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로서의 불교
원신연
고려대학교 철학과 재학중
1. 들어가며
주말을 이용해 여자친구와 함께 불교 수행에 참가하고, 지하철에서 틈틈이 《화》 같은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틱낫한의 한국방문 강연회장은 발 디딜 틈이 없고, 마돈나가 인터뷰에서 선수행이 자신에게 미친 긍정적인 면을 홍보한다.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은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불교는 오늘날 하나의 세련된 유행이 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오늘날의 불교란 무엇이며, 현대인은 불교를 무엇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숨가쁜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란 산속의 수행자의 관심과 분명히 다를 것임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교’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12연기’와 ‘해탈’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mindfulness’와 ‘마음의 평화’다. 사실 대부분은 욕망이 모두 충족된―혹은 욕망을 완화시켜―마음의 평화를 원하지, 욕망을 초탈한 마음의 평화를 원하진 않는다. 자신의 삶이 보다 만족스럽기를 원하지 삶을 내던진 채 고독하고 힘들게 삶의 본질을 묻고자 하진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의 불교는 키치(kitsch)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해탈이라는 불교의 목적과는 괴리된 채 몇 가지 요소들만이 따로 떼어내져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사는 마음으로 틱낫한의 《힘》을 사는 것뿐이며, 리더쉽센터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사찰에서 여는 수행에 참가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탈맥락적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키치적 이해에 바탕하고 있고,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게 하는 것은 키치의 악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가 이러한 소비를 유발하고 가능하게 만들었다.
본 글에서는 키치적 이해란 무엇인가를 먼저 소개한 뒤 불교가 현대인들에게 키치적으로 소비되고 있음을 몇 권의 베스트셀러와 기사, 그리고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을 들어 제시하고자 한다. 틱낫한의 책이나 달라이 라마의 책은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불교가 아닐 수도 있다.(진정한 불교가 사실 뭔지도 모르겠지만) 또한 진정한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본 글의 논지를 해치진 않는다. 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 불교가 무엇이다’라는 점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불교란 무엇일까’에 가깝다. 사족을 달자면 《근본불교》 같은 책이 출판되면 만 권이 안 팔리는 반면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백만 권이 넘게 팔리고 있다. 더군다나 《행복론》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책이 불교에 기초해서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시점에서 일반인들에게 있어 불교란 《근본불교》이기보다는 차라리 《행복론》이 아닐까?
2. 키치란 무엇인가
키치란 예술작품에 대하여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서 키치를 무엇인지 말하고, 키치적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 있게 엄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한 본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에 대한 대답은 별 필요가 없고, 단지 고급예술과 통속예술이라는 구분이 가능하며 이 사이에 키치가 기생한다는 정도만 알면 된다. 고급예술과 통속예술의 구분 기준으로 하나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고급 예술이란 ‘인간존재와 우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 수많은 구분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이 기준을 제외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술가의 목적이란 어찌 보면 삶에 대한 이해의 증진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과학자와 철학자와 수행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이 광활한 우주와 덧없이 보이는 인간존재에 대해서 가식 없는 탐구를 하며 그 과정에서 결코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다. 즉 예술가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서 양보 없이 육박해 들어가며 그 진실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한 순간 ‘어느 정도로 만족스런’ 무엇인가 탄생한다. 이것을 좋은 예술, 고급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전 존재를 바치는 노력 끝에 겨우 잠시간의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존재의 불안을 잊는다.
키치는 이러한 고급예술에 반대되는 예술이다. 하루의 고된 노동에 지친 인간에게 창의적이고 새로운 도상이나 관습을 사용하는 영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에게는 그저 ‘익숙하고 즐길 수 있는’ 도상과 관습으로 가득 찬 오락영화가 필요할 뿐이다. 고급예술은 이러한 키치예술을 만나게 되면서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고급예술은 그 본질상 긴장의 해소라기보다는 긴장의 재생산이다. 진지한 예술이란 인간의 부조리와 세계의 불가해함에 대해서 물러서지 않는 통찰이고,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어느 프랑스 비평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고급예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는 긴장의 이완과 휴식을 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긴장을 제공한다.
