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과 선, 그리고 쇠고기 매운탕
-근현대 불교의 공백을 메우자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프랑스 브르곤뉴 대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방법론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으로는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 서양인들에 비친 동양, 그리고 불교〉,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붐〉 등이 있고, 공저로는 《몸》, 《프랑스 문학의 지평》, 《진화론과 철학》이 있다.
생각은 장소를 따라 다닌다. 동일한 내용·주제의 강연이라도 문화센터에서 아줌마를 상대로 할 경우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할 경우가 다르듯이, 내국인을 상대로 할 경우와 외국인을 상대로 할 때가 다를 수 있고, 또 이렇듯 달라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달라야 한다"는 것은 청중을 고려한 방편에 국한된 이야기이지 그렇다고 원래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아무렇게나 달라져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불교적으로 말해, 청중의 근기(根器)를 고려해 방편이 달라질 때 강연의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뜻 정도로, "생각은 장소를 따라 다닌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면 후자의 경우, 즉 외국인을 상대로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 행해진 강연일 경우, 원래 전달하고자 마음먹었던 생각 자체가 아예 장소에 맞추어 변질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를 우리는 귤화위지(橘化爲枳) 또는 본말전도(本末顚倒)라 말하곤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원래 전달하고자 마음먹었던 내용이 장소에 맞추어 변색된 결과로 인해 애초에 주문받은 주제가 희석된, 다소 국적을 떠난 내용이 강연되는 묘한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예를 들어 서구인에게 불교라는 생소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동양의 어떤 연사가 세미나에 초청되어 이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의 성과를 내는 그런 우스꽝스런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구식으로 완전히 변색된 동양인의 낯선 강연을 듣는 서구의 청중들이, 강연 내용에 긴장해서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 그렇지"라고 자신들이 전통 속에서 가지고 있던 기지(旣知)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가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념들을 재확인하며, 오히려 자만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필자는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종종 목도하곤 했었다. 서구인들을 지나치게 배려하여 이들에게 익숙한 비유나 개념 등을 섞어가면서까지 강연 내용을 구성하려다 보면 십중팔구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난데없이 달마도나 일필휘지로 내려 갈긴 '불(佛)'자가 쓰여진 족자를 보여준다든지, 아니면 명상음악을 들려주며 "우리 같이 잠시만 눈을 감고 침묵합시다"라는 방식의 엉뚱함도 이들 서구의 청중들을 당황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서구인 앞에서라고 할지라도 방편을 앞세워 된장국에 닭고기를 넣는 것처럼 불교를 소개해서는 곤란하다.
그런가 하면 '쇠고기 매운탕'을 만들어 마치 그것이 매기 매운탕이라도 되는 냥 입에 침을 발라가며 불담(佛談)을 전하려 하는 것 역시 문제이다. 따라서, 사회·역사·문화적 지평과 이해 코드가 우리와 다른 서구인들을 상대로 한 불교 강연의 경우, 이와 같은 '얼치기' 방편위주의 설명은 전법(傳法)의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보다 더욱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 연구하고,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서구인들에게 소개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그 청중이 국내의 청중과 다르기 때문이요, 그들의 이해 코드가 우리와 문화적으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1) 1) 불교에서는 물론 방편을 중요시하며, 그 이유는 사람에 따라 각기 근기(根器)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불교가 다른 지역에 전파될 때," "[불교의 약상자는] 급격하게 요동치며," "그렇게 불교의 약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보태졌고, 불교는 점점 더 유능한 약사가 되어 있다" - 이렇게 한형조는 〈간화(看話)와 돈오(頓悟)를 넘어서 새 정체성 만들기〉(《불교평론》 2000 겨울호)라는 논문에서, 불교의 역사를 방편들의 발전과 재해석의 역사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로, 불교에서는 방편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유럽 등지에 이제까지 소개된 불교관련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예외 없이 필자에게 '닭고기 된장국'이나 '쇠고기 매운탕'을 연상케 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정법(正法)에 준한 양질의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고 유사 정보가 마치 불교 전체로 둔갑해 서구인들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구인들에게 불교가 제대로 수용되고 이해되었을 리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교에 대한 오해는 심화되고 있으며, 현재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해된 불교가 마치 불교의 본의인 냥 이들 서구의 대중·식자에게 유포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이미 두 번에 걸쳐 프랑스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소논문 형태로, '불교계'를 겨냥해, 지금이야말로 풀린 고삐를 다시 매야 할 때란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 서양인들에 비친 동양 그리고 불교〉,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붐〉).
