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불교의 욕망관과 경제문제의 인식

slowdream 2007. 9. 28. 13:30
 

불교의 욕망관과 경제문제의 인식




이 글은 2001. 11. 17. 한국선학회 월례 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토론자로서 유익한 도움말을 주신 박경준 교수와 구병진 박사께 감사 드린다.


정기문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경제학 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수료.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및 주임연구원 역임. 현재 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1. 시작하는 말


조용한 절이나 선방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좌선하는 모습의 스님들과 시장 바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우리 생활인들의 모습을 같은 도화지 위에 그려 놓으면 어떤 그림이 될까? ‘무소유’란 낱말을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불자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이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般若)를 얻어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을 남겨 주셨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불교 교리들은 어렵고 심오한 철학의 한 체계로 이해되고, 선(禪) 수행은 출가 수행자들만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부처님의 그 많은 가르침들이 우리 실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현대사회의 복잡한 정치문제나 경제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불교 교리나 선 수행은 우리 대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된다.


특히 한국 불교가 따르고 있는 대승불교 전통이 발생하게 되고 번성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대승불교 운동은 불교의 세속화 또는 사회화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불교는 더욱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고, 사회 조직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인간 생활의 물질적, 정신적 복지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불교가 그런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불교 교리는 일부 지식인들의 지적인 취미를 만족시켜 주는 하나의 고급 철학 체계 또는 생명력을 잃은 종교가 되고 말 것이고, 선 수행은 출가 수행자들만의 전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경제학, 특히 신고전학파 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이라고 불리는 주류 경제학(mainstrean economics)에서는 과학성과 논리성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이나 윤리 또는 도덕에 관해서는 논의의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 때문에 현대 경제학은 우리 사회가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데 많은 한계점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는 과학성과 논리성만을 강조하는 현대 경제학이 지나치게 추상화된 모형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최근에는 경제학이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해결책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는 경제문제에 대한 인식과 경제학의 연구 방법에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 경제학계 내부에서도 많이 지적되고 있다.


이 글은 현대 주류 경제학이 갖는 한계점들을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해서, 만일 불교적인 시각에서 경제문제들을 인식한다면 경제학의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생활인들의 바른 생활(正命)이 경제문제에 대한 인식과 경제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분야에 대한 선행의 연구가 거의 없는 형편이고 글쓴이의 연구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본격적인 연구라기보다는 몇 가지 문제들을 제기하는 정도의 글이 될 것이다.


이 시작하는 말에 이어서 2에서는 만일 ‘불교경제학(Buddhist Economics)’이라는 것이 있게 된다면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3에서는 현대 주류 경제학의 경제문제 인식 방법에 대해 불교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4에서는 바른 생활과 선 수행이 경제문제의 인식과 경제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를 생각해 보고, 5에서는 맺는 말로 끝낸다.