예컨대 램브란트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하루의 노동 이후에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그 다층적인 후경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 괴로움을 주는 것이며, 오늘날의 속도감 있는 플롯구조에 전혀 영합하지 않는 그리스 비극을 힘들게 읽어봤자 남는 것은 인간존재에 대한 어쩔 수 없음이다. 고급예술이란 본래 자신의 전부를 걸어 매달릴 것이지 ‘반지의 제왕’같은 노동 후의 휴식거리가 아닌 것이다.
통속예술은 이에 대비해 즐거움과 안락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고급예술이 지니는 오만함이나, 훈련의 필요성도 없다. 이 통속예술에 대해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속예술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첫번째 배경은 탈진할 만한 근로이다. 산업혁명 이래 그 혁신은 인류의 더 많은 휴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탐욕을 위해서 사용되어 왔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더 많은 욕구를 부르고, 그 욕구에 부합하기 위해 증대된 생산력은 더 많은 생산을 하려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끝나지 않을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무엇을 위한 노동이란 말인가. 그 속에서 인간이 ‘아, 좀더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푹 쉴 수 있겠지’라고 위안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가끔씩 다가오는 휴가는 오히려 또 다른 노동을 위한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여행도 가야 되고, 집안 수도도 고쳐야 되고, 못 읽었던 책도 읽어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잘 교육된 오늘날의 노동계급은 무위도식을 하나의 수치로 여긴다. 인간이 어떻게 일하지 않고 즐기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베짱이의 비참한 죽음을 보며 개미가 되기로 맹세했던 것이다. 노동계급―쁘띠부르주아도 별 차이 없겠지만―에겐 매일이 휴일이라는 귀족의 사고가 방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통속예술이 자리하게 된다. 하루하루의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에게 고급예술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이란 것은 모름지기 즐기기가 쉽고, 그 향수가 포근해야 한다. 고급예술의 겹겹이 싸인 문은 귀찮기만 한 것이다. 누가 본질을 원하는가? 예술은 단지 한 순간의 휴식만을 제공해 주면 되는 것이다.
또한 15세기 화폐경제의 성립 이후로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게 되었다. 이제 돈으로 구매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치의 금전적 환산이 가지는 의미는 ‘모든 가치가 소비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누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존재를 위해서 힘쓸 필요가 과연 있을까? 과연 그럴려고 할까? 소비하고 소유하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더 속편하지 않는가.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나야 한다. 테니스도 치고, 클레이 사격도 하고 오페라도 봐야 한다. 이것은 진지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아니라 안락과 휴식을 위한 소비일 뿐이다. 열심히 소비해서 재충전한 뒤에 다시 경제활동에 뛰어들기 위한. 하지만 무료하고 끝없는 근로를 견디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지 않은가. 켕기긴 하지만 조금만 뻔뻔스러우면 인생이 편하다.
그런데 키치는 이 뻔뻔스러움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허위의식을 채운 통속예술이다. 그것은 손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통속예술과 같지만 키치는 고급스러우며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통속예술은 양심적이다. 그것들은 자신이 대량 생산 사회의 소비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고급예술로 불리길 염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키치는 그 감상이 극히 피상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엄연한 고급예술로 치장한다.
산업혁명 이후에 인간의 가장 비참한 점은 창조성의 상실이다. 인간이란 동물은 살아가면서 가치를 추구하려 하고, 무언가 창조해내려고 하는 재미있는 존재다. 따라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투자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순간에는 인간은 극단적인 소외나 고독을 겪지는 않는다. 보잘 것 없는 농사를 짓더라도 창조자라는 점에서는 위대한 예술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분업화된 컨베어 시스템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창조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노동력을 투자하고 임금을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임금은 결코 창조물이 되지 못한다.
