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비 선형적 상호 인과율로서의 연기

slowdream 2007. 10. 8. 10:12
 

비 선형적 상호 인과율로서의 연기


조에너 메이시 지음 / 이중표 옮김

(jplee@chonnam.ac.kr)



전남대학교 철학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아함의 중도체계><불교의 이해와 실천1,2>가 있고, <공의 의미><불교의 인간관><불교의 생명관>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이것은 알기 어렵나니, 다시 말하면 이 조건성, 이 연기(pat.icca samu-ppa?a)는 …… 상식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며, 심오하며, 난해하며, 어려우며, 미묘하며”


붓다는 인과율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달마(法)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존사 냐나틸로카(Ven. Nyanatiloka)의 견해에 의하면, 연기(pat.icca samuppa?a)의 의미를 파악하여 전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낳았으며, 많은 왜곡된 결과를 가져왔다. 불교의 교리들 가운데 연기(pat.icca samuppa?a), 즉 모든 존재현상은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교리보다 더 큰 오해와 반론과 터무니없는 공론과 해석을 야기한 교리는 없었다.


러시아 불교학자로서 불교논리학의 연구에 여러 해를 바쳤던 테오도르 체르바스키(Theodor Stcherbatsky)도 마찬가지로 연기(pat.icca samuppa?a)의 해석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격렬하게 표현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오해되고, 그렇게 소모적으로 근거 없는 억측과 공상적인 철학화가 많이 이루어진 불교 교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연기설에 대한 해석들이 구구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연기설이 불교의 실재관에 핵심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연기설이 파악한 인과 과정은 보편성과 비인격성을 갖기 때문에, 연기설은 인류사상사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비교적 소수의 학자들만이 연기설이 보여주는 인과율의 상호의존적 특성을 확인하거나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인과율의 상호의존적 특성)은 쟁점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특별하거나 의미 있는 것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


연기(pat.icca samuppa?a)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인과 과정의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무아설과 제일원인의 부정 속에 내재하고 있고, 인과 요인들이 상호 의존한다는 점에서 명백하며, 사용된 언어의 구조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1. 실체에서 관계로


마루야마(Maruyama)는 “단일방향적 인과 패러다임은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어떤 하나의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는 것을 지적해 냈다. 우주는 근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 고대 희랍인들의 생각〔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의 하나의 근원-실체(proto-substance)라는 개념과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영혼, 질서, 합리성과 동일시되는 동력-실체(power-substance)라는 관념〕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분류와 연역적 사고로 귀착되었다고 마루야마는 주장한다.


그래서 우주의 재료는 중복되지 않는 추상적인 범주에 의하여 배열되고 등급이 매겨지며, 순환논법은 금지된다. 동양의 경우, 베다 사상이 본질주의자와 실체론자의 사상인데, 베다 사상에서는 실재와 동력이 존재하는 장소인 아트만(A?man)이 현상계의 토대를 이루면서 현상계에 고루 퍼져 있는 미묘한 실체로 인식된다. 실체가 우파니샤드(Upanis.ad)에서처럼 일원론적으로 파악되든 미망사(M沖ma?.sa? 전통 브라만 학파의 하나)에서처럼 다원론적으로 파악되든, 실체는 세계의 궁극적인 질료이며 행위자(agency)가 머무는 장소이다.


실재를 실체로 이해하면, 미묘한 것으로 이해하든 조악한 것으로 이해하든, 언제나 인과의 효과는 세계의 근본질료를 나타내고 있거나 포함하고 있는 사물들에 내재하는 힘에 기인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실재를 관계들이 우선되어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침투하여 그들에게 특성들을 전달할 수 있는 본질들―즉 실체들이 우선되어 구성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어떤 실체가 다른 특별한 실체나 상태에 기인하고 그것에 의해 한정된다고 하는 것은 그 실체가 다른 특별한 것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으로부터 특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는 실체와 속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수반하고 있다. 실체들 사이의 인과관계로서의 변화는,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속성(attribute)으로 파악된 것이든, 베단타나 상키야적인 의미의 덕(gun.a)으로 파악된 것이든, 특성들의 전개나 전달에 의해 일어난다.


어느 경우에든 실체는 비록 경험적인 근거는 없을지라도 속성들의 운반자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번즈(Bunge)가 선형적 인과율을 비판하면서 지적했듯이 “추상적 개념에 의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런 성질이 없는 그리고 변화와 무관하게 정지해 있는 것은 어떤 것도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리고 추상적 개념에 의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떤 성질들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의 외부에서 그 성질들을 발견할 수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를 선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실체는―실체의 특성들이 동력인(動力因)의 경우에서처럼 외부로부터의 강요에 의하여 전달되고 변하든,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a)의 경우에서처럼 내부로부터의 성숙에 의해 전달되고 변하든―행위자(agency)의 근본이 된다.


불교는 과정을 파악함으로써 이러한 견해를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린다. 무아(anatta?와 무상(aniccata?의 교설은 지속하고 있는, 그리고 고립할 수 있는 실체에 대한 모든 개념을 해체하여, 실체와 속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설 수 있는 근거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실체성을 전제하고 있는 인과의 공식과 인과의 문제는, 붓다의 관점에서 보면, “온당치 못한 것”이다. 붓다는 그의 제자 파꾸나(Pagguna)가 식(識), 촉(觸), 수(受) 그리고 여타의 연기지(緣起支)를 산출하는 원인이 되는 행위자를 확인하고자 그에게 질문했을 때, 붓다는 그 질문을 비판했다. 다른 말로 바꾸어 질문해야만 붓다는 대답하겠다는 것이며,―다른 말로 바꾸어 질문할 때, 그는 명사를 동사로 바꾸고, 실체를 행위로 바꾼다.


“그러면 세존이시여, 그것은 누구입니까. 누가 갈애(愛)하는 것입니까?” “온당치 못한 질문이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나는 (누군가가) 갈애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만약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그 질문은 온당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만약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그러면, 세존이시여, 무엇을 조건으로 갈애함이 있습니까?’ 이것이 온당한 질문이다. 그러면 온당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 ‘느낌(受)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함(愛)이 있다’.”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함께 발생하고 있는 현 존재의 요인들을 실체화하고 본질화하는 성향이 인간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들을 실체화함으로써, 우리는 집착과 혐오에 노출된다.―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의 무상함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종수관경(二種隨觀經, Dvayata?upassana?sutta)》에서 이야기하듯이, “upadhis(依, 경험의 인자들) 속에 어떤 본질도 없다는 것을 안 사람”, 그는 올바로 나아간 것이다.