그런데 이 두 편의 글을 본 필자의 측근들은 한결같이 "당신이 전공한다는 프랑스철학이나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었다. 그런가 하면, 기어(奇語)의 죄를 더는 짓지 말라는 분들도 없지 않았다. 혼자 핏대 세워봐야 '그대의 속'만 쓰릴 뿐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분들이 무슨 충고를 필자에게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이런 당부를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불교평론》에 주지의, 에릭 프롬과 스즈키, 그리고 리샤르 드 마르띠노가 공저한 《선과 정신분석학(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하는 '불운'이 필자에게 부과되어 있다. 2)2) Erich Fromm, D. T. Suzuki, and Richard De Martino, 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 (Harper & Row, 1960). 이 책은 1957년 8월 멕시코 국립대학 정신분석학 대학원 주최로 열린 세미나 발표문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당시 멕시코, 미국 등지에서 50여 명 정도의 심리학자, 정신병리학자와 정신분석가들이 이 세미나에 참여했었고, 이 책은 그 중 불교의 선과 연관된 논문만을 차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출판한 것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이 책을 '(ZP/쪽번호)'와 같은 형식으로 인용할 것임.
주어진 운명이기에 이를 거스를 수도, 다른 선택을 통해 피해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부득이 이 글을 쓴다. 아무리 양보하고 또 양보하려고 해도 불교가 '닭고기 된장국'이나 '쇠고기 매운탕'으로 서구에 소개되고,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불교가 서구에서 오해받고 있는 상황이, 그 동안 필자가 지은 업(業) 때문인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가 현재 서구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고, 이 과정에서 양산된 오해들이 결코 우리 동양인의 전법, 포교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양인들은 그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동양과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렇게 불교가 해석, 이해됨으로써 불교는 서구에서, 그러니까 주인 없이 정착된 셈이다.
그런데 최근 서구에서 그들 방식으로 이해되고 정착되기 시작한 불교가 역으로 우리에게 다시 수입되고 있는 것 같다. 정작 '불교의 주인'은 누구이며, 진정한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도래할 불(佛)은 소승(小乘)도 대승(大乘)도 아닌 서승(西乘)이라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름하여 '서구식 불교'의 범람 시대가, 현재, 우리 땅에도 도래해 있으며, 이 서구식으로 해석된 불교가 우리의 불교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자 잣대로까지 기능하고 있으니 자못 혼란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불교'를 뒤흔들 만큼 이들 스스로도 불교 교리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자구의 노력과 아울러 이제까지 자신들이 이해한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반성까지 겸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비드-닐도 서구인들에 의해 호도되고 있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반성을 촉구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처럼 서구화된 불교, 즉 부처님의 불교(le bouddhisme du Bouddha)와 관계없이 19세기 말경부터 서구에서 '근대적으로' 해석된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도리어 자신이 소속된 서구인들을 겨냥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전후가 맞지 않은 이념들의 혼합(incoh rents m langes d'id es)이 도처에서 차용되고 있으며, 그 결과 붓다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주 하잘 것 없는 인상들만 주어져 있을 뿐이다.3)3) Alexandra David-Neel, Le bouddhisme du Boudda et le modernisme bouddhiste, Ed. du Rocher, 1977, p.10.
그러니까, 다비드-닐은 동양종교의 꽃인 불교의 핵심 내용이 서구에서 상당히 곡해되어 있다는 일종의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전체적으로는 아직 도달해야 할 본질에 육박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표피적 인상들을 가지고 소일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비드-닐 뿐만 아니라 최근 티유만 같은 이는 보다 구체적·직접적으로 불교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불교연구는 이제까지의 티벳어, 일본어, 중국어 중심의 번역 불교연구에서 벗어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된 경전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다시 말해 문헌학적 접근의 필요성이 절박한 시점이다.4) 4) Tom J. F. Tillemans, "O va la philologie bouddhique?", Etudes de Lettres, N 4, 1997 참고.
다비드-닐이나 티유만의 반성인즉, 서구에서 진행된 이제까지의 동/서양 사상의 비교연구 내지 접목의 시도가 '좋은' 궁합을 맺었다고 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뜻이고, 따라서 여전히 이러한 연구에 문제가 있다는 일종의 자책(自責)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많은 동/서양 사상의 비교연구나 접목의 시도를 진정한 의미의 '퓨전'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글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선과 정신분석학》이란 책도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겠지만,5) 다비드-닐이나 티유만의 지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5) 이 책은 모두 세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즈키의 〈선에 대한 독해〉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 논문은 에릭 프롬의 〈정신분석학과 선〉이며, 세 번째 논문은 리샤르 드 마르띠노의 〈인간의 상황과 선〉이다. 여기서 스즈키의 논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페이지만으로도(pp.1∼76), 다른 두 편의 논문에 비해 지대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프롬과 드 마르띠노의 글은 모두 스즈키의 글에 대한 일종의 '조심스런' 주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선과 정신분석학의 퓨전 시도, 제법 '환상적' 시도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이 책은 실제 불교가 한 사람의 동양학자에 의해 어떻게 서구인들에게 소개되고 있는지 또 서구인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단적인 예라 하겠다.6) 6) 프레데릭 르누와르는 서구에서 매 순간 불교가 문화적 색안경을 끼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Fr d ric Lenoir, "Adaptation du bouddhisme l'Occident", Diog ne, N 187, 1999, p.131).