노동력을 통한 창조의 행위, 자아실현의 욕구와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소비다. 자아실현을 하고 싶으면 돈을 소비하라. 가치의 금전화 이후 소비되지 않는 것이 있던가.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힘든 근로에 지친 노동자께서는 위대한 예술품을 향유할 여력은 이미 없다. 그런데 가치는 추구해야만 한다. 따라서 키치가 기생하게 되는 것이다.
키치는 교묘하게 위장되어 책,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 나아가 서비스까지 잠식한다. 통속예술이면서 스스로 고급예술임을 자칭한다. 아니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의무교육을 충실히 이수한 노동자가 어느 정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양식이다.
키치는 ‘나를 소비하고 열심히 너의 예술적 안목을 자랑하라구, 나를 소비하는 이상 너는 진정한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고, 너의 고상한 향유는 창조에 버금가는 것이야.’라고 열심히 속삭여댄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은 통속예술일 따름이다. 키치는 판매되기 위해 자신에게 충실하기보다는 소비자에게 치근대야 하며, 그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다. 독창적이어서는 안 되고 평범해야 하며, 독창적이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우회로를 열어둔다. 소비되어야 할 것 아닌가.
따라서 키치는 다음과 같은 악덕을 지닌다. 키치는 통속예술임에도 고급예술을 가장하므로 기만적이다. 더하여 현실 옹호적이다. 우리 삶이 신기하게도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려 하고 더 나은 현실에 살려고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키치는 이마저도 농락한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예술인 양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현실 옹호적이다. 무언가 나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자리에 서서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고급예술과 통속예술의 또 하나 큰 차이는 거리두기에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키치적 이해가 드러난다. 통속예술은 그저 욕구의 대상으로 소유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고급예술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 서서 서로를 이해할 만한 자세를 갖추기 전에는 그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쉽게도 고급예술을 창조함에 있어서 작가는 자신의 전 역량을 그 내재적 가치에 투여하기 때문에 감상자에 대한 배려는 빈약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급예술은 모든 순간에 향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즉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저 입에 넣기만 하면 즐길 수 있는 새우깡이 아니라,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그 공간을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귀기 힘든 친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키치는 고급예술과 다르지 않다. 키치는 욕구대상을 소유할 만큼 저급하지는 않다. 오히려 키치의 특징은 욕구대상에서 욕구자체로 관심을 옮긴다는 데에 있다. 클래식 음악 자체보다 그 음악을 우아하게 감상하고 있는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고 거지를 도우며 자신이 얼마나 자비스러운 인간인가에 놀라며 기뻐하는 것처럼, 대상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대상을 누리는 자신에 대해 환호하는 것이다.
저 그림 자체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주인공이 예전 남자 친구와 닮아서 만족하며, 음악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예전 연애시절에 어느 까페에서 들었던 음악이라서 즐기는 것은 전형적인 키치다. 그들에게는 그 그림이 어떤 가치를 지니든, 그 음악이 어떤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즉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제멋대로 자신에게로 옮겨와 버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키치는 하나의 작품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오히려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의 태도와 작품과 맺는 그의 심적 관계가 오히려 키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키치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키치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키치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커피 광고에서는 커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아한 여성이 나오고 성공한 남자가 나와서 둘이 저녁노을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고 하면서. 혹은 냉장고를 광고하면서 고급스러운 여자가 여유롭게 웃으며 여자라서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관심을 상품과는 동떨어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킨다는 점에서 키치이다.