불교의 입장은 존재(being)를 비존재(nonbeing)로 바꾸어 인과의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해석의 경향은 19세기 프랑스 불교학자 부르노프(Burnouf)와 그의 동료 골드스퇴커(Goldstuecker)에 의해 형성된 것인데, 그들은 불교의 인과율에서는 현실존재의 요소들이, “le non-e?re”(non-being,非存在)와 “lene�nt”(nothingness, 空)로부터, 최초의 분화되지 않은 질료로부터 나오듯이, 단계적으로(in degree) 나오는 것으로 보았다.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는, 한 세대 후에 나타나서, 그 오류를 지적했다. 그는 무상(anicca)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연기(pat.icca samuppa?a)는 상호관계의 작용을 의미하며, 사물들의 “생성(becoming)”은 “그것들이 상호관계에 있음”으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언했다.


우리는 불교가 비존재를 사물의 진정한 실체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모든 표현을 피하고자 하며, 그렇게 하여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바라문들의 사색은 모든 생성(becoming) 속에서 존재(being)를 파악했고, 불교인들의 사색은 외견상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생성을 파악했다. 전자의 경우는 인과율이 미치지 않는 실체를 파악한 것이고, 후자는 실체가 없는 인과율을 파악한 것이다.


무상과 무아의 교설은 실재를 비실체화한다. 불교인들이 증명하는 과정에 대한 불교의 시각은 연기의 근본이 되며, 연기를 인과관계는 실체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개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만든다. 연기를 이해하려면, 프레데릭 스트렝(Frederick Streng)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인과율에 대한 인습적인 견해들”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인도의 불교인들)은 인과율에 대한 인습적인 견해들로부터 벗어나서 보지 않으면 인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일상의 상식적인 지식이 인과율을 이해하는 절차는 인과관계를 두 개의 독립된 실체들, 즉 행위자와 행위자의 행위의 결과 사이를 매개하는 어떤 힘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짝을 이루는 두 개념은, 불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착각을 일으키는 경향성에 물든 마음이 투영된 것이다. ……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는 한 …… 거기에는 주관-객관 이분법에 의해 “머물고 있는”(pratis.thitam) 어떤 효력이 있게 된다.



2. 제일 원인은 없다


선형적 인과율은 우리에게 사물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인과의 연결고리들을 제공한다. D는 C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고, C는 B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B는 A의 결과이다 등등으로. 그래서, 버터기름에서 생유로든, 당구대 위의 마지막 공의 상태에서 첫번째 공에 대한 타격으로든, 원인이 되는 작용을 소급해 갈 수 있다. 그러면 우유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당구 큐를 잡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같은 질문이 암소와 당구 선수에 대해서도 물어질 수 있다. 선형적 인과의 연결고리는 제일 원인이나 무한한 소급을 요청한다. 어느 편이든 우리는 형이상학적 억설인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나 아니면 현기증 나는 무한소급(regressus ad infinitum)으로 끝나게 된다. 양자는 모두 알고 있는 것(결과)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번즈(Bunge)가 지적했듯이, 거꾸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제일 원인이라는 관념은, 논란의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요청으로서, 그리고 종교적 경향으로서 단일 방향적 인과관계 속에 내재해 있다. 자신들의 전통인 선형적 가정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서양과 힌두교 배경을 갖는 많은 불교학자들은 선형적 가정들을 불교 교리 탓으로 돌려왔다. 무명(無明, avijja?이 연기지(緣起支)의, 즉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들의 맨 앞에 위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은 무명을 최초의 원인으로 취급해온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동향은 불교학 분야의 몇몇 저명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무명(avijja?을 아직 개인화되지 않은 의식의 “최초의 활동(the first act)”이라고 소개한 서양불교연구의 창시자인 브라이언 호즈슨(Brian Hodgson)으로부터 그들의 팔리-영어 사전에서 무명(avijja?을 “모든 현 존재의 근본 원인”이라고 의미 규정한 리스 데이비스(T. W. Rhys Davids)와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de)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다. 체르바스키조차도, 어떤 점에서는 불교 인과율 속에 있는 상호의존의 원리를 인정하지만, 무명(avijja?을 “인생 윤전(the Wheel of Life)의 최초의 근본 요소인 제1의 원리”로 보는 관습에 빠져 있다.


냐나틸로카(Nyanatiloka)는 연기(pat.icca samuppa?a)에 대한 “불합리한 생각”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특히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서양의 불교학자와 저술가들을 볼 때” 실로 안타깝다고 이야기한다.


무명(avijja?을, 그것으로부터 의식과 신체적 삶이 전개되어 나오는, 원인 없는 최초의 원리로 (해석하는 학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붓다는 현 존재의 절대적인 최초의 기원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Anamatagga-Samyutta), 그리고 그와 같은 사색은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 될 뿐이라고(An.guttara Nika?a, IV. 27), 그리고 실존에 무명과 갈애가 없었던 때를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An.guttara Nika?a, X. 61) 거듭해서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들을 하다니.


이러한 오류는 서양인들에게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시대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경전들(예를 들면 An.guttara Nika?a, IV. 27; V. 113, 116; X. 61)을 보면 붓다의 뜻에 어긋나는 논법으로 판단하는 사례가 초기불교 시대에도 흔히 있었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보다 분명하게 인과적 제일 원인을 무명으로 돌리는 경향을 논박하고 있다. 그는 인과 계열(12支緣起)에서 무명이 출발점에 있는 것은 단지 회화적이며, 교육적인 방편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왜 무명이 여기에서 기원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무명이 세계의 원인 없는 근본원인이란 말인가……? 무명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명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뇌의 발생과 함께 무명의 발생이 있다.’(Majjhima Nika?a, I. 54) 그러나 회화적인 표현 방법에 속에서는 무명이 근본원인으로 처리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방법인가? (생성을) 원으로 설명하면서 무명이 출발점 구실을 하도록 만들어졌을 때를 말한다.


단일 원인으로부터는, 그것이 단일한 것이든 다수의 것이든, 어떤 종류의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것이 고상한 가르침을 펴는 데 적합할 때, 그리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개성에 알맞을 때, 하나의 전형적인 원인과 결과를 채용하신다.