3. 스즈키의 불교 해석은 반서구주의에 기초한 열등감의 표현
물론 이러한 동/서양 사상의 퓨전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다른 지면을 통해 이미 지적했듯이,7)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박사와 같은 선도적 불교 전파자들이 불교를 - 구체적으로는 선(禪)을 - 서구인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게', 아니면 설득력 없게 소개한 데 일차적 책임이 있어 보인다. 7) 박치완,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붐〉, 《오늘의 동양사상》 제8호 2003 봄·여름호, p.340 이하 참고.
이런 식의 불교 소개가 서구인들이 불교를 호도하게 만드는 주원인이라 생각되며, 그러다 보니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이 주인행세를 하려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기서 '어렵게'란 기독교 전통이나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서구인들에게 필경 낯설 수밖에 없는 불교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과정에 있어, 이들에게 익숙한 개념이며 용어들을 단지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동양적인 것(불교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기독교적인 것)간의 진정한 차이가 무엇인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오로지 서구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 동양적인 것이라는 '대결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 때문에도 그렇다.8)8) 변규룡은 「비교사상의 가능성과 방법론」(『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집문당, 1989, p.273-293)에서 비교철학의 방법에는 <비교>, <대비>, <대결>이 있다고 말하면서 마지막 방법은 처음의 두 방법과 달리 연구자 자신의 주체적 자각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스즈키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단순 대결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변규룡의 기준에 따르자면 <대비>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세계에 무지한 이들에게 불교를 소개하려다보니 서구적 개념들과의 빗댐이나 대비를 시도한 점은 좋으나, 그 빗댐이나 대비가 종국에는 서구적 개념들을 '무자비하게' 비판만 하는(ZP/8∼10 참고) 양상을 보인다는 데 스즈키의 불교 해석이 갖는 결정적 편협성이 있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서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대화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정작 불교(또는 불교의 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자리에 이르러서는 서구인들이 전혀 수긍할 수 없는 매우 초논리적인 논법을 취하는 것도 또한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스즈키의 〈선에 대한 독해〉에는 이 모든 문제점들로 가득 차 있다.
왜 필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과연 스즈키가 어떤 식의 논법을 펴는지 그의 〈선에 대한 독해〉에서 몇 개의 문장들을 골라보도록 하겠다.
동양이 침묵을 상징한다면 서구는 웅변을 상징한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침묵이 표현할 단어가 없달지(wordless) 말을 못하는 벙어리랄지(speechless)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침묵은 여러 경우에 웅변만큼이나 장황한(wordy) 것이다(ZP/4).
서양에서는 "예"는 "예"이고, "아니오"는 "아니오"이다. 다시 말해 "예"는 결코 "아니오"가 될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예"가 부지중에 "아니오"가 되며 "아니오"는 "예"가 된다. 이렇듯 동양에서는 "예"와 "아니오" 사이에 엄격하며 고정된 분리가 없다(ZP/10).
선(禪)의 차원에서는 육화됨(incarnation)은 곧 육신을 버림(excarnation)이다. 침묵은 천둥처럼 으르렁거리며, 이렇듯 말은 말이 아니고(no-word), 육체는 육체가 아니다(no-flesh). 지금-여기는 공(空), 무한과 같다(ZP/10).
선(禪)에 있어 원(圓)은 원이고 사각형은 사각형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각형은 원이며 원은 사각형이다(ZP/9).
어쩌면 스즈키의 이와 같은 불교 해석이 불교에 조금이라도 상식을 갖춘 동양인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늘 듣고 보던 익숙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도 얘기했듯이 스즈키의 글(말)을 접하는 사람들이 불교적 경험에 친숙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스즈키가 〈선에 대한 독해〉에서 택한 설명의 방편이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그 논리와 방편이 말이다. 게다가 불교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위 논문에서 적극적으로 서구적인 논리와 개념들을 차용하는 것은 좋으나 오직 비판하기 위해 이것들을 차용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단적으로 말해, 스즈키는 불교의 선을 논리적,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서구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아예 전제하고서, 이러한 전제로부터 서구인들의 자연관 및 이성 비판으로까지 논의를 확대해 가는가 하면, 이런 다분히 '직관적'이고 '작위적 판단'에 의존해 난데없이 〈선에 대한 독해〉의 여기저기에서 동양의 불교정신이 서양의 기독교·과학정신보다 월등히 우수함을 역설하는 방향으로 주장을 급선회시킨다. 이런 그의 설명방식은 대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전인수격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서구사상과의 대결구도로서의 동양사상을 서구인들이 그를 초청해 듣고자 기대했던 내용이었을 리 없다. 그의 서구사상 자체에 대한 판단과 평가에도 수긍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스즈키의 반서구적인 태도가 '무의식'을 설명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으니, 이는 아예 귀를 막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음 인용문들을 살펴보자.