1) 소비 패턴으로서의 불교
붓다가 삶의 고통에 대해서 괴로워하면서 존재의 궁극적인 해탈에 육박해 들어갔었고, 결국 그 해답을 찾은 후에 설한 것이 불교라는 점에서 불교는 예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불교에서 전하는 가르침에 따라 다시 근원에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는 한 명의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사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수행자와 과학자와 예술가는 ‘참다운 존재의 관찰 혹은 이해’라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사라진 이후에 존재와 우주에 대해 두려워하며 인간이 예술을 추구하였기에 종교는 예술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독교의 그것처럼 성스럽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안내일 뿐이며, 그러한 점에서 불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신 개념은 상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리스도와 붓다는 같지 않으며,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고도(Godot)는 미륵이라기보다는 메시아가 아닐까? 이런 면에서 시중의 인식상 불교가 종교라는 범주에 포함되지만,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통해 해탈에 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본질은 기독교를 종교라고 할 때의 ‘종교’의 의미와는 맥락이 다르다고 보이며, 오히려 예술과 더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고도 자본주의 사회인 오늘날 이러한 불교도 키치적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의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다. 그것은 키치적 이해라는 점에서 탈맥락적이며, 소비된다는 점에서 손쉬운 휴식으로의 서비스와 같이 여겨지고 있다. 더구나 키치로서 소비된다는 것에서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만족과 허영을 제공하다는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모두가 불교의 원래 존재기반이, 불교의 문제의식이, 그러한 맥락에서 불교가 무엇을 말하는가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몇 가지 요소만을 탈맥락적으로 따오고 있다. 혹은 그렇게 생산되지 않더라도 소비자가 탈맥락적으로 얼마든지 소비하고 있다.
틱낫한이 그의 책 《힘》에서 주장하는 ‘mindfulness’는 불교의 정념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깨달음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의 작은 마음가짐에 의해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반가운 말이고 기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얼마든지 탈맥락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현실에서의 마음챙김은 깨달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도 이용될 수 있고,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도 얼마든지 이용 가능하다. 틱낫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틱낫한의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른 목적으로 책을 구매하고 있다. 과연 그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 중에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고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될까?
피곤한 노동자로서 한 사람의 인간은 이러한 진지한 고민을 할 여력이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덧붙여 틱낫한도 자신의 책이 어떤 양식으로 읽힐지 대강 알고 있는 듯하다. 정념의 개념을 현대인에 맞게 해설했다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바쁜 비지니스맨이 어떻게 좀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효율적인 시간관리가 가능한지 등의 예가 나온다. 결정적으로 무상의 진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무상을 깨달은 주식 중개인이 진솔하게 ‘자신은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에 대해서 절대적 진리를 모르다’고 했더니 더 많은 고객이 생기더라는 예를 들고 있다. 너무하지 않는가!
온 마음을 다해 찻잔을 감싸 안고, 온 마음을 다해 차를 마신다. 깨어 있는 마음mindfulness으로 …중략… 누구나 차를 따르는 법과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온 마음을 다해 차를 따르거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업가나 직장인은 프로젝트를 마시고 학생은 내일 볼 시험을 마신다. 주부들은 저녁 반찬을 마신다. …중략… 우리에게는 현재에서 달아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삶의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위 내용은 마음챙김을 설명하는 하나의 비유다. 재미있게도 별로 불교의 맥락이 드러나지 않는다. 학생은 내일 볼 시험을 마시지 말고 집중해서 차를 마시고 휴식하면 내일 볼 시험을 더 잘 칠 것 같은 인상이 들지 않는가?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해 순간에 집중하라는 말은 대기업 CEO가 좀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서도, 학생이 수능준비를 위한 효율적인 시간관리를 위해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이런 내용은 웬만한 처세술 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시간을 구분하고, 지금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시하는 것은 시간관리서의 대전제라 할 수 있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해야 시간관리의 중요성이 나올 것 아닌가.
하이럼 스미스의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이란 책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내 손가락으로 만든 그림자로 과거와 미래를 나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선 뒤로는 사라진 시간, 이제 더 이상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 선 앞으로는 미지의 시간이 놓여 있나니 어둠 속에 그리고 그대가 마음대로 할 수 없네.”