학자들에 의해서 제일 원인으로 취급될 때, 무명은 일반화된 원리나 최초의 상태가 된다. 대조적으로 올덴베르크는 초기불교의 경전들은 무명을 어떤 특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四聖諦)를 알지 못하는 것,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명’은, 원인 없는 제일 원리이기는커녕, 붓다가 가르쳤듯이, “인과적으로 조건 지워진다”. 실제로 경장과 율장 속에 최초의 그리고 원인에 기인하지 않는 출발점으로 제시된 그 어떤 실체나 본질 또는 조건은 없다. 붓다는 그 어떤 제일 원인이 실재한다고 가르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일 원인을 찾지 못하게 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알고 있고, 보고 있다면, 사물의 과거의 끝을 찾거나[축어적으로는 “뒤로 돌아가다(run behind)”] …… 사물의 미래의 끝을 추구하겠는가?[축어적으로는 “뒤쫓아가다(run after)”]


법우들이여, (중생들의 삶의) 여정에서 출발점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무명에 뒤덮이고, 욕망에 묶인 중생들이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면서 떠도는 여정의 최초의 출발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헤아릴 수 없는(incalculable)”이라고 번역한 술어는 아나마타(anamata)인데 그것은 “생각될 수 없는”의 의미이다. 출발점들을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마음이 인과적 발생의 일부이며, 인과적 발생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인과적 발생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과적 발생의 기원을 찾는 여정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장은 확정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붓다의 그 유명한 침묵(無記)이 연기(pat.icca samuppa?a)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변은, 붓다가 밝혔듯이, 바른 사유의 길을 어지럽히는 공허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불화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붓다는 거기에서 다른 위험―제일 원인을 가정하거나 추구하는 위험―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영원의 문제들에 대한 갖가지 견해들은 왜 생기며, 세계의 근원과 존속 같은 주제들에 대한 논쟁은 왜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붓다는 인과적 요인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무지에서 갖가지 견해와 논쟁이 발생한다고 대답했다.


이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붓다가 보기에는, 제일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확인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연기(pat.icca samuppa?a)와 연기가 강조하는 전적인 조건성에 의해 뿌리뽑힌 가정―이 조건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모든 원인들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그 관계 속에서 단독으로 결정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요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초기 불경 속에서 많은 은유와 유비로 표현된다. 초목을 예로 들면, 초목을 자라게 하는 조건들을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선형적 인과의 고리는 없다. 씨앗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양도 필요하고 습기도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사건들의 결합에서, 즉 관계로부터 불이 붙는다. 두 개의 막대기를 맞대어 문지르면 열이 나고, 불꽃이 생기지만, 그 두 막대기를 떼어놓으면, 마찰의 결과인 열은, 마찰이 그치면, 식게 된다. 건축된 집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서까래들은, “모두가 지붕 꼭대기로 집중하여, 균등하게 지붕 꼭대기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 각기 다른 것을 버텨주며, 혼자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서까래는 하나도 없다. 붓다고사는, 어떤 하나의 인자의 탁월성을 반박하면서, 덩굴 식물의 비유를 들었다. 덩굴은 지면을 따라 뻗어가면서, 연기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어느 지점에나 (뿌리내려) 붙을 수 있다.


즉, 처음부터 말씀하시기도 하고, 중간에서 끝으로 올라가며 말씀하시기도 하고, 끝부터 말씀하시기도 하고, 중간에서 처음으로 내려가며 말씀하시기도 했다. …… 세존께서는 왜 (연기를) 이와 같이 가르치셨을까? 연기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출발점 가운데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그것은 결국 바른 길(中道)을 통찰하게 될 뿐이다.


3. 상호의존 구문론


연기(pat.icca samuppa?a)의 가르침에 사용된 바로 그 언어와 문법적 형식들은 연기가 일종의 비선형적 인과율을 수반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선형적인 가설에서 벗어나 실체보다는 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을 선택된 술어들과 그 술어들의 어형 변화에서 알 수 있다.


일련의 연기지(12연기)를 예로 들어보자. 그가 정각을 이루던 날 밤에 붓다는 이들 현 존재의 요인들을 깊이 관찰하여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했다. 붓다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들의 의미론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면 무엇이 있기 때문에 갈망함(愛)이 있는 것일까? 무엇이 갈망함의 조건이 되고 있는가?” 붓다는 어떤 주어진 요인을 만들거나, 낳거나, 산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는 오히려 A가 있을 때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A의 조건이 되는가 이다.


그래서 이들 질문에 이어지는 단언과 뒤이어 설해지는 인과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조건들을 열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A를 조건으로 하여, B가 나타난다.” 축어적으로 말하면 “A를 조건으로 하는” 또는 “A에 의존하고 있는, B”(vin???a-paccaya?na?aru?a, 識을 조건으로 하는, 名色)이므로 번역에서는 “나타난다”라는 말을 넣었다.


원인을 나타내는 용어로 paccaya(緣)가 사용되는데, 문자 그대로는 지지(suport)를 의미한다. 그것은 pat.icca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다, ∼에 의지하다’는 의미의 동사 pacceti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비달마불교에서 paccaya(緣)는 모든 형태의 관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범주로 쓰이게 되었으며, 그것들이 일으킨 사건들은 paccayuppanna(緣生)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연기계열(12연기)에서 사용된 탈격 paccay는 ‘∼에 의하여’ 또는 ‘∼에 의지하고서’를 의미하는 부사적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을 조건으로 하는’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부당한 것은 아니다.


베다 학파의 svadha?스스로 자기존재를 결정한다는 이론)와 satka?yava?a(因中有果論 ; 원인 속에 결과가 내재한다는 이론) 이론과는 대조적으로, 이 말(paccaya?은 B는 A의 잠재력에서 나온다는 의미의 원인을 의미하거나 (B는) A의 자기 전개라는 의미의 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유의 힘으로부터 발생적으로 (결과를) 생산해 내는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것이 있음으로써 (어떤 작용을) 일으키고 유지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만약 원인을 생산하는 것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했다면 그 교설(연기설)은 satka?yava?a(인중유과론)에서처럼 kar(만들다)와 같은 동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설은 paccaya를 사용함으로써 원인을 일방적인 힘의 의미가 아니라 상호관계의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즉 무엇인가 있다는 사실이 (어떤 현상을) 조장하거나 촉매작용을 하거나 야기한다는 것이다.


캐롤라인 리스 데이비스(Caroline Rhys davids)와 에이웅(S. Z. Aung)은 paccaya를 사용한 것은 실재의 본성이 과정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그것은 결국 작인(作因, 作者)과의 결별을 수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불교철학에서 paccaya는……, 모든 형식의 관계는, 비록 인과적 효과(원인이 결과를 산출하는 효과)는 결여되어 있지만, 인과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음(happening)’ 또는 ‘사건(event)’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paccaya를 paccayuppanna, 즉 결과, 또는 ‘paccaya를 통해 나타난 것’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사건이라고 정의를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 작인(作因; B를 산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A)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나타나도록 돕는’이라는 개념을 취하여, 우리는 …… paccaya를 …… 돕고 있음(upakaraka)으로 이해한다.


