸어 다시 인터넷에 올리면 이것은 금세 네티즌에 의하여 수많은 하이퍼텍스트를 만든다. 내가 합성하여 만든 비서가 내 문서를 작성해 주고 하루의 일과를 알려주듯이, 흑인을 살인강도로 만든 롤플레잉게임이 흑인에 대한 혐오감을 만들고,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혐오감과 차별로 흑인이 폭력에 기울어지는 것에서 보듯, 현실이 바로 환상으로 변하고 환상인가 하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
누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 매트릭스가 아니라고 단언하겠는가?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이미지를 통하여 느끼고 생각하기에 상징계(symbolic stage)를 깨고 상상계(imaginary stage)를 지향한다.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가고 자유로이 나가기에 모든 경계, 영토, 권위, 제도는 무너진다. 익명의 네티즌끼리 소통하면서 누구든 인종, 계급, 성, 사회적 위상, 학력을 묻지 않는다. 현실, 또는 아날로그식으로는 권력을 형성하던 요인들이 작용을 하지 않으니, 권력과 권력의 담론들은 이곳에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은 해방의 장이자 평등의 장이다.
화엄의 원리를 따라 나와 남, 작가와 독자, 발신자와 수신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이들과 네트워킹을 하는 것, 그리하여 내가 전혀 모르던 곳의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며, 내가 정보를 올린 것이 익명의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여 정보를 모아 내 속의 타인과 타인 속의 나들이 소통하면서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보화사회에 맞는 패러다임일 것이다.14)14) 그렇다고 정보화사회를 긍정적으로만 보려는 것은 아니다. 정보화사회는 가상과 현실의 전도, 빅브라더의 정보독점에 의한 전체주의화, 미국 문화의 세계화와 동시화, 정보통제, 정보혼란, 도덕적 타락, 주체의 소멸 등 역기능을 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정보화사회에 있어야 할 당위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토대는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화사회, 탈산업사회로 급격히 변동하면서 인간과 이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은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다른 요인도 있지만 변한 토대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는 새로운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유용하다. 변한 세계는 변한 세계관을 요구한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고 말한다. 유리창만 닦으면 하늘이 다시 청정함을 드러내듯, 무명(無明)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불성(佛性)이 스스로 드러나니 그 먼지만 사알짝 닦아내면 된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인문학이란 무명을 걷어내고 인간 속에 내재한, 자연과 하나가 되고 내 밖의 수많은 타자들과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려는 마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욕구, 나보다 더 약한 것들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스스로 드러내도록 안내하는 학문이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은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바로 여기가 도솔천이듯, 깨달음은 우리의 몸 속에, 우리가 있는 이 땅 위에 현존한다. 자연의 공(空)함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은 특정한 몸이요, 이 몸은 또 특정한 장소에 자리한다. “공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오로지 이 순간에만, 바로 이곳, 내 몸 속에서 실현된다.”이처럼 불교철학은 21세기의 사회의 현실이란 맥락에서, 이 땅 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몸을 바탕으로 우리 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앞으로 불교철학을 21세기 오늘의 맥락에 맞게 재해석하여 이를 밝히는 새로운 인문학을 정립하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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