틱낫한은 돈이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좀더 만족스런 참된 삶이라는 맥락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고 변명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어떤 처세술 책이라도 순진하게 돈이나 세속적 성공을 위해 시간관리를 하라고, 현실에 전념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이럼 스미스는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에서 사명서의 중요성을 극구 주장하며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참되게 추구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선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노력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선 그 가치의 예로 사랑이나 행복, 만족감 등을 들고 있다. 실은 현대인들이 바라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그리고 틱낫한의 책을 사는 목적도 이것들에 가깝지 않을까?
행복을 찾고 싶다면 우선 자신을 알아야 한다. …중략… 당신이 시간을 쏟는 대상들을 우선순위대로 살펴보라. 일에 90%, 친구들에게 5%, 그리고 가족들에게 그 나머지를 쓰고 있지는 않은가? 이 순서가 당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서와 일치하는가? …중략… 단신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 큰 부담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오(no)’라고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힘》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우선순위가 높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한 다음, 다른 일들에 대해서 좋은 말로, 그러나 변명이 되지 않게 “못한다”라고 말할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런 용기는 자신의 내면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하겠다’라는 강렬한 결심에서 나온다.
-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하나는 틱낫한의 글이고 하나는 스티븐 코비의 글이다. 두 글 모두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정해서 행동해야 하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나 우선순위에 부합되지 않는 일에는 ‘아니오(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 생각이 비슷하다든지, 누가 누구를 베꼈을 수 있다든지, 행복의 추구란 목적이 같으니까 방법도 비슷할 수 있지 않느냐 등등의 것이 아니라 과연 소비자들은 하이럼 스미스나 스티븐 코비의 책을 사는 것과 틱낫한의 책을 사는 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점이다. 소비자가 두 책을 구매하는 목적 사이에는 사실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불교는 어디로 갔는가.
틱낫한의 최근 저서 《화》는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종교역학 카테고리뿐만 아니라 《아침형 인간》, 《설득의 심리학》과 함께 자기계발 카테고리의 베스트셀러로도 올라와 있다. 책을 기획한 출판사의 의도나 독자가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서점의 심리를 살필 수 있다.
2) 불교의 키치적 이해가 초래한 오해 혹은 진실
다음은 신문기사 등에서 묻어나는 키치적 이해를 보자. 조금 길지만 기사의 전문을 인용하겠다.
[〈조선일보〉 2003. 10. 23일자. 주말 매거진]
산사체험, “미웠던 일 용서하시고…”
새벽산책 예불 모닥불놀이… 휴양지서 푹 쉬듯 ‘마음 수양’
참가자들 “마음의 때 벗겼다… 다시 현실과 부딪쳐 보겠다”
법당 안에서 올리는 새벽 예불, 그리고 천수경 독송…. 스님이 읽는 독송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 같다. 불경에 정통하지 않아 그 의미는 잘 다가오지 않아도, 마음을 모아 따라해 본다. 혹은 화두(話頭)를 들어본다. 세면장에 붙어 있던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 이 뭣고’라는 화두다.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의 세상, 내가 존재하기도 전의 그 세상,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그리 멀지도 않았던 세상을 생각하고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다.
지난 17일부터 전라남도 두륜산 대흥사에서 열린 수련회 ‘새벽 숲길’은 2박3일간의 산사 체험 프로그램이다. 예불이나 좌선, 108배 등 절에서 하는 고유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밤을 새워 선(禪)을 수련하는 ‘용맹정진’ 같은 프로그램은 없고, 분위기는 자유스럽다. 스님들은 “산속에서 쉬다가 가라”고 한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좀 힘들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몸과 마음이 새롭다. 예불 이후 스님과 함께 하는 새벽 숲길 산책은 신비롭다. 산채와 버섯 등으로 먹는 아침 공양은 꿀맛이고 이후의 절 마당 쓸기는 즐겁다.