나는 앞장에서 ida-paccayata彭?pat.icca samuppa?a(緣起)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고, 그것을 ‘이 조건성(此緣性, this con-ditionality)’으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그것을 ‘이것의 조건(the con-ditionedness of this)’으로 표현한 에이웅과 C. 리스 데이비스의 번역이 아마 더 엄밀한 번역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과 동일한 문장 속에서 A는 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B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것(ida)은 B(결과)를 가리키고, 복합어(ida-paccayata?는 A(원인)를 가리킨다.: 즉 A는 ‘이것의 조건(paccaya-of-this)’이다. 그 추상적 형식은 paccaya를 표현하는 유일한 철학적 방법이다.


이제 2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던, pat.icca samuppa?a의 축소판을 의미하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공식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게 된다(此有故彼有).; 이것이 나타나면 저것이 나타난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게 된다(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여기에서 어법은 A가 B를 만들거나 산출한다거나, 또는 B가 A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방식이 아니다.; 즉 분사의 처격(處格, locative)이 사용되어, A가 나타나고 있는 곳에(또는 나타나지 않는 곳에) B가 나타난다(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때문에(becauuse)’보다는 ‘∼할 때(when)’ 또는 ‘만약 ∼하면(if)’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가깝다.(그리고 실재로 ‘if’와 ‘when’이 가끔 번역에 사용되어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게 된다’로 번역된다.) ‘∼때문에(becauuse)’로 맺어지는 관계는 선형적 인과율에 의한 산출을 훨씬 강하게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예를 들면 ‘그 쇠는 불 속에 있기 때문에 붉다’(즉 불이 쇠를 붉게 만들었다)는 어법이 ‘일요일이면 도서관이 폐쇄된다’(즉 일요일이 도서관을 폐쇄하는 것은 아니다)는 어법과 대조되듯이.


팔리어에서, 어떤 것이 있게 만든다는 의미나 나타나게 만든다는 의미는 동사의 사역형에 의해 표현된다. 팬드(G. C. Pande)가 지적했듯이, 이 연기의 공식을 idam. uppannam. idam. uppa?eti(uppajjati의 사역형)의 의미로, 이를 번역하면 ‘이것이, 나타나면서, 저것을 나타나게 만든다(this, arising, makes that to arise)’ 정도가 되는데, 그런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들 사건들은 단순히 공간적으로 접촉하고 있거나 시간적으로 인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팔리어를 idam. uppannam. idam. uppajjati(이것이 나타나 있다 저것이 나타난다)로, 즉 첫번째 절(idam. uppannam.)이 주격(nominative)이 되는 ; 그래서 동시 발생이나 단순한 연속을 의미하게 될 우려가 있는 문장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문장의 첫 번째 절은 독립 처격(locative absolute)의 형태를 띠고서, B는 A의 나타남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A의 나타남은 B가 나타날 수 있는 터전과 상황을 제공한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사건들의 접촉일 뿐이라는 흄(Hume)의 견해 이상의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때때로 불교의 해석과 동등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인과율에 대한 흄의 해석에 의하면, 사건들은 과거로 흘러가며, 근본적으로, 객관적으로 서로 무관하다. (단지) 우리의 정신 작용이 인과관계를 추론할 뿐이다. 그러나 붓다의 견해는, 처격의 형태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인식론적 관계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도 파악했다.


불교의 인과율은 이들 경전 속에서 주관적 투사보다는 객관적 현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칼루파하나(Kalupahana)는 연기의 공식 가운데 두번째와 네번째의 구절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그 가르침은 단순히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이라고 하는 변화를 의미하는 동사를 포함하고 있다.


칼루파하나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은 선행하는 구절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동사를 바꿈(‘있으면’에서 ‘나타나면’으로, ‘없으면’에서 ‘사라지면’으로 바꿈)으로써 그 구절들은 새로운 생성과 새로운 소멸이라고 하는 새로운 것이 나타날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과 법칙이 붓다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경전의 언급은 연기(pat.icca samuppa?a)가 객관적인 지위에 있다는 훨씬 효력 있는 증거일 것이다.; 연기는 붓다들의 깨달음과 무관하게 실재성을 갖는다. “법우들이여,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사물들의 이 본성, 즉 이 인과의 현상, 이 인과의 정연한 질서는 확립되어 있다.”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을 꾸며내거나 추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연기는 실재에 대한 단순한 개인의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붓다는 그것을 ‘사물들의 본성(dhammata?; 法性)’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어원적으로 고찰해야 할 점 두 가지가 더 남아 있다. 연기에 대한 팔리어의 설명에 기초가 되는 두 개념, pat.icca와 paccaya, 이 둘은, 이미 지적했듯이, 동사 pacceti에서 유래한 것이다. pati와 i의 합성어인 pacceti는 ‘되돌아오다’ 또는 ‘되돌아가다’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다시 ∼으로(back to)’를 의미하는 전치사 pati가 뜻하는 회귀 또는 역진 운동의 관념이다. 다음 장에서 시스템 이론을 살펴볼 때, 피드백(feedback)이라는 개념이 상호 인과율이라는 관념에 얼마나 핵심적인 것인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어떤 활동의 결과들은 (그 활동을 한) 유기체 속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며, 이 피드백으로 인하여 시스템들은 상호 결정력이 있다. 인과의 흐름 속에 있는 회귀의 관념이 이들 pat.icca와 paccaya라고 하는 중심 개념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언어 속에서, 바로 그 ‘relation’ - re-latus, 본래의 의미는 ‘다시 제자리로 운반된 것(that which carried back)’이라는 단어 속에서도 볼 수 있다. A는, B와 관계하면서, A를 A 스스로에게 다시 가져온다.; 사물들에 대한 인공두뇌학적 견해가 밝힌 자기 조회(self-reference)는 우리 자신들의 언어의 어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 팔리어 개념들 속에도 함축되어 있다.


인연(Nida?a)과 의(依, upadhi)는,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들에, 그것들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적용된 용어들이다. 이들 두 용어에서 어원상으로 당면한 문제는 속박이라는 관념이다. Upadhi는 보다 초기의 용어인데, 기초나 근본을 뜻할 뿐만 아니라 장애, 속박, 제한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nida?a는 ‘묶다’ 또는 ‘족쇄를 채우다’는 의미의 동사(da? dyati)에서 바로 나온 것이다.