2. 불교경제학


1) 경제학의 문제 인식과 논리

모든 경제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희소성(scarcity)’의 법칙이라고 하여 경제문제의 인식과 경제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우리들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자원이 한정이 되어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하나를 가지게 되면 반드시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것을 택하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가능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제학에서의 문제 인식과 논의의 전개는 흔히 ‘세상에 공짜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라는 말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인간 사회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시장’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 소위 ‘경제활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생산·소비·거래·교환 등의 활동을 한다.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이런 제도와 행동들은 모두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많이 충족시켜 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적 특징의 하나는 복잡한 인간 행태 및 사회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인간 행위에 대해 여러 가정을 한다는 점이다. 주로 논리의 단순화를 위한 가정을 통해 모형을 설정하고, 그 모형 안에서 인간 행태와 사회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가정하는 것이 인간은 항상 ‘이기적(self-interested)’이고 ‘합리적(rational)’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이다. 또한 대부분의 인간 행태를 ‘한계(marginal)’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소위 ‘한계주의(marginalism)’ 분석 방법을 택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기호(preferences)’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으며, 인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사회적 제도도 주어진 조건으로 하여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은 너무 단순화된 가정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단순화를 위한 가정들은 논리의 전개와 인간 행태 또는 사회현상의 분석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복잡한 사회현상의 많은 부분을 잘 설명함으로써 경제문제나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단순화를 위한 가정들 때문에 인간 행태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감정·윤리·도덕성 등을 제외하고서 인간 행태나 사회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경제문제를 인식하는 데 ‘합리적인(rational)’ 인간이 아니라 ‘상식적인(reasonable)’인간을 설정하고는 논의를 전개시킬 수 없을까? 인간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이타적인 행동도 하는데 이를 경제학 모형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것이라고 전제를 하고, 그 무한한 욕망을 어떻게 하면 많이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소비가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인식하고, 생산요소들은 소비를 통한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불교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경제활동의 목적이 최대의 소비가 아니라 적정 규모의 소비로써 인간 사회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데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노동은 경제학에서 가정하듯이 단순히 소비활동을 위한 소득을 벌기 위해서 감수해야만 하는, 그리고 우리에게 괴로움이나 불만족만 가져다주는 비효용(disutility)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노동행위가 항상 비효용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노동행위 그 자체가 오히려 우리들에게 만족과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경제학의 모형에서는 인간의 욕망은 가치 중립적이라고 가정하고, 소비를 통해서 이 욕망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인간의 행복이 달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 교리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하나는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욕망으로 chanda라고 불리는데, 이는 가치 중립적인 또는 좋은 의미의 욕망이다. 이를 ‘선욕(善欲)’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의 욕망은 흔히 ‘갈애(渴愛)’라고 번역이 되는 tanha이다. 갈애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지나친 욕망을 말한다. 갈애는 주로 순간적으로는 인간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선욕과 갈애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되면 경제학에서처럼 반드시 소비를 통해서 욕망을 충족시키고 이 욕망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보기가 어렵게 된다. 오히려 소비의 증대가 아니라 적절한 소비를 통해서 또는 갈애를 줄이거나 아예 소멸시킴으로써 진정한 행복〔福祉(well-being)〕을 얻을 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비자의 효용체계나 가치체계를 단순히 물질적 소비에만 주로 의존하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의 모형보다는 훨씬 더 발전되고 현실에 가까운 이론의 전개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경제학의 가능성

만일 우리가 욕망의 본질을 불교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인식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경제 문제들을 좀 다르게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바로 불교경제학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불교의 시각에서 경제문제를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인간 중심의 경제학(E. F. Schumacher, 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1973)》이라는 책에서 ‘불교경제학(Buddhist Economics)’이라는 한 장을 포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불교경제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불교경제학이라는 장의 서두에서 “불교에 있는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하나가 올바른 생활(正命)이고, 따라서 불교경제학이 있을 만하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다른 여러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에서도 ‘객관성’과 ‘논리성’을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이나 주관적인 가치관 등은 경제학 논의의 전개 과정에서 제외시킨다. 그런데 인간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윤리성 등을 제외하고 인간 행태와 이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현상들을 과연 잘 설명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의 해결 방안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까?


만일 소주 한 병과 짜장면 한 그릇의 값이 같다면 경제학에서는 이 둘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경제학에서의 모든 가치는 시장에서의 가격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추는 것은 경제적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행위이고 절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참선을 하는 행위는 아무런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가치에 대한 인식 방법이다.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가 그 이후에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절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는 행위 이후에 우리가 얻게 되는 지혜와 이로 인한 개인의 변화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의 가치는 모두 무시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학의 문제 인식은 우리들의 현실 세계를 형성하는 원인과 조건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하기가 곤란하다. 경제학―다른 과학도 마찬가지겠지만―이 바탕을 두고 있는 논리나 법칙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리나 법칙들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들이 어떤 목적이나 편의에 의해서 만들어낸 인위적인(artificial) 법칙들이다. 이들은 자연법칙과는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삽으로 땅을 파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땅을 파게 되면 구덩이가 생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한편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드는 것은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이고 따라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경제학에서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땅을 파는 행위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다고 사람들이 인식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을 파면 돈이 된다는 사실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일 뿐이다. 만일 사회적인 합의가 없다면 땅을 아무리 파도 가치가 생성되지 않고 따라서 돈이 되지 않는다. 결국 ‘땅을 파면 돈이 된다’는 사실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인식의 문제이고, 따라서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진리일 뿐이다.