그것은 느긋하면서도 절제된 휴식이다. 스님과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 저녁 예불 후의 모닥불 놀이, 자유정진 시간의 두륜산 산행 등은 세간의 어느 야유회보다도 더 푸근하고 풍성한 느낌을 준다.
저녁시간, 참선 장소인 청운당에서 하는 스님과의 대화는 웃음이 넘쳐났다. 수련생들은 “불상의 양미간에 왜 붉은 점이 있나” 등의 궁금한 점을 물었고 스님은 불상의 유래를 인도의 역사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강연했다. “꿈에 스님들과 절이 자주 보이는데, 출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본인이 잘 생각해서 출가하고 싶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절에서 참선도 하고 예불도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 하지만 속세로 내려가면 나의 근심 걱정거리는 그대로 있다. 불교는 현실을 회피하는 것 아닌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컨대 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교가 돈을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생로병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스님은 딱딱해질지도 모를 질문을 간명하게 처리했다. 문답은 적나라하게 이어졌다. 사실, 뭘 숨길 이유도 없었다.
“절에 가면 스님들과 얘기하고 싶은데, 선물로 무얼 들고 가면 좋습니까?”
“나는 박카스 갖고 오는 거 싫어합니다.”
“차를 갖고 가는 것은 어떨까요?”
“차요? 스님들 입맛이 얼마나 고급인지 압니까?”(웃음)
“빈손으로 가면 뭐라 그러지 않을까요?”
“스님이라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절에 가면 법당 참배 후에 차 한잔 달라며 이야기해 보세요. 좋은 질문을 잘 준비하면 얘기를 많이 해줄 겁니다.”
일요일 오전 마무리 감상을 얘기하는 시간, 수련생들은 하나같이 “절을 떠나기 싫다”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내 속의 너무 많은 나를 비우려고 왔는데, 설거지하면서 마음속의 때를 다 벗겼다” “부산서 5시간 걸려왔는데, 대흥사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근심 걱정이 다 사라졌다” “염불을 배우려고 했는데, 그보다도 편히 쉬면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어 좋았다” “스님이 찍어준 사진이 예쁘게 나왔다. 절에서 행복했으니까 예쁘게 나온 것 같다” “절제된 휴식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108배를 처음 해봤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감상들이 쏟아졌다. “‘산에 왔으면 산이나 보고 가시요, 잉?’ 하던 스님의 말에 마음이 편했다” “나는 원래 가톨릭 신자인데, 절이 편하게 느껴졌다”는 소감도 있었다.
그러나 수련회는 수련회일 뿐. 세속으로의 귀환을 앞둔 한 수련생의 말에는 근심이 묻어났다. “어젯밤에는 정말 다시 돌아가기 싫었어요. 그렇지만 새벽에 산책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죠.” 그의 목소리는 “수련회가 정말로 마음의 안식이 되었다. 두렵지만 다시 현실과 부딪쳐 보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부제목으로 쓰인 〈참가자들 “마음의 때 벗겼다…… 다시 현실과 부딪쳐 보겠다”〉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참가자들은 휴향지에서 푹 쉬듯 마음 수양을 한 뒤에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인도를 부르짖는 류시화 같은 작가들이 인도에 가서 원하는 것을 찾아 현실로 돌아오려 하지 인도에서 살려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산사체험은 결국 박카스 한 병 마시는 것과 목적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것이 저급한 박카스가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하고 매력적인 사상 중 하나인 불교라고 자위하는 점이 다르다.
“나는 원래 가톨릭 신자인데, 절이 편하게 느껴졌다”라고 할 정도니 얼마나 탈맥락적인가. 불교가 원래 가톨릭을 배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교가 가르침처럼 느껴졌다면 가톨릭 신자가 불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가톨릭은 다른 가르침과는 배치되니까 말이다. 특히 한국 가톨릭이 불교와 다원주의를 논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따라서 산사체험 속의 불교는 결국 저 소감을 말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리더쉽센터에서 주최하는 자기관리 프로그램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불교는 어디로 갔는가?