이들 두 술어 속에 들어 있는 속박의 관념은 인과율의 특성을 강조한다. 만약 인과적인 효력이 실체보다는 관계에 기인한다면, 시스템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그 효과는 이들 관계들이 현상성(phenomenality)에 부과하는 속박에 의해 작용한다. 시스템(조직체)들은 한결같은 관계로 인하여 스스로를 조직하면서(self-organize) 발전하는데,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을 방향 잡아주는 그 관계의 속박하는 성질은 마약의 습관성(a morphic nature)과 같은 것이다.



4. 인과 요인(緣起支)들의 상호 작용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緣起支)들은 연속적인 형태를 보인다.; 사실 언어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이 잇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하도록 강요한다. 비록 몇몇 학자들은 이들 요인들을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해석했지만, 그들의 관계가 상호의존의 관계라는 경전상의 증거는 풍부하다. 이 상호의존은 실재를 상관적으로 보는 관점과, 제일 원인이 없다는 사실 속에 함축되어 있다.; 여기 인연(nida?a)들 또는 의(依, upadhi)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들의 상호 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종수관경(二種隨觀經, Dvayata?upassana?sutta)》이라고 하는 연기설을 이야기하는 초기 경전은 각각의 의(依, upadhi)를 다른 의(upadhi)들의 원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괴로움이든 나타나는 괴로움은 모두 무명(avijja? 無明)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 무명이 완전히 소멸하면 괴로움의 어떤 근원도 없다. ……

어떤 괴로움이든 나타나는 괴로움은 모두 행(san.kha?a?, 行)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 행이 완전히 소멸하면 괴로움의 어떤 근원도 없다. ……

어떤 괴로움이든 나타나는 괴로움은 모두 식(vin???a? 識)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등등).


이 구절들은 나머지 연기지(緣起支)에도 모두 반복된다. 여기에서 12연기는 선형적 고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고 있는 각각의 의(依, upadhi)는 다른 의(upadhi)들을 일으킨다. 다른 것들을 야기하면서 다른 것에 의해 야기되는 그들의 인과관계는 상호적이다. 카드로 만든 집과 같이, 우리들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들의 무더기는 어느 지점에서든 분열되고 무너질 수 있다.


다른 것에 의지하여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갈대 단의 비유가 경전들 속에서 사용된다. 그 비유는 식(vin???a? 識)와 명색(na?aru?a, 名色)의 관계에 대한 비유이다. 인과의 계열(12연기)을 순서대로 열거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이들 두 요인인데, 명색(na?aru?a, 名色)은 식(vin???a? 識)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고 말한 후에, 거꾸로 선회하여 이번에는 식이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과의 상호관계는 명백해지며,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그것을 고민했고, 케이트(Keith)와 토마스(Thomas)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연기설의 난점(難點)이라고 보았다. 꼬티따(Kot.t.hita)는, 그 문제를 가지고 붓다의 제자 가운데 가장 박식한 사리뿌뜨라(S�riputra)와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십시오, 우리는 존자 사리뿌뜨라의 말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즉 …… 명색(名色)은 식(識)을 조건으로 하며,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사리뿌뜨라여, 당신이 한 말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그렇다면, 법우여, 내가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비유를 통하여 지혜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의 의미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법우여, 이것은 마치 두 개의 갈대 단이 한 갈대 단이 다른 갈대 단을 지탱하면서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법우여,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며, 육입(六入)은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등등. ……

법우여, 만약 내가 저 갈대 단 가운데 하나를 끌어당기면, 다른 하나는 쓰러질 것이고; 내가 다른 하나를 끌어당기면, 전에 당겼던 갈대 단이 쓰러질 것입니다.


비슷한 이미지, 즉 세 개의 막대기가 의지하여 서 있는 삼각대의 비유가 khan.d.as, 즉 자아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의식 덩어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인과의 계열 속에서는 명색과 식의 상호관계가 가장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의식을 물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보다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두는 바라문교의 견해와 의식에 대한 불교의 견해를 대조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아무튼 사리뿌뜨라가 갈대의 비유에서 (식과 명색 이외에) ‘수(受)와 그 밖의 것들’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과 명색 이외의) 다른 연기지(緣起支)들 사이의 인과 관계도 역시 상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식(識)과 그 앞에 있는, 즉 식의 조건이 되는 연(緣, nida?a), 다시 말해서 의지에 의한 형성작용인 행(行, san.kha?a)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들 형성작용들은 이 계열에서 식을 형성하는 것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식이 그들의 조건이 된다. 이 관념은 ‘합성된’ 또는 ‘짜 맞추어진’의 뜻을 가진 유위(有爲, san.khata)에서 유래하는 그 개념의 의미 속에 나타나있다.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식 활동과 의도이며, 한편 의지는 우리의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법우들이여, 우리가 의도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전념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의식을 지속하게 하는 대상이 된다.


동일한 인과적 상호관계는 행(san.kha?a)과 연기계열(12연기)에서 그 앞에 위치하는 요인인 무명(avijja?과의 관계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들의 무지가 우리들의 의지를 형성하는가 하면, 뷔르누프(Burnouf), 쿠마라스와미(Coomaraswamy), 그리고 그 밖의 여러분들이 설명했듯이, 의지는 앞에 존재한 무명의 상태에서 단일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의지가 우리의 무지를 기르고 유지시킨다. 아비달마의 《논사(論事, Katha?atthu)》에는 이 점이 강조되어 있다.


“무명은 행의 조건이 되지만, 우리는 행이 무명의 조건이 된다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대중부(Maha?an.ghika)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상좌부(Theravadin)는 무명(avijja?은 행(san.kha?a)과 함께 존재했으며, 식(vin???a?과 명색(na?aru?a)이 상호적으로 원인이 되는 것과 똑같이, 무명과 행, 또는 취(取)와 애(愛)도 그럴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 책(《論事》)에서는 “따라서 조건이 되는 관계는 상호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팔리어 an??man??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서로서로(one another)’인데, 번역할 때에는 ‘서로의(reciprocal)’와 ‘상호간의(mutual)’로 번역한다. 한편 이 말은 아비달마 학자들에 의하여 특수한 형태의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쓰이게 되는데, 붓다고사는 연기설의 취지를 총괄하여 의미 규정하는데 그 말을 사용했다. 그는 인과율의 형식으로서 그 인과율에 따라 ‘현상들이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an??man?? pat.icca) 함께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연기(pat.icca-samuppa?a)를 정의한다.