어떻게 내가 무의식이란 물음에 접근할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이 '무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나는 나의 '무의식'이 '메타과학적인 것'이거나 '전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스즈키의 발표를 듣고 있는 청중들, 모든 그의 논문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과학자들이며 나는 한 사람의 선수행자(Zen-man)이기에, 무의식에 대한 나의 접근이, 비록 '전과학적인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가 두렵기는 하지만, 전과학적인 것이 분명하다. '전과학적인 것'이란 용어가 적절한 용어는 아닐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전달(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ZP/10).
위 인용문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듯 스즈키는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있어, 오직 반서구적(비과학적, 비설득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서구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의식에 대한 소위 '과학적인 접근'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스즈키에게 이 방법이 단지 하나의 대상을 기술하고 그것에 '관해(about)'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상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보였기 때문이다(ZP/11 참고).
무의식에 대한 서구인들의 '과학적인 접근'과는 달리, 그의 선을 통한 대상에의 접근(the Zen approach)은 그러나 "곧바로 대상 자체에 파고들어(enter into) 그 대상을 보며, 이 때의 '봄'이란 물론 대상 내부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그는 말하고 있다. 스즈키에게 있어서는 "꽃을 아는 것은 꽃이 되는 것이며(to become the flower), 꽃이고(to be the flower), 또한 꽃으로 피어남"이다. 이를 그는 "마치 가랑비를 즐기듯 일광을 즐긴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ZP/11)고 부언까지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즈키에게 있어 선을 통한 대상에의 접근은 단지 한 인간(환자, 즉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치료 대상)의 무의식에 관해 무엇인가를 분석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급기야는 "우주 전체의 비밀을 캐는 것"으로까지 비약되며, 이런 점에서 스즈키에게서는 "꽃을 아는 것 자체가 곧 나(the Self)를 아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이와 같은 이치로 꽃에(in the flower) 나를 잃음(놓음)은 내 자신을 꽃과 동시에 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기에 이른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을 선적 방법(Zen way)이라 부르며, 이는 전과학적이거나 메타과학적인 방법이자 심지어는 반과학적 방법이기도 하다(ZP/12).
이렇듯 스즈키 자신의 선적 방법이 대상을 '위해' 창조적이며 공생적(conactive)인 반면, 정신분석학에서의 과학적 방법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지성 작용에 의해(by intellection) '죽이는' 일종의 살인이라고 폄하된다. 그래서 그는 유일하게 선적 방법만이 "생명을 생명으로써 보전하게 한다"고 주장하게 되며, 이를 위해 정신분석적 방법에서처럼 더 이상 수술용 칼을 만질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단적으로, "선적 무의식(Zen's Unconscious)"은 모든 생명이 그 곳에서 탄생하는 창조성을 원천으로 하고 있으며, 이 창조성의 근원에 돌입함이 곧 선의 본질이기도 하다고 스즈키는 말한다(ZP/12 참고).
결과적으로 스즈키는 동양적인 사유 방식과 서구적인 사유 방식, 선과 정신분석학의 퓨전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으며, 이 둘을 극단적으로 이원화시켜 결과적으로 양자간의 대화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나아가 정신분석학을 과학일반 또는 과학 자체로 일반화시켜 비판하면서, 일반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의미의 무의식을 "우주적 무의식(Cosmic Unconscious)"(ZP/13)으로 대체하며 논의의 장을 일탈하고 있다.