또한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는 세상에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과관계들을 지극히 부분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주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하자. 이 수요는 생산활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시켜 준다. 경제학에서 생각하는 인과관계는 여기서 끝난다. 소주를 소비하고 난 후 그것이 개인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수요가 충족되고 난 다음의 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제활동의 최종의 목표는 바로 수요를 충족시켜 주는 소비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문제를 불교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논의를 여기서 끝내서는 곤란하다. 소주의 소비와 관련되어 있는 원인과 결과의 전 과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소주의 소비가 미치는 영향을 소비자 개인뿐 아니라 사회, 자연 환경, 나아가 생태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객관성과 논리성을 강조하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에서는 논의의 전개에서 개인의 주관적 가치나 윤리 같은 것은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윤리관을 배제하고서 과연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문제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을까?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은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제한된 물질 자원을 가지고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자니 자연히 선택을 해야 하고, 경제활동이란 보다 효율적인 선택을 통해서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욕망이라는 것은 바로 무명에서 비롯된 우리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망상이 아닌가. 그래서 욕망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또한 인간의 가치관, 윤리, 도덕 등도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거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과연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이처럼 경제학에서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관이나 도덕성과 윤리 등을 논의에서 배제시켜 버리면 인간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예를 들어 과잉소비의 문제, 과잉생산의 문제, 환경 문제 등―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 행위와 사회현상에 대한 불교적 이해를 통해서 경제학의 문제 인식 방법을 보완하고, 객관성과 논리성만을 강조하는 경제학에 인간의 감정이나 윤리, 도덕 등 주관적인 가치를 포함하여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면 전통적인 경제학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유용한 소위 ‘불교경제학’의 탄생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3) 불교에서의 욕망에 대한 인식

불교 교리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하나는 ‘선욕(chanda)’으로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갈애(tanha)’로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지나친 욕망을 말한다.


갈애는 주로 감각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이며 무명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되면 이는 우리에게 즐거움 또는 불쾌감을 주게 된다. 만일 그 감각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유지하려고 집착하게 되고, 불쾌감을 주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집착한다. 따라서 갈애는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나 얻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음식을 먹는 본래의 목적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 유지의 목적 외에 맛을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기도 한다. 이 맛을 즐기려고 하는 욕망이 바로 갈애이다. 우리는 보통 이 갈애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큰 강물은 때로 물로 채워질 수 있어도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늘에서 돈이 비오듯이 쏟아진다고 해도, 큰 산 전체를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해도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채워지겠는가?


만일 인간이 갈애만 갖고 있다면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인간은 진정한 행복(福祉)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도 갖고 있다. 우리의 삶이 갈애에만 이끌려 간다면 삶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혜(般若)를 가질 수 있다면 망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명이 아니라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감각적 욕망 충족을 통해서 얻는 세속적인 행복과 진정한 의미의 행복, 즉 복지(well-being)를 구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말로 우리의 삶에 이득이 되는 것에 대한 욕망을 법욕(法欲, dhammachanda: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 선욕(善欲, kusalachanda: 선을 추구하는 욕망), 또는 그냥 줄여서 욕(欲, chanda 또는 욕망이라고 한다. 선욕은 진리(法)에 대한 욕구이다. 갈애는 감각적 욕망 충족을 위해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선욕은 행동을 유도하여 법 또는 진리를 얻게 해준다.


갈애는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어떤 대상을 찾아 나서게 하며,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욕은 진정한 복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노력과 행동을 유도하며,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 행위의 윤리적 가치 판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그 행위가 갈애에 기초한 것인가, 선욕에 바탕을 둔 것인가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에서의 선택도 진정한 복지를 추구하는 결정인가, 아니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인가에 따라 바람직한 결정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 거래, 소비 등의 경제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생활(正命)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나아가서는 생태계 전체의 진정한 복지를 달성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불교식의 경제문제를 인식하는 방법이고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경제 현상의 인식에 관한 몇 가지 문제


이 장에서는 경제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불교의 관점에서 그 문제점들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1) 생산(production)

우리가 어떤 상품을 ‘생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물건이 이 세상에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하면 이 지구상에 없던 자동차가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물건이 생겨난 것인가? 사실은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물질들을 모양이나 위치를 바꿔서 그 상태를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를 생산한 것과 이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잘라서 저 테이블로 옮겨 놓은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새로운 물건이 생산된다는 것은 어떤 물질이나 에너지가 위치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재조합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지 세상에 없던 무엇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질과 에너지의 변환은 옛날 상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생산은 항상 동시에 파괴를 수반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세상에 어떤 것도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없던 물건이 만들어져서 인간 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은 곧 가치의 창조이고, 따라서 생산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정의한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이렇게 생산된 것들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가가치(value-added)’라고 부르고 이 부가가치를 모두 합하여 국민총생산(GNP: Gross National Product)이라고 불리는 지표를 만들어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로 삼는다.