초기 경전 속에서 식(vin???a?과 명색(na?aru?a), 그리고 식(vin???a?과 행(san.kha?a)과 무명(avijja?의 상호작용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 상호관계는 애(tan.ha?의 발생에도 작용한다. 12연기에서 여덟 번째이며, 수(受)를 조건으로 하여 발생하는 애(tan.ha?는 집성제(集聖諦)와 멸성제(滅聖諦)가 단언하듯이 우리들의 괴로움의 핵심 요인이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지(無明)와 갈망(愛) 가운데 어떤 것이 인류를 타락한 상태로 만든 보다 중요한 원인인가에 대해 의아해 하게 했다.


그것은 플라톤의 견해처럼 무지일까, 아니면 사도 바울의 견해처럼 갈망의 자아 중심성을 (타락의)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은 것일까? 니까아야(Nika?a, 남방불교 성전)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정답이다. 무명(Avijja?은 가장 자주 맨 앞에 위치함으로써 연기설에서 강조된다.; 한편 애(tan.ha?는 사성제 속에서 강조되며, 때로는 고(dukkhasamudaya, 苦)의 집(集)의 첫번째 요인으로 강조된다. 붓다고사는 양자가 그 교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은 생사유전(sam.sa?a)을 기술한 위의 인용 구절이 시사한다.: 즉 중생들은 ‘무명에 뒤덮이고, 갈망에 묶여’ 윤전(輪轉)하고 있다. 어떤 요인도 다른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우리의 갈망을 부채질하듯이, 갈망은 우리를 무지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비슷한 형태로 애(tan.ha?와 자아(atta?라는 관념은 상호 인과관계의 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대애명경(大愛名經, Maha?an.ha?an.khaya sutta)》에 물질적 음식(食), 감각에 의한 지각(更樂, 觸食), 의지(意念, 意思食), 그리고 생각(識, 識食)으로 분류된, 개별적 자아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갈망이 출처이며, 갈망이 원천이며, 갈망이 낳은 것이며, 갈망이 근원이다”. 세계의 발생을 신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세기경(世起經, Aggan??sutta)》에서는 갈망이 어떻게 자아의 환상을 갖게 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땅에서 나온 음식(地味)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중생들은 점점 그들의 개성에 대한 의식과 자만심을 키워간다. 지속하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네 가지 형태의 집착(四取, upa?a?a) 가운데 하나(我語取)인데, 그것은 12연기 속에서 갈망(愛)를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42) 그러나 갈망(愛)이 그것(我語取)을 기르듯이, 한편으로는 자아에 대한 환상이 갈망을 기른다.


라훌라여, 어떤 비구가 완전한 지혜로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五蘊)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atta?가 아니다’라고 깨달으면, 그러면 그는 갈망으로부터 그 자신을 끊어내고, 결박을 풀고, (자아에 대한) 헛된 자만심을 극복함으로써 괴로움을 멸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애(tan.ha?와 자아(atta?는 상호의존적으로 나타나며, 그들의 인과관계는 상호적이다. 갈대 단처럼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것은 무너진다. 전에 인용한 ‘갈애의 소멸에 대한 위대한 설법’에서 신체를 유지시키는 음식, 의지, 그리고 정신적 구조물들과 함께 감각적인 지각도 자아의식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가르침은 음식(a?a?a)의 은유에 의해 선명해 진다. “이들 네 가지 음식이 존재하게 된 중생들을 유지시킨다.”


음식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실재가 우리가 가공 저장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우리는 우리의 시스템(신체)을 통해 음식을 섭취하고 배설한다. 우리는 관찰하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분명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 ‘외부에 있는’ 어떤 것처럼 그것(음식)을 마주하고 서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속에 있고, 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의 (대상을 지각하는) 바로 그 지각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 계열(nida?a series)은 선형적인 인과의 연속을 나타내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호간에 영향을 주는 조건들의 관계그물망(network)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 태생의 승려이며 라마인 아나가리카 고빈다(Anagarika Govinda)는 연기의 ‘역동적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고리는 다른 고리와 연결될 수 있으며, ……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연속할 것인지를 선택함에 따라 어느 고리와도 연결될 수 있다. …… 이런 식으로 우리는 순전히 시간적인 인과관계나 순수하게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살아 있는, 유기적인 관계, 즉 동시공존적인 상호관계, 다시 말해서 모든 연결 고리들이 나란히 있으면서 상속하는 관계를 갖는데, 그 관계 속에서 각각의 고리는, 말하자면, 모든 다른 고리들의 단면을 모아 놓은 모습을 나타내며, 그 자신 속에는 그의 모든 과거는 물론 미래의 모든 가능성까지 지니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 때문에 모든 (고리의) 연쇄는 모든 순간에 그리고 그것(연쇄)의 모든 단계에서 제거할 수 있다.



5. 아비달마의 해석들


불교의 인과율에 대한 나의 연구는 팔리 성전의 경장(經藏, suttas pit.aka)과 율장(律藏, vinaya pit.aka)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삼장(三藏) 가운데 이 둘은 현존하는 불교 교리의 기록 가운데 가장 초기에 쓰여진 기록이다. 그것들은 불교학자 미즈노(Mizno)가 ‘원시 불교(primitive Buddhism)’로, 그리고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가 ‘고대 불교(archaic Buddhism)’로 명명한 것에 해당한다. 삼장 가운데 불교의 철학적 측면을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논장(論藏, Abhidharma pit.aka)은 논장의 술어와 내용이 명시하듯이 보다 후기에 발전한 불교사상을 보여준다.


아비달마(부파불교)에서 상좌부(Theravadin)와 유부(有部, Sarvasti-vadin) 두 학파는, 인과관계의 성질을 분석적으로 이론화하면서, 고도의 궤변과 복잡한 이론을 만들게 되었다. 무성하고 복잡한 언어와 논리를 지닌 아비달마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불교의 인과율에 대한 후대의 많은 학문적 견해들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것이 발전하는 가운데 약간의 변화가, 즉 연기(pat.icca-samuppa?a)를 설명하는 방법상에 미묘한 그러나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나타났다. 이 차이들은 자주 간과되었다. 오늘날 불교를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과 체르바스키와 콘즈 같은 대학자들조차도 아비달마 불교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사변적인 요소들을 초기의 가르침 속에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왜곡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은 인과율에 대해 오히려 선형적인 견해로 치우치는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서 긴히 그것들을 명기하여 개괄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① 순간성(刹那)이라는 관념; ② 무위법(無爲法)의 가정; ③ 실체와 속성의 구분; ④ 12연기(the nida?a series)를 삼세(三世)의 인과적 연쇄로 보는 설명(三世兩重因果說).