이 결과 우리는 그의 서구적인 사유 방식에 대한 비판과 이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적 방법을 통한 대상 접근과 주지의 무의식에 대한 논변이 이미 원래 〈선과 정신분석학〉이 노렸던 물음틀, 문제틀 밖으로 벗어나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이런 식으로 스즈키가 자신의 주장을 펴다 보니 서구학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는(받게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두에서 우리는 생각은 장소를 따라 다니고, 생각이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스즈키의 경우는, 사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스즈키의 〈선에 대한 독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글(강연)이 동양의 불교도 앞에서가 아니고 서구인들을 독자(청중)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두 번째로는 불교의 선에 대한 설명의 방편이 서구인들이 볼 때는 지나치게 동양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의 강연 내용은 마치 동양의 어느 불교 국가에서 서구적인 것을 성토하는 그런 방식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서구인들을 상대로 한 스즈키의 불교의 선이나 도(道)에 대한 소개는 오래 전부터 동양/서양간에 상존하는 문화·사상적 차이의 간극을 좁히는 데 이바지했다기보다 되려 그 간극을 더 넓히고 있으며, 이런 무전략적인 동양사상의 소개, 내지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불교의 전파 때문에 서구인들이 역비판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9)9) 스즈키가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 기술(記述)하고 있는 해탈의 경지에 대해, 르누와르는 그것이 마치 "원시적 신비론자(Mystique sauvage - M. Hulin의 용어임)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르누와르에 따르면 원시적 신비론자들은 타자를 위해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설명하는 대신 단지 자신의 느낌을, 마치 미국에서 60년대에 유행했던 비트 세대의 시인들(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들이나 다다이스트들에 해당하는)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전달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한다. 스즈키가 〈선에 대한 독해〉에서 불교를 설명하는 데 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듯, 이들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작가들 중에도 스즈키를 모방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선의 세계와 연결시켜 보려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 주자로는 A. Ginsberg, D. Goddard, J. Kerouac 등이 있다. 그런데 A. Watts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비트화된 선(le Zen beat)에는 항상 망령(une ombre)이 따라 붙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의식의 과잉, 주관의 과잉 그리고 격렬함의 과잉이다. 그런데 선향(禪香)을 이렇게 맛볼 수 있으며, 이렇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Fr d ric Lenoir, La rencontre du bouddhisme et de l'Occident, Fayard, 1999, pp.257∼258 참고).
한마디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마치 이해되어야만 할 것으로 둔갑하여 행세함으로써, 특히 불교사상은 서구에서, 다비드-닐의 지적 그대로, 50년 전은 물론이고 현시점에 있어서도 역시 그들 사이에서 "전후가 맞지 않은 이념들이 혼합되어" 오해에 오해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리라. 마치 주인 없는 땅을 먼저 차지하기만 하면 주인이라도 되는 냥 스즈키는 착각한 것이고, 항해술도 터득하지 못한 채 '불교'라는 배를 서구로 끌고 가 스스로 좌초당하는 경우를 맞은 것이다.
4. 프롬의 불교 해석은 인도주의적 정신분석학을 지향한다
《선과 정신분석학》이라는 세미나를 주도하고 〈정신분석학과 선〉이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또 이 세미나의 발표 내용이 《선과 정신분석학》이란 책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직·간접적으로 도왔던 프롬이, 아래에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스즈키보다 훨씬 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동양의 불교와 서구사상을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프롬의 정신분석학과 선의 비교가 열등감 많은 스즈키에 비해 보다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불교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스즈키가 서구사상을 비난조에 가까운 태도로 비판하기만 했던 것에 비해, 상당히 관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 문장들을, 앞서의 스즈키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면, 왜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의 이러저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선은 나에게 지극히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그리고 그런 만큼 정신분석학을 [인간 본성의 차원에서] 연구하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유의미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중략) 정신분석학은 하나의 과학적 방법이고, 이의 핵심은 비종교적(non-religious)이다. 반면 불교의 선은 하나의 이론이며 해탈을 완성하는 기술(technique)이다. 헌데 서구인들에게 이러한 선적 경험은 단지 종교적인 또는 신비적인(mystical) 것이라 치부되었다. 정신분석학이 정신병을 치료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면, 선은 영적 구제를 위한 방편이다(ZP/78, 77).
도교와 불교는 서구 종교들의 그것보다 탁월한 합리성과 현실주의를 가지고 있다. (중 략) 역설적으로, 동양의 종교적 사유는 서구의 종교적 사유보다는 오히려 서구의 합리적 사유에 더 적합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ZP/80).
이렇듯 프롬은 불교의 선에 도움을 청해 근대 이후 서구인들이 직면하게 된 위기, 즉 기술· 과학이 불러온 정신의 위기를 극복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주지의 《선과 정신분석학》이란 세미나를 마련했을 터다. 이는 프롬이 "정신분석학은 서구인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특징적 표현이며,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을 강구해야 한다"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ZP/80).