상품의 생산에서 왜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믿는가? 이는 인간이 물질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결과 파괴된 상태의 가치보다는 새로 생산된 상태의 가치가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의 새로운 상태가 인간 생활에 더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활동이 정당화되려면 그 생산을 위해서 파괴된 것의 가치보다는 생산된 것의 가치가 더 커야만 한다. 그러면 생산된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경제학에서는 이를 주로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으로 평가를 한다.


만일 파괴된 상태의 가치가 생산된 상태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행위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골프장을 건설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골프장을 만들면 반드시 자연환경의 파괴가 뒤따른다. 만일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가 골프장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활동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생산된 골프장의 가치는 쉽게 시장가격으로 평가가 되지만,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는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제학에서는 파괴된 환경의 가치가 단지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생산 그 자체가 파괴를 위한 생산인 경우도 있다. 전쟁에서 쓰여질 무기의 생산은 그 목적 자체가 파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파괴를 위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이 생산을 하는 경우보다 가치가 클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는 골프장이 건설되고 무기산업이 번창하면 국민총생산은 증가하고 따라서 경제는 성장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우리가 생산활동의 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결국 그 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파괴된 것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생산(non-production)’도 훌륭한 경제활동의 하나라고 인식해야 한다. 생산활동에 적게 참여하고 동시에 소비를 적게 하는 사람이 오히려 파괴를 적게 함으로써 인류 사회의 복지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생산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탁발에만 의존해서 생활하는 출가수행자들의 생활이 때에 따라서는 더 훌륭한 경제활동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전통적인 경제학의 관점에 의하면 보다 많은 생산(과 동시에 파괴)은 더 많은 가치를 생성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소비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믿으며 그러한 생산활동만이 경제를 성장하고 발전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2) 가치(value)

앞 절에서 우리는 욕망을 선욕(chanda)과 갈애(tanha)의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다. 욕망을 이처럼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에 따라 가치도 ‘참 가치(true value)’와 ‘인위적 가치(artificial value)’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시장에서 평가되는 시장가격이나 또는 인간의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또는 사회의 복지(well-being)에 어느 만큼 기여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시장 가격이나 인간의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정도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망상(妄想)이나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인위적으로 조작된―가치일 뿐이다.


어떤 상품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상품이 선욕과 갈애 중 어떤 욕망을 더 많이 충족시켜 주는가에 따라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멋있는 옷, 보석, 비싼 자동차 등은 인간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인위적 가치는 매우 크다. 좋은 옷은 값이 싼 옷에 비해 그 기능만 보면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더 큰 인위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장가격이 높게 형성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진정한 가치는 별로 없고 오로지 갈애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되는 상품들이 너무 많다. 향락 산업, 도박, 많은 종류의 사치품들, 광고 등이 그 좋을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소비(consumption)

소비에 관한 문제도 가치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소비활동이 선욕과 갈애 중 어떤 욕망을 충족시켜 주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서 참 가치를 추구하느냐 인위적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소비가 바람직한 것인가 아니면 바람직하지 않은 소비인가를 판단할 수가 있다. 경제학에서는 소비를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소비행위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생활의 최종 목표를 소비로 설정할 수는 없다.


어떤 소비행위가 인간생활의 진정한 복지를 증진시켜 주는가 아니면 단순히 감각적 쾌락만을 주는 것인가에 따라 올바른 소비활동인지 그릇된 소비활동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소비행위가 우리의 복지(well-being)를 증진시켜 주지는 않고 단순히 감각적 욕망만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라면, 이러한 소비는 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에서는 더 많은 소비가 소비자의 만족을 증가시켜 주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인식하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더 많은 소비가 항상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때에 따라서는 비소비(non-consumption)도 비생산처럼 훌륭한 경제활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 성장과 발전(growth and development)