6. 순간성(찰나)이라는 관념


초기 경전들은 현상들의 무상(無常)과 상호작용을 강조했지만, 그러나 현상들의 존재론적 본질을 분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비달마 학자들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 즉 제법(諸法, dharmas)의 고유한 특성을 확정하려고 시도했다. 이들 (아비달마에서 생각하고 있는) 법(dharma)은 경험의 심리적-물리적 구성 단위, 즉 분해될 수 있는 세속적인 실재의, 건물의 벽돌과 같은, 근본 요소를 의미한다.


그래서 법들은 구별되고, 그 수가 몇 가지인지 세어지고, 분류되었으며, 법의 성질과 수와 존속 기간에 대한 정교한 이론들이 수립되었다. 이들 이론은 법을 분리된 실체들로, 즉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사실들’로 실체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스트렝(Streng)이 언급했듯이, 이것은 “본질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불행한 풍조”였다.


아비달마 학자들이 이 실체론을 (초기불교의) 실재에 대한 역동적인 관점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이들 법은 번갯불처럼 빨리, 너무 짧아서 상호작용을 하거나, 아니 그보다는 시간 속에서 상호간에 상속할 수 없는 순간에, 상호간에 교체하는 순간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상성(無常性, aniccata?은 순간성(khan.ika? 刹那性)이 되었고, 인과관계는 단순한 연속이 되었다. 법들은 너무 순간적이어서 상속 관계 이상의 어떤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 대한 흄(Hume)의 견해에 가까우며, 흄의 견해는 자주 불교와 비교되지만, 흄과의 유사성은 아비달마 불교에 한정될 뿐 그 이전의 불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칼루파하나(Kalupahana)가 주장하듯이, 초기불교 경전에서 현상들은 무상한 것으로 표현될 뿐 결코 순간적인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경험적인 사물들은 …… 얼마 동안 존재하고 있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나 동시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요인 외에도,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는 어떤 사물이 얼마나 오래 존속하느냐가 아니라, 인과율이 사물들에 의하여 세워지느냐 관계들에 의하여 세워지느냐이다. 초기불교 경전에 순간성이나 찰나성(khan.ika?이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나타날 것 같지 않는 이유는 아비달마 불교 이전의 불교인들은 별개의 실체라는 개념으로 실재를 형이상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아는 오온(五蘊)으로 분석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들 구성요소들의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7. 무위법(無爲法)의 가정


또 하나 아비달마가 변형시킨 것은 열반(nibba?a)과 허공(akas�)이라고 하는 조건이 없이 존재하는 실재, 즉 무위법(無爲法)이 있다는 가정이다. 이것은 무위(asan.khata, 산스크리트는 asam.skr.ta)라고 하는 용어의 사용에 변화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경전에서 유위(有爲, san.khata)는 ‘결합되어 하나로 만들어진’ ‘복합된’ ‘조직된’―따라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을 의미한다. 그 말은 ‘조건에 의한’이라는 의미가 아니므로, 그 반대말인(nibba?a, 열반반에 적용되는) 무위도 ‘조건에 의하지 않는’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로 초기불교 경전에서 조건에 의하지 않는 것, 즉 인과율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칼루파하나가 단언하듯이, 아비달마 불교 이전의 경전들이 무연생(無緣生, apat.icca samuppanna, 조건 없이 생긴 것)으로 보는 실체나 본질 또는 상태는 결코 없다. 해탈도 초기불교 경전에서 인과율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인과율을 사용하여, 즉 조건성의 효력을 이용하여 성취된다. 열반(Nibba?a)은 조건이 되는 연(nida?a)들의 계열(12연기)에서 벗어남으로써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집(集, samudaya)을 멸(滅, nirodha)로 바꿈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이야기된다. “나는 해탈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지,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라고 붓다는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와 함께 무위(無爲, asan.khata)가 ‘조건이 없는’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예를 들면,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n.i)》의 제법 분류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거기에는 열반만이 무위법의 범주 속에 들어있는데, 다른 학파에서는 허공도 포함시킨다. 이와 같이 무위(asan.khata)의 의미는 ahetujam, 즉 ‘원인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보다 실체론적인 그리고 선형적인 견해로의 변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결과가 그 원인 속에 선재(先在)하며, 결과는 원인에 의해 산출된다. 열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산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열반은 인과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그래서 조건이 없는 것으로 단정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열반을 형이상학적 절대자와 동등시하려고 하는 해석을 부추겼다. 그것은 또한 구원을 우리가 살고 있는 위태롭고 곤궁한 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가 불교학자들의 불교관에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구원은 오직 무위의 세계(The Unconditioned)로의 탈출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라고 이야기한 콘즈(Conze)에게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8. 실체와 속성의 구분


아비달마 불교는 분석하기 위하여 법들(dharmas, 사물들, 또는 심리 물리적 사건들)을 범주적으로 구분했는데, 기록에 남겨진 붓다의 가르침에는 그러한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튼 세속적인 또는 상대적인 실재와 현상 세계와는 별개의 절대적 진리 또는 절대적 영역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desana? 勝義說)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졌다. 비슷한 범주적 구분이 정신 영역과 물질 영역 사이에 나타났는데, 아비달마 자체의 표현으로는 명(名)과 색(色)의 구분(na?a-ru?apariccheda), 즉 정신과 물질로 나누기이다. 물질이 비정신적(acetasika) 특성으로 정의된 반면, 마음(心, citta)과 그 정신적 속성들(心所, cetasika)은 비물질적(無色, aru?a) 특성으로 정의되었다.(몇몇 책에서는 열반을 정신 영역에 넣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추세는 신체와 현상 세계를 대하는 태도들을 조장했는데, 그것은 상좌부 불교의 특성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또한 아비달마 학자들에게 철학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는데, 칼루파하나는 그것을 자세히 고찰하여 아비달마 학자들이 만든 세 번째 구분, 즉 사물(dharma)과 사물의 특성(lakkhan.a)의 구분에 결부시켜 설명한다.


 이러한 구분은 기초가 되는 실체를 생각하도록 하며, 기초가 되는 실체 관념은 순간성이라는 관념이 나타남으로써 사라진 연속성이라는 관념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2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선형적 인과율에 대한 비판에 의해 깨닫게 되었듯이, 실체와 속성의 구분은 결국 인과작용을 단일 방향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5장 참조).