즉, 프롬은 프로이트에서 융으로 연계되는 심리· 정신분석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다시 말해 이들이 갖는 인간을 환원주의적으로 분석하려는 태도를 극복하고, 서구인들이 겪는 병리현상을 확대된 의미에서의 정신분석학으로 치유책을 찾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프롬이 불교를 응용함으로써 가능했던 목표였다. 한마디로, 불교사상을 응용함으로써,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 "무엇이 무의식을 구성하는가,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으로 나타나는가, 정신분석적 치료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가"(ZP/viii) 등의 물음을 근원적으로 재고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불교를 접했던 프롬에게도, 불교는 스즈키의 말대로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 불교사상에는 동시에 초논리적이고 초과학적인 것인 면이 강하다는 것을 그는 발견했다. 바로 이 초논리적이고 초과학적인 것인 면이 그가 불교를 응용하려는 이유이며,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그가 볼 때, 특히 이 초논리적이고 초과학적인 측면이 불교사상의 특징을 이루며, 이 초논리적이고 초과학적인 특징은 동시에 동양인, 동양 사회·문화의 특징을 구성하기도 한다고 본 것이다. 단적으로, 프롬은 현재 자신들이 겪는 서구정신의 위기를, 마치 중세의 신이 그랬듯, 논리나 과학의 폐쇄성이 만들어 낸 위기로 보고 그 대안을 동양에서 찾은 것이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서구세계가 논리와 과학만을 절대가치화함으로써 닫힌 사회와 닫힌 문화를 만들었기에 서구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동양세계에 비해 많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치유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가졌던 프롬에게 인간의 의식,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개별 환자 또는 환자 가족 내의 경험으로 제한되지 않고 사회·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진다(ZP/104 참고). 그리하여 그는 이런 전제 하에 프로이트의 개인적 차원이나 가족적 차원의 치유보다, 언어, 논리, 타부 등을 모두 포괄하는 사회·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진 의식과 무의식을 치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프롬에 따를 때, "무의식의 구성요소들(contents of the unconscious)은 [프로이트나 융이 분석한 것처럼] 일반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ZP/106).
따라서 그는 프로이트나 융의 생각처럼 그런 방식으로는 환자들이 완전 치유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것이 프롬이 말하고자 하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무의식, 즉 기존의 무의식 개념에 대한 새로운, 확대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추구하려고 하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무의식은 다름 아닌 개별 사회·문화를 넘어서 인류 전체에 공통된 무의식을 추출해내는 데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이 때의 인류 전체에 공통된 "무의식의 구성요소는 [이미]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합리적인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 둘 모두가 [프롬에게는] 인간적인 것이다(it is both; it is all that is human)"(ZP/106).
이렇듯 프롬은 프로이트와 융의 단순한 치료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의 위상을 넘어 일종의 인도주의적 정신분석학을 정립하려고 한다. 인도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 일방향적 논리를 버리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바꿔 말해, 쌍방향적 논리를 취함으로써 선/악, 합리/비합리를 떠안은 인도주의적 정신분석학에서는 모든 사회·문화에 공통된 인간 자체를 다루려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 특정 환자만을 다루려는 데 연연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인간 자체'는 물론 모순된 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전인(全人, the whole man)이다.
전인은 "보편적 인간"이며, 그의 "무의식은 우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전인에게는 식물도 동물도, 인간의 영혼도 모두 같은, 차별 없는 존재이며, 이와 같은 '총체적' 인간(fully human)의 차원에서 볼 때, 기존의 서구적 이원론, 즉 자연/인간이라는, 주체/대상이라는 구분은 이미 사라지게 된다. 프롬에 따를 때 전인, 총체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연은 인간화되어 있고 대상은 주체화되어 있다(ZP/106 참고). 이는 앞서 스즈키가 정신분석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무의식을 '우주적 무의식'으로 보았던 것과 유사한 차원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에서 사회적 존재를 거쳐10) 우주로까지 확대된 무의식,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무의식, 아니 의식/무의식이라는 이분적(二分的)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프롬만의 독특한 대의적(大醫的) 해석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0) 프롬의 인간관은 실존적 개인보다는 '사회·문화적 존재(social and cultural existence)'로서 인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롬이 마르크스에 대해 야기하면서, 그가 인간을 사회· 역사적 상황 하에서 결정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건전한 사회》, 김병익 역(서울: 범우사, 1975), pp.250∼270 참고)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가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둘의 종합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 프롬이고, 이 종합의 결과가 '인도주의적이며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Humanistic Communitarian Socialism)'(같은 책, p.359 참고)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박찬국의 〈에리히 프롬의 인간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시대와 철학》, 1996) 참고.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본래 도달하고자 원하는 삶, 삶에서 누리고자 하는 진정한 자유(une v ritable libert int rieure)도 사실은 이런 것일 것이다. 우주로 통하는 자기, 우주와 하나된 인간, 대의(大醫)는 소의(小醫)와 달리 이렇듯 인간을 우주와 상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하며, 바로 이러한 '신비체험'이 있을 때 인간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프롬은 불교의 선사상을 응용해 이와 같이 당시 팽배한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당시의 정신분석학적 경향과 방법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개인 위주의 치료 방식을 인류 차원의 치료로까지 확대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프롬은 불교의 선에서의 초논리적이고 초과학적인 무의식을 읽어냄으로써 서양의 합리성, 즉 비합리적이고 불확실한 것, 감각적이고 병적인 것들에 대해 배타적이기만 했던 그런 합리성보다 훨씬 확대된, 보다 완성된 의미의 합리적 사고 패턴을 구축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확대된 합리성은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들(l'irrationalisables)과 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열린 이성(la raison ouverte)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이 열린 이성이 닫힌 이성(la raison close)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것, 반이성적인 것(l'a-rationnel)을 적대자로서가 아니라 짝으로 감쌀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초이성적인 것(le sur-rationnel)이 분명하다.11)11) '열린 이성/ 닫힌 이성'의 구분은 Fr d ric Lenoir의 앞의 책, p.349 참고.