산사체험이나 여러 수행 프로그램들은 사실상 그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현대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서비스로 소비되고 있다. 산사체험은 위와 같이 주말여행처럼 느껴지고 있고, 수행프로그램은 그 목적을 단지 ‘만족스럽게 살기(well-being)’ 정도로 맞추고 있다. 혹은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져 소비되고 있다. 어떤 수행 프로그램의 참가가격은 백만원에 육박하고 있고 태권도 자격증처럼 코스도 나누어져서 이수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본래 키치의 악덕은 대상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버리는 측면도 있지만, 그 소비가 기만적이라는 데에 있다. 가치의 획득이 오늘날 소비의 주요 목적이라 볼 때, 산사체험과 수행이 인기를 끄는 데에는 키치의 악덕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의 후광이 씌어진 명상이나 산사체험은 자기관리 프로그램보다 뭔가 깊이 있고, 지적으로 세련된 느낌을 준다. 이는 오리엔털리즘이 만들어낸 신비주의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소비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단지 키치의 악덕이라고 분석하는 편이 정확하다.
인간은 가치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삶이 뭔가 충만하기를, 더 충실하기를 바란다. 바쁜 현대 사회에 있어서 무언가 만족스러움을 주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는 어렵고 그 만족감 역시 즉각적이어야 한다. 종교도 모름지기 이해하기 쉬워야 되고 실용적이야 한다. ‘이렇게 사니까 뭔가 좀 뿌듯하게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세련되고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으면 더 금상첨화가 아닌가.
오늘날 불교에 대한 많은 이해는 또한 여기에 기반한다. 불교는 동양사상에 씌어진 신비주의적인 측면에 이미 동승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서양에서 비롯된 수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이 마치 불교에 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불교 경전에서 그 관련자료를 모아 근거로 삼아 주장을 펼치는 작업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보통 현대적 이해라는 문제 의식 아래에 불교는 환경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자본주의에서 비롯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정당한 작업인가. 이것은 불교가 처음 미국에 전파될 때 그들의 과학적 사고와 배치되지 않는 점만을 모아서 홍보했던 작업과 같은 종류의 잘못을 다시 한 번 저지르는 게 아닌가.
하나의 예로 노자가 공해문제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태중심주의를 주창했다고 말하면 보통 별 저항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 가족이 일년 내내 고생해서 경작해봤자 세금내고 입에 풀칠이나 하면 다행이었던 시대에 무슨 환경보호 정신이 있었단 말인가. 환경보호 정신이 있었던 게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킬 능력이 없었거나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는 게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불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논의가 상당하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사실은 키치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악덕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 관련한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결국은 다음과 같은 말밖에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정말로 그랬다는 말이냐” 혹은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불교의 키치적 이해라는 주제 아래 현상을 분석하다 보니 키치적 이해가 나쁜 것처럼 제시되었다. 사실 ‘키치’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효과나 거부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키치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가치의 문제를 벗어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키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키치를 긍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게 아닐까 한다.
제시했듯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몇 명 승려의 서적이나, 인기를 끄는 불교 명상수행에 대한 관심은 키치적 이해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그 키치적 이해가 불러오는 관심이란 것이 중요하다. 누가 처음부터 드뷔시를 들을 수 있는가. 그것은 어려운 역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이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그 훈련에 있어서 키치는 좋은 충동이 된다. 남자친구가 좋아해서 따라서 열심히 클래식을 듣던 아이가 어느새 클래식 매니아가 되는 경우를 보라.
안타깝게도 오늘날 불교에 대한 관심의 집중은 불교 그 내부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현대사회라는 맥락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키치적 이해와 관련한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 자리에서부터 무언가를 다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대학에서 불교철학을 같이 수강했던 여러 학생들로부터 수업을 듣게 된 동기가 한 번의 산사체험이라던지, 명상서적, 신비주의라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동기로 인해 불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불교는 이들에게 키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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