9. 12연기를 삼세(三世)의 인과적 연쇄로 보는 설명(三世兩重因果說)


우리가 아비달마 불교에서 주의해야 할, 초기불교의 인과관에서 벗어난 네번째 이탈은 12연기(the nida?a series)를 과거세, 현세, 내세의 연속적인 삶(三世)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2연기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의미하게 되며, “삼세에 걸친 두 겹의 인과(三世兩重因果)”로 불리게 된다〔兩重(twofold)은 집(samudaya)과 멸(nirodha)을 의미한다〕. 붓다가 가르친 연기설 그 자체와 자주 동일시되는 이 해석에서, 처음의 두 요인, 즉 무명(avijja?과 행(san.kha?a)은 전생에서 초래된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의 일곱 요인은 현생의 현 존재를 나타내는데, 식(vin??n.a)에서 수(vedana?까지는 과거의 원인에 의한 현재의 결과이고, 애(tan.ha?와 취(upa?a?a)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원인이다. 마지막 셋, 즉 유(bhava), 생(ja?i), 노사(jara?aran.a)는 현재의 업이 가져올 미래의 결과, 또는 세 번째 삶(미래의 삶)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는 경장과 율장에서는 설해지지 않았다. 경장과 율장에서 연기지(緣起支, nida?as)들은 명확하고 특정한 결정소의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삶이 연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실례의 역할을 했다. 미즈노에 의하면, (경과 율에서) 식(vin??n.a)을 환생하는 의식으로 언급한 것은 단지 통속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의도에서였을 뿐, 권위 있는 버전이 한 둘이 아닌 연기설(다양한 형태의 연기설) 그 자체는 삼세라고 하는 고정된 도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많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초기 경전을 보면 연기지(緣起支)의 수와 순서 그리고 특성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양하다.―어떤 연기설은 10지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은 12개 또는 그 이상으로 되어 있으며, 어떤 것은 식 앞에 촉과 수를 두고 있고, 어떤 것은 희락(喜樂)과 신념이라는 요인(緣起支)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인과적 연쇄의 순서와 명확한 구성이 그 가르침(연기설)의 주요 교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니까야(Nika?a)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연기설의 형식 하나(12지연기설)가 인간의 (삼세에 걸친) 연속적인 삶을 관통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이들 용어(緣起支)에 특별히 중요한 지위와 특이성이 주어진다.


미즈노가 시사하고 있듯이, 통속적인 은유에 의한 그리고 기억을 돕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여기에서는 문자 그대로 해석된 것이다. 열반을 조건에 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 발전(삼세양중인과설)도 부분적으로는 법(dharma)을 실체화 하려는 경향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아비달마 학자들은 개개의 연기지에 경과 율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들의 삼세양중인과설은 12연기설을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표현하는 데 공헌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연기설의) 상호 역동성을, 즉 어떤 주어진 삶 속에서, 엄밀히 말하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우리의 의지와 생각, 갈망과 무지가 서로간에 상호 결정하는 방식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10. 상호의존으로서의 연기


후대에 몇몇 아비달마 불교학자와 학문적인 해석들이 본의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경전에서 연기가 실재의 ‘상호의존적 구조’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즈노의 말을 들어보면, 붓다는 보리수 아래서 세계의 상호의존적 구조를 깨닫고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이라는 사고방식 위에 서 있다고 말해도 좋다.


붓다는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습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기는 경전에서 거듭 이야기하듯이, 심오하고, 미묘하고, 파악하기 어렵고,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을 설명하면서, 그리고 성도 직후 연기를 가르치면서, 상호 인과율에 수반된 사유의 방식을 언급하는 말이 반복되는데, 그것은 여리 작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a?a)이다.


작의(作意, manasika?a)는 ‘심사숙고하다’ ‘마음에 깊이 새기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깊은 주의’ 또는 ‘주의 깊은 심사숙고’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 심사숙고는 yoni의 탈격(奪格)인 여리(如理, yoniso)에 의해 수식되고 있다. Yoni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자궁’인데, 의미가 확장되어 ‘근원’, ‘태어나는 길’, ‘모조직(母組織, matrix)’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여리작의(Yoniso manasika?a)는 우리가 의존적 상호발생(연기)에 대하여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그리고 유익한 함의를 제공한다. 자궁을 가리킴으로써 발생, 즉 현상의 발생을 함축하고, ‘모조직(母組織, matrix)’을 가리킴으로써 현상들이 참여하고 있는 상호의존의 조직(web)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리작의는 분석하거나 분류하는 이지적인 학습이 아니다. 그것은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인 것으로서, 전체의 자각―즉 폭넓고 집중된 개방성 또는 그 안에 모든 요인들이 포함될 수 있는, 즉 그들의 상호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깊은 주의(靜慮)를 뜻한다.


허버트 귄터(Hebert Guenther)는, 이러한 스타일의 사유는 서양적 성질의 사유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면서, 그 교의가 선형적 인과관에서 일탈한 것임을 강조한다. 불교의 인과율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유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불교인의 연합·조화적(associative and co-ordinative) 사유의 개념 체계는 전통적인 유럽인의 인과·입법적(causal and nomothetic) 사유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불교인의 사유체계는 상호의존하는, 함께 존재하면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힘들의 관계그물망(network)을 (가정하며), 이 관계그물망 속에서는 어떤 요인이건 인과의 분류단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언제든지 차지할 수 있다.


이것(불교의 인과율)이 의식을 지닌 존재들에게 주는 역할에 대하여 평하면서, 귄터(Guenther)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작인(作因, causal agent)’으로서 그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이고, 한편 세계는 그를 만들고 있는 ‘작인(causal agent)’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불교의 ‘인과율’이 전술한 바와 같이 원인과 결과가 서로 얽혀 있는 시스템이며, 인과의 선형적인 연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인과율은 상대적이며 또한 객관적이다.: 객관적으로 사물들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이 인과율은 상대적인데, 주관적인 견해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상호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이 상호의존이라는 관념은 붓다의 가르침에 고루 퍼져 있어서 붓다가 계율을 제정하는 것 자체도 조건(인연)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일방적인 계시(啓示)란 결코 있지 않으며, 계율의 출현은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절망과는 거리가 먼,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보다 순결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늙어 죽어 가는, 생사윤회(sam.sa?a)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혼란에 의지하여 나타난 것이다. 후에 용수(龍樹, Nagarjuna)가 이야기한 생사윤회와 열반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대한 언명의 전조가 되는 언급 속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이들 세 가지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제자들이여, 여래, 불(佛) 세존은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여래가 현시한 계율과 교의도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 그 셋인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그것이다.


인과율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아와 자아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즉 인간 실존의 본질인 곤경과 희망을 파악하는 데, 광범위한 함의를 갖는다. ■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