그러므로 그가 다음과 같이 프로이트와의 결별선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우리가 프로이트의 제한된 무의식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중략) 프로이트가 원래 목표하기도 했었던 '무의식의 의식에로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unconsciousness into consciousness)'에 대한 보다 폭넓고 보다 심오한 의미를 [불교의 도움으로] 획득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을 의식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 단지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관념일 뿐이라면, [선에서 말한 무의식은]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경험을 직접 체험하게 하며, 바로 이것이 경험을 통해 얻은 인도주의의 실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ZP/107).
현실적으로 동/서양의 사유와 종교, 문화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런 기준에서 선과 정신분석학이 추구하는 바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프롬은 대의(大醫, 大義)적 입장에서 편견 없이 동/서양이 만날 수 있는 길을 튼 것이며, 서로에게서 보충할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12)12) 이러한 프롬의 작업에 대해서는 르누와르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Fr d ric Lenoir의 앞의 책, pp.252∼254).}}
불교적으로 말해, 개오(開悟)한 프롬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서구의 학자에 의해서도 선(禪)을 인간 의식의 최고의 경지로 평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13) 13) 물론 프롬에게 있어 철학과 종교, 예술 등은 모두 '인간의 존재'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이들 간 우열이나 차이는 설사 있다고 해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들 간의 우열이나 차이보다 "주어진 해답 중 어떤 것이 더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건전한 사회》, p.38)에 있다. 그렇다면 프롬에게 있어 불교가 인간의 존재 문제에 있어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좋은 해답'을 제시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개오한 사람은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외부 사물,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은 사람이다. 이것이 프롬이 본 미래의 인간상이며, 우주적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과정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각자(覺者)의 모습이고, 그가 학문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인도주의적 정신분석학의 목표이자 '건강한 사회'14) 를 위한 설계도였던 것이다.14) "건강한 사회는 개인이 동료를 사랑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이성의 객관성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생산적인 힘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자아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인간의 능력을 조장시켜준다. 이에 대해서 불건전한 사회는 상호간에 적의와 불신감을 일으키고 타인을 이용해서 착취하는 도구로 변모시킨다."(《건전한 사회》, p.79)
5. 열린 대화의 장: '불교'라는 주인 없는 돛배를 구하기 위해
이상에서 우리는 스즈키와 프롬의 무의식과 연관된 불교 해석을 중심으로 《선과 정신분석학》을 간략히 재구성해보았다. 스즈키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서구사상 전반은 물론 서구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을 밀어내는 방식을 취한다면, 프롬은 반대로 스즈키의 해석을 참고하여 그 무의식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해석하는가 하면, 이를 감싸 안아 인도주의적 정신분석학을 개척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우리는 두 사상가가 어떻게 타자(타문화)를 수용하고 있는지, 그 태도를 구별해 읽을 수 있었다. 스즈키가 자기 모순적으로 '웅변'의 수사학을 펴고 있다면, 프롬은 물론 스즈키가 말한 '침묵'은 아니지만 차분하게 동/서양의 사상을 비교·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스즈키가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드러내 보여주고 주장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프롬은 자신이 '아는 것' 만큼을 가지고 동양사상을 응용하려 애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렇게 프롬의 태도가 스즈키에 비해 훨씬 관용적이며, 그래서 스즈키와 프롬의 사상적 만남은 프롬에게는 득을, 스즈키에게는 실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필자와 같은 소인에게도 스즈키 박사를 비판할 권능이 주어져있는지, 괜한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순간 자성하고 있다. 그가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유럽과 영어권의 지성인들에게 불교의 선을 퍼뜨리고 유혹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에 비해,15) 필자가 한 것은 사실 전무하기 때문이다. 15) {{) 같은 책, p.246 이하 참고.}}
《불교의 선에 대한 시론들》(1930, 1934)을 필두로 하여, 《불교 선 입문》(1949), 《선과 일본문화》(1959) 등을 통해, 그는 서구에서 명실상부한 불교의 일인자로 평가받았고, 사실 그러기에 충분한 업적을 남겼다.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교를 이론적으로, 다시 말해 교학적으로 서구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치한 전략을 겸비하지 못했고, 특히 다도법(茶道法)이며 일본식 정원, 동양화에서의 몇몇 선화(禪畵),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에 표현된 한시(漢詩) 등 다분히 부수적인 것들로 불교의 정수를 설명하려는 '경솔함'을 보였던 점은, 그러나 얼마든지 비스러지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브로스 같은 이가 "[스즈키는 분명] 탁월한 학식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는 [불교에 관해] 하나의 역사(이야기)를 썼을 뿐이다. 그런데 이 참고자료가 아주 잘 겸비된 [불교의] 역사와 비교할 때 많은 부분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스즈키의 이 책(《불교 선 입문》)은 볼품없는 하나의 작품, 즉 졸작(un mince ouvrage) 정도로 고려해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중 략) [왜냐하면] 그는 이 책에서 그가 정의하는 것처럼, 우리가 과연 그와 같이 선(禪, la pens e Zen)에 실제로 다다를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런 점에서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렵다.16)16) {{) Jacques Brosse, Zen et Occident, A. Michel, 1992, p.176. }}