어떤 나라이든지 보다 많은 생산이 이루어지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정의하고 대부분의 경제정책은 경제성장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생산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결국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복지(well-being)―을 가져다 주는가? 대부분의 불자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생태학자들은 모든 동물이나 식물들이 보다 많은 소비행위를 개체 또는 종족의 목표로 삼는다고 보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다른 개체들과, 더 나아가서는 다른 종족들과도 균형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정된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도록 행동한다고 본다. 그리고 생태계 전체를 개체간 또는 종족간에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면서 균형 있게 유지되는 하나의 커다란 순환체계로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제생활도 생산과 소비의 극대화가 그 목표가 아니라 개인, 집단, 지역, 국가 사이에 서로 이득을 주고받으면서 균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순환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생산과정에 반드시 수반되는 파괴된 가치를 깊이 고려하여 경제의 성장 또는 발전이 항상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사회 또는 국가의 복지를 증진시켜 준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4. 바른 생활(正命)과 경제활동


위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경제활동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보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경제활동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상품을 생산하고, 사고, 팔고, 소비하고 하는 경제활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삶의 목적에 대한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은 각자의 삶의 방식을 결정할 것이고, 이는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갈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삶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우리는 인생관, 사회관, 더 나아가서는 세계관 또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이는 한 사회의 제도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


삶의 방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삶의 방식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화해 가는 과정의 모습을 결정하게 된다. 각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것이지만, 결국은 사회 전체의 ‘객관적’인 사회현상의 모습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이라고 불리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는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인식하는가? 경제학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사회의 성장이나 발전―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기술적, 등―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 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행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한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이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경제활동―생산, 소비, 거래 등―을 한다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저 멀리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고, 우리는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현재 또는 미래에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가 감각적인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갈애(tanha)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끝없는 추구에도 결국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의 충족을 위한 노력은 결국 우리에게 괴로움만 더해줄 뿐이라는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만일 욕망의 충족이 바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착각한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고통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첫번째는 세상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이다(苦諦).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이 모두 괴로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삶의 모든 것들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죽음이라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삶의 모든 것들이 결국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번째 진리는 괴로움의 원인이다(集諦).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끝없는 욕망의 추구(渴愛) 때문이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가르쳐 준다. 괴로움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 그런데 갈애가 정말로 늙음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가? 갈애가 죽음의 원인인가? 물론 갈애 자체가 늙음이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음이나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결국 갈애를 늙음이나 죽음으로부터의 괴로움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늙는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늙지 않겠다는 집착은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세번째의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이다(滅諦). 우리는 갈애를 완전히 버림으로써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 부처님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道諦)으로 여덟 가지의 바른 방법(八正道)12),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정신통일(正定)을 제시하신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과 경제학의 가르침의 차이의 핵심은 이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것은 괴로움이고, 우리는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경제학의 가르침은 저 멀리에 행복이라는 열매가 있는데 우리는 그 열매를 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 충족이라는 행복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러한 노력은 인간 사회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움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괴로움을 더 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이란 그 자체가 원래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알아차리고, 그 괴로움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이 바로 문제의 바른 해결 방법일 것이다. 삶은 원래가 괴로움이라는 것을 제대로 안다면, 행복이라는 열매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협력하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생산, 소비, 거래 등의 모든 경제활동의 방법도 무한한 인간의 욕망 충족에 그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소멸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결국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함으로써가 아니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괴로움은 더 커지기만 하고, 반면에 삶은 원래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되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올바른 삶의 한 방식으로 흔히 ‘무소유’를 강조한다. 이는 아마 어떤 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소유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왜 어떤 사물도 소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명으로부터 발생한 우리의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나 또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있는가? 부처님은 어떤 것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소유당한다고 믿어지는 사물이나 모두 고(苦)이고,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다만, 우리가 세상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이것을 내가 가졌다’라고 착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착각이 바로 괴로움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한 수단이다. 순간적으로 보기에는 소유를 통해서 우리의 욕망이 충족될 수도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원하던 결과를 얻게 되면 더 큰 욕망이 일어나고,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면 계속해서 얻기 위해 집착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욕망, 욕망을 이루려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라는 악순환 속에서 헤매고 만다.


불멸 후 100년경 2차 결집이 행해질 때 문제가 되었던 것들 중의 하나는 출가 수행자들이 돈을 소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원래 출가 수행자들은 돈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당시의 사회환경에서 그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과연 오늘날 스님들이 돈을 소지하지 않고 생활하거나 심지어 수행을 할 수가 있을까?


초기 율전에 의하면 비구들은 철저히 탁발에 의해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비구들이 자비를 행하는 방편으로 그리고 해탈을 하는 수행의 방편으로 이해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도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만약 옷을 축적하여 선법이 증대하고 악법이 쇠퇴한다면 나는 그런 옷을 축적해도 좋다고 설한다. 옷뿐만이 아니라 음식·도구·주택·촌락 등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무소유를 우리가 글자 그대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로 이해하기보다는 ‘우리는 소유를 통해서 욕망 충족을 할 수가 있는가?’ 또는 ‘이 세상의 무엇이든 과연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는 소유라는 것이 집착에서 비롯된 망상의 결과라고 한다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한 일인가?’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악한 사람은 악한 행위를 하고 싶어해서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경험하고 악하게 된다. 선한 사람은 선하게 행위하기를 원해서 그것에 따르는 고통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붓다다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충고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 즉,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면 단지 선행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선행을 초탈하여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욕망의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마음을 자유스럽게 해주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의 가르침도 이보다 나을 수도 이와 같을 수도 없다. 따라서 아주 주의깊게 기억해야만 한다. 세 가지 형태의 욕망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면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얻는다.


어떻게 욕망의 노예로부터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붓다다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무상·고·무아에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것을 가지거나 어떤 상태로 되었을 때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을까.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어떻게 근심과 걱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을 계속 심사숙고해야 한다.”


붓다다사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여덟 가지 바른 길 중에서 특히 올바른 견해(正見)을 강조한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을 일으키는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은 사물들을 충분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갈망이 있을 때는 무엇을 소유하거나 무엇이 되려고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 사물의 특징을 통찰할 때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다소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단한 예로 ‘먹기’를 살펴볼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여 먹는 것은 정견에 따라서 먹는 것과 아주 다르다. 두 가지는 먹는 방법도 다르고, 먹는 동안의 감정도 다르며, 먹고 난 후 일어난 감정도 다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없어도 역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갈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행위를 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행위의 결과로서 생기는 이것 혹은 저것으로 되고 싶은 욕망이나 갈애와 상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특징에 대한 명확하고 철저한 지혜의 힘(정견)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는 욕망에 따라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에 그 결과 계속 고통의 지배를 당한다.


사물들과 관계를 가질 때 정견을 가지고 한다면 행위는 욕망으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지혜롭게 처신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통으로부터 자유스럽다. 마음은 어떤 사물들을 소유할 가치가 있거나 어떤 상태로 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는 확실히 깨어 행위할 것이고 전통이나 관습 혹은 법에 따라서 처리할 것이다. 예를 들어 땅과 재산을 소유한다고 해도 탐욕스러운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재산이 부담이 되어 마음을 짓누르고 고통스러울 만큼 집착할 필요도 없다. 법은 그 땅 마지기가 자기 소유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땅에 대해 근심 걱정하며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 쫓아와서 그것을 강탈해간다 해도 우리는 확고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화를 내거나 마음의 불꽃으로 달아오르지 않아도 대항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게 법에 의존하여 저항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재산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자제력을 벗어나서 감정적이 되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은 무상하고 영원히 변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결국 우리가 모든 종류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욕망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이고, 고이며, 무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욕망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에 의해 지혜롭게 사물과 관계를 가지게 되며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5. 맺는 말


경제학에서는 욕망을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욕망을 선욕(chanda)과 갈애(tanha)로 구분하여 인식한다. 이처럼 욕망을 구분하여 인식할 때 우리는 경제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경제학에서의 논리 전개 방식을 약간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해 봤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효용 극대화에 있다고 전제하고 이는 생산과 소비의 증대로써 인간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활동이나 경제정책은 이를 위한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반면에 불교에서처럼 욕망을 구분해서 인식하게 되면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적인 욕망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가치에 바탕을 둔 복지의 달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생산과 소비의 증대로써가 아니라 갈애의 소멸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갈애의 소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 특히 바른 생활(正命)을 통해서 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글은 욕망을 선욕과 갈애로 구분함으로써 불교적인 경제학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모색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첫 출발점이기 때문에 거의 문제를 인식하고 제기하는 수준에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머지 해야 할 일들은 모형을 설정하고 새로운 이론의 전개를 시도해 보는 일들일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재가 불자와 출가 수행자를 구분하지 않고 논의하였는데 이를 구분하여 논의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은 다음에 계속되어야 할 연구의 숙제로 남겨 둔다. 그리고 앞으로의 보다 본격적인 연구는 불교학자들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서 시도해 보고자 한다.■



출처  http://budreview.com/