이렇듯 시간은 의미 없이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오해는 벗겨지고 진실은 밝혀지며 인간은 이런 진실들을 통해 계몽되어 간다. 서구에서 60년대의 신세대, 반문화 세대에 의해 그토록 추앙받았던 스즈키도 이렇듯 이 시간과 더불어 재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과연 불교에서 말하는 선과 정신분석학이 직접적 관계가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 둘의 중매는 스즈키와 프롬의 합작품이기도 하지만 왠지 '억지' 중매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장-끌로드 잔만(Jean-Claude Zandman)의 말대로, 오늘날 유럽에서 붓다의 존재, 불교는 분명 프로이트나 그의 심리·정신분석학이 유행했을 때보다 더 많은 관심을 사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불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철학적, 신학적, 정신분석학적 곤경을 극복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응용하려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17)17) {{) "붓다는 분명 프로이트처럼 인간의 존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들의 계획이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이를 통해 신경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면, 붓다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어떻게 한 인간이 해탈에 의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Express, N 2364, 1996, p.61)}}
선과 정신분석학의 '그럴듯한' 중매는 물론이고 니르바나를 무(N ant)와 연관시킨 것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18)18) {{) Guy Richard Welbon, The Buddhist Nirvana and its Western Interpreter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8; Roger-Pol Droit, Le Culte du n ant, Seuil, 1997 참고.}}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이 글에서 일일이 언급할 공간은 없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는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 이제 요지부동의 자세로 스즈키처럼 불교가 동/서를 통틀어 최고의 철학(le Zen est le sommet de toute philosophie)이라는 입장을19) 취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19) {{) 이는 � 필드(Rick Fields)에 의해 인용된 것으로, Fr d ric Lenoir의 앞의 책, p.246에서 재인용한 것임.}}
그리고 사실,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 자체가 아닌 각색된 불교(le bouddhisme interpr t )를 가지고서는 그 어떤 서구인이나 심지어는 동양인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때이다. 이는 곧 불교로 일인극을 올리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공동의 노력을 통해 불교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필자의 판단이자 속내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단적으로 서구세계와 동양세계에 상존하는 문화적 이해부족(incompr hension culturelle)을 극복하는 일이 타자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에 새롭게 재개되어야 할 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자리는 타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할 때 비로소 꿈꿀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도 보았듯이 타자에 대한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이 불교를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것도 문제지만,20) 우리 역시도 몇몇 대표 선수들만이 불교를 대중화하고 상품화시켜 서구에서 임의대로 활동하게 방기한 책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20)"간단히 말해, 각자는 자신의 문으로 붓다를 보았다." 이렇게 해석된 불교(le bouddhisme inetrpr t ), 즉 서구인들에의 어제 그리고 오늘 나름대로 "상상된, 이해된, 공격받은 또는 변호된, 동화된, 소화된, 변형된, 재창조된 불교"는 "진정한 불교(le bouddhisme authentique)"와는 거리가 멀다(Fr d ric Lenoir, 앞의 책, p.19에서 부분 인용).}}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편견은 자기족쇄일 뿐이다. 시대와 상황을 더 잘 보고 더 잘 분석할 수 있기 위해, 타문화를 기존의 경험 밖에서 수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제 벽을 쌓아 소유한 것들을 나누어야 한다. 프롬의 말대로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에 의해 온 인류가 넋을 놓고 있는 이 물신시대, 인공물(l'artificiel)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타자와 나누고 사랑하는 일이다. 이 나눔과 사랑을 위해 방편 따위가 필요할까.
자기, 가족, 집단, 사회,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킬 나눔과 사랑을 위해, 이를 위한 방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날을 위해 합장하며 이쯤해서 기어의 죄 짓기를 멈추고자 한다.21)21) {{) 이 글을 마무리지을 즈음, 필자는 프롬의 대부분의 책들이 번역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유냐 존재냐》(최혁순 역, 범우사, 1978), 《인간과 종교》(최혁순 역, 한진출판사, 1983), 《희망이냐 절망이냐》(종로서적 편집부 옮김, 1983), 《사랑의 기술》(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2) 등. 차후 시간이 허락하면 이 책들의 교차독서를 통해 본 논의를 심